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지원의 꽃시계
가을의 길목에서
숙지원은 광주에 비해 봄은 열흘쯤 늦고 가을은 열흘쯤 빨리 온다.
한 겨울 기온도 광주에 비해 섭씨 2,3도가 낮은 편이고, 같은 남평이라도 읍내와 상당한 차이가 난다.
읍내에 비해 해발 고도가 높고 또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 때문일 것이다.
한가위 달이 기울면서 밤으로는 선선한 바람이 불더니 어젯밤 비가 온 탓인지 오늘 아침 바람은 서늘하여 완연한 가을 느낌 그대로다.
동편 산자락 철쭉길 앞 쪽에는 붉은 꽃무릇이 새로운 계절을 알리고 있다.
잎이 지면 꽃이 피고 꽃이 지면 잎이 나오는 그래서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한다하여 상사화라고도 한다던가.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다는 붉게 핀 꽃무릇의 애틋한 전설이 짙은 여운을 남기는 까닭은 꽃무릇이 가을로 가는 길목에 서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 두 뿌리 옮겨 심은 꽃무릇이 제법 꽃밭을 이루었다. 철모르는 수레국화가 피어 어울리는 모습도 이채롭다.)
숙지원의 꽃들을 보면 연필로 선을 긋듯 날자와 시간에 맞추어 한 종류의 꽃이 진 후에 다른 종류의 꽃이 피는 모양새가 아니다. 꽃이 피는 시기는 조금 빠르고 늦을 뿐 상당기간 앞에 핀 꽃과 뒤에 핀 꽃이 공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직 숙지원에는 여름에 피기 시작한 달리아 백일홍 멜란포디움 파라솔 과꽃 분꽃 봉숭아 담배꽃 종이꽃 등이 남아 있다.
그런데 가을을 재촉하는 꽃무릇이 보이다니!
붙잡아도 가는 세월을 막을 수 없는 법, 꽃무릇을 보니 나도 모르게 “벌써…!”라는 혼잣말이 가만히 나왔다.
(달리아는 아내의 추억 속에 남은 꽃이다. 어렵게 구했는데 간수를 잘 못해 겨우 한뿌리만 살렸다. 그런데 한 뿌리에서 크기가 다른 색색의 꽃이 나왔다.)
아내는 달리아 꽃을 꺾어 화병에 꽂는다.
어렵게 구하고 어렵게 살린 귀한 꽃이다.
바람에 쓰러지는 것을 막는다면서 집으로 들어오는 길목 작은 정원의 소나무 사이에 심었더니 여름내 지치지 않고 꽃을 피웠다.
그런데 하나의 투박한 뿌리에서 어떻게 그렇게 다양한 색상의 꽃들이 나올 수 있는지.
여름부터 지금까지 지치지 않고 새로운 꽃들을 선보이는 달리아는 경이요 감동이었다.
아직도 성성한 달리아는 가을을 거부한다.
오래도록 볼 수 있기를 바라지만 그러나 그건 사람의 욕심일 뿐, 달리아 역시 오는 가을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서리가 내리면 붉은 매화부터 시작한 숙지원의 화려한 꽃 잔치가 끝날 것이다.
계절의 순서에 맞추어 소리 없이 피었다가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내주고 숨어버리는 꽃들을 보는 동안 나는 시간의 흐름을 의식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덧 가을바람이라니.
수선화 물망초 이름도 생소한 아이리스 디기탈리스 ….
그리고 코끝이 시린 청매화, 눈이 시원한 자두꽃, 맑은 연분홍 복숭아꽃….
지나간 계절의 꽃들이 기억의 주름에 접힌 한 폭의 그림으로 남을 것이다.
(대문 쪽의 풍경. 아직은 잔디가 듬성인다. 길가에는 멜란포디움 과꽃 족두리꽃 채송화 봉숭아 제라늄이 심어져 있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이란 꽃시계와 함께 사는 삶이기도 하다.
꽃시계와 함께 가는 길에도 기다림이 있고 이산가족 상봉하듯 만남이 있고 조용한 헤어짐이 있지만 그러나 다툼도 원망도 없는 세월의 무게가 버겁지 않은 삶이다.
거울 같은 호수 위를 나는 세처럼 자연의 시계에 맞추어 오는 듯 가는 듯 피고 지는 꽃들을 보는 시간은 적잖은 복일 것이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키고 과일전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고 했다. 모과는 설탕에 재여 차로 먹는다는데 향이 좋고 목감기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아직 덜익었지만 모양이 재미있다.)
고개를 돌리니 감나무와 모과나무 잎들은 거의 낙엽이 되었다.
고추를 말리고 참깨를 털던 때가 불과 한 달 전인데 그 사이 계절이 바뀐 탓인지 아득한 한참 오래전의 일처럼 느껴진다.
저녁을 먹고 바깥 탁자에 나갔더니 서늘한 기운이 몸을 휘감는다.
그래도 파란 빛을 깜박이며 숙지원 잔디밭 위를 유성처럼 나는 반딧불이가 반가워 한참을 앉아 있었다.
얼마 후면 숙지원의 꽃시계도 잠들 것이다.
반딧불이도 숨을 곳을 찾을 것이다.
하늘의 별자리가 바뀌고 이내 하얀 눈이 숙지원을 덮을 것이다.
나는 어디로 가는가?
7궁금해진다.
2013.9.25.
첫댓글 아름다운 자연입니다. 계절의 변화 속에서 꽃이 피고 지는 풍경을 보면서 삶을 되돌아 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