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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강제 개항시킨 미국은 신미양요때 조선은 왜 개항시키지 못했나?
오래 전에 고등학교에 다닐 때의 아슴푸레한 기억입니다만.... 시회과 지리부도에 세계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넓은 영토를 가진 나라인 미국과 소련의 영토가 연도별로 점점 커져
확장되는것이 표시된 지도에 내가 보기에는 다 같은 내용인데도 제목을 다르게 표현합니다?
우리 문교부는 “미국의 발전” 과 “소련의 팽창” 으로 2중 기준을 가지고 전혀 다르게
제목을 달았던게 생각이 나는데, 하기사 米國(미국) 을 美國(미국) 으로 바꾼 정부
이니.... 그 미국이 1854년에 일본은 강제 개항을 시켰음에도 17년 후인 1871년
신미양요 때는 조선은 개항시키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지 한번 살펴 보고자 합니다.
1853년 미국 페리 제독은 군함 구로후네(黑船 흑선)를 이끌고 대서양을 건너고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을 건너서 말래카 해협을 통과하고 북상해 홍콩과 상해를 지나
대만 해안을 거슬러 올라와 에도만을 침범해 일본의 개항을 강요하니... 함포에 굴복한
도쿠가와 막부는 1854년에 “하코다테와 시모다를 개항장” 으로 서양에 문을 열었습니다.
미국이 일본에 필사적으로 개항을 강요한 이유는 2가지인데, 그걸 말하기 전에 우선 지도를
펴놓고 살펴 보자면 미국 페리 제독의 함대는 샌프란시스크에서 출발해 화와이를 거쳐
“태평양을 건너오는게” 최단거리로 항로가 짧으니 시간과 경비며 노력이 훨씬 단축됩니다.
하지만 태평양 항로 보다 훨씬 먼 항로인 뉴욕에서 “대서양으로 내려가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고
인도양” 을 건너고 말래카해협을 통과해 필리핀을 지나서 왔다는 사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겠는데.... 첫째는 “고래잡이” 요, 두번째는 “중국으로 가는 중간기지” 가 필요했기 때문 입니다.
1. 고래잡이 :
석유는 오랫동안 ‘역청’ 으로 불리며 액체에서 기체로 변해 사람을 현혹하는 마법의 물질로
주술적인 대상이었으니 ‘죽은 고래의 피’ 또는 ‘유황이 농축된 이슬’ 의 일종으로
보았으며 기원전 2000년경 수메르의 마법사는 가스를 이용하여 미래를 점치기도 했습니다.
B.C 3000년경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인은 아스팔트를 재료로 조각상을 만들었고, 바빌로니아인도
아스팔트를 건축에 접착제로 사용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고대 이집트에서 미라를
싸는 천에도 아스팔트를 사용했으며 그리스에서는 “그리스의 불” 이라는 무기로도 사용됐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석유가 최초로 발견된 것은 미국이니 1859년에 에드윈 드레이크는 펜실베이니아에서
조명용 램프 연료를 구하기 위해 땅을 굴착하여 석유를 발견하는데 성공하였으니...... 그가 석유를
최초로 발견한 것은 아니지만 최초의 유전(油田) 굴착자로서 유전 개발을 통한 석유가 발견된 것입니다.
그 이전에 유럽과 미국에서는 “기계의 윤활유” 와 “램프(등잔)” 에는 “고래 기름” 을 썼는데
영화 “하트 오버 더 씨” 는 허민 멜빌의 소설 “모비딕” 의 모티브가 된 1819년에
출항한 포경선 에식스호가 1820년 향유 고래의 습격으로 침몰하니 생존자 21명이
94일간 표류하면서 제비를 뽐아 “동료 선원을 잡아먹으면서” 결국 8명이 생존한 실화 입니다.
