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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흥종 목사의 생애 2부 | 나환자와 걸인들의 아버지
이은아 목사
여름 어느 날 뜻밖의 서서평 선교사가 면회를 왔습니다. 독일 태생인 그녀는 포사이트가 미국으로 떠나던 해에 32살의 처녀의 몸으로 광주에 와서 제중원 간호사 겸 선교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흥종이 서서평이라는 이름을 지어줄 정도로 두 사람은 동기간처럼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습니다. 흥종은 서서평을 보자 너무 반가웠습니다. “금주동맹 일은 잘 되는가?” 그 무렵 서서평은 선교 활동의 일환으로 금주 금연 운동과 축첩 금지 공창제도 폐지 운동을 벌이느라 바빴습니다. 흥종은 무엇보다 나환자촌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는 서서평에게 환자 하나하나 이름을 거명해가며 그동안의 병세를 물었습니다. 그때 서서평이 선물을 전해주었습니다. 하나는 나환자들이 보낸 편지 꾸러미이고 하나는 영어 성경과 신학 서적들이었습니다. “장로님 힘내세요. 장로님 옆에는 하나님과 우리가 있습니다.” 라고 쓰여진 김칠복의 편지에 흥종은 한참 동안 얼굴을 묻고 있었습니다. 글을 모르는 노인 환자들은 문드러진 얼굴이나마 사진 찍어 자신의 이름을 대필해 보내오기도 했습니다. 그는 얼굴만 보아도 이름을 다 알 수 있었습니다. 편지 중에는 자신의 일생을 바꾼 지팡이의 주인 김복실의 남편의 편지도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죽은 아내를 돌봐준 일과 딸을 데려다 길러준 일, 부녀를 만나게 해준 일에 대해 절절한 고마움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서서평이 양녀로 삼은 그의 딸 보영은 간호원이 되어 봉선리 환자촌에서 봉사하며 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윌슨은 ‘하나님이 주신 시련은 쓰나 그 열매는 달다.’ 라는 짧고도 감동적인 메모를 보냈습니다. 최흥종은 서서평이 다녀간 후로 매일 영어 성경과 신학 서적을 읽으면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감옥에서 슬픈 소식도 들려왔습니다. 벨 선교사는 제암리 교회의 참상을 살펴보고 자동차를 몰고 오다가 사고로 아내를 잃게 되었고 크게 실의에 빠져 미국으로 돌아가 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김윤수 장로가 운명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벨 목사는 흥종을 거듭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준 평생 잊을 수 없는 은인이었고 김윤수는 그에게 신앙의 길을 열어준 인생의 참된 선배요, 큰 형님 같은 존재였습니다. 최흥종은 그날 아무것도 먹지 않고 엎드려 기도만 했습니다.
최흥종은 1920년 6월 14개월 동안의 옥고를 치르고 풀려났습니다. 그는 광주로 돌아와 봉선리 나완자촌부터 들렀습니다. 그가 들어서자 환자들이 손을 높이 올리며 만세를 불렀습니다. 가정에 돌아와서는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는 집 안에서 처음으로 가슴 벅찬 행복감에 젖었습니다. 최흥종은 42살의 나이로 목사 임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광주의 노라복 선교사는 최흥종 장로를 북문밖교회 위임 목사로 임직하여 줄 것을 청원하였습니다. 1904년 주님의 품 안에 들어온 지 8년 만에 장로가 되었고 9년 만에 목사직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목사가 된 최흥종은 너무나 감격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양림동산에 올라갔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채 끝없는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주님! 이 몸을 버리시지 않고 끝까지 지켜주시고 이끌어주셔서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주님이 이 몸을 주님의 종으로 선택하신 뜻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이 몸은 이웃을 위해 이 땅에 주님의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자신을 버리겠나이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뜻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오며 주님의 종으로 살겠습니다." 최흥종은 아무리 바빠도 하루에 한 번씩은 나환자촌에 들렀습니다. 봉선리 나환자촌은 날이 갈수록 환자들이 넘쳤습니다. 그는 윌슨 선교사가 자리를 비울 때는 환자들의 절단 수술도 맡아서 할 정도로 간호 실력이 뛰어났습니다. 그가 담임하는 북문밖교회는 최흥종 목사가 부임하면서 신도가 늘어났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떼를 지어 왔습니다. 초가집을 개조하여 앉을 자리를 넓혀보았지만 몰려드는 사람들을 수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심지어 교회 처마 밑에까지 자리를 깔고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쓰러져 가는 초가에 종만 달랑 걸려 있는 집을 최 목사는 부지런히 손질하여 제법 쓸만하게 단장하였습니다. 그가 목사로 부임한 지 6개월 만인 7월 3일 마침내 북문밖교회에 헌당식을 하였습니다. 예배당을 새로 확장하고 사택까지 마련한 흥종은 새 어머니로부터 분가하여 9명의 가족이 목사관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이사가 끝나자 이번에는 북문밖 교회 내에 유치원과 부녀 학교를 개설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들을 제대로 키우고 가르치기 위해서는 어머니들부터 깨우쳐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먼저 야학당을 열어 부녀 학교를 만들었습니다. 학교에 갈 수 없는 가난한 집 딸들로부터 판사나 변호사 부인들까지 다양한 나이와 계층의 여성 학생들로 교실이 넘쳤습니다. 부녀 학교가 번창하자 유치원을 개설하였습니다.
