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파소(乙巴素, ?~203)는 191년에 고구려의 국상이 되어 12년간 고국천왕과 산상왕을 섬기며 충성스럽게 일하였다. 초야의 선비로 묻혀 있던 그는 추천을 받아 벼슬살이에 나설 때, 기왕 줄 자리 높게 달라고 당당히 말한, 개성 강한 이였다. 고구려를 대표할 만한 명법(名法)인 진대법은 그의 손을 통해 나왔으리라 본다. 왕의 절대적인 신임 아래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를 걸었던 명재상. 을파소의 생애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선비의 처신 그 이상을 보여준 독특한 개성파

벼슬자리 외에 딱히 먹고 살 일이 없었던 옛날의 선비들이었지만, 벼슬을 살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서 엄정한 자기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한들, 선비가 지키는 지조는 여기서부터 출발하였다. 아무나 아무 때나 부른다고 그냥 나가지는 않았던 것이다. 벼슬에 나가는 기준은 명분에 맞아야 했다. 무엇보다 자신이 직무를 수행할 만큼 공부가 되어 있어야 하고, 나라에 선비를 알아 줄 도(道)가 있어야 하며, 공식적인 부름을 받아야 했다. 이렇게 나가는 일의 기준은 반대로 물러나는 일의 기준과 손바닥의 앞뒤를 이루었다.
이 기준에 맞더라도 벼슬에 나가지 않는 선비가 있었다. 아마도 소부(巢夫)와 허유(許由)의 이야기가 가장 잘 알려졌을 것이다. 오래 전, 중국 요순시대 때이다. 요 임금은 순 임금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는데, 순 임금은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물려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허유라는 고매한 선비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당장 그를 찾아가 이 나라를 맡아 달라 하였다. 그러나 허유는 이를 한마디로 거절했다. 공부도 충분하고, 요순시대라는 중국 역사상 최고의 도가 행해지던 시대이고, 왕이 직접 찾아와 요청을 했음에도 그는 거절했다. 모든 요건을 갖췄는데 왜 거절했을까.
그뿐만이 아니었다. 허유는 바로 영천(潁川)으로 달려가 흐르는 맑은 물에 양쪽 귀를 번갈아 가며 씻었다. 그때 마침 소부가 말을 몰고 나와 물을 먹이려다, 귀를 씻는 허유에게 까닭을 물었다. 왕을 맡아달라는 ‘더러운 소리’를 들어 씻는다고 하였다. 이쯤 되면 참 가관이라고 고개를 갸우뚱거릴 터이다. 그런데 다음 장면이 더 가관이다. 더러운 말을 듣고 더럽혀진 귀를 씻은 더러운 물을 말엔들 어찌 먹일 수 있겠느냐며, 소부는 말을 몰고 그대로 돌아서 버렸다. 그렇다면 이것은 명분 이상의 문제이다. 비록 소부와 허유가 설화상의 인물이기는 하나, 역사상의 선비 가운데도 보다 고양된 어떤 경지를 추구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런데 고구려의 명재상 을파소는 이런 기준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독특한 개성을 지닌 이였다. 선비가 지니는 명분 이상의 것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허유∙소부 같은 신선놀음에 빠진 이도 아니었다.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너무나 잘 알아, 어느 만큼의 위치에서 어떤 업적을 남기리라 정확히 측정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그 길대로 걸어간 멋쟁이였다.
멈칫하는 고구려에게 필요한 것은 대망의 명재상이었다

고구려는 건국 이후 차분한 발걸음으로 나라의 꼴을 갖춰가고 있었다. 동명과 유리로 이어지는 건국세대가 막을 내린 다음, 대무신왕은 27년, 국조왕은 94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나라의 틀을 잡았다. 그 사이 짧은 기간 자리를 지킨 왕도 있었으나, 차대왕과 신대왕을 이어 고국천왕에 이르자 왕조는 힘을 받는 듯했다.
그러던 고국천왕 12년(190)에 문제가 발생했다. [삼국사기]에 실린 이 해의 기록으로 가보자. 어비류(於畀留)와 좌가려(左可慮) 등이 권세를 휘두르며 옳지 못한 짓을 많이 하였다. 좌가려는 왕의 부인 우씨(于氏)의 친척이었다. 백성의 원망이 높아지자 왕은 노하여 그들을 목 베려 하였다. 그러자 좌가려 등이 반란을 꾸몄다. 이들의 반란은 이듬해 여름에 본격화되었다. 무리를 모아 왕도 공격을 감행했던 것이다. 왕은 일당을 목 베고 귀양 보내며 일단 급한 불을 껐다. 이 같은 반란으로 왕은 큰 충격을 받았다. 왕조를 세운 이후 이처럼 큰 반란을 만나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왕은 곧바로 명령을 내렸다.
“근자에 벼슬이 측근에게 주어지고, 지위가 덕행에 따라 올라 가지 못하는 일이 많아, 그 해독이 백성에게 미치고 왕실을 동요시켰다. 이는 과인이 총명치 못한 탓이었다. 이제 너희들 4부에서는 각기 초야에 묻혀 지내는 어진 이들을 추천하도록 하라.”
고구려에는 5부(동·서·남·북·내)의 행정구역이 있었다. 그런데 왕이 4부라고 한 것은 어비류나 좌가려가 속한 중앙의 내부, 곧 계루부(桂婁部)를 제외했다고 볼 수 있다. 반란의 주모자가 든 지역을 제외한다면, 지방의 4부에서 현명한 이를 뽑아 중앙으로 진출시키겠다는 것이 왕의 의도였으리라. 그리고 바로 앞 왕인 신대왕 때에 명림답부(明臨荅夫)라는 명재상이 있었음을 떠올렸을 수도 있다. 그는 한(漢)나라 현토태수 경림(耿臨)이 대군을 출동시켜 고구려로 쳐들어 왔을 때, 다른 신하와 달리 무척 신중한 대응방법을 내놓았었다. 곧바로 군사를 출동시키자는 중론과는 달리, 명림은 지공(遲攻:공격을 늦추는 것)과 초토작전(성을 비우거나 물자를 없애버려 원정군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주장하였다. 명림의 이 작전은 적중하였다. 고국천왕은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이런 명재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왕 줄 자리면 높은 자리를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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