17세기에 시작된 포경선의 기지는 미국 동부 매사츠세츠주 뉴 벧포드였으니 한창 때는 연간 700척의
포경선이 출항해 대서양에서 고래를 잡았는데, 전체의 3분지 1이나 되는 “고래 머리에서 기름” 을
얻었으며 대장에 덩어리로 나오는 용연향은 안정제 향료로 그리고 뼈는 장식품과 우산등에 쓰였습니다.
육지에 골드러쉬 라면 “바다에는 포경산업” 이었는데.... 골드 러시는 캘리포니아주 콜로마의
슈터밀에서 제임스 마셜이 1848년 1월 24일 사금을 발견함으로 촉발된 사건으로....
미국의 각지와 유럽은 물론 중국인들까지 몰려들어 30만명의 인구가 캘리포니아에
유입되었으며 캐나다에서 금이 발견되자 중국인들이 몰려들어 밴쿠버라는 도시가 커집니다.
그런데 “바다의 포경산업” 은 육지의 골드러쉬에 결코 뒤지지 않았으니 이른바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는데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울고 세상에 영원한건 없는 법이라.... 저 700척이
수백년간 대서양 바다를 훑으니 “고래 씨가 마른지라” 미국은 태평양으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러시아 포경선들이 베링해에서 고래를 잡아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팔고 갔으니 주요 어장으로, 미국
은 “포경선을 베링해” 로 보내자면 문제는 도중에 현지에서 배의 연료인 석탄과 물이며 식료품
등을 보급받을 “기지” 가 필요한지라... 미국은 일본 홋카이도 남부 “하코다테” 에 눈독을 들입니다.
2. 중국으로 가는 전진기지 :
중국은 일찍이 한자와 종이에 금속활자와 비단과 화약에 나침판을 발명한 세계 4대 문명이 발생
했던 나라로 인쇄술과 종이에 활자와 나침판을 유럽에 전해주었으며 또 유럽에 비단
외에도 도자기와 차를 수출한 반면에 정작 유럽에서 수입할건 별로 없는 최고 선진국이었습니다.
그런 반면에 영국은 고작해야 식민지인 인도산 면직물 정도가 수출품인지라 도자기에 이어
차를 대량으로 수입하던 영국은 “무역적자”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으니 인도에서 “아편을
재배해서 중국” 에서 파니 중국은 이를 금지하자 기어코 해전이 벌어지니 “아편전쟁” 입니다.
석탄을 때는 “철갑선과 신형 대포” 를 장착한 영국 함대의 침공으로 1840년 “아편전쟁” 이 발발
하니, 중국 배 22척이 영국배 2척과 붙어 전멸하는등.... 중국은 영국의 함포사격에 처참하게
무느지는데..... 군사들이 맞붙는 육전과는 달리 해전에 있어서 으뜸은 “대포의 사정거리” 입니다.
임진왜란때 조선수군의 사망자를 보면 비상식적으로 적은데 놀랍니다만, 한산도해전 조선군
전사자는 3명이고 명량해전 전사자는 2명에 불과한 것은 일본 무기인 “조총의 유효
사거리는 70미터” 인데 비해... “조선 대포는 평균 600미터” 였기 때문이니, 조선 수군
은 왜선과 300미터 정도 거리를 유지한채 대포로 적선을 격침시키면 피해가 거의 없습니다?
철갑 증기선으로 무장한 영국에 이어서 프랑스 까지 중국 침탈에 나서자 마음이 급해진
미국은 자기도 “중국에서 앞선 두 나라 처럼 이득” 을 챙겨야 하는데..... 문제는
태평양을 횡단해 중국에 도착할 무렵이면 “석탄이 바닥나고 식수에 식량” 도 떨어집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출항한 배가 하와이에서 마지막 보급을 받는다 쳐도 중국에 도착하기도 전에
석탄이며 식수가 떨어지니... 보급기지 때문에 원거리인 대서양과 인도양을 돌고
동남아를 거쳐서 중국으로 가야 하는지라 가까운 “태평양을 횡단하지 못하는 불편” 은 컸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일본의 요코하마에서 보급” 을 받을수 있으면 가까운 “태평양 항로” 로 와도
되는지라..... 1853년 “페리제독은 구로후네”(黑船 흑선) 4척을 이끌고 대서양과 희망봉
을 돌아 인도양을 건너 홍콩과 상해를 지나 7월 8일 일본 에도만 우라가항을 침범해
“일본에 개항을 요구” 하고 다음해에 답변을 받으로 다시 오겠다고 통지하고는 돌아갑니다.