1920년대 들어 개화의 바람이 광주에도 불어왔습니다. 광주 본정은 일본인들이 상권을 형성하면서 차츰 번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광주의 가장 큰 변화는 학교가 많이 늘어난 것과 기독교 신자의 급증이었습니다. 이 무렵 기독교인들은 교회의 사회 모금 운동의 필요성을 느끼고 광주 기독청년회 YMCA를 창설하였습니다. 이때 회장의 누구를 모실 것인지 의견을 나누었는데 최흥종 목사를 회장으로 모셔야 한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습니다. 청년들은 최 목사가 거리에서 나병 환자들을 만나면 직접 그 환자들을 등에 없고 제중원으로 가고 하는 것을 여러 차례 보아왔고 이러한 삶을 존경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최흥종은 날마다 제중원에 나가 나병 환자들을 돌봐야 했으며 북문밖 교회의 확장에도 힘써야 하므로 회장직을 거절하였습니다. 대신 최흥종은 강연회나 웅변대회 혹은 토론회를 통해 좌절하거나 낙심해 있는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는 북문밖교회 당회장 일이며 유치원 부녀학교 나환자촌 시설 문제 YMCA의 일에도 전력투구하였습니다. 또한 농촌에 수백 개의 야학을 세우고 농사법을 소개한 소책자를 출판하는 등 농촌 계몽 운동에도 힘썼습니다.
1921년 늦봄 우원 기념각에서 블라디보스톡의 조선인 학생 음악단 일행 13명이 와서 공연을 하였습니다. 최흥종 목사는 오래전부터 블라디보스톡에 교민들에게 관심이 많았습니다. 공연이 끝나자 최흥종은 숙소로 찾아가 단장을 만나 블라디보스톡에서 활동하고 있는 항일투쟁 상황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습니다. 한인 교민들은 시베리아의 한재로 인해 큰 흉년이 들었고 마적들에 의해 신자 수백 명이 살해를 당하고 의복과 집기들을 빼앗겨 걸인이 되어 떠도는 형편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나라를 잃고 집을 잃은 그들에게 희망을 심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최흥종은 이전에도 시베리아 교포들의 고통스러운 소식을 듣고 러시아 말을 익히고 러시아 성경까지 구해 시베리아 선교사를 자청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총회 선교부는 시베리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정하게 되었고 1921년 10월 14일 전남 노회가 최흥종 목사를 시베리아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가 얼어붙은 땅 시베리아로 간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먼저 가족들이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부인은 남편의 시베리아 행을 극구 말렸습니다. 그는 자기한테 시집 와서 고생만 하는 부인이 불쌍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에게 말할 수 없이 미안하오. 나를 이해하고 용서하기를 바랄 뿐이오. 나는 내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바친 사람이므로 오로지 하나님의 명에 따를 뿐이오. 내가 내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가지 않는다면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나는 평생 주님 앞에 죄송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고, 시베리아에서 살고 있는 동포들에게는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러 가는 것뿐이니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도 너무 걱정하지도 마시오. 대신 아이들을 잘 키우고 건강하기를 바라오. 하나님께서도 도와주시리라 믿소.”
