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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진도 8코스 제2부
돈지백구문화센터-삼별초궁녀둠벙-만길재-
만길리경로당-원두리마을회관-송정저수지
20230305
1.코스 소개(두루누비)
1)코스개요
- 진도의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남도의 민속, 문화, 예술의 혼이 남아있는 코스
- 길이 22.8km, 소요시간 7시간 30분, 난도 어려움
2)관광포인트
- 해송이 어우러진 바닷가에서 조개잡이, 개매기체험을 즐길 수 있는 '죽림어촌체험마을'
- 국악 연구와 보급에 앞장서며 공연, 교육, 체험 등 진행하는 '국립남도국악원'
3)여행정보(주의사항)
- 시점 :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110-1 운림산방주차장
대중교통) 진도공용터미널에서 사천-쌍계사 방면 버스 승차 '운림산방, 첨찰산'정류장 하차
- 종점 : 진도군 임회면 상만리 1370 국립남도국악원
대중교통) 진도공용터미널에서 농어촌 탑립-죽림 버스 이용, 귀성리 하차 도보 680m
- 진도신비의바닷길이 열리는 시기에는 다양한 체험행사와 축제가 개최됨
- 군립민속예술단이 펼치는 민속공연 볼 수 있음
- 주요 경로 : 운림산방주차장 1.0Km 삼별초공원 10.0Km 송정지 10.5Km 아리랑마을관광지 입구 1.3Km 귀성삼거리
2.아침에는 '운명의 힘' 같은 건 없다
제2부 : 진도군 의신면 돈지리 돈지백구문화센터는 가로등 불빛으로 환하게 빛난다. 탐방객은 백구문화센터 앞쪽에 조성된 '돌아온 백구기념비'와 '돌아온 백구상'만을 살폈다. 날이 밝았었다면 이들 뒤쪽으로 가 보았을텐데, 어둠이 꽉 들어차 있는 이들 뒤 빈터에 다른 조성물들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하여 앞쪽만을 살피고 돈지백구문화센터를 떠난다. 돈지마을 앞에는 드넓은 간척농지가 펼쳐져 있다. 이 들판을 평지들이라 이르는 듯하다. 서해랑길은 이 평지들을 가로질러 돈지마을 서쪽으로 돌아 동쪽에서 흘러오는 의신천을 건너 철마산 자락의 의신천 남쪽에 있는 삼별초 궁녀둠벙으로 이어간다. 돈지리 일대 들녘은 삼별초와 여몽연합군의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1232년 강화도에 천도한 고려 정부가 1270년 개경으로의 환도를 결정하자, 무신정권의 군대 삼별초는 이에 저항하여 승화후 온을 왕으로 옹립하고 1270년 8월 진도의 용장성에 독자적인 국가를 세웠다. 이에 고려 정부와 몽골은 연합군을 결성하여 진도 벽파진으로 상륙하여 1271년 5월 용장성을 함락하였다.
삼별초가 왕으로 추대했던 승화후(承化侯) 온(溫)은 지금의 의신면 침계리에 있는 왕무덤재에서 붙잡혀 논수골에서 죽임을 당했고, 피난 중이던 삼별초의 궁녀들은 몽골군에게 붙잡혀 몸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고자 만길재 북쪽, 의신천 남쪽의 깊은 둠벙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이런 사연을 간직한 둠벙을 삼별초 궁녀둠벙이라고 부른다. 삼별초 군대의 패배 현장과 슬픈 사연이 전해져 내려오는 궁녀둠벙 위쪽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새벽을 지나 아침으로 향하는 세상의 빛 속에서 진도군 의신면 지역이 모습을 보여준다. 의신면 침계리, 창포리, 돈지리, 옥대리, 청룡리, 연주리 지역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펼쳐지고, 용마산, 강성봉, 왕봉산, 대봉이 에워싸고 있다. 용마산 서쪽에는 침계마을, 그 서남쪽에 창포마을, 용마산과 강성봉 사이 남쪽에 돈지마을, 그 북쪽에 옥대마을과 중리마을, 왕봉산 자락에 청룡마을, 대봉 아래에 정지마을이 불빛을 깜빡이며 존재를 밝힌다. 북쪽 맨 끝에는 진도지맥 산줄기가 남북을 가르는데, 그 북쪽 의신면 사천리 운림산방 앞을 출발하여 산줄기를 가로질러 의신면 옥대리로 넘어와 돈지리를 거쳐 철마산 자락으로 왔다. 어둠 속에 걸어온 길이 확인되고, 돈지마을의 명품 돈지백구문화센터의 거대한 백구 조형물이 중심에 있다.
진도대로 만길재를 넘어 의신면 만길리 지역으로 넘어갔다. 만길리는 진도대로 동쪽에 자리하고 서쪽에는 의신면 거룡리가 자리한다. 날은 완전히 밝아 만길리 들녘과 멀리 서남쪽의 산봉들과 가야할 남도국립국악원 위치가 가늠된다. 하늘에는 쇠기러기떼들이 시베리아를 향해 날아가는지 V자 편대를 이루어 날아간다. 진도대로에서 만길안길을 따라가는 철마산 자락에는 오래된 여러 비석들이 서 있어, 만길리 지역이 유서 깊은 지역임을 알려주는 것 같다. 추모비, 효자비, 학행비 등에는 명문 양쪽에 한시들이 적혀 있다. 이 비석들이 이 시대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폐가의 빈터에 버려진 학행비는, 아름다운 시절의 추락물처럼 슾프다.