다음해 중국에서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고 동아시아 정세가 급변하자 페리는 7개월 만인 “1854년
2월 13일 우라가”에 다시 나타났으니 “함대를 9척” 으로 늘려서 왔는데 당시 바람의 힘으로
운행하던 나무로 된 일본의 100톤 범선에 비하면 일부지만 2,000톤에 흑선 이라 불린 “기선
은 쇠” 로 만들어졌으며 석탄을 때어 운행했으니..... 시커먼 연기에 일본인들은 혼비백산 했습니다!
멕시코 전쟁의 영웅 페리 제독은 동인도 함대 사령관(?) 이 되자마자 일본 파견 특파대사를 겸임해
1853년과 다음해 다시 온 것인데 조약체결을 강요하니“항구가 봉쇄”된지라“수송이 중단”
된데다가 미해군의 함포사격으로 “에도(도쿄) 시내가 불바다” 가 될 상황에 처하자 일본은
고심 끝에 충격을 줄이기 위해서 에도에서 멀리 떨어진 이즈반도 시모다에서 조약을 체결합니다.
그래도 미국은 에도(도쿄) 입구 시모다와 북해도 하코다테 개항만 달성하고 영국이 중국에서
자행 했던 치외법권은 요구하지 않았으니 일본으로서는 그나마 다행입니다. 이는 미국은
불과 몇년 전에 멕시코를 침략해서 승리해 탈취한.... “텍사스와 캘리포니아, 뉴멕시코 및
애리조나” 등을 개발하는 것만도 힘에 부쳐 당시는 “해외에 영토 욕심” 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1858년 미일수호 통상조약에서 이즈반도 시모다항이 불편하다고 요구해 “개항장
은 요코하마” 로 변경되는데.... 일본은 기왕에 개항했으니 이제 서구문물을 적극적
으로 받아들이니, 러시아의 남진에 대비해 2번째 개항장인 홋카이도의 하코다테
에 서양 캐나다의 퀘백성 처럼..... 5각형 성채인 고료가쿠 五稜郭(오릉곽) 를 축성합니다.
16세기 유럽에서는 도시 전체를 성으로 둘러싼 성곽 도시들이 만들어졌는데, 이후 총과대포가 발달
함에 따라 방어하는 쪽에서는 총의 사각(死角)을 적게하는 구조가 고안되니 "별 모양의 성"
으로 16세기에 프랑스 국왕 앙리 2세가 지중해의 앙티브 해변 산에 축성한 성채가 대표적 입니다.
저 고료카쿠성의 설계자는 일본인 다케다 아야사부로 인데 서양의 책만 보고 스스로 연구해서 설계
를 했다니? 일본의 정신은 그대로 유지하며 서양의 기술만 차용한다는 "和魂洋才(화혼양재)"
로 성공하지만 중국의“ 中體西用(중체서용)” 과 조선의 "東道西器 (동도서기)" 는 성공하지 못합니다.
또 1854년에 재차 방일한 페리 제독이 실제 기차를 5분지 1로 축소한 작은 기차 모형을 일본에
선물로 주었더니.... 일본인 장인들은 이것을 해체해서 연구한 다음에 일본 기술로 18년만에
실제로 기차를 만들어 1872년 10월 14일 도쿄 신바시에서 요코하며 까지 기차를 운행했습니다!