최흥종이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니콜라이프스크였습니다. 먼저 다녀갔던 선교사들의 숙소는 유리창은 깨진 채였고 나무 침대는 한 쪽이 찌그러져 있었습니다. 무너져 가는 지붕에 십자가만 남아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최 목사는 일주일 동안 집을 손질하고 청소를 한 뒤 마당을 예배소로 쓸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예배소를 대충 정리한 후에 그곳에 미리 와 있는 젊고 믿음이 강한 김창호와 함께 교민들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임상 치료법을 배웠기 때문에 병자들을 찾아다니며 치료할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서 치료를 받은 교민들은 쉽게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러시아의 사정은 불안하고 혼란스러웠습니다. 사회주의 체제로 바뀐 러시아의 형편은 또 다른 유형의 군국주의로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형편인지라 조선인들의 인권은 철저히 무시되었습니다. 더욱이 시베리아를 중심으로 일본군과 러시아 군 사이에 빈번히 일어나는 총격전으로 조선인들은 희생양이 되곤 하였습니다. 동포들은 어려운 일이 있으면 최흥종 목사를 찾아와 하소연을 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는 억울한 사정에 처한 동포들의 형편을 러시아 당국에게 호소하여 해결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그는 시베리아 전역에서 교민들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최흥종은 늘 교민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최흥종은 진료소를 임시 병원 규모로 키우고 제대로 된 교회를 세우는 것을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벨 목사와 오원, 포사이트, 윌슨, 서서평 등이 이국땅 광주에 와서 자신들을 희생하면서 이국인들을 위한 삶을 산 것처럼 그 또한 시베리아에 와서 그들처럼 희생하며 살고 싶었습니다. 그는 시베리아에서 일하던 중 총회에서 돌아오라는 전보를 받았습니다. 러시아 당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지사들과 자주 만난다는 것을 알고 그를 추방시킨 것입니다. 1년 6개월 만에 최 목사는 참담한 패배자의 심정으로 광주에 돌아왔습니다.
그는 광주로 돌아와서 다시 북문밖교회 당회장을 맡고 광주 YMCA 4대 회장이 되어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도 늘 시베리아를 생각했습니다. 그곳에서 방황하는 교민들과 치료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독립지사들을 생각하며 늘 다시 시베리아로 가기를 소망하였습니다. 두 번째 시베리아행을 꿈꾸던 그의 간절한 기도는 응답되었습니다. 최흥종이 두 번째 블라디보스톡에 갔을 때는 이미 러시아 공산당 정부가 세워진 지 오래였습니다. 공산당의 종교 탄압이 블라디보스톡 한인 교회까지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한 번은 예배소에서 50여 명의 교인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지역 공산당원들이 몰려와 교인들을 강제로 해산시켰습니다. 최흥종은 지역 공산당 간부를 찾아가 강력히 항의하였으나 러시아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선교 활동은 금지되어 있다며 당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당장 추방하겠다고 협박하였습니다. 그러나 최흥종은 끝까지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며칠 후 주일을 맞아 최흥종은 겨우 20여 명의 동포들을 모아놓고 설교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러시아 공산당 군인들이 들이닥쳐 총부리를 겨누었습니다. 그들은 동포들에게는 함부로 대하면서도 러시아 말을 유창하게 하는 최 목사에게는 비교적 예의를 갖추었습니다. 최 목사는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 중이오, 정 나를 잡아가야 한다면 설교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시오. 내 발로 당당하게 가리다.” 하였습니다. 러시아 군인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상의를 하더니 허락하였습니다. 최 목사는 마저 설교하였습니다. “여러분 불안해하지 말고 차분하게 시편 137편 1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라고 했습니다. 포로가 된 민족의 억울함을 무엇으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곧 좋은 날이 찾아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힘을 내서 살아가야 합니다. 서로 믿음의 한 마음이 되어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설교를 듣고 있던 동포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습니다.
러시아 군들에게 붙잡힌 흥종은 감옥에 투옥되었고 한 달이 지나서야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재판장은 최 목사에게 국경을 월경했다는 죄목으로 재추방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장교는 재판장의 말을 무시하고 흥종을 당장 총살해 버리라고 명령했습니다. 최흥종이 세 사람의 기마 헌병들에게 끌려가 깊숙한 산속에 다다랐을 때였습니다. 기마 헌병들은 다급하게 뛰어오는 소련인 나무꾼을 만났습니다. “큰일났습니다. 어서 피하십시오. 방금 저 앞에서 적위군들에게 소련군 몇이 학살을 당했습니다.” 나뭇꾼들의 말을 전해 들은 기마헌병들은 최 목사를 버려둔 채 나몰라라 하고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최 목사도 반대편 숲속을 향해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바람이 살 껍질을 벗기는 것 같은 추위와 배고픔에 떨면서 걷고 또 걸었지만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셨던 예수님의 고통을 생각했습니다. 자신도 지금 이 황량하게 얼어붙은 낯선 시베리아 벌판에서 홀로 십자가를 메고 가는 고통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주여! 저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시는 것입니까? 앞으로 종으로 더 부리시려거든 이 절망과 고통으로부터 저를 꺼내어 주시옵소서.” 더 이상 걷지 못하고 눈밭에 쓰러진 흥종은 설원에 엎드려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자꾸 눈이 감겨 들려고 했습니다. 잠들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을 뜰 수가 없었습니다.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 하나님을 외쳐 불렀습니다. 그때 금광을 찾아 떠돌던 조선인 동포들이 최 목사를 발견하고 구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멀리 떨어진 사냥꾼들의 움막으로 최 목사를 옮겼습니다. “하나님 고맙습니다. 저를 살려주시다니 제가 할 일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앞으로 더욱 열심히 살겠습니다.” 최흥종은 두 젊은이들의 손을 붙들고 울었습니다.
