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여름방학이 되면 엄마는 언니와 내 손을 잡고 외갓집으로 향하셨다. 지금은 사라진 덜컹거리는 통일호 기차를 타고 외갓집으로 가는 길은 늘 신났다. 열차 안에서 먹는 삶은 달걀과 진미오징어 때문이기도 했지만, 외갓집에서 놀 생각 때문이었다. 방학이면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놀러 오는 아이들이 많아 시골 마을은 북적거렸다. 원래 동네에 살던 아이들까지 합세해 시골에서 보내는 여름방학은 놀이동산만큼 신나는 시간을 보장했다. 낮에는 냇가에서 놀고, 저녁이면 숨바꼭질, 신발 숨기기를 하면서 놀았다. 그렇게 나의 여름방학은 즐거운 추억으로 알알이 채워졌다.
외갓집에 가는 기분으로 신나게 한국민속촌으로~
한국민속촌에서 만나는 시골 외갓집 풍경
세월이 흘러 두 딸을 둔 엄마가 됐다. 지금도 나는 여름방학이 되면 아이들의 손을 잡고 친정엄마의 집으로 향한다. 안타깝게도 아이들의 외갓집은 아파트다. 내가 어린 시절 누리던 초록 가득한 추억을 만들기에는 부족한 환경이다. 문득 아이들에게도 내가 즐겼던 신나는 여름날의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서 먼 추억 속의 외갓집 풍경을 찾아냈다. 바로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한국민속촌이다.
[왼쪽/오른쪽]한국민속촌에는 시골 운치가 제대로 살아 있다. / 한복을 입고 한국민속촌을 방문하면 입장료가 할인된다.
한국민속촌 하면 조선시대 무렵의 풍경이 떠오른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민속촌에는 조선시대 각 지방의 가옥을 이건 및 복원한 건축물이 가득하다. 외갓집 풍광을 떠올리기엔 너무 먼 과거로 간 것 같다고? 걱정 마시라. '시골스런' 자연으로 둘러싸인 한국민속촌 일부 공간이 '민속리' 마을로 변신했다. 지금, 민속리 마을을 중심으로 '시골 외갓집의 여름'이라는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왼쪽/오른쪽]스탬프지 들고 '시골 외갓집의 여름' 프로그램 본격 탐험 / 한국민속촌 곳곳이 아이들에게 놀이터가 되어준다.
아이들에게 오늘 한국민속촌에서 물총놀이도 하고 봉숭아물도 들이고 흙놀이도 하며 놀 거라고 설명하자, 아이들은 입구에서부터 흥분 상태. 정문에서 스탬프지를 들고 상가 마을을 거쳐 바로 민속마을로 입성했다. 수박밭을 중심으로 민속리 마을이다. 시골 마을 분위기가 살아 있다. 단순히 풍경만이 아니다. 마을 이장, 부녀회장, 시골 총각, 말숙이, 산지기 등 민속리 캐릭터들이 시골 분위기를 맛있게 살려낸다.
수박 서리하고, 물수제비 던지고, 미꾸라지 잡고~
[왼쪽/오른쪽]수박 서리 도전! / 수박 서리에 성공 못했다면 포토존에서 기념사진이라도~
아이들과 원두막이 있는 수박밭으로 갔다. 이장과 부녀회장이 있는 이곳에서 수박 서리 체험이 진행된다. 수박 서리 체험이라는 글자를 보고 아이들이 묻는다. "엄마, 서리가 뭐예요?" 아!, 아이들은 서리라는 말 자체를 모르는구나. 직접 서리는 안 해봤어도 단어에 익숙한 우리와는 다른 세대의 아이들이다. 서리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주고 아이들에게 '산교육'의 시간을 주기로 한다. 밭에는 진짜 참외, 수박 등이 자라고 있다. 진짜 밭에 있는 수박을 따가는 건 아니다. 모형 수박이 준비되어 있다. 아이가 수박을 살살 들고 도망가니, 부녀회장이 곧 뒤따라온다. 아이는 웃느라 몇 발 못 가 잡히고 만다. 부녀회장에게 혼나면서도 아이는 웃는다. 어린 딸들은 이제 서리라는 단어를 잊지 못할 것이다. 젊은 남자들은 이장과 신나게 잡힐 듯 말듯 달리기를 한다. 뛰는 사람들은 땀이 비 오듯 쏟아지지만 구경꾼들은 그저 재미있다.
