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曠野)미드바르Midbar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면하신 ‘광야’는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가? 성경에서 광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 용어이다. 광야는 물리적 지리적으로 인간의 생존을 고통스럽게 하는 척박하고 열악한 장소이다. 마실 물과 먹을 것을 구하기 어렵고 기온도 걷잡을 수 없다. 해로운 동물과 같은 인간의 습격도 당할 수 있어 죽음의 위협이 있는 두려운 곳이다. 다른 한편은 영적 정신적으로 참된 하느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고 성장하며 완성을 향해 가는 여정이다. 이러한 전형을 이미 우리보다 앞서 살아간 모든 인류의 조상들 특히 구약의 이스라엘이 보여주었다. 광야 여정 중 갈증과 배고픔 앞에서의 처신(탈출 15,22-17,7), 우상숭배(탈출 32장;민수25장),권력과 명예를 두고 다투는 모습 등으로(민수 12,1~16;14장;16-17장;21장).
우리 말 광야는 황무지, 거친 땅, 거친 들, 불모지, 사막으로 성경의 광야와는 한참 동떨어진 뜻이다. 한자어 광야曠野 (넓을광 들야曠野)로 아득하게 너른 들 광원이라고도 한다.(廣原). 성경 언어와 일맥상통한다. 히브리어로 광야는 ‘미드바르Midbar’인데, ‘mi’와 ‘다바르dabar’의 합성어이다. 다바르dabar는 ‘말씀’이라는 뜻이다. 히브리어에서 ‘mi’는 그 단어가 이루어지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광야미드바르Midbar’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곳을 의미한다. 압권이다. 더 이상 구구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몇 줄 보탠다면, ‘곳’이란 말은 시간 장소 관계를 다 포함하는 여정을 뜻할 것이다.(미드바르의 뜻: 인터넷, 바이블 오디세이, 강준식, 광야로 가자, 발췌함).
이 말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구약성경 오경중 민수기가 생각이 난다. 히브리어 민수기는 제목은 ‘수를 세다’가 아니라 ‘광야에서’라고 한다. 이스라엘의 광야는 어디서 어디까지일까? 좁은 의미에서 탈출기 시나이산에서 계약을 받고 출발하여, 모세가 세 차례 율법 강조 교육을 실시한 모압 평원을 거쳐, 여호수아가 가까스로 정복하여 입주한 가나안 땅까지를 말하는가? (탈출 15,22~여호 12,23). 신명기는 광야의 지평에 대해 더 광범위한 정보를 제시한다. “저희 조상은 떠돌아다니는 아람인이었습니다. 그는 몇 안 되는 사람들과 이집트로 내려가 이방인으로 살다가, 거기에서 크고 강하고 수가 많은 민족이 되었습니다.”(신명 26,5). 그들은 원래 ‘히브리인’, 그 말의 뜻은 소수의 무리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무리였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중에 여기 포함되지 않는 인종과 무리는 어디 있을까?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것을 통찰해 낸 그리스도교는 인간은 세상에 한 번 왔다가는 ‘떠돌이 나그네’라고도 한다.
떠돌이 나그네인 인간이 사람이 살아가면서 직면하는 가장 큰 유혹은 무엇보다 먹는 것이다. 즉 밥과 물이다. 그러나 인간은 빵만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가고 마지막에는 모두 말씀을 이뤄내야 하는 사명의 존재이다. 말씀을 우선하고 앞세우며 살아갈 때 빵은 뒤따른다. 말씀은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은 어떠한 형상과 실체로 당신을 드러내시는 분이 아니라 그저 말씀으로 당신을 드러내셨다. 이 말씀을 제대로 온전히 살아간다면 그릇된 우상숭배가 참되고 신실한 하느님 경외가 이루어진다. 하느님의 개입과 도우심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해당 복음 본문(루카 4,1~13)에서 왜 가장 먼저 말씀을 제시하는지 알 것 같다.
광야는 인생과 신앙을 교육받고 훈련받는 여정이다. 우리를 광야로 초대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신뢰하며 믿는 법 사는 법을 가르치시며 배우기를 원하신다. 넘어지고 깨어지고 일어나기도 하며, 거역하기도 순종하기도 하는 나약한 인간의 앞, 옆, 뒤에 변함없이 항상 같은 모습과 사랑으로.
입력:최 마리 에스텔 수녀/2025년 3월 9일 2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