최흥종 목사는 그의 러시아로부터 추방령을 받고 귀국하였습니다. 그는 서서평 선교사와 함께 빈민구제 사업에 전념하며 제주도 모슬포 교회의 목사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얼마 후 교회를 사임하고 나환자들에게 돌아갔습니다. 봉선리 나환자촌에는 환자가 날로 넘쳐나고 치료를 끝낸 사람들은 갈 곳이 없어 방황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치료가 끝난 음성 환자들에게 재활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 시급하였습니다. 최 목사는 나환자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야지마 도지사를 찾아가 얘기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최흥종 목사와 서서평은 거리에 나환자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하루 만에 200여 명의 나환자들이 모였습니다. 그는 환자들과 함께 서울의 총독부를 향해 행진하기 시작했습니다. 흥종은 그 행진을 ‘아름다운 구라행진(救癩行進)’이라고 불렀습니다. 얼굴이 찌그러지고 코가 문드러지고 팔이 없는 200여 명의 나환자들이 길게 줄을 지어 새벽에 광주를 떠났습니다. 그들이 시내를 빠져나갔을 때에야 뒤늦게 사실을 안 경찰들이 차를 몰고 달려왔으나 막아서지 못했습니다. 하루에 한 차례씩 있는 여흥 시간이면 누가 시키지 않는데도 환자들은 한 가락씩 뽑아내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하면 지쳐 있던 다리에 힘이 솟아났습니다. 마음에 깊은 상처가 있는 이들은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을 수 있었고 손가락이 없는 손으로 박수를 칠 수 있었습니다. 이 긴 여행을 통해 절망으로 무너진 마음에 희망의 복음이 솟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때로는 식량이 바닥 나 교회들을 찾아다니며 식량을 구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마침내 520여 명의 환자가 열하루 만에 총독부에 도착했습니다.
우리는 총독을 만나 면담하기 전에는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최흥종은 우가끼 총독에게 소록도에 있는 음성 환자들의 수용소를 확장해 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총독은 앞으로 소록도에 수용된 환자들의 생계를 정부에서 책임지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총독은 환자들이 무사히 소록도 돌아갈 수 있도록 열차까지 내주었습니다. 총독부 정문 앞에서 연주하고 있던 500여 명의 나환자들은 흥종이 면담 결과를 알리자 만세를 불렀습니다. 이렇게 하여 1939년 11월에 소록도 나환자 갱생원이 개설되었습니다.
최흥종이 구라행진을 마치고 광주에 돌아와 보니 전남도에서 큰 장터 주변에 거린 천막촌을 모조리 철거해 버렸습니다. 천막촌이 철거되자 거렁뱅이 200여 명은 갈 곳이 없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노숙을 했습니다. 거리에는 온통 거인들이 즐비했습니다. 그 해 최흥종은 중앙교회 목사로 부임하여 우선 거리에 우글거리는 거인들을 위해 대책을 세우자고 신도들에게 호소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모두 똑같이 태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저들과 똑같이 사랑하십니다. 저들도 우리와 같은 하나님의 자식들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신도들은 최흥종 목사의 말에 감동하여 거인들을 돕는 일에 나서기로 했습니다.
최흥종은 역촌으로 통하는 경양방죽에 걸인촌을 만들어주기로 했습니다. 중앙교회 신도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임시 움막이 작은 마을을 이루었습니다. 최흥종은 이 움막집 걸인촌을 천사 마을이라고 했습니다.
그곳에 수용된 걸인들의 수는 수백 명에 달했습니다. 최흥종 목사는 매일 점심 때마다 중앙교회가 중심이 되어 경양방죽에서 거린 잔치를 열었습니다. 그때 광주에 몰려 유리걸식하던 거인들은 거인 잔치에 가서 하루 한 끼만 먹어도 굶어 죽지는 않겠다 고들 했습니다. 걸인 잔치에는 매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거인들이 인근 지방에서까지 몰려들었습니다. 거인들이 많이 몰려 들어오는 날은 여러 차례 가마솥 밥을 지어내야 했습니다. 천사 마을의 걸인 잔치는 그해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 해 겨울에는 한 명의 거인도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은 일이 없었습니다. 이 같은 사정을 잘 알고 있는 걸인들은 길에서 최 목사를 만나면 “아버지! 아버지!” 하고 부르며 허리를 굽혔습니다.