웃음 가득한 민속노래자랑
한바탕 수박 서리 체험이 벌어진 후, 오후 3시 30분이 되자 수박밭 원두막 앞에서는 민속노래자랑이 펼쳐진다. 반짝이 의상을 입은 민속리 대표 꽃미남 춘삼이가 사회를 맡고 이장이 심사를 맡는다. 그리고 부채 장수, 시골 총각, 산지기, 말숙이(장사꾼, 부녀회장, 광년이)가 차례로 나와 재미나게 노래 솜씨를 뽐낸다. 무더위 속에서도 관객들은 부채질을 하며 노래자랑을 구경한다. 웃느라 잠시 무더위도 잊는다. 아이들은 "엄마, 저 사람들 진짜 여기 사는 사람들이에요?" 하고 묻는다. 그 정도로 캐릭터들의 연기력이 뛰어나다. 마치 정말 민속리 마을에 놀러 온 것처럼, 원래 이 동네 사람들인 것처럼 그 상황에 빠져들게 된다. 공연이 끝난 후에는 수박을 잘게 잘라 관객들에게 나눠주기도 한다. 정말 시골 인심이다. 작은 수박 한 조각이 꿀맛처럼 아주 달콤하다.
[왼쪽/오른쪽]"저 미꾸라지 잡았어요!" / 아빠들이 더 좋아하는 물수제비 체험
더울 땐 물놀이가 최고인 법. 수박밭 옆에는 물놀이장이 마련되어 있다. 황톳물에 미꾸라지들이 꾸물꾸물 헤엄치고 있다. 작은딸이 미꾸라지를 잡아보겠다며 도전장을 내민다. 잡힐 듯 미끌미끌 도망가는 미꾸라지가 아이 속을 태운다. 아이는 금방 잡을 것 같았는데 의외로 쏙쏙 잘도 달아나는 미꾸라지를 얄미운 듯 몇 번 노려본다. 그러더니 결국 미꾸라지를 손에 쏙 잡았다. 엄마, 아빠한테 자랑하는 순간, 미꾸라지는 금세 또 쑥 빠져나가 버린다.
요즈음 아이들에게는 낯선 물 펌프질도 해보고 고무신 던지기 놀이도 해본다. 냇가에 가서 물수제비 던지기도 한다. 옛날 추억에 젖은 엄마 아빠들이 더 열심이다. 왕년에 물수제비 좀 던졌다며 아이들 앞에서 '폼나게' 돌을 던지는 아빠들. 돌멩이가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물을 가르고 나갈수록 의기양양해진다. 아이들에게 노하우를 전수하며 냇가에서 시원한 한때를 보낸다.
[왼쪽/오른쪽]대나무로 물총을 만들어요! / 개울에서 대나무 물총에 물을 채워서 발사~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아이템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대나무 물총. 엄마 아빠에게도 다소 낯선 아이템이다. 천연대나무로 물총을 만든다는 게 신기하다. 대나무 물총 만들기 체험은 유료(4,000원)로 진행된다. 마음에 드는 대나무를 골라 직접 사포질을 하고 밀대에 헝겊을 감아 대나무 물총을 완성한다. 아이들은 물총이 완성되자마자 바로 앞 개울에서 물을 담는다. 그러고는 발사. 의외로 시원하게 물이 나간다. 물을 담고 쏘고, 한참 신나게 논다. 매주 토요일에는 대나무 물총 싸움도 벌어지니, 이때를 맞춰 가면 좋다. 단, 물총 싸움에 참여하면 옷과 신발이 젖을 수 있다는 점은 미리 참고하자.
첫눈 올 때까지 봉숭아물이 남아 있을까?
한국민속촌에서 채취한 봉숭아로 손톱을 예쁘게 물들일 수 있다.
물가에서 놀았으니 이제 산에서도 놀아보자. 산지기의 산촌 마을에는 친환경 소재를 활용한 자연 놀이터가 마련되어 있다. 산촌 마을로 향하는 길, 봉숭아 물들이기 체험 코너가 보인다. 여자아이들이라 큰 관심을 보이며 내 손을 이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어릴 때 외갓집에 가면 꼭 양손 모두 봉숭아물을 들이곤 했다. 봉숭아꽃과 잎을 따서 외할머니에게 가져가면 곱게 빻아 백반을 넣고 손가락 위에 예쁘게 올려주곤 하셨다. 그때만 해도 랩이나 비닐 팩이 귀해서 라면 봉지나 검은 비닐봉지를 잘라서 손가락마다 감싸뒀던 기억이 난다. 진하게 물들라고 비닐을 둘둘 만 채 잠자리에 들곤 했다. 자고 일어나면 비닐이 대부분 빠져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 추억을 더듬으며 아이들의 손에 봉숭아물을 들여준다.
