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의 모든 시조 : 진순분 시인 ♣
-2020년 3월 7일 토요일-
공생
팽나무 우듬지에 조롱조롱 열린 열매
곤줄박이 배 채우고 겨우살이 발이 언다
세차게 바람 불 때마다 더부살이 흔들린다
한파를 견디려면 나에게 기대려무나
무채색 산과 들에 혼자 푸른 나무로
봄이면 겨울 눈 틔어 활짝 꽃 피우거라
어차피 내 몸에 물관 체관 뿌리내리니
의붓자식 네게도 젖 한 모금 물리고
한겨울 어미 가슴에 너를 꼭 안고 가마
궤나
온몸 다 부서져도 정강이뼈만 남아서
살아선 잊지 못해 가슴에 품고 가다
때때로 울고 싶은 날 그를 꺼내 불어본다
희망은 오지 않아도 날마다 기다리듯
차마 말 못 할 그리움도 만조일 때
피맺힌 속울음 터져 울리는 피리 소리
가끔씩 정강이뼈 아프게 시릴 적마다
그도 나를 꺼내 애절히 부나 보다
눈물 빛 시공을 넘어 사무치게 부나 보다
피리
그로 인해 내 눈멀고
그로 인해 내 귀먹고
단 하나 가슴의 문
환하게 열려 와서
아프게
갈비뼈 마디마디
피리 소리로 웁니다
순간의 꽃
한때는 다가와 환하게 피던 꽃이
스치는 바람결에 무심히 집니다
갑자기 별이 된 이름 우두망찰 부릅니다
절망도 슬픔도 울음 삼킨 말없음표
다시금 쓰러졌다가 아프게 일어서는
갈대는 세찬 바람에 한 뼘 키 자랍니다
바라보던 그 산 능선 물빛 그대로 일뿐
꿈길로도 뵈지 않는 그 모습 아득합니다
타오른 한순간의 꽃 영영 오지 않습니다
♠ 나누기 ♠
진순분은 경기도 수원 출생으로 1990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으로 등단했습니다. 시조집으로『안개꽃 은유』『시간의 세포』『바람의 뼈를 읽다』『블루 마운틴』(현대시조 100인선) 『익명의 첫 숨』등이 있습니다. 네 편의 시조를 소개합니다.
「공생」은 진중한 작품입니다. 팽나무는 낙엽활엽교목으로 열매는 둥글고서 약간 붉은색이 강한 노란색이고 시월에 여물며 과육은 달고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 팽나무 우듬지에 조롱조롱 열린 열매를 곤줄박이가 배를 채우고 겨우살이는 발이 업니다. 세찬 바람이 불 때마다 더부살이는 흔들립니다. 팽나무는 한파를 견디려면 나에게 기대라고 하면서 무채색 산과 들에 혼자 푸른 나무로 봄이면 겨울 눈 틔어 활짝 꽃 피우거라, 하고 겨우살이에게 따뜻한 말을 건넵니다. 어차피 내 몸에 물관과 체관을 뿌리내리니 의붓자식 네게도 젖 한 모금 물리겠다고, 한겨울 어미 가슴에 너를 꼭 안고 가겠다는 말을 덧붙입니다. 참 눈물 나게도 정겨운 속삭임입니다. 얹혀사는 것에 대한 한 마디의 불평도 없이 이렇듯 자상하게 사랑을 베푸는 모습에서 상생의 온정을 깊이 느낍니다. 더불어 살아야 함을 절감합니다. 내가 손해를 보고 귀찮더라도 온기와 물과 영양을 나누는 일이 진정 제대로 된 삶이 아닐까요? 「공생」은 그런 점에서 좋은 시조입니다.
「궤나」는 애절하군요. 궤나는 사람의 정강이뼈로 만든 악기입니다. 슬픈 전설이 전해오고 있지요. 온몸이 다 부서져도 정강이뼈만 남아서 살아서는 잊지 못해 가슴에 품고 가다가 때때로 울고 싶은 날 그를 꺼내 불어봅니다. 진정 살면서 때로 소리내어 울고 싶을 때가 있지요. 누가 보는 앞에서는 차마 울지 못하여 혼자 골방에 들어앉아 소리죽여 울기도 합니다. 애환 많은 세상에 울음만큼 속 시원한 해소의 방안도 없지요. 희망은 오지 않아도 날마다 기다리듯 차마 말 못 할 그리움도 만조일 때 피맺힌 속울음 터져 울리는 피리 소리는 그래서 더욱 애잔합니다. 화자는 가끔씩 정강이뼈 아프게 시릴 적마다 그도 나를 꺼내 애절히 불고 있는 것을 감지합니다. 눈물 빛 시공을 넘어 사무치게 부는 궤나 가락을 들으며, 나를 향한 변함없는 그의 사랑을 떠올립니다.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단시조 「피리」는 「궤나」와 함께 읽어야 하겠습니다. 그로 인해 내 눈이 멀고 그로 인해 내 귀가 먹어 버렸습니다. 그때 단 하나 가슴의 문이 환하게 열려 와서 아프게 갈비뼈 마디마디 피리 소리로 우는 것을 듣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눈이 멀고 그로 말미암아 귀가 먹어버린 지독한 열병의 젊음을, 사랑의 가없음을 맛보지 않은 이가 누가 있을까요? 죽음보다 끔찍했던 애증의 나날을 때로 캄캄한 흑암 속을, 때로는 눈부신 꽃길을 걷기도 했지요. 우리 몸이 악기이기도 하지만, 특별히 제작된 악기는 사람의 영혼을 울립니다. 갈비뼈 마디마디 피리 소리를 울음 웁니다.
「순간의 꽃」을 읽으며, 꽃은 실로 순간의 미학임을 절감합니다. 한때는 다가와 환하게 피던 꽃이 스치는 바람결에 무심히 집니다. 그때 갑자기 별이 된 이름을 우두망찰 부릅니다. 절망도 슬픔도 울음 삼킨 말없음표여서 다시금 쓰러졌다가 아프게 일어서는 갈대는 세찬 바람에 한 뼘 키가 자랍니다. 바라보던 그 산 능선과 물빛 은 그대로 일뿐 꿈길로도 뵈지 않는 그 모습이 아득하여서 타오른 한순간의 꽃이 영영 오지 않는 것을 아프게 그리고 있군요. 함께 살다가 별안간, 별이 된 이름을 우리는 숱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어느 순간, 문득 별이 될지도 모릅니다. 별보다는 지상의 한 포기 풀꽃이 더 낫지요. 땅에 발 딛고 사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생생히 느끼는 요즘, 영원의 꽃을 꿈꾸었으면 합니다.
내 안에 들어오지 않는 시적 의미는 잡을 수 없는 안개의 입자와 같습니다. 그럴 때면 나는 항상 안개 속에 서 있는 느낌입니다. 진순분 시인이 지난 해 상재한 시조집『익명의 첫 숨』산문에 나오는 말입니다. 어김없이 하루가 밝아왔습니다. 설렘을 안고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2020년 3월 7일 <세모시> 이정환
첫댓글 좋은 시에 머물다 갑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