한편 최흥종은 중앙교회의 목사로 재취임하면서 본격적으로 구라운동에 나섰습니다. 최 목사는 남자 수용소에서 환자들과 함께 살면서 치료를 했고 틈나는 대로 나환자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면서 용기와 희망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는 걸인들과 나환자들을 가족보다 더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나환자들과 걸인들이 기뻐하면 같이 기뻐했고 그들이 슬퍼하면 그 또한 슬퍼하였습니다. 1934년 서서평 선교사가 소천하고 최흥종은 한동안 무기력해진 듯 했으나 다시 기운을 차렸습니다. 수많은 나환자들과 거인들이 그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서서평 선교사가 세상을 뜨기 1년 전에 만든 계유구락부를 활성화시켜 민중 계몽 운동과 빈민 구제 사업에 열중하였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가슴 아픈 소식들이 들렸습니다. 함께 손잡고 민족적 농촌 운동과 사회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친일로 몰락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최흥종은 일신의 부귀영화와 욕심의 함정이 도사린 세속에 염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벨과 오원, 포사이트, 서서평처럼 참 사랑을 알고 실천하는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없다는 것을 절감하였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그는 결국 더러운 흙탕물에 세속과 영합하며 혼자만의 부귀를 위해 사는 사람들과 결별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것은 곧 세상과의 결별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서울로 올라가 거세수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거세수술과 성욕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후에 알고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세를 해도 성욕은 여전하다네. 이럴 줄 알았더라면 괜히 수술을 했어. 하나님 나라는 금욕을 한다고 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날 때 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 하늘나라는 무릎으로 가는 거요.” 최흥종은 거의 수술을 한 뒤 호를 오방(五放)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다섯 가지의 얽매임으로부터 해방된다는 뜻으로 혈육의 정에 얽매이지 않고, 사회적으로 구속을 받지 않으며, 경제적으로 속박을 받지 않고, 정치적으로 자기를 앞세우지 않으며, 종파를 초월하여 정한 곳이 없이 하나님 안에서만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5가지의 생활 신조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최흥종 목사는 새벽 기도를 올리고 명상에 잠겼습니다. 그동안 자신이 살아오면서 어쩐지 가면의 인생을 살아온 것만 같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들고 무등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정상에 올라 무릎을 꿇고 십자가를 머리 위로 높이 치켜 올리며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는 누구입니까? 저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제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를 위한 삶입니까? 혹시 제가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을 팔아 거짓된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닙니까?”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향해 마음속으로 거듭 물었습니다. 그는 해가 질 때까지 무등산 산정에 엎드려 산상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는 그날 밤 무등산 정상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하늘에 떠 있는 십자가 고상을 바라보며 명상에 빠졌습니다. 그러다 깜빡 잠이 들었는데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체험했습니다. 손바닥에 못이 박혀 너무 고통스러워 힘껏 소리를 질렀습니다. 자신이 내지른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뜨고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하늘에는 여전히 십자가가 떠 있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힌 자신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무등산 정상에서 내려온 최 목사는 자신이 아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돌렸습니다. 그 편지에는 첫머리에 [사망 통고서]라고 크게 인쇄되어 있었습니다. “1935년 3월 17일 이후 나 오방 최흥종은 죽은 사람임을 알리는 바입니다. 인간 최흥종은 이미 죽은 사람이므로 차후에 거리에서 나를 만나거든 아는 체를 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나 최흥종은 오늘부터 이 지상에서 영원히 떠나 하나님 품에서 진실로 하나님과 함께 자유롭게 살 것입니다. 이제는 생사 간에 예수님 이외에 아무것도 없으므로 세상에 대하여 사망자가 되어 스스로 매장한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기를 바랄 뿐입니다. 지금 이후로는 사망자로 인정하시고 모든 관계와 통신을 단절하여 주심을 통고합니다.”
[사망 통고서]를 받아든 지인들과 친지들은 깜짝 놀라 최흥종을 찾아갔지만 그는 답했습니다. “나는 속세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감상에 빠져 사망 통고서를 낸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비록 내가 육신을 입고 있다할지라도 이제 나의 삶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위한 삶이라는 깨달음 때문입니다.”