만길안길을 따라 만길리복지회관&경로당을 거쳐 철마게이트장이 있는 넓은 광장으로 내려갔다. 만길 버스정류소 옆에 2004년에 세워진 만길마을 연혁비가 있는데, 비문이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한자들로 촘촘히 적혀 있어 젊은 세대들이 읽어 내기 어렵다. 이 지역을 잘 아는 어르신에게 식초봉, 사자봉, 여금산, 호장산, 아릿재, 솔정재, 깨끼재, 해목재, 목보듬재, 장밭재 등의 지명 유래와 위치, 만길리 지역의 역사와 현재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만길리 지역을 알고 싶다. 이 지역의 문제를 언론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에 만길리에 관심이 더 가는 이유다.
"만길리는 한국전쟁기에 140여가구, 지금은 60여가구가 사는 허씨와 문씨의 집성촌이다. 한국전쟁 직후 좌익에 의해 불에 탄 집터, 악명을 날렸던 허 모씨 집의 원형과 그가 부역자로 지목한 이들을 감금했던 목화창고 건물이 남아 있었다. 진도도 한국전쟁기의 여느 지역처럼 민간인 학살의 광풍이 가해세력을 바꿔가며 휘몰아쳤다. 전쟁 발발 직후에는 좌익에서 전향한 이들로 구성된 국민보도연맹원들을 ‘인민군에 동조할 우려가 있다’며 인근 바다에 수장시켰고, 의신면 구자도리 갈매기섬에 격리한 뒤 불태워 죽이기도 했다. 인민군 점령 뒤엔 적대세력(지방 좌익·빨치산)에 의한 학살, 경찰 수복 뒤엔 군경에 의한 부역혐의자 학살이 이어졌다. 마을마다 양상이 조금씩 다를 터였다. 만길리에서는 ‘공산당 제조기’ 허 모씨 이름이 우뚝 솟았다."(한겨레신문 기사) 간단히 이야기하면, 만길마을에서는 6.25 전쟁 중 진도군청 산림과 직원 허 모씨의 모략에 의해 진도 군경이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이 벌어졌다. 허 모씨는 마을 주민의 재산을 빼앗으려다가 안 되면 경찰에 그들을 빨갱이라고 신고하여 경찰이 그의 말을 의심 없이 받아들여 그가 지목한 마을 주민들을 죽였다고 한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의 김광동 위원장이 군경에 의한 학살 피해자에 대한 ‘부역 몰이’에 집중하여 진실을 외면하고 있다는 데 있다. 과거의 아픈 잘못은 바로잡아야 한다. 그래야 화해와 평화로 나갈 수 있다.
만길마을에서 만길리 원두마을로 가기 위하여 언덕을 넘는다. 언덕에는 진도의 명품 대파를 재배하는 대파밭들이 넓게 자리한다. 언덕에서 뒤돌아보면, 진도대로에서 만길안길을 따라 만길마을을 거쳐온 길이 한눈에 보이고, 철마산 서쪽 자락에 자리한 만길마을이 평화롭다. 평화의 마을에 너울거리는 한스러운 원혼들의 넋을 어서 풀어주어야 한다. 권력 어느 쪽의 유불리를 떠나 진실과 화해의 길로 가는 길이 민족이 사는 길이다. 만길마을 언덕을 넘으면 만길리 원두마을과 마을 앞 드넓은 간척농지, 서쪽을 에워싼 산봉과 의신면 송정리 지역이 펼쳐진다. 가야할 길은 아직도 멀기만 하다.
쇠기러기들이 날아가는 투명한 하늘 아래 원두마을 들녘을 가로지른다. 남쪽에는 만길리 해안이 있을 것이고, 바닷물은 이곳까지 들어왔을 것이다. 이제 바다는 방조제에 의해 막히고 이곳은 농지로 간척되어 풍요롭다. 원두마을을 지나와서 동쪽을 바라보니 붉은 태양이 이글거리며 하늘을 붉게 물들인다. 아침의 태양이다. 시계를 보니 7시 16분, 해가 떠오른지 시간이 꽤 지났는데, 산에 가려 못 본 것 같다. 긴 밤의 어둠을 헤치고 새벽을 지나 밝게 빛나는 붉은 태양이 하늘에 떠올랐다. 아침이다. 새 아침이다. 어제와 다른 오늘의 아침이다. "아침에는/ 운명 같은 건 없다/ 있는 건 오로지/ 새날/ 풋기운// 운명은 혹시/ 저녁이나 밤에/ 무거운 걸음으로/ 다가올는지 모르겠으나/ 아침에는/ 운명 같은 건 없다" 정현종(1939~)의 '아침' 전문. 새날 새아침, 운명을 떨치며 새길을 간다.
