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敦煌本 六祖壇經 – 性徹 註釋』
松溪 小註
돈황본 육조단경 성철 주석 송계 소주
松溪 朴 喜 鎔
1. 2021. 2. 10.
제1편 壇經指針 단경지침
3. 唯傳頓法 유전돈법
法無頓漸 人有利鈍 迷卽漸契 悟人頓修 識自本心 是見本性 悟卽元無差別 [敦煌本 295]
법무돈점 인유이둔 미즉점계 오인돈수 식자본심 시견본성 오즉원무차별
법에는 '돈'과 '점'의 구별이 없으나 사람에게는 영리함과 우둔함이 있으니, 미혹하면 차츰차츰 계합하고 깨친 이는 단박에 닦느니라.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아는 것이 바로 본래 성품을 보는 것이니, 깨치면 원래로 차별이 없느니라.
2. 서기 2021년 단기 4354년 불기 2565년 2월 13일
請大師의 不立은 如何오 大師言하되 自性은 無非無亂無痴하야 念念般若觀照하야 常離法相하니 有何可立고 自性頓修하니 立有漸이라 此所以不立이니라 [敦煌本 338]
청대사 불립여하 대사언 자성무비무란무치 염염반야관조 상리법상 유하가립 자성돈수 립유점 차소이불립
"청하오니 대사의 세우지 않는다[不立] 하심은 어떤 것입니까?"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자성은 잘못도 없고 어지러움도 없으며 어리석음도 없어서 생각 생각이 반야 지혜로 관조하여 항상 법의 모양을 떠났으니 무엇을 가히세우리오. 자성은 단박에 닦는 것이니 세우면 점차가 있으므로 세우지 않느니라."
[성철 주석] 식심 ㆍ견성 , 대오, 돈오는 원래 묘각인 내외명철을 내용으로 한다. 그리하여 삼현(三賢), 십성(十聖)을 뛰어넘었으므로 돈오돈수라 하였으니, 이것이 육조선(六祖禪)의 근본사상이다. 그러므로 돈법, 돈교로 일체의 점문(漸門)을 배제한 것이다.
[송계무학 주석] 삼현과 십성을 뛰어넘는다는 불립문자 禪의 경지를 감히 알지못하는 일개 寒士로서 돈황본 육조단경 한 구절을 베껴 세상에 펴는 것도 한 개 조약돌 같은 공덕이 아니겠는가.
육조혜능은 홀어미를 모시며 사는 나무꾼이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어느 시 문득 금강경을 듣고 한 소식 깨친 다음에 검은머리 이고 홍인대사를 찾아가 여덟 달 동안 방아찧기 등 잡일을 하며 틈틈이 깨친 바를 질의 응답을 한 끝에 오조홍인으로부터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의발을 물려받았다고 한다. 소문이 나면, 수십 년 공부한 승려들이 떼로 몰려와 의발을 빼앗으려고 하기 때문에.
이후 정식으로 삭발하고 승려가 되어 용맹정진하며 크게 남종선풍을 일으켰다고 한다.
혜능, 그만한 근기를 가진 분들이야 돈오돈수, 한 순간에 깨치고 닦아버리지만, 나와 같은 둔재는 점오점수, 한 평생토록 모래알 한개 정도로 깨치고 깨쳐 쌓고 쌓노라면 개미굴 하나 정도는 이루지 못할 것인가!
그리하여 삼현 십성은 감히 따지못할 하늘 복숭아처럼 높고도 귀하신 분들이지만, 그들의 그늘 아래에서 안빈낙도하는 한 필부로 편안하게 살다 갈 수 있지 않으랴.
세상엔 천재가 있다. 그러나 범재들이 더 많다. 천재들은 세상의 기둥이지만 범재들은 모래, 흙, 자갈, 나무, 못, 등 등 온갖 재료가 되어 기둥과 기둥을 이어서 한 채의 집, 세상이 되도록 한다.