이제 최흥종 목사는 무등산 산록의 오방정에 은거하며 세상일과 손을 끊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최흥종은 이상야릇한 손수레를 타고 시내에 나타났습니다. 내 귀퉁이에 받침대를 세워 누더기로 지붕을 만들어 덮어 햇볕을 가리고 사방을 휘장처럼 둘러 비바람을 막을 수 있게 했습니다. 손수레 안에는 덮고 잘 수 있는 낡은 담요와 물 주전자와 컵 성경과 노자의 도덕경이 들어 있었습니다. 손수레가 그의 침실이며 삶의 터전이었던 것입니다. 그 안에서 거지들이 먹는 대로 똑같이 먹고 잤습니다. 손수레가 멈춘 곳은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아무 데나 걸인들이나 나환자가 있는 곳이면 손수레가 멈췄고, 그들이 먹을 때 같은 음식을 함께 먹었습니다. 그의 모습은 누더기를 걸친 거인들과 똑같았습니다.
가족들이 이 사실을 알고 여러 차례 찾아와 집으로 돌아오라고 사정을 했으나 그는 듣지 않았습니다. 음식과 갈아입을 옷을 가져오면 모두 거지들에게 주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버렸다. 그리고 이미 죽은 사람이다. 나에게는 가족도 형제도 없다.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사람이면 모두 내 가족이며 형제이다. 그러니 나를 남편이라고 부르지도 말고 아버지라고도 형님이라고도 부르지 말라. 내 눈에는 내 피를 빌어 세상에 나온 자식이나 병든 나환자나 굶주리는 거인들이나 모두 똑같아 보인다. 내게는 특별히 가까운 사람도 먼 사람도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없이 다 같을 뿐이다.
이 같은 최 목사를 본 광주 사람들의 반응은 갖가지였습니다. ‘손수레를 탄 성자 오방’, ‘거지들의 아버지’, ‘나환자들의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한편에서는 예수를 흉내내는 정신병자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사랑을 실천하는 헌신적이고 거짓 없는 그리스도를 닮은 삶에 대해 존경하였습니다. 최흥종의 이 같은 삶은 속세에 얽매임 없는 완전한 자유인의 몸짓이기도 하였지만, 일제에 대한 불 같은 저항이었으며, 하나님을 배반하고 신사에 고개 숙이는 교회와 교인들에 대한 꾸짖음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손수레 위의 삶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고, 그릿시냇가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엘리아의 거처였으며, 위신과 체면을 던져버리고 오로지 그리스도를 닮은 진실의 삶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손수레를 타고 마음 내키는 대로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버림받은 나환자들과 거인들을 찾아다니며 그들과 먹고 자며 함께 살다가도 홀연히 무등산 속으로 모습을 감추어 버리기도 했습니다. 이 무렵 그는 복음은 곧 사랑의 실천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삶의 가장 중요한 요체는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최흥종은 사랑에 대한 깨달음을 다음과 같이 나타냈습니다.
“남의 인격을 사랑하는 애정이 곧 공경이요, 백발 노인에 대한 사랑이 곧 존경이요, 동년배에 대한 사랑이 곧 은혜요, 어린이에 대한 사랑이 곧 자애로움이요, 부모에 대한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미치게 하는 것이 곧 효도요, 남을 사랑하고 그 은혜를 받지 않는 것이 겸손이요, 남을 사랑하여 서로 다투어 고집하지 않는 것이 양보요, 남을 사랑하여 이롭게 되도록 하는 것이 충이요, 남을 사랑하여 스스로 정결케 하는 것이 절도요, 남을 사랑하여 양갈래로 사랑하지 않는 것이 의로움이요, 남을 사랑하기를 애쓰는 사랑이 직무에 충실함이요, 남을 사랑하여 자기의 손해를 돌보지 않는 사랑이 곧 희생이요, 남을 사랑하되 알 수 없는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곧 신앙이요, 남을 사랑하여 눈앞에 새로운 삶을 이룩하도록 하는 사랑이 곧 종교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동포를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사랑이요, 원수를 사랑하고 남을 용서하는 데 배불러 또 새로운 사랑을 거듭하는 사랑이 사랑이다.
