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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 國 時 代
趙 王 朝 世 家
趙(조) BC. 403∼BC. 228 위치 하남. 하북 성: 嬴(영) 작위 자작
(삼진분립 전. 晉(진 신하때)
代數 | 在位期間 | 位 | 姓名 | 關係 | 首都 | 現地名 |
제 1대 | BC. 636∼BC. 622 | 成子(성자) | 衰(쇠) | 邯鄲(한단) | 河北省 邯鄲 | |
제 2대 | BC. 621∼BC. 601 | 宣子(선자) | 盾(돈.순) | 성자의 아들 | 하북성 한단 | |
제 3대 | BC. 600∼BC. 597 | 莊子(장자) | 朔(삭) | 선자의 아들 | ||
제 4대 | BC. 583∼BC. 541 | 文子(문자) | 武(무) | 장자의 아들 | ||
제 5대 | BC. 540∼BC. 518 | 景子(경자) | 成(성) | 문자의 아들 | ||
제 6대 | BC. 517∼BC. 476 | 簡子(간자) | 鞅(앙) | 경자의 아들 | ||
제 7대 | BC. 475∼BC. 425 | 襄子(양자) | 毋卹(무휼) | 간자의 아들 | ||
제 8대 | BC. 424∼BC. 424 | 桓子(환자) | 嘉(가) | 양자의 아들 | ||
제 9대 | BC. 423∼BC. 409 | 獻子(헌자) | 浣(완) |
삼진분립 후
代數 | 在位期間 | 位 | 姓名 | 關係 | 首都 | 現地名 |
제 1대 | BC. 408∼BC. 400 | 列侯(열후) | 籍(적) | 헌자의 아들 | ||
제 2대 | BC. 399∼BC. 387 | 武侯(무후) | ? | 열후의 동생 | ||
제 3대 | BC. 386∼BC. 375 | 敬侯(경후) | 章(장) | 열후의 아들 | ||
제 4대 | BC. 374∼BC. 350 | 成侯(성후) | 種(종) | 경후의 아들 | ||
제 5대 | BC. 349∼BC. 326 | 肅侯(숙후) | 語(어) | 성후의 아들 | ||
제 6대 | BC. 325∼BC. 299 | 武靈王(무령왕) | 雍(옹) | 숙후의 아들 | ||
제 7대 | BC. 298∼BC. 266 | 惠文王(혜문왕) | 何(하) | 무령왕의 아들 | ||
제 8대 | BC. 265∼BC. 245 | 孝成王(효성왕) | 丹(단) | 혜문왕의 아들 | ||
제 9대 | BC. 244∼BC. 236 | 悼襄王(도양왕) | 偃(언) | 효성왕의 아들 | ||
제 10대 | BC. 235∼BC. 228 | 幽穆王(유목왕) | 遷(천) | 도양왕의 아들 | ||
제 11대 | BC. 227∼BC. 222 | 代王(대왕) | 嘉(가) | 도양왕의 아들 |
조나라 조씨는 秦(진)나라와 같은 영성이다. 시조는 蜚簾(비렴)이며, 그는 두 아들을 두었다. 장남의 이름 은 惡來(오래)라 지었다. 오래는 은나라 주를 섬기다가 주나라 백성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 후손이 秦 (진)나라의 선조가 되었다.
오래의 동생 이름이 季勝(계승)이다. 그 후손이 조나라의 선조가 되었다. 계승은 孟增(맹증)을 낳았다. 맹증은 周 成王(주 성왕왕)의 총애를 입었다. 그가 宅皐狼(택고랑)이다. 택고랑은 衡父(형보), 형보는 조보 를 낳았다. 趙父(조보)는 周 穆王(주 목왕)을 섬겼다. 그는 말을 잘 몰았고 목왕을 태우고 전국을 순시하 고 또 목왕을 위기에서 구한 일도 있어 그러한 공으로 趙(조)에 봉해졌으며 그로써 성을 조씨라 했다. 조 보로부터 6대 후손인 奄父(엄보)는 자가 公仲(공중)이다. 엄보는 叔帶(숙대)를 낳았다. 숙대는 周 幽王(주 유왕이)이 황음무도하자 晉(진)나라가 진 文侯(문후)를 섬겼다. 이로써 진나라에서 조씨 가문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5대를 지나 조숙대에 이른다
춘추시대에 趙夙(조숙)이란 사람이 晉(진)나라를 섬겼다. 조숙은 共盟(공맹)을 낳고 공맹은 조최(조쇠)를 낳고 자를 자여라 했다.