의신면 만길리에서 송정저수지 수로 방죽길을 따라 의신면 송정리 송정저수지 제방으로 올라갔다. 송정저수지는 백봉산 서남쪽에 자리하고 제방은 동쪽 방향에 축조되어 있으며, 제방 남쪽에 저수지 수문을 조절하는 건물이 있다. 1926년에 완공되었다고 하니, 송정저수지는 거의 1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저수지 북쪽은 의신면 거룡리 명금마을이다. 송정저수지 북쪽 백봉산 자락에 의신초등학교 명금분교장 건물이 보이는데, 안타깝게도 폐교하였다고 한다. 1938년 송정간이학교로 개교하여, 1949년 명금국민학교로 승격되었으나, 2000년 의신초등학교 명금분교장(義新初等學校 明今分校場)이 되었다가 결국 2013년 3월 1일 폐교하였다고 한다. 새날 새아침 운명을 헤치는 힘이 가라앉는다.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운명의 힘'의 슬프고 아름다운 선율과 아리아가 송정저수지에 메아리치는 것 같다. 인간의 의지인 듯, 운명의 힘인 듯, 삶은 의지와 운명의 두 힘에 의한 것인가? 그래도 인간의 의지가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아닐까? 송정저수지 둘레길을 걸어가는 발걸음이 의지의 힘으로 넘친다.
3.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24.7km
전체 소요 시간 : 6시간 49분
돈지백구문화센터 앞에 '돌아온 백구기념비'와 '돌아온 백구상'이 조성되어 있다.
높이 2.1m, 너비 1.5m 크기의 '돌아온 백구상'은 백구의 주인인 박복단 할머니가 돌아온 백구를 어루만지는 형상의 조형물이다. 백구는 2000년 2월에 12살의 나이로, 박복단 할머니도 2010년 12월 30일 94세를 일기로 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돈지백구문화센터 앞에 돌아온 백구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기념비 아래 지대석 앞면에 비문이 적혀 있다.
'돌아온 백구기념비' 아래에 비문이 적혀 있다. 비문을 읽어 본다.
한번 주인이면 평생주인 진도개 백구 : 이 비의 주인공(백구)는 천연기념물 제53호(세계명견 334호)인 진도개의 충성심과 귀소본능의 품성을 전형적으로 보여준 충견입니다. 1988년 진도군 의신면 돈지리 박복단할머니의 집에서 태어나 다섯살이 되던 1993년 3월 대전으로 팔려갔으나, 할머니와 손자·손녀의 따사로운 정을 잊지 못하여 목에 메인 줄을 끊고 도망쳐 300여 km의 거리를 주인을 찾아 헤메다 1993년 10월 한밤중에 옛 주인인 할머니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백구는 할머니의 사랑과 보살핌 속에 행복하게지내다 2000년 2월 열세살의 나이로 주인의 품에서 차마 잠기지 않는 눈을 감았습니다. 의신면 돈지 마을에서는 충견 백구의 품성을 높이 기려 자라나는 새싹들의 교육의 장으로 삼고자 동네사람들의 뜻을 모아 이 비를 세웁니다. 서기 2002년 11월 3일
돈지권역 백구테마센터 종합안내 게시판이 세워져 있다. 종합안내를 읽어 본다.
1.돌아온 진도개 백구 이야기 1)한번 주인이면 평생 주인 : 지난 1993년 3월 대전으로 팔려간 진도개가 7개월만인 93년 10월에 300km나 떨어진 대전에서 낯선 곳을 헤매면서도 변함없이 간직한 주인을 향한 충성심으로 진도의 옛 주인인 박복단 할머니의 집으로 돌아왔다. 2)천연기념물 제53호, 세계명견 제334호 진도개 : 진도개는 천성이 영민하고 충직스럽고 대담하며, 후각·청각이 잘 발달되어 수렵본능과 복종심, 비유혹성, 귀가성이 뛰어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토종견이며, 세계적인 명견이다.
2.백구테마센터 및 돈지권역 소개 1)돈지 백구테마센터 : 돈지 백구테마센터는 대전으로 팔려간 진도개 백구가 주인을 찾아 돌아온 사연을 널리 기리기 위해 마을 주민 스스로 조성한 백구공원 부지 내에 2014년 건립되었다. 2)백구공원에는 돈지 백구테마센터, 백구 미로원, 돌아온 백구 동상과 기념비가 조성되어 있고, 매년 가을 추수를 축하하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논배미축제가 열리고 있다.
3.활력 일번지 돌아온 백구마을! 진도 돈지권역 둘러보기 1)돈지권역 마을안내 : 돈지권역은 진도군 의신면에 위치하고 돈지리를 비롯하여 향교리, 옥대리, 중리 마을이 모여있는 곳이다. 2)돈지권역은 진도 신비의 바닷길로 이어지는 길목이며, 삼별초 격전지로 궁녀둠벙, 퇴각로 등 문화유적이 산재하고 있다.
돈지백구문화센터 광장 동쪽에 '앞서가는 돈지마을' 표석이 세워져 있다.
돈지백구문화센터 서쪽에 서해랑길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삼별초 궁녀둠벙 0.8km, 8코스 종점 16.2km 지점이다.
돈지백구문화센터 옆에서, 해발 101.8m 용마산 동남쪽에 자리하는 의신면소재지 돈지리 돈지마을을 뒤돌아본다.
서해랑길은 왼쪽 뒤 철마산 자락길을 통해 중앙 맨 왼쪽 가로등 불빛이 반짝이는 진도대로의 만길재를 넘어간다.
가로등이 이어지는 진도대로 왼쪽은 만길재 방향이며, 진도대로 건너편은 의신면 창포리(昌浦里) 지역이다.