그외 "해체신서(解體新書)“ 는 1771년에 발간된 번역 의학서로, 독일의사 쿨무스의 “해부도보”
라는 책의 네덜란드어판인“타펠 아나토미아” 를 일본어로 번역한 것이니 총 책임자는 스기타
겐파쿠는 네델란드어를 몰랐기 때문에 의사 마에노 료타쿠와 나카가와 쥰안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사형수의 시체해부 광경을 직접 보고는 타펠 아나토미아의 해부도가 정확하다는 것을 확인
한뒤 번역을 결정했다는데..... 네델란드어를 모르는지라 먼저 도판(그림)에 주목했으니 도판에
있는 단어들과 인체의 위치를 이용해서 그 단어들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추리하듯 찾아나갔습니다.
문법적인 요소는 무시했으며 추상적인 어휘들은 유추를 통해 의미를 파악했으니 “코는 후루헷헨도”
라고 보았습니다.“나뭇가지를 잘라 쌓으면 후루헷헨도”, “마당을 쓸면 먼지가 쌓여
후루헷헨도”라는 설명을 일본에서 발간된 네델란드어 사전이나 어휘집에서 발견하고“후루헷헨도”
의 의미를 솟아오르다, 봉긋하다(堆) 로 정해서는 이것이 사람의 "코의 이름" 이라는 식이었습니다.
하지만 개항후에 전국 260개 번 중에서도 도자마 다이묘였던 번주(영주) 들과 사무라이들은
굴욕적인 조약으로 일본의 혼이 더렵혀 졌다면서 “존왕양이”를 내 걸고 투쟁해 우여곡절
끝에 1868년 조슈번과 사쓰마번에 히젠번과 도사번등 4개번이 궐기해 “무진전쟁” 내란
을 통해 260년 이어진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고 신일본을 세우니 바로 “메이지유신” 입니다.
1840년에 청조가 유럽의 영국군에 패하니 일본에서는 일왕(천황) 과 쇼군이며 번주에서 부터
사무라이에 이르기 까지 “서양의 침략을 방비”하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 문제로 고심
하는데. 조선도 걱정은 됐는지 국왕 헌종이 사신에게 물으니 “북경은 평소와 다를바 없다”
고 말하자.... 모두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아무일도 없었던 것” 처럼 그냥 넘겨 버립니다.
1849년 7월 농사꾼인 강화도령 철종이 왕에 옹립되어 외척 “안동김씨들의 세도정치” 가 시작되었으며
1864년에 19살 총명한 형 재면을 제치고 12살 철부지 어린 고종이 왕이 되니... “흥선이 대원군” 에
오르는데 1866년 “프랑스인 신부 9명과 조선인 신도 8천명(도망쳐서 산속에서 사고나 병, 굶어 죽은
자는 제외)을 학살하는 병인박해” 가 일어나니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침공한 “병인양요” 가 발생합니다.
그후 1871년 6월 1일 미국의 로저스제독은 군함 5척에 1,230명 병력으로 강화도를 침공하는데
1866년에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 가 평양에서 민간인을 공격하고 납치하는등 만행을
저지르자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는 불 지른 나룻배를 떠내려 보내 격침시킨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일어났으니, 이 “사건을 항의” 하고 “강제개항” 시켜 금을 찾을 의도니 “신미양요” 입니다.
광성진 600명 조선군 중에서 “전사자는 어재연등 350명” 에 부상자 20명을 포함해 다수가 미군의 포로가
되었는데도 “미군은 전사자 3명 에 부상 12명” 이니, 국민대 교수 “김병준” 씨가 동아일보에 신미양요에
대해 쓴 글을 보면 신미양요에 참전한 미해병 장교의 편지와 보고서를 읽고 참담한 기분을 느꼈다고 합니다.
"이게 조선이었던가? 이게 나라였던가? 미군은 초지진과 덕진진을 함락하고 이어 광성보로
진격하니 어재연의 조선군 600명은 참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열심히 싸웠으나 최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미군을 상대로 조선군의 구식 화승총은 재장전에 시간이 너무나도
오래 걸리자 성벽을 오르는 미군들을 향해 화승총을 버리고 돌을 던지며 저항했다고 한다.“
“ 구식 총 보다는 차라리 활이나 돌이 더 나았던 것이네? 누가 우리 병사들을 돌과 같은 구석기
시대 무기" 로 전투에 임하게 했었나? 성 위에서 돌을 던지는 조선 병사를 성 아래
후방의 미군이 저격하니 전투는 불과 한시간 만에 끝난다." 한시간? 겨우 한시간 만에 끝났나....