제 1대 성자 쇠
조쇠는 晉 獻公(진 헌공)의 아들 重耳(중이)가 왕위에 오르기 전 19년 동안이나 여러 나라를 떠돌며 망명 생활을 하는 동안 狐偃(호언)과 함께 따라다니며 충성을 다했다. 중이가 오랜 방황 생활을 마친 뒤 귀국 하여 왕위에 오르자 조쇠는 국정을 돌보면서 문공이 패자가 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문공의 뒤를 이어 襄公(양공)이 즉위하고 나서도 조쇠는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했다. 조쇠가 아들 셋을 두었다. 맏이가 趙 同(조동). 둘째가 趙括(조괄). 셋째가 趙嬰齊(조영제)다. 공자 중이를 섬길 때 여희지란으로 인해 공자 중 이가 翟(적)땅으로 달아날 때 조쇠도 같이 갔다. 그곳에서 얻은 여인에게 趙盾(조돈. 조순)을 낳았다. 조 최가 晉(진)나라로 돌아오자 본부인이 조돈을 적자로 삼고 아들 삼형제가 모두 조돈을 받들게 했다. 진 양공 6년 조쇠가 죽자 시호를 成季(성계)라 했다.
제 2대 선자 조돈
조돈은 양공때 재상을 지내며 많은 치적을 쌓았다. 양공이 죽은 후 일부 대신들이 일곱 살 난 공자 夷皐 (이고)를 왕으로 세우려고 하자 조돈은 이를 반대했다. 하지만 결국 이고가 왕위에 올랐는데 이이가 바로 靈公(영공)이다. 영공은 무능하면서도 포악한 왕었다. 조돈은 여러 차례 간언을 했지만 영공은 오히려 조 돈을 죽이려고 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조돈은 도성을 떠났다가 얼마 후에 영공이 趙穿(조천)에게 시해 되자 돌아와 晉 襄公(진 양공)의 동생 黑臀(흑둔)을 세웠다. 그가 成公(성공)이다. 진 경공 때 조돈이 죽 었다. 그의 뒤를 아들 삭이 이었다.
제 3대 장자 삭
삭이 晉 成公(진 성공)의 손위누이를 부인으로 맞이했다. 같은 해에 大夫 屠岸賈(대부 도안고)가 조삭과 趙同(조동). 趙括(조괄). 趙嬰齊(조영제) 등을 죽여 일족을 멸했다. 조삭의 아내는 조 성공의 누나로 당시 임신 중이었다. 진 경공의 궁으로 달아나 숨었다. 도안가는 유복자 조무를 찾아 죽이려 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그 후 조무와 함께 程嬰(정영. 삭의 식객) 은 도안가를 멸했다.
제 4대 문자 무
15년 후 晉 景公(진 경공)이 병이 나 점을 쳤다. 대업을 이룬 후대가 순조롭지 못해 재앙이 생긴다는 점 괘가 나왔다.
경공이 한궐에게 물었다. 한궐이 모든 사실을 이실직고 하였다. 진 경공은 조씨의 엣 田邑(전읍)을 다시 조무에게 내렸다. 晉 平公(진 평공) 12년 조무가 정경이 되었다. 진 평공 13년(조무가 죽자 시호를 문자 라고 했다.
제 6대 간자 앙(BC. ?∼BC. 475)
진 경공 9년. 간자가 정경의 지위에 있었다. 어느날 정나라 출신 관상장가인 姑布子卿(고포자경)이 조간 자를 배견했다. 조간자가 여러 아들을 불러 관상을 보게 했다. 고포자경이 말했다. “장군이 될 사람은 없 습니다“ 그러면 조씨가문이 멸망한다는 말이오? 고포자경이 말했다. 제가 길에서 한 아린아이를 보았습 니다. 아마 그대의 아들이겠지요? 하였다. 조간자가 아들 무휼을 불러다. “이 아드님이 장군감 임니다“
“이 아이의 어미는 미천한 적나라의 婢女(비녀) 출신이요“ 하자 “하늘이 내려주신 인재는 비록 태생이 비 천하다고 할지라도 나중에는 존귀하게 될것이요“하였다. 이후 무휼이 현명하다는 것을 알게 된 간자는 태자 伯魯(백노)를 폐위시키고 무휼을 태자로 삼았다. 진 출공 17년 조간자가 죽자 태자 무휼이 뒤를 이 었다.