봉숭아물 들이고 기분 좋게 '브이~'
민속촌에서 채취한 봉숭아꽃과 잎을 사용한단다. 하나 아쉬운 점은 아이들이 직접 뜯어오거나 빻거나 할 기회가 없다. 어쨌든 아이들은 봉숭아물을 들인다는 자체로 한껏 들떴다. 체험료는 손가락 2개에 2000원이다. 양손에 하나씩만 들이기는 아쉬워서 양손에 2개씩 하기로 한다. 어느 손가락을 할까 고심하더니, 'V'자를 만들 때 쓰는 검지와 중지에 물을 들이기로 한다. 예쁘게 봉숭아를 올리고 비닐을 씌우고 실을 감는다. 혹시라도 비닐이 빠질까 아이들의 손놀림이 어색하리만큼 조심스러워진다. 그 옛날 외할머니가 내게 그랬듯, 내가 아이들에게 말한다. "첫눈 내릴 때까지 봉숭아물이 남아 있으면 좋은 일이 생길 거야."
[왼쪽/오른쪽]시원한 산속에 마련된 산촌 마을 놀이터 / 맨발로 황톳길도 걸어본다.
봉숭아물을 들인 손가락을 조심히 움직이며 산촌 마을로 올라가 본다. 산지기랑 이런저런 자연 탐구도 해보고 놀이도 즐긴다. 또 맨발 황톳길 산책로가 있어 아이들이 '좋아라' 한다. 흙길을 보자마자 신발을 벗어들고는 걷는다. 역시 어른들보다 과감하다. 맨발에 닿는 흙의 촉감이 시원하고 좋단다. 흙을 밟고 놀 일이 별로 없는 아이들에게는 이 순간마저 소중한 경험이 된다. 길 양쪽에는 발 씻는 곳도 마련되어 있다.
천연 재료를 사용한 음식과 직접 빚은 술
[왼쪽/오른쪽]체험 중 스탬프 찍기도 잊지 마세요~ / 내 손으로 만드는 단소
체험하고 스탬프 찍고 놀다 보면 시간이 빨리도 흘러간다. 놀다가 출출해지면 민속촌 안쪽의 장터를 이용하자. 배고프다며 빨리 장터로 가자고 재촉하던 아이들은 길목에 있는 단소 만들기 체험 코너 앞에 또 서고 만다. 단소를 직접 만들고 소리 내는 법도 알려주는 체험 코너다. 어느 정도 완성된 단소에 아이들이 직접 구멍마다 사포질을 하고 내부 청소를 한다. 엄마 아빠랑 함께 줄을 감는 체험까지 해본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단소 소리 내는 방법을 알려준다. 소리를 열 번씩 내면 단소에 이름을 새겨준다는 단소 선생님의 제안에 아이들은 열과 성을 다해 단소 소리를 낸다. 그리고 드디어 본인의 이름을 새긴 단소를 손에 넣는다.
전통 방식으로 제대로 만든 먹거리도 맛보자.
단소를 불며 장터에 도착한다. 큰 천막이 드리워진 모습이 진짜 옛날 장터 분위기다. 장터에는 어른과 아이 모두를 위한 메뉴가 준비되어 있다. 잔치국수, 해물파전, 장국밥, 잡채밥, 전통순대 등 메뉴가 다양하다. 이런 관광지의 음식은 '비싸기만 하고 질은 별로'라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한국민속촌 장터는 달랐다. 화학조미료 대신 천연의 재료로 맛을 내기 때문에 아이들과 먹기에도 부담이 없다. 인절미는 직접 떡을 쳐서 만들고, 콩고물도 인공적인 단맛을 배제하고 소금으로 간을 한다. 동동주와 막걸리도 제대로다. 한국민속촌 안에 있는 양조장에서 직접 빚는 술이다. 전통문화 체험이라는 한국민속촌의 큰 흐름이 음식 코너인 장터에까지 고스란히 적용되고 있다. 아이들과 놀면서 즐거웠던 마음이 음식을 먹으면서도 고스란히 유지된다.
아이들에게 정겨운 여름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어 떠났던 한국민속촌에서 엄마 아빠가 더 큰 추억을 안고 온 듯하다. 아이들은 손톱에 곱게 내려앉은 봉숭아물과 대찬 대나무 물총을 품고, 비록 아파트촌에서이지만 '시골스럽게' 남은 여름을 보낼 터다.
여행정보
- 주소 :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민속촌로 90
- 문의 : 031-288-0000
- '시골 외갓집의 여름' 일정 : 6월 24일~8월 27일
주변 음식점
- 동화가든짬뽕순두부 : 짬뽕순두부 / 기흥구 용구대로 1998 / 031-282-3661
- 하이드파크 : 파스타, 스테이크, 피자 / 기흥구 백남준로 7 / 031-286-8584
- 두부마당 민속촌 : 두부전골, 두부보쌈 / 기흥구 민속촌로 75 / 031-285-4893
숙소
- 효종당 : 기흥구 동백8로113번길 64 / 010-9281-8444 / 한옥스테이
- 송담고택 : 처인구 이동면 어진로 780 / 010-5341-6962 / 한옥스테이
- SR디자인호텔 : 처인구 금령로90번길 5 / 031-338-9401 / 굿스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