미군은 악착같이 덤벼드는 “조선군에게 질려” 버린데다가 전함 5척과 해병대 1,200명으로 “한성
까지 점령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광성보를 점령한 바로 다음날인 6월 11일에 철군
하는데... 그 전력으로 한 국가 전체와 싸우기에는 부족했으며..... 또한 미국은 “한반도에는
침략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판단” 하여 셔먼호 보복 정도에 그치고 개항은 포기하고 물러갑니다.
미군이 일본을 개항시킨데 비해 조선을 개항시키지 못한 첫 번째 이유는 “병력이 너무 적고” 두번째
는 “에도(도쿄)는 항구” 도시라 에도만을 봉쇄해 물자의 수도 진입을 틀어막고(도쿄 시민이
모두 굶어죽게 생겼음!) 함포사격으로 “도시를 불바다” 로 만들겠다는 위협이 통했지만........
조선은 인천이 수도가 아니라 “내륙인 한성” 이 수도니 함대로 한성을 위협할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다음 3번째 이유는 미국은 “포경선 보급기지” 로 홋카이도 하코다테와 태평양을 건너온 배들이 “중국
으로 가는” 중에 석탄과 식수며 식량등 보급을 받아야 하는 절대적인 필요성 때문에 “요코하마 개항
은 반드시 필요”했으나..... “조선은 외진곳” 에 위치하니 “중국으로 가기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 은 아닌지라 전략적 가치가 일본 보다 덜하니 개항하면 좋고 아니면 포기할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율곡이 선조에게 올린 상소문 “萬言封事 만언봉사” 에 “이 나라는 썩어 무느지고 있는 집과 같습니다,
기둥을 바꾸면 서까래가 내려앉고 지붕을 고치면 벽이 무느져 내립니다. 때가 바뀌면 법과
제도도 바뀌어야 합니다” 하지만 선조는 귓등으로 흘려들었고 임진왜란의 참화를 입었으며
3백년 후에는 찬란한 문화를 지닌 조선이 전쟁은 커녕...... 단 한 차례의 정식 전투 조차 없이 망합니다.
1840년 아편전쟁에서 하늘같은 상국 청나라가 영국에 패해 보호막이 사라졌는데도 단 한가지도
아무른 대비를 못하고 허송세월하다가, 프랑스 신부와 천주교도를 다섯차례나 박해해서
잔인하게 잡아 죽이니 1866년에 병인양요가 있었고, 이후 1871년 신미양요를 맞이했는데
아쉬운건 대원군이 프랑스나 미국과 전쟁을 할것이 아니라 개항해 외교관계를 수립했더라면....
서양과 수교하고 개항해서 무역을 하며 나라의 존재 그 자체였던 유교를 국교에서 끌어내린후
천주교를 수용하고 사대부 선비들의 평생의 꿈인 “과거제도를 폐지”하며, 청년 100여명을
뽑아 프랑스와 미국에 유학을 보내 관리로 임명하거나 철도, 전기, 조선, 철강, 자동차,
무역, 은행, 보험회사를 세우며 산업을 일으켜 국력을 길러서 부강한 나라를 만들었더라면.....
1895년 동학농민전쟁이 발생하자 아베 신조총리의 외고조부 오시마 요시마사는 4천으로 서울에
무혈 입성해 간을 보다가 경복궁을 공격해서는 몇시간만에 고종을 포로로 잡고는 이노우에
가오루 공사가 고종을 협박해서 친일파 김홍집 내각을 세우고는 소위 “갑오경장” 개혁
을 실시했으나..... 아관파천으로 친일 내각이 무느지고 친러내각이 들어서니 개혁은 중단됩니다.