제 7대 양자 무휼
양자 원년 월나라가 오나라를 포위했다. 조양자의 누나는 대왕의 부인이다. 기원전 458년 조간자가 죽자 무휼이 아버지의 직위를 받았다. 조양자는 아버지에게 선언했던 대로 가장 먼저 대나라를 공격했다.
조양자는 夏屋山(하옥산)에서 대나라의 왕을 초대했는데 이 자리에서 요리사 犖(락)을 시켜서 구리 국자 로 대나라 왕과 일행들을 때려 죽인 뒤 대나라로 보냈고 결국 대나라는 조양자의 손에 떨어진다. 조양자 는 점령한 대나라를(자신 때문에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난)형 백노의 아들 周(주)에게 위임하니 그가 代 成君(대성군)이다. 조양자의 제위기간은 33년에 달한다. 조양자에겐 아들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조카 주를 후계자로 삼았고. 주가 자신보다 먼저 죽자 주의 아들 완에게 가절을 물려준다. 이 완이 바로 조나라 헌 후로 이후 조나라 군주 자리는 현후의 후손들이 이어간다.
⁂ 죽은 대나라 왕의 부인은 조양자의 누이였은데 남편이 죽자 대나라에 있던 조양자의 누이는 비녀로 자기 목을 찔러 자결했다.⁂
제 8대 환자 가
조양자가 죽자 완이 즉위했다. 그가 조 헌우다. 조 헌우는 어린 나이에 즉위해 治所(치소)를 中牟(중모)에 두었다.
제 9대 헌자 완
조양자의 동생 조 환자가 조 헌우를 내쫓고 대 땅에서 스스로 자리에 올랐으나 1년 만에 죽었다. 백성들 이 조환자의 즉위는 조양자의 뜻이 아니라 여겼다. 함께 조환자의 아들을 죽인 뒤 다시 조헌우를 맞이해 옹립했다. 조헌우 10년 中山國(중산국)의 武公(무공)이 처음으로 즉위했다. 조헌우 13년 平邑(평읍)에 성 을 쌓았다. 조헌우 15년 조 헌우가 죽자 아들 조 열후 적이 즉위했다.
제 1대 열후(BC. ?∼BC. 400)
열후 원년(BC. 408년), 中山 武公(중산 무공)이 삼진을 위협했는데 그중 약체인 조나라를 쳤다. 이에 조 열후는 魏(위)나라의 군주 文侯(문후)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위 문후는 장수 樂羊(악양. 연나라의 명장 樂 毅, 악의 조상)을 보내 조나라를 구했고 중산에게 빼앗긴 땅을 회복했다.
열후 2년(BC. 407년), 위 문후는 악양과 태자 위격(훗날 위 무후)을 보내 중산국을 멸망시켰다. 그 땅은 위나라에서 멀었으므로 조나라에 돌아갔다. 조 열후 6년(BC. 403년), 주 위열왕은 韓(한)나라. 魏(위)나라. 趙(조)나라를 후작으로 봉해 晉(진)나라는 3개로 갈라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한. 위. 조 3국은 삼진으로 불리게 된다. 조 열후는 아버지 조완을 후작으로 추숭하여 조완을 달리 조 헌후라 한다. 조 열후 9년(BC. 400년) 조 열후가 죽었는데 그 아들 조장이 아직 어려서 열후의 동생이 뒤를 이었다. 그가 조 무후이다.
제 2대 무후(BC. ?∼BC. 387)
조완의 아들이며, 조 열후의 동생. 조 경후의 삼촌. 조 무후 13년(BC. 387년), 조 무후가 죽자 사람들은 조 열후의 태자인 조장에게 뒤를 잇게하니 그가 바로 조 경후다.