창포리(昌浦里)는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에 속하는 법정리. 황씨가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본래 진도군 명금면에 속해 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명금면 가단리와 의신면 침계리 각 일부를 병합하여 창포리라 하여 의신면에 편입되었다. 100여 년 전 창포리에 섰던 4일장이 유명하였으나 현재는 폐쇄되었다. 서남쪽으로 대덕산(大德山)의 끝자락에 입지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도목방조제 간척으로 조성된 농경지가 펼쳐져 있다. 북동쪽은 돈지리, 북쪽은 침계리, 북서쪽은 가단리와 각각 접하고 있다. 18번 국도에서 갈라진 2차선 도로가 창포리를 지난다. 현재 주요 성씨는 박씨이며, 주민들의 주요 소득원은 벼농사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의신면 돈지리 평지들 왼쪽에 돈지백구문화센터, 중앙 뒤에 의신면 옥대리 옥대마을과 중리마을이 보인다.
맨 왼쪽은 옥대리 옥대마을과 중리마을, 중앙에 청룡리 왕봉산과 그 아래 청룡마을, 맨 오른쪽에 대봉(큰봉)과 그 오른쪽에 옥대리 정지마을이 보이며, 앞의 들은 돈지리 평지들이다.
청룡리(靑龍里)는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義新面)에 속하는 행정리. 청룡은 사신(四神) 또는 사수(四獸)의 하나로 동서남북 중 동쪽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알려져 있다. 위치가 진도군 의신면 옥대리의 청룡(왼쪽 즉, 동쪽)이 되므로 청룡리라고 했다는 설과 마을의 주산이 청룡 모양이라 하여 청룡리라고 했다는 두 설이 전해진다. 마을의 입향조는 청주한씨로 알려져 있다. 또한 1887년경 김해김씨 11대 김용(金龍)의 후손 김무정의 아들 김계탁(金季鐸)이 입거한 이래 밀양박씨 등이 입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구룡리·구계리·옥대리 일부를 병합하여 청룡리라 하였다. 북쪽, 동쪽, 남동쪽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서쪽 방향으로 논농사 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북쪽의 구계지에서 흘러나오는 청룡천이 평야 지대로 흐르고 있다. 서쪽으로는 의신면 옥대리와 접해 있고, 남서쪽으로는 의신면 돈지리, 남동쪽으로는 의신면 연주리와 접해 있다. 청룡천이 남북 방향으로 흐르고 있으며, 18번 국도가 동서 방향으로 지나고 있다. 주요 성씨는 김씨와 박씨이며, 주민들의 주요 소득원은 벼이다. 진도군 진도읍 상도도 저수지가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앞은 돈지리 평지들, 그 뒤는 해발 159m 대봉(큰봉), 그 아래에 옥대리 정지마을, 그 오른쪽 뒤는 연주리 지역이다.
연주리(連珠里)는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에 속하는 법정리. 앞산이 구슬처럼 생겼다 하여 연주(連珠) 또는 연지동이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밀양박씨가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본래 진도군 의신면에 속한 지역이었으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가향리와 응덕리를 병합하여 연주리라 하였다. 첨찰산(尖察山)과 덕신산(德神山)으로 이어진 산릉의 끝자락에 입지하고 있다. 남쪽으로 남해와 접하고, 서쪽으로는 도목방조제 축조로 조성된 넓은 농경지가 펼쳐져 있다. 북동쪽으로 응덕리·가향리와 각각 접하고 있다. 18번 국도에서 갈라진 2차선 도로가 연주리까지 연결되어 있다. 현재 주요 성씨는 김씨와 오씨이며 주민들의 주요 소득원은 벼농사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왼쪽에 철마산, 중앙 뒤에 진도대로의 만길재가 보인다. 서해랑길은 철마산 자락을 통하여 진도대로로 나가 만길재를 넘는다.
철마산은 의신면 돈지리, 옥대리, 만길리가 만나는 꼭지점이다. 서해랑길은 철마산 자락길을 오른쪽으로 이어간다.
의신면 돈지리 평지들을 가로지른다. 해발 159m 대봉은 의신면 옥대리, 청룡리, 연주리의 꼭지점이다. 대봉 오른쪽 뒤는 의신면 연주리(連珠里) 지역이다. 대봉 뒤 동쪽 하늘이 불그스레해진다. 곧 해가 떠오를 것이다.
왼쪽에 철마산, 중앙 뒤에 만길재가 보이며, 철마산 자락에 의신천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돈지리 평지들이 드넓게 펼쳐지고, 왼쪽 뒤에 옥대리 옥대마을과 중리마을, 오른쪽 뒤에 옥대리와 청룡리의 경계를 이루는 왕봉산, 그 아래 청룡리 청룡마을, 맨 오른쪽에 대봉(큰봉)과 옥대리 정지마을이 있다. 하늘이 점점 더 불그스레해진다.
돈지리 평지들 왼쪽에 돈지백구문화센터, 해발 200m 강성봉 아래 돈지마을이 자리한다.
오른쪽 뒤에 대봉, 그 왼쪽 뒤 중앙에 왕봉산이 보인다. 의신천이 동쪽으로 흐르고, 그 위에 돈지교가 놓여 있다.
의신천의 돈지교 북단에 서해랑길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의신천 남쪽 방죽 뒤에 삼별초 궁녀둠벙이 있다.
돈지교 북단에서 의신면 면소재지 돈지리의 돈지마을을 살폈다. 간척농지인 평지들이 드넓게 펼쳐지고, 돈지마을 앞에 돈지백구문화센터가 자리한다. 돈지마을 뒤에 해발 200m 강성봉이 있다.