최흥종은 의재 허백련과 함께 무등산에 있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의제는 그림을 그렸고 최 목사는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들이 함께 있는 정자는 원래 석아정(石啞亭)이었던 것을 최흥종이 넘겨받으면서부터 오방정(五放亭)이라고 바꾸게 되었습니다. 최흥종의 식사는 소나무 잎과 생쌀가루를 빻은 가루를 한 줌 입에 털어 넣고 물 한 모금 삼키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무등산 속에 들어앉아 있으면서도 교회를 걱정했습니다. 교계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앞다투어 신사에 참배하고 창시 개명을 하는가 하면 무기 제조용으로 교회의 종까지 떼어다가 바치고, 출전 장병의 무운을 비는 묵념을 주도하는 것을 보며, 기독교와 나라의 장래가 걱정되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최 목사는 참다못해 “교역자의 반성과 평신도의 각성을 촉구함” 이라는 장문의 글을 발표하여 교계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글은 조선교회의 앞날을 걱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각성의 채찍을 든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장로총의 사람들로부터 경계의 대상이 되어 온 최흥종 목사는 이 글이 발표되자 배척을 당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뜻에 따르는 많은 민족주의 교인들도 산골로 숨어버렸습니다. 그 후 그는 더욱 외롭게 되었습니다. 그는 악인이 득세하고 의인이 숨어버린 세상에 나가기 싫어 그는 한동안 손수레를 타지 않고 오방정에만 틀어박혀 지냈습니다.
1945년 8월 14일 어느 때와 같이 아침 일찍 일어난 흥종은 오방정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때 매일 신문 특파원 최인식이 헐레벌떡 달려왔습니다. “오방 선생님 해방이 되었습니다.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그는 광복이 되었다는 소식에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었습니다.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생각하니 그 기쁨을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닥쳐올 앞으로의 혼란이 더 걱정스러웠습니다. 그동안 소외당하고 억압받던 사람들이 지난 날의 고통을 보상받기 위해 목소리를 높일 것이며, 민족을 배반했던 사람들은 살아날 궁리를 위해 온갖 작태를 부릴 것이 눈에 훤했습니다. 최흥종은 해방이 되었다 한들 세상에 나가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광복이 된 지 2주일쯤 후 동생 영욱이 도지사가 되어 찾아왔습니다. 최흥종에게도 미군정하 전남도정 고문회의 회장직이 맡겨졌습니다. 미군정의 중요한 업무는 치안 유지와 인민위원회를 무력화시키는 것, 그리고 한국인의 요구와 불만을 수용하여 처리하는 일과 정치 세력의 동향 파악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인민위원회를 무력화시키는 작업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좌우세력을 총망라한 조직이었던 건국준비위원회가 인민위원회로 재편되면서부터 좌익세력이 완전히 주도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에도 최흥종 목사는 나환자 문제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오방정에 있으면서 자주 산에 내려온 것도 나환자들의 대책을 세우기 위함이 컸습니다. 태평양 전쟁 때문에 물자 부족을 겪고 있는 총독부에서는 나환자 문제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고 애양원과 갱생원은 물자와 경비 부족으로 존폐 위기에 놓이게 되어 굶주린 나환자들이 다시 거리로 뛰쳐나올 형편이었습니다. 그는 군정 고문회의 회장을 맡으면서 미군정 도움을 받아 두 곳의 물자와 경비를 최대한 지원하였습니다. 이 기간을 틈타서 전남 나예방협회까지 만들어 나병 퇴치에 힘썼으며 사회사업협회 위원장직을 맡으면서 걸인들 보호에 진력했습니다. 최흥종은 세상을 등지고 비탄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나환자와 걸인들 문제라면 두 팔을 걷어붙이곤 했습니다.