제 3대 경후(BC. ?∼BC. 375)
조 열후의 아들이며, 조 무후의 조카. 조 성후의 아버지다. 그는 아버지 조 열후가 죽을 때 어려서 숙부 조 무후가 즉위했고 조 무후가 죽자 그 뒤를 조 경후가 이었다. 조 경후 원년,(BC. 386년), 조 무후의 아 들 趙朝(조조)가 모반을 일으켰으나 패배해 魏(위)나라로 달아났다. 이때 위 무후가 그것을 빌미로 출병해 邯鄲(한단)을 쳤으나 위군이 패해 물러났다. 같은 해 도성을 中牟(중모)에서 한단으로 옮겼다.
조 경후 2년(BC. 385년), 조나라는 영구에서 제나라에게 이겼다.
조 경후 11년(BC. 376년), 조 경후 와. 위 무후. 한 애후는 晉 靜公(진 정공)을 축출해 평민으로 만들었 다. 그렇게 하여 공식적으로는 진나라는 멸망했다. 그리고 조. 위. 한이 진나라 땅을 나뉘 가졌다. 같은 해 조 경후가 중산국을 쳤다. 조 경후 12년(BC. 375년), 조 경후가 죽고 아들인 조종이 뒤를 이어니 그 가 조 성후다.
제 4대 성후(BC. ?∼BC. 350)
조 성후 원년(BC. 374년), 公子 勝(공자 승)이 조 성후와 趙侯(조후) 자리를 다투어 반란이 일어났으나 공자 승이 패했다. 성후 3년(BC. 372년), 성후는 衛(위)나라를 쳐서 73개 읍을 얻었다
조 성후 8년(BC. 367년), 조나라는 한나라와 함께 주나라를 둘로 나누었다.(그리하여 동주가 또 다시 동 주(주공이 다스리는 동주와. 서주 주나라 본가). 조 성후 16년, 한, 위 두 나라와 더불어 진나라 영토를 나누어 가지고 晉(진)나라 군주를 端氏(단씨)에 봉했다.
. 성후 21년(BC. 354년) 양 혜왕이 조나라를 치자 조나라의 수도 한단이 포위되었다.
성후 25년(BC. 351년), 성후가 죽고 공자 緤(설)이 태자 어와 군주 자리를 다투다가 설이 실패해 한나라 로 달아났다. 태자 어가 조 성후의 뒤를 이어니 그가 바로 조 숙후다.
제 5대 숙후(BC. ?∼BC. 326)
조 숙우 원년(BC. 349년), 숙우는 晉 靜公(진 정공)을 端氏縣(단씨현)에서 屯留縣(둔류현)으로 옮겼다.
조 숙후 3년(BC. 347년), 조나라의 公子 范(공자 범)이 반란을 일으키고 도성 한단을 습격했다. 조 숙우 는 바로 반란 진압에 나서서 공자 범을 주살했다. 조 숙우 24년(BC. 326년), 조나라. 한나라. 연합군은 위나라의 양동을 포위했다. 조 숙우는 이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조웅이 즉위하니 그가 호복기사를 도입해 조나라의 전성기를 이끈 조 무령왕이다.
제 6대 무령왕(BC. 340∼BC. 295)
조 무령왕 3년, 鄗(고)에 성을 건축했다. 조 무령왕 5년, 한나라 여인을 부인으로 맞이했다. 조 무령왕 11년, 공자 職(직)을 한나라에서 불러들여 燕王(연왕)으로 세우고 樂池(악지)를 시켜 호위하게 했다. 무령 왕은 胡服(호복)을 채택하고 기마전술을 도입하여 군사개혁을 시도해 변방을 개척해 나간 조나라의 중흥 군주다. 호복을 입고 말 타기와 활쏘기를 시행한 덕분에 조나라 한복판에 있던 중산국을 정복하고 임호와 누번을 격파하는 등 국세를 크게 신장시켰다. 중산국이 네 개의 성읍을 바치며 강화를 요청했다.
조 무령왕이 이를 허락하고 군사를 철수 시켰다. 조 무령왕 26년, 다시 중산국을 쳤다. 이로서 탈취한 땅 이 북쪽으로는 연과 대 땅 까지 이르고, 서쪽으로는 雲中(운중)과 九原(구원)까지 이르렀다.
조 무령왕 27년(BC. 299년), 맏아들 章(장)을 안양군으로 책봉하고 아들인 조하에게 양위하며 자신은 主 父(주보)라 칭하니 그가 바로 조 혜문왕이다. 맏아들 조장이 반란을 일어켰다가 패배하고 도망오자 숨겨 주었다가 혜문왕의 군대에게 포위당해 끝내 굶어죽는다.