돈지리는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에 속하는 법정리. 돈대가 있었으므로 돈대, 돈디, 돈지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밀양박씨가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본래 진도군 의신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향교리와 명금면의 창포리 일부를 병합하여 돈지리라 하여 의신면에 편입되었다. 대부분 평지이며 북서쪽으로는 용마산(龍馬山)[99.7m]이 위치하고 있다. 용마산 아래 구릉성 산지는 밭으로 개간되어 있다. 돈지리 남쪽으로는 농경지가 펼쳐져 있다. 북동쪽은 옥대리, 북서쪽은 침계리, 서쪽은 가단리, 남서쪽은 창포리와 각각 접하고 있다. 18번 국도가 돈지리를 지나며, 18번 국도에서 갈라진 2차선 도로가 마을까지 연결되어 있다. 현재 주요 성씨는 밀양박씨이며, 주민들의 주요 소득원은 벼농사이다. 돈지리는 고려시대 삼별초의 최후 싸움터였던 곳으로 여기급창 둠벙이 남아 있다. 또한 돌아온 백구 마을로 유명하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의신천의 돈지교를 건너서 뒤돌아본다. 맨 오른쪽에 돈지리 용마산과 돈지마을, 그 왼쪽은 침계리, 맨 왼쪽 진도대로 왼쪽은 창포리 지역이다.
침계리는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에 속하는 법정리. 마을 앞을 흐르고 있는 시내를 베개 삼아 터를 잡았다 하여 ‘침계(枕溪)’라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마을이 언제 생겼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1357년 경에 제주양씨 금성군파 6세손이 제일 먼저 들어와 살았다고 전해지나 자세한 기록은 없다. 본래 진도군 의신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사하리, 영산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침계리가 되었다. 첨찰산(尖察山, 485m)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나온 지맥인 광정산(廣庭山, 203m, 영산 뒷산) 줄기인 매바위, 까치바위, 여우바위 등을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마을 앞으로는 우항천(牛項川, 의신천 일명 枕溪川)이 가로 놓여 의신포로 흘러가며, 마을 앞산에는 용마산(龍馬山, 99m)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의신면의 중서부에 있으며, 동쪽은 옥대리, 서쪽은 칠전리, 남쪽은 창포리, 북쪽은 사천리와 각각 접하고 있다. 교통은 마을 앞으로 도로가 비스듬히 북쪽과 남쪽으로 나 있어서 진도읍과 면소재지를 쉽게 이용할 수 있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과 대파, 월동배추가 많이 생산되고, 이외에도 보리, 고추, 콩 등이 있으나 생산량은 적다. 마을의 주요 성씨는 밀양박씨, 창녕조씨 등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돈지교를 건너 철마산 자락 오른쪽 쉼터정자 앞으로 이어간다. 정자 오른쪽 아래에 삼별초 궁녀둠벙이 있다.
철마산 자락 의신천 남쪽에 삼별초 궁녀 둠벙이 있고, 건너편에 진도대로가 지나며, 그 너머는 창포리 지역이다.
삼별초 궁녀둠벙, 진도군 향토문화유산 제4호. 소재지 : 진도군 의신면 돈지리 1029-11, 1029-12. 지정일 : 2001년 10월 30일
삼별초가 왕으로 추대했던 승화후(承化侯) 온(溫)은 지금의 의신면 침계리에 있는 왕무덤재에서 붙잡혀 논수골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전투 중에 피난 중이던 여기·급창(女妓·及唱) 등 삼별초의 궁녀와 부하들은 창포리에서 만길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만길재를 넘다 몽골군에게 붙잡혀 몸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고자 언덕을 따라 내려가 지금의 둠벙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이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망할 당시 3천 궁녀가 부여 낙화암에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는 내용과도 매우 흡사한 사건이기도 하다. 그 뒤 비가 오는 날이면 이곳 둠벙에서 여인네의 울음소리가 슬피 들려오고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밤에는 이곳을 지나는 이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이런 사연을 간직한 이곳 둠벙을 가르켜 이후 진도사람들은 여기·급창(女妓·及唱) 둠벙이라 부르게 되었다. 당시 이곳 둠벙의 수심은 매우 깊어서 절굿대를 넣으면 우수영 또는 금갑 앞바다로 나온다는 전설도 간직하고 있다.
삼별초 궁녀둠벙을 살피고 쉼터정자 앞을 거쳐 철마산 자락길로 오르다 뒤돌아본다. 바로 앞에는 의신천의 돈지교, 그 뒤 해발 101.8m 용마산 오른쪽 앞에 돈지리 돈지마을, 용마산 왼쪽에 침계리 침계마을이 가늠된다.
돈지리 평지들이 드넓다. 바로 앞에는 의신천이 흐르고 맨 왼쪽에 용마산, 오른쪽에 강성봉, 그 사이에 돈지마을이 있다.
앞의 의신천이 맨 오른쪽에서 옥대천을 합수한다. 왼쪽에 돈지백구센터와 돈지마을, 그 뒤에 강성봉이 자리하고, 강성봉 오른쪽 자락에 옥대리 옥대마을과 중리마을, 그 뒤에 왕봉산이 가늠된다.
철마산 자락길을 따라 무안 박씨 무사공파 가족묘 앞을 지난다.