친일파 내각이 실시한 “갑오경장” 은 양반과 상놈 반상의 차별제도를 철폐하고 백정과 광대등
천민제도를 폐지하며 양반들의 첫째가는 큰 재산인 노비를 해방하고, 500년 강고하게 이어
내려온 과부 재혼 금지제도를 폐지하며 왕실과 정부 회계를 분리하고 도량형을 통일하며
조세 금납제에 경찰을 행정에서 분리하고 또 사법기관을 새로 만들며 단발령을 실시했습니다.
그런데 1866년 병인양요나 늦어도 1871년 신미양요때 대원군이 전쟁을 할게 아니라 프랑스나 미국
과 수교하고 1895년에 친일파들이 실시하고자 했던 저런 개혁을 사대부 양반들의 기득권과
재산을 포기하고 스스로 실시하며, 거기다가 의회를 도입하고 신문사를 설립하며 소작농
에게 농지를 주는등 국력을 신장시켜 조선군을 현대화했더라면 독립을 유지했을른지도 모릅니다?
19세기에 미국은 포경선과 중국행 상선에 꼭 필요한 보급기지로 일본의 항구가 필요했었는데 지금은
그때 보다도 더 절실히 일본이 필요하니... 2차대전 때 일본 함대가 2차례나 태평양을 건너 화와이와
미드웨이를 공격하고 일본 잠수함이 캘리포니아 연안에서 작전했으니 미국민들은 공포에 떨었습니다.
미국의 안보를 위해 태평양 바다를 어떤 적국도 넘보지 못하도록 “태평양이 미국의 내해”
가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미일동맹” 이 필수적이며, 미국이 일본을 적국으로
부터 지켜 주는 전쟁도 불사하는 교두보가 한반도 인데..... 최근에 들어서는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 하기 위해 미국은 더욱 더 미일동맹에 매달리니 가히 “찰떡 궁합” 입니다!
P.S. 오늘 인터넷에 특이한 기사가 하나 올라왔는데 좋은나무교회 문혁 목사 입니다.
대한민국의 세계적 위상이 대단합니다. 비결로 일본이 이웃이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본을 모델로 삼고 죽어라 ‘극일’ 하다 보니 최정상에 온 것입니다.
일본 기업이 아프리카에서 수도에 진출하면 우리 기업은 시골까지 진출했습니다.
또한 중국이 이웃이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국은 서비스 정신이 없습니다.
중화사상 때문입니다. 저는 중국 항공기를 타면 승무원이 무섭습니다. 말도 못
알아듣지만 미적거리면 한 대 맞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국 항공사는 서비스에
승부를 걸었습니다. 그 결과 양대 항공사는 세계 정상급의 항공 기업이 되었습니다.
만약 이웃 나라들이 게으르고 무지한 국가들이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안 좋은 영향을
받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니 문제는 환경과 조건이 아닙니다.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이 문제입니다. 코로나의 열악한 상황이지만 조금만 달리 보면 모든 것이 기회 입니다.
※ 한국이 이웃나라인 일본 및 중국과 한자리에서 만난적이 있으니 1592년 임진왜란
인데 연인원은 일본 30만, 중국 20만에 조선 10만으로 1597년 정유재란만 보면
일본 14만, 중국 11만 7천에 조선 3만 8천인데..... 1950년에도 다시 만났으니
동아일보 정권현씨는 인천상륙작전에 일본인 2천명이 미 7사단에 참가했다고 합니다.
일본인 선원들은 인천까지 뱃길 안내 는 물론이고 "수로가 좁고 조수간만의 차 가 심한 때문
에 상륙에 주어진 시간이 두세시간" 정도에 불과한 제한된 악조건에서..... "미군이 탄
상륙정 LST 를 직접 조종" 했으니 2천명 중에 57명이 전사한지라 NHK 는 다큐멘터리로
방영했다는데.... 세번째로 3국 젊은이가 다시 한반도에서 만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