제 7대 혜문왕(BC. 310∼BC. 266)
혜문왕의 어머니는 吳廣(오광)의 장녀로 孟姚(맹요)라 한다. 무령왕은 그녀를 몹시 총애하여 공자 하를 얻 었다. 맹요를 총애한 나머지 BC. 300년 맹요가 죽은 뒤 이미 태자였던 章(장)을 폐적해버리고 공자 하를 태자로 삼을 정도였다.
BC. 298년 ,무령왕은 중산국을 공략중이던 태자 하에게 양위하고 자신은 主父(주보)를 칭하며 여전히 실 권을 장악하였다.
사구의 난(BC. 296년) 조나라는 중산국을 멸했고 주보는 전 태자 장을 북방의 代(대)땅에 봉하여 안양 군으로 삼았다. 이러한 주보의 호의에 장은 자신이 복위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혜문왕을 죽일 계 책을 세웠다. 이듬해인 BC. 296년 주보는 장의 불만을 알아차리고 장과 혜문왕을 沙丘(사구 .지금 하북 성)의 성으로 불러 주연을 마련해 사이를 풀어주려고 했다. 그러나 이 무렵 장은 병사를 거느리고 혜문왕 을 죽이려 했고 혜문왕은 몇 차례나 달아났는데 이 사이에 왕의 신하들이 병사를 모아 장의 군을 쳐서 격파 한다. 장은 주보의 저택으로 달아나 숨었지만 왕의 병사들은 주보의 저택을 포위해 장을 그곳에서 굶어 죽게 만들었으며 왕의 아버지도 결국은 굶어 죽었다.
제 8대 효성왕(BC. ?∼BC. 245)
조 효성왕 원년(BC. 265년), 秦(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해 세 개의 성을 빼앗았다. 조나라 왕이 막 즉위 했을 때 태후가 정권을 장악했다. 효성왕 2년(BC. 264년), 태후가 죽고 그리고 전단이 조나라의 상국이 되었다.
장평대전--BC. 262년, 한나라의 상당군수 馮亭(풍정)이 조나라에 上黨(상당)을 바쳤는데 그 이유는 진나 라의 공격으로 상당군과 한나라의 연락이 두절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조 효성왕은 좋다고 받아들였으나 平陽君 趙豹(평양군 조표)만 반대했고 平原君 趙勝(평원군 조승)과 趙禹(조우)는 찬성해 풍정의 투항을 받아들여 상당군을 차지해 그곳에 백전노장 廉頗(염파)를 보내 지키게 했다. 염파는 장평에 주둔했다. 진 나라에서는 왕홀을 보내 장평을 공격했으나 그는 염파의 적수가 되지못했다. 이에 진의 상국인 范雎(범 저)가 헛소문을 퍼뜨렸는데 염파는 두렵지 않고 오직 趙奢(조사)의 아들인 趙括(조괄)만 두려워 한다는 내 용이었다. 이에 조 효성왕은 염파가 계속 수비만 하는 것을 답답하게 여겼기 때문에 그 말을 믿고서는 염파의 자리를 조괄에게 맡기려 했다.
이에 인상여와 조괄의 어머니가 말렸다. 그러나 조 효성왕은 끝내 교체를 강행하여 7월에 조괄이 백기에 게 패해 죽고 조나라의 45만 병사는 모두 생매장 당했다. 그러나 범저는 백기가 자신의 상국자리를 대신 차지할 것이 두려워 백기를 회군시켜 조나라는 멸망을 피할 수 있었다. 조 효성왕은 조표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을 후회했다. 조 효성왕 20년(BC 246년), 진 시황이 즉위했고 진양을 빼앗겼다. 조 효성왕 21년 (BC. 245년), 조 효성왕이 죽고 그 아들 조언이 즉위하니 그가 조 도양왕이다. 이때 염파가 위의 번양을 쳐서 차지했을 때 조왕이 樂乘(악승)을 보내 염파를 대신하게 하자 염파는 불복하고 악승을 공격했다. 악 승은 싸움에서 져서 도망치고 염파는 위나라로 망명했다.
제 9대 도양왕(BC. ?∼BC. 236)
조 도양왕 2년(BC. 234년), 李牧(이목)을 장수로 삼아 燕(연)나라의 武遂(무수). 方城(방성)을 점령했다.