무안 박씨 묘 앞을 지나 진도대로 철마산 자락길 입구로 나간다.
철마산 자락길을 따라 진도대로로 나왔다. 이곳을 만길재라고 이르는 듯. 진도대로를 따라 만길재를 오른다.
국도제18호선 진도대로는만길재를 넘어 왼쪽 만길리와 오른쪽 거룡리를 가르며 달린다. 중앙 뒤에 봉호산이 어림된다.
서해랑길은 진도대로에서 왼쪽 만길안길을 따라 만길마을로 이어간다. 중앙 뒤의 산은 봉호산인 듯.
만길리 입구에 만길리 표석과 서해랑길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종점까지 14.9km, 이정목 맨 뒤의 산은 봉호산인 듯.
만길안길을 따라 철마산 아래에 자리한 만길마을로 내려간다.
의신면 거룡리 하늘 위로 쇠기러기떼가 V자 행렬을 지어 날아간다.
추모비 명문 양쪽에 오언율시가 적혀 있고, 왼쪽 관직명 이력비에 적힌 광서(光緖)7년은 1881년이다. 140년이 지난 비석이다.
모훈각사적비 명문 양쪽에 칠언절구 한시가 적혀 있다. 선생의 이름을 알 수 없다. 모훈각이 사라졌는가?
만길리 입구에서 만길안길을 따라 비석들을 살피며 내려왔다.
왼쪽 두 비석은 남평 문씨 문찬홍의 효자비와 학행기념비이며, 맨 오른쪽 비는 오래된 문찬홍 학행기념비이다.
만길리 입구에서 만길안길을 따라 내려온 길을 다시 돌아본다. 의신면 만길리 철마산 자락에 여러 비석들이 세워져 있다.
만길안길을 따라 만길마을로 내려가면서 서북쪽의 의신면 거룡리 거룡마을을 바라보았다.
거룡리(巨龍里)는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에 속하는 법정리. 마을의 형세가 대덕산 사잣골의 기세에 대적할 만한 큰 용과 같다 하여 거룡리라 부르게 되었다. 동복오씨가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본래 진도군 명금면에 속해 있던 지역으로, 사잣골 또는 거룡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명금면 신정리·노상리·사정리·원두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거룡리라 하여 의신면에 편입되었다. 거룡리는 대덕산 밑 사잣골 자락에 동남향으로 위치한다. 구릉성 산지의 완경사면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완경사면 아래로는 농경지와 취락 지역이 위치한다. 북쪽으로는 의신면 소재지로 넘어가는 큰 고개가 있다. 남쪽은 원두리, 남동쪽은 만길리, 북쪽은 창포리, 서남쪽은 신정리와 각각 접하고 있다. 18번 국도에서 갈라진 4차선 도로가 동서 방향과 남북 방향으로 지난다. 서쪽으로는 의신면 신정리와 임회면 상미실로 통하는 4차선 도로가 있다. 현재는 만길재(아래재)가 거룡리 중심지로 가는 주요 교통로이다. 현재 주요 성씨는 김씨와 박씨이다. 주민들의 주요 소득원은 벼와 월동배추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만길안길을 따라 만길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펜션 건축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만길마을 입구의 폐허에 두 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왼쪽 비는 글씨가 잘 안 보이고, 오른쪽 비는 허연(許演) 학행기념비이다. 건립일자가 소화17년이니 1942년에 세워진 비석이다.
만길안길을 따라 고요하기 그지없는 만길마을을 지난다. 이 골목에서 바로 앞 오른쪽 골목으로 이어간다.
오른쪽 골목으로 꺾이는 곳에서 바라보니 앞에 만길리복지회관&경로당이 있다.
만길리복지회관 앞 골목길을 빠져나오니 넓은 광장이 나오고, 만길마을 버스정류소와 그 옆에 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뒤에는 철마게이트볼장이 있다. 비석을 찾아가 살펴본다.
서해랑길은 만길마을 버스정류소 앞 광장 서쪽 끝 만길안길로 이어간다.
만길마을 버스정류소 옆 비석을 찾아와 살피니, 2004년에 세운 만길마을 연혁이 적혀 있는 비석이다. 비석의 내용을 읽는다.
