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중한 사진 한장을 어렵게 찾았다.
일제 때 '조선의 씨름왕'으로 군림했던 나윤출(羅允出; 1913-?) 장사의 사진으로,
1936년 마산에서 열린 '전조선씨름선수권대회' 결승에서 송병규 장사와 맞붙고있는 장면의 사진이다.
대회가 열렸던 곳은 옛 서성동 주차장 자리다.
이 사진 원판을 소장하고 계신 분은 고등학교 박식원 선배다.
6년 전 강남의 선배 사무실에서 이 사진을 스마트폰으로 찍어 보관해오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게 사라졌던 것이 오늘 어떤 USB에 담겨져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1936년 마산에서 열린 '전조선씨름선수권대회' 결승에서 평양출신 송병균과 맞붙고 있는 나윤출(왼쪽)
나윤출은 그 인생사가 하나의 드라마다.
경북 달성군 옥포면 출신의 나윤출은 1930년대 부터 1940년대 중반까지 각종 씨름대회를 휩쓸어
황소를 1천마리나 땄다는 얘기가 전해져 올 정도의 씨름꾼이었지만,
이념적으로 좌파에 극도로 경도된 인물이었다.
결국 1946년 대구 10월폭동 때 인민보안대장을 맡아 경찰과 민간들을 상대로 많은 살상을 저질렀다.
당시 대구지역의 한 신문 보도에 따르면, 나윤출은 당시 경주군수를 참혹하게 타살했으며,
폭동 기간 중 경찰관 36명을 주먹으로 때려 죽였다고 나와있다.
그는 폭동이 진압된 후 당국에 체포돼 사형선고까지 받았다.
하지만 혼란한 정국을 틈타 6.25 전인 1948년 용케 월북에 성공해
북한의 스포츠관련 기구에서 승승장구했다.
전성기 때의 나윤출 모습
1983년 중앙일보에서 펴낸 '북한인명사전'에 나윤출이 나온다.
그에 따르면 나윤출은 1965년 '조선민족체육협회' 위원장을 맡았으며,
그 해 '공훈체육인' 칭호를 받은 것으로 나와있다.
우리 신문에 그에 관한 동정 하나가 보도된 적이 있다.
1966년 런던월드컵 때 북한선수단 단장으로, 런던에서 우리 측 기자와 조우했던 보도다.
개인적으로 나윤출에 대한 관심이 많아 5, 6년 전 취재를 한 적이 있다.
달성군 옥포에까지 내려가 나윤출 집안을 살펴보려 했으나, 아무도 찾을 수 없었다.
동네 나이드신 노인으로부터 이런 얘기는 들었다.
나윤출이 월북한 후 그의 유일한 혈육인 아들은 성과 이름까지 바꾸며 아버지 나윤출의 흔적을 지우려고 노력했으나, 결국은 자살했다는 것이다.
이만기. 강호동을 키워낸 마산 씨름의 代夫 격인 황경수 현 대한씨름협회회장과도 몇 차례 만나
나윤출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황 회장도 나윤출 장사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황 회장은 나 장사가 우리나라 '조선씨름'의 이론적 체계를 마련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 얘기는 나윤출이 북한에 있을 때 '조선의 씨름'이라는 책을 펴낸 것에 기인한다.
이 책은 조선씨름 최초의 교본으로 꼽혀진다.
황 회장은 개인적으로 역시 씨름선수인 자신의 형이 씨름계로 나온 것도
나윤출 장사의 영향 때문이라고 했다.
1913년 생인 나윤출이 언제 사망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중앙일보 '북한인명사전'에도 1965년까지만 나오고,
1966년 런던월드컵 때의 행적으로 미루어 아마 1966년 이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