조 도양왕 9년(BC. 236년), 진나라가 조나라와 연합하면서 조나라가 연나라를 공격하여 이와 陽城(양성) 을 빼앗았다. 같은 해에 조 도양왕이 창씨에게 반해 왕후로 삼으려 하자 이목이 창후가 한 집안을 어지 럽혔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는데 조 도양왕은 이 간언을 물리치고 창씨를 후궁으로 맞이했다. 창씨의 계략으로 아들 조가를 태자에서 폐하고 창씨의 아들인 조천을 태자로 삼았으며 왕후를 내쫓고 창씨를 왕 후로 삼았다. 얼마 후에 조 도양왕이 세상을 떠나자 그 뒤를 이어 태자 조천이 이어 왕이 되었다.
제 10대 유목왕(BC. 245∼BC. 228)
도양왕의 서자이며, 대왕가의 이복 아우.
조 도양왕과 이미 한 집안을 망하게 한 적이 있는 倡姬(창희)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 때 이목이 반대했 기 때문에 창희와 그 아들 조 유목왕은 싫어하게 되었다. 조 유목왕 2년(BC. 234년), 秦(진)나라의 장수 환의가 조나라의 平陽(평양)과 武城(무성)을 침략하자 조의 장수 扈輒(호첩)이 구원을 나섰으나 패해 죽 었다. 진군은 조군 10만 명을 죽였다. 조 유목왕 7년(BC. 229년), 진나라가 대군을 거느리고 조나라를 쳤다. 이번에는 왕전이 정형구를 쳤다. 이에 이목과 사마상이 맞섰다. 이에 진나라에서는 조 유목왕의 총신인 곽개를 매수해 이목과 사마상이 모반을 한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하니 조 유목왕은 곽개의 말만 듣고 이목과 사마상 대신 趙蔥(조총)과 顔聚(안취)를 세웠다 그리고는 이목을 제거했다.
조 유목왕 8년(BC. 228년), 왕전이 조나라를 사나운 기세로 몰아치니 조군은 패배해 조총은 죽고 안취 는 달아났다. 그리고 조나라의 수도인 邯鄲(한단)을 쳐서 함락시키니 조 유목왕은 투항에 포로가 되었 다. 그리하여 조나라는 멸망했다. 조 유목왕은 온기가 없는 냉방에 감금시켰다. 조 유목왕은 냉방에서 병을 얻고 고통스럽게 17세에 죽었다. 조나라가 멸망하기 직전 국정을 농단해 오던 왕의 어머니 창후와 그 일족들은 조의 대부들에게 살해되었다.
제 11대 대왕(BC. ?∼BC. 222)
조 도양왕의 아들로 본래는 태자였다가 창후가 조 도양왕의 총애를 받자 조가의 어머니와 조가를 헐뜯 었다. 창후가 사람을 시켜 조가에게 죄를 뒤집어 쓰도록 만들고 유혹하면서 조가는 함정에 빠졌다. 결국 조가는 태자에서 폐위되고 창후의 아들인 조천이 태자가 되었다. 조 유목왕 8년(BC. 228년), 秦(진)나라 의 공격으로 조나라의 수도 한단이 함락되면서 조나라가 멸망하자 집안 사람 수백 명을 이끌고 代(대) 지역으로 달아나 왕위에 올랐으며 조나라의 대부들이 조금씩 그에게 돌아오자 연나라의 군사와 합세해 상곡에 주둔하게 했다. 대왕 가 2년(BC. 226년), 진나라가 연나라를 공격해 도읍인 薊(계)를 함락시키고 燕王 喜(연왕 희)와 太子 丹(태자 단)을 추격하자 연왕 희에게 편지를 보내서 태자 단을 죽여 진나라에 바치게 했다.
대왕 가 8년(BC. 222년), 진나라의 장수 王賁(왕분)에게 공격을 받아 조나라(대나라)가 멸망했다.
사료 출처
司馬遷(사마천)의 史記世家(사기세가)와 曾先之(증선지)의 十八史略(십팔사략) 그리고 左丘明(좌구명)의 春秋左傳과 馮夢龍(풍몽룡)의 東周列國志(풍몽룡의 동주열국지)또한 司馬光(사마광)의 資治通鑑(자치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