우리마을의 沿革 : 우리마을은 鐵馬山 靈峰 아래 本郡邑 東南方으로부터 約 20리에 位置하여 西北으로는 食草峯과 獅子山 兩峯이 雄立하며 女琴山을 案山으로 南으로는 太平洋의 성난 波濤를 막아주는 虎藏山과 아릿재 솔정재 깨끼재 해목재 목보듬재 장밭재 등이 마을 周圍를 屛風처럼 감싸고 七十町의 沓과 五十町의 田 등 廣闊한 沃土를 안아 平和스럽게 자리하고 있다. 우리마을 뒤 들녘에는 先史時代遺跡인 고인돌의 痕迹이 남아 있으며 珍島郡誌에 의하면 西紀 一六〇〇年代 木川 馬氏와 務安 朴氏가 鞍脫에서 始居하였고 마을 이름을 勒吉이라 하였다 한다. 韓日合邦 때 晚吉里라 改稱하였으나 光復 이후 全國的인 行政區域이 改編됨에 따라 晚吉里라는 法定部落에서 원두, 도목, 도항, 도명, 만길 등 五개 行政部落으로 分區되었다. 西紀 一九五〇年代는 約 百六十餘 世代와 住民 約 千餘 名이 居住하는 커다란 마을이었으나 現在는 金, 文, 朴, 梁, 尹, 李, 許氏 등의 姓氏 七十七 世代와 約 百三十餘 名의住民이 居住하고 있어 勤勉 誠實 和合 溫厚하던 우리 祖上님들의 情神을 이어받아 農業과 學業에 精進하면서 매년 豐年農事를 이루며 풍요로운 生活을 하고 있다. 祖上님들께서는 마을의 上下에 書堂을 設置運營하시어 漢文修學에 熱中한 結果 儒學者들을 輩出하셨고 人材育成에 크게 貢獻하셨다.마을의 傳統行禮로 매년 정월대보름날 里民의 平安과 無病長壽를 祈願하는 癘祭와 六月 初하룻날 害虫의 박멸과 豐年農事를 祈願하는 虫祭를 모셔오고 있다. 또한 祖上님들께서는 마을의 東쪽 田 千七十七 番地에 있었던 望月石에서 아릿버듬 許氏 門中 山에 있는 큰 老松을 바라보고 正月 大보름날 한해 農事의 豊年과 凶年을 豫想하는 달맞이를 하셨다 하며 달이 老松의 위쪽에 뜨면가뭄과 凶年이 들고 老松의 아래쪽에 뜨면 비가 자주와 豊年이 들었다는傳設이 있다. 이러한 知慧와 美風良俗을 繼承하고 더욱 發展시켜 千秋萬代에 祖上님들의 일을 永遠히 빛나게 하리라는 部落民 모두의 祈願 則 傳統行禮時使用하는 祝文을 아래에 새겨 里民의 이름으로 이 碑를 세우다. 2004.5.10.
현재 60여 가구가 살고 있는 만길마을은 철마산 서쪽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오른쪽 골목길에서 광장으로 나와 버스정류소 옆 만길마을 연혁비를 살피고 광장을 나간다. 이 마을에서 6.25 전쟁 중 진도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이 있었다.
만길마을 광장에서 나와 만길안길을 따라 잠깐 남쪽으로 이어가다가 오른쪽 언덕으로 올라간다.
서해랑길 이정목이 세워져 있는 만길안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원두마을 가는 언덕으로 올라간다.
죽림어촌체험마을 7.1km, 종점 14.1km 지점이다. 남쪽으로 내려가면 의신면 만길리 해안 도항포구일 것이다.
언덕길에 있는 (주)진도벤처팜은 도정(搗精)과 곡물 및 식량작물 재배업을 한다고 한다.
언덕길에서 뒤돌아서서 맨 왼쪽 뒤 만길리 입구에서부터 바로 아래 언덕의 (주)진도벤처팜까지 걸어온 길을 가늠한다. 철마산이 남북으로 벋어 있고 그 서쪽 아래에 만길마을이 자리한다. 언덕에는 진도의 명품 대파들이 자라고 있다.
만길리(晩吉里)는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에 속하는 법정리. 1600년대 무안박씨와 목천마씨가 처음으로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본래 진도군 명금면에 속해 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도명리, 도목리, 도동리, 원두리, 거룡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만길리라 해서 의신면에 편입되었다. 만길리는 낮은 구릉 사이의 깊숙한 계곡에 입지하고 있다. 계곡 사이 북쪽에서 동쪽으로 길게 논이 조성되어 있으며 그 끝부분은 남해와 접하고 있다. 남쪽은 독점리, 북서쪽은 거룡리, 남서쪽은 원두리와 각각 접하고 있다. 18번 국도에서 갈라진 2차선 도로가 만길리를 지난다. 현재 주요 성씨는 김씨와 문씨이다. 주민들의 주요 소득원은 벼와 양배추이다. 마을 공동 재산으로 마을회관이 있다. 만길리에서는 매년 12월 30일 만길리 만길마을 동제를 지내고 있다. 자연지명으로는 아랫재, 솔정재, 깨끼재, 해목재, 목보듬재, 장밭재 등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언덕은 대파밭들이 차지하고 있다. 고개를 넘어 의신면 만길리 원두마을로 이어간다.
언덕을 넘어 내려보면 중앙에 만길리 원두마을, 그 뒤 송정리 송정마을, 중앙 맨 뒤 산 아래에 송정리 죽청마을이 가늠된다. 맨 왼쪽 앞의 산은 큰봉산, 그 오른쪽 뒤의 산은 봉호산인 듯.
원두리(元頭里)는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에 속하는 행정리. 원머리·원뚝머리에서 언두리라 부르다가 1945년 원두리로 바뀌었다. 나씨가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의신면 만길리로 편입되었다. 북서쪽은 낮은 구릉지이며 남동쪽은 평지이다. 원두리는 남해와 접한 해안가 마을이었으나 방조제 축조 이후 마을 앞으로 넓은 농경지가 조성되었다. 동쪽은 독점리, 북동쪽은 만길리, 북쪽은 거룡리, 북서쪽은 신정리·사정리, 남서쪽은 송정리와 각각 접하고 있다. 18번 국도에서 갈라진 2차선 도로가 원두리까지 연결되어 있으며 2차선 도로에서 연결된 소형차로가 마을까지 이어져 있다. 현재 주요 성씨는 박씨이다. 주민들의 주요 소득원은 벼, 보리, 양배추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의신면 만길리 원두마을 앞에 드넓은 간척농지가 펼쳐져 있다. 오른쪽에 큰봉산, 그 뒤에는 송정리 활곡마을이 있고, 맨 오른쪽 뒤에 봉호산이 가늠된다. 전선에는 새들이 앉아 있고, 하늘에는 쇠기러기들이 날아간다.