오늘 날의 불교는 교종은 미미하고 선종은 도도하다. 그리하여 웬만한 절마다 선방이 있어 많은 선객들이 참선 중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과 용수, 마명, 무착, 세친, 적천, 법칭, 달마, 유마 등 기라성 같은 승려들이 불법을 세웠다.
그들의 깨달음이 들어있는 곳이 불경이다. 그러니 어찌 불경 공부를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교종 역시 불법의 큰 맥이 아닐 수 있겠는가.
불립문자 선의 경지는 돈오돈수도 있지만 점오점수도 있다. 또한 돈오점수도 있고 점오돈수도 있다.
그러므로 불립문자란 말을 감히 함부로 써선 안 된다. 禪이 나태의 위장이나 보호가 되어선 안 되고, 하안거 동안거가 혹서와 혹한을 피하는 무위도식이어선 안 된다.
禪을 이루어서 무엇하려는가. 내 마음의 위안만족인가, 내가 도통한 고승이라는 자만인가, 종정이나 조실이 되는 통로인가.
원효의 끝은 저자거리에서 민중들과 섞여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는 일상이었다. 유마거사는 시장에 장사꾼이었다. 효봉의 끝은 머리 기르고 저 북쪽 끄트머리 삼수에서 여자와 함께 서당훈장으로 살다 갔다.
수만 권의 불경을 읽는다고 도를 깨치지는 못한다. 그러나 도가 무엇인지 어디있는지 어렴풋이 안다.
고승들이 불립문자를 말한 뜻은 문자에만 얽매인 좁은 마음에서 자맥질하지 말란 뜻이지, 불경 공부를 폐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혜능이 돈오돈수 할 수 있었던 바탕은 이미 금강경을 들어 깊이 느낀 상태에서, 읽지는 못하지만 귀로 들은 홍인스님의 법어를 방아찧기 등 고된 잡일을 하면서도 그 뜻을 속으로 소화시켰기 때문이다. 혜능의 돈오돈수는 한 순간이었지만, 층층켜켜로 쌓인 물이 한 순간에 둑을 터뜨리듯이 온갖 일을 하면서 오래동안 쌓은 점오점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은 교이고 마음은 선이라 한다. 말씀과 마음이 어찌 다를 것인가. 그러므로 교는 선에 이르는 길이요 선은 교의 길을 비추는 등불이다.
한국불교가 구태의연의 허물을 벗고 싱싱한 새 몸으로 다시 세상에 나서는 방법 중에 하나가 마음과 말씀의 합치, 교와 선의 조화이다.
특히 불법에 뿌리를 둔 각종 종파들은 불경을 자의로 해석하여 차별성을 강조하기 보다는 불법의 근본을 분명하게 밝히면서 응용에 차이를 두어야 할 것이다.
불법은 광대무변하다. 불경은 석가모니 한 사랑의 공덕이 아니라 대하장강에 모여드는 수많은 지류처럼 용수와 마명 등 수많은 선지식들의 공덕이 쌓인 지혜의 서고이다.
또한 석가모니 역시 많은 부처 중의 하나이다. 그보다 앞서 여러 부처들이 있었고, 미륵불은 몇 겁 후에 현현한다고 한다.
즉 불법은 찰흙과 같아서 관심을 갖는 사람마다 저마다의 형상을 짓도록 한다. 그중에서도 공덕이 높은 이들은 다양한 모양의 부처를 마음의 바탕 위에 짓는다.
수많은 선지식들이 저마다의 부처를 지었다. 19세기에 강증산과 박중빈이가 지은 부처의 세계가 특별하지만, 그것도 불법의 큰 틀 안에서 지어져야 할 것이다.
불법은 우주를 관통한다. 불법은 우주를 물질과 정신으로 이분하지 않고 일체로 한다. 장차 보편적 지식과 지혜가 극에 달한 인류 정신의 질문에 명료하게 답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禪의 외피를 입은 불법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