1950년 6.25로 최흥종 목사는 동생 영욱을 잃었습니다. 군정하에서 도지사를 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최흥종은 조국 분단의 현실이 통탄스러웠습니다. 폐허가 된 시내로 내려가 보면 거리에는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 들끓었습니다. 전쟁으로 집을 잃고 거리로 몰려나온 걸인들도 더 많아진 듯 했습니다. 그 난리통에도 많은 환자들이 오방정을 찾아오곤 했습니다. 이때마다 최흥종은 그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여 있는 식량을 모두 털어 밥을 지어 먹이고 같은 방에서 재워 보냈습니다. 그에게는 전쟁이 없었습니다. 다른 때와 똑같이 그를 찾아오는 나환자들과 걸인들을 맞아 주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오랜만에 보영을 만났습니다. 자신을 변화시킨 지팡이의 주인의 딸이자 서서평의 양녀인 그녀는 남평 산포리에서 음성 나환자 10여 명과 집단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소록도에서 병을 치료하는 음성 환자들의 상당수가 가정을 이루어 이곳에 정착하려 하나 이웃 마을의 반대가 심한 데다 살 길이 막막하여 어려움에 처해 있다고 하였습니다. 최흥종 목사도 나병을 치료한 음성 환자들이 전국 30여 개 소의 집단촌을 이루어 살아간다는 것은 알고 있던 터였습니다. 그는 이미 오래전 서서평이 살아있을 때부터 음성 환자들을 위한 삶의 터전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치료약이 개발되고 완치율도 높아져 나환자들을 언제까지나 수용 시설에 수용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최흥종 목사는 다음 날 아침에 서둘러 군청과 도청을 찾아가 남평 산포리 음성 환자 정착촌에 대한 지원을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유지들을 찾아다니며 이들을 도와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는 산포리 음성 나환자촌을 ‘호혜원’이라는 사단법인으로 만들기까지 오랫동안 무등산을 떠나 이곳에서 그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호혜원’에서 광주로 돌아오던 어느 날 최흥종은 진다리 부근에서 진풍경을 보았습니다. 곧 숨이 넘어갈 것처럼 병색이 짙은 거렁뱅이 수십 명이 한 줄로 길게 늘어서서 흐느적거리는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을 본 것입니다. 맨 앞에는 제중원의 케딩톤(Herbert Codington)이었습니다. 최흥종은 캐딩톤이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행려병자들을 모아서 제중원으로 데리고 가는 곳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습니다. 최흥종은 문득 자신이 젊었을 시절 서서평과 함께 거리에 널브러져 있던 나병 환자들을 데리고 가던 때가 생각났습니다. “아! 캐딩톤 선교사님이 옛날 포사이트나 윌슨 그리고 서서평이 하던 일을 계속 하고 있구나!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이 땅의 천사들을 계속 내려보내 주시는구나!” 최흥종은 그곳에서 노랑머리의 키가 큰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캐딩톤은 옛날 벨 목사 부부가 그랬던 것처럼 길거리에서 행려병자들을 보면 차에 태우고 집으로 데려와 함께 목욕을 시키고 옷을 갈아입힌 다음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해 주었습니다. 병원에서 각혈을 하던 폐병 환자가 지혈이 안 되고 피가 기도로 넘어갈 것 같으면 캐딩톤이 환자 입에 자신의 입을 대고 피를 빨아내어 목숨을 구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최흥종은 키딩톤에게 다가가 대화를 나누며 걸어간 곳은 기독병원의 폐결핵 환자들이 몰려와 미군 막사를 임시 병동으로 쓰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나병보다 더 무서운 것이 폐결핵이며 지금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는 폐결핵 환자의 실태를 듣게 되었습니다.
무등산으로 돌아온 그는 서울 YMCA 현동환에게 캐딩톤의 이야기를 그대로 전하고 [백십자 취명애]라는 단체 이름으로 폐결핵 환자 구제를 위한 호소문을 써서 각계에 보냈습니다. 그리하여 1958년 결핵 환자의 수용소인 ‘송등원’이 개원하였습니다. 후에 ‘송등원’을 ‘무등원’으로 이름 바꾼 다음 환자들이 예배를 볼 수 있도록 초막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때부터 최흥종은 결핵 환자들이 아버지 노릇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옛날 나병 환자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것처럼 이제는 폐결핵 환자들을 위해 사랑을 베풀고 헌신했습니다.
1965년 11월 20일 85세의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무등산 정상에 올라가 40일간의 산상 기도를 마치고 초막 교회로 내려와 유서를 썼습니다. 그리고는 1966년 마지막 눈을 감기 위해 큰아들의 집으로 옮겨가기까지 그는 무등산 원효사 뒤편 폐결핵 환자 정량을 위한 초막에서 100일 동안 금식하며 사랑과 희생의 영적인 삶을 정리하였습니다.
1966년 5월 그가 큰아들의 집으로 내려온 지 두 달이 되었을 쯤에 그는 가족들을 모두 방으로 불렀습니다. “이제 내가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로 갈 시간이 되었으니 슬퍼하지 말아라. 너희들은 내가 이 세상을 떠나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가는 것을 보고 산 자로서 큰 위로로 삼길 바란다.” 최흥종 목사는 마지막으로 찬송가 ‘날빛보다 더 밝은 천국’을 불러달라고 하였습니다. 최흥종 목사는 무등산 초막에서 금식을 시작한 지 100일째 되는 오후에 평화롭게 눈을 감았습니다.
1966년 5월 18일 광주공원에서 오방 최흥종 목사 사회장이 엄수되었을 때 수많은 나환자들과 거인들이 “아버지! 우리는 어쩌라고 이렇게 가십니까!” 울부짖으며 많은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였습니다. 오방 최흥종 목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자유인이었으며,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한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