만길리 만길마을에서 원두마을로 넘어가는 언덕에 채석장이 있다.
원두마을 가는 들길에서 남쪽의 도명포구 방향을 가늠한다. 방조제가 축조되어 이 넓은 농지가 간척되었을 것이다.
만길마을에서 언덕을 넘어 원두마을 들길을 따라왔다. 왼쪽에 채석장이 보인다.
원두마을 앞 들길을 따라 만길로로 나왔다. 오른쪽 들을 빈지머리들이라 이르는 듯. 만길로 북쪽 방향을 바라보면 중앙 전신주 뒤에 거룡리 거룡마을이 가늠된다.
서해랑길은 만길로 서쪽 방향에서 오른쪽 원두길로 진입하여 바로 앞 원두리마을회관과 원두마을을 지나간다.
원두길을 따라 원두리마을회관&경로당 앞을 지나간다.
원두리마을회관&경로당 앞 넓은 터를 지나 원두마을을 지나간다.
원두길을 따라 원두마을을 거쳐 만길로로 다시 나왔다. 만길리 도명포구 동쪽에 찬란한 태양이 솟아 올랐다.
의신면 만길리 원두마을 앞 간척농지가 드넓게 펼쳐져 있다. 맨 뒤에 철마산이 벋어 있고 걸어온 길이 분명히 보인다.
원두길을 따라 원두마을을 거쳐 만길로로 나왔다.
원두마을을 거쳐 원두길로 나와 뒤돌아보니 원두마을 견공이 길손을 지켜본다.
만길로의 원두교를 건너 송정저수지 수로 남쪽 둑방길을 따라 올라간다.
원두교를 건너서 의신면 만길리 원두마을을 뒤돌아 보았다.
송정저수지 수로 남쪽 둑방길을 따라 송정저수지 제방으로 올라간다. 뒤의 산은 백봉산인 듯.
아침 햇빛이 동쪽 하늘을 붉게 물들인다. 오른쪽 뒤의 산은 범자골산이며 그 뒤에 서해 바다가 펼쳐져 있을 것이다.
송정저수지 언덕에서 의신면 만길리 들녘을 다시 바라본다. 송정저수지 수로는 만길리 도명포구로 흘러간다.
의신면 만길리에서 송정리 지역으로 올라간다. 폐가가 있는 언덕 오른쪽에 송정저수지 제방이 축조되어 있다.
'송정제 전도게이트 조작실'이 저수지 남쪽 제방에 설치되어 있다. 전도게이트(傳導gate)는 '개폐 스위치 역할을 하는 논리 소자(論理素子'라고 한다. 그러니까 제방의 수문을 열고닫는 조작실을 의미하는 듯. 송정저수지는 1926년에 축조되었다.
의신면 송정리 송정저수지 제방이 동쪽에 조성되어 있다. 송정저수지 건너편 북쪽은 의신면 거룡리 명금마을이다.
송정저수지 북쪽 백봉산 자락에 폐교된 의신초등학교 명금분교장이 있다.
의신초등학교 명금분교장(義新初等學校 明今分校場)은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송정리 551번지에 있었던 공립초등학교의 분교장으로, 2013년 3월 1일 폐교하였다. 1938년 3월 27일 의신공립보통학교(현 의신초등학교) 송정간이학교로 설립인가를 받고 같은 해 6월 1일 개교하였다. 1949년 10월 1일 명금국민학교로 승격되었으며, 1982년 3월 2일 병설유치원을 개원하였다. 학생수 감소로 인하여 2000년 3월 1일 의신초등학교에 편입되어 명금분교장이 되었다. 2013년 3월 1일 폐교하였다. 교훈은 ‘보다 바르고 날로 새롭게’이며, 교목은 은행나무, 교화는 수선화, 교색은 흰색이다. - 두산백과
송정저수지 너머 서쪽 끝 산자락에 의신면 송정리 죽청마을이 보인다. 서해랑길은 맨 뒤 산을 오른쪽으로 돌아 넘어간다.
송정저수지 남쪽 산기슭에 폐가들이 몇 채 있다.
의신면 송정리 송정저수지 남쪽 둘레길을 따라 송정저수지를 돌아간다.
송정저수지 남쪽 둘레길을 따라 진도대로로 나간다. 저수지 건너편 마을은 의신면 송정리 송정마을이다.
송정저수지 남쪽 둘레길에서 멀리 서쪽을 바라보면 산자락에 송정리 죽청마을이 보인다.
송정저수지 남쪽 둘레길 산기슭에 송암(松菴)선생 박헌증(朴憲增) 학행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송정저수지 서쪽에 송정리 송정마을이 있다. 물가의 물억새풀꽃과 저수지에 비친 산그림자가 아름답다.
송정저수지 남쪽 둘레길을 따라 진도대로로 나왔다. 저수지 출입구에 세워진 서해랑길 이정목 날개를 보면 종점 12km 지점으로, 이곳이 서해랑길 8코스 중간지점이며, 죽림어촌체험마을까지는 5km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