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막의 앙장이나 휘장의 진홍색은 모두 피를 상징합니다.
번제단에서 흘린 짐승의 피로 모든 제사의식과 성물이 거룩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막은 피의 집입니다(출29:12.16. 히9:18-22) 그렇지만 짐승의
피는 죄를 덮기는 할 수 있으나 영원한 속죄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히10:1-14)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 인간의 유일한 중보이십니다. 사람의 죄 값은
사람이 갚아야죠. 그래서 짐승의 피는 참 화목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히9:11-12)
죄는 반드시 하나님과 화목이 이루어지기 전에 해결되어야 합니다.(엡2:13-18절 참조)
구속을 위한 값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십자가의 피 흘리심은
주의 죽으심의 의미이며 성찬의 잔은 언약의 잔 곧 새 생명에 참예하는 핍니다.
왜 속량이 필요할까요?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신 분이지만 반면 인간의 죄는 엄청나게
가증스럽고 더럽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넝마와 같고 누더기와 같습니다(렘17:9)
하나님은 죄를 증오하심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보면 압니다. 처절합니다.
그와 같이 죄의 저주를 온 몸으로 받으신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죄에서 죽은 자요
그리스도 안에 부름을 받아 하나님께는 살아 있는 자가 됩니다(롬6:10) 오늘날 이와 같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강조되지 않으므로 성도들의 경외감이 결여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예배를 진지하게 드려야 합니다. 그 피로 대가를 지불하고 사서 십자가의
대속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으로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게
허락하신 아버지 하나님께 경외감을 가지고 진지한 자세로 나아가야 합니다.
반드시 우리 범죄함을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믿음에 의해 죄가
해결되어야 하나님과 화목하고 참 평화를 얻습니다.(롬3:23-26, 롬5:1-2)
이 제사와 예물을 하나님이 마련 하셨습니다. 구약은 짐승을 그림자로 신약은
그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히10:5, 14)의 몸이 영원한 제사와 예물이 되셨습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증오와 사랑이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입니다.
죄의 값은 반드시 지불해야 합니다. 아니면 그 삯은 사망입니다(롬6:23) 만약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을 거부하면 본인이 영원토록 지불해야 합니다.(계6:15-17 롬3:23)
그건 바로 사망을 가진 자들이 그 사망으로 인하여 들어가는 영원한 불못의 형벌입니다.
속량(Atonement)이란 말의 뜻은 M. R디한의 성막 P216에 히브리어로
Kaphar(카파르) 곧 덮는다는 의미라고 말합니다(창 6:14) “너는 잣나무(코페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역청이란 말이 바로 속량이란 뜻입니다. 카파르는 동사이고 코페르는 명사입니다.
창6:14절을 바꾸면 “너는 속량으로 안팎을 칠해 속량하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역청은 홍수의 물이 방주 안으로 들어오는 걸 막아 하나님의 심판에서 속량했습니다.
구약의 짐승의 피는 죄를 덮었습니다. 그야말로 카파르만 했습니다.
또 그냥 지나갔다는 의미로 간과는 해도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 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죄를 완전히 도말(사함)할 때까지 임시 조치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막의 제사는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매일 드려야 했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죄를 용서받기는 했지만 결코 의롭다 하심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칭의라는 말을 갈보리의 사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 이전에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죄 용서란 말도 갈보리 이후에는 한번도 사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롬3:25 죄를 간과하시고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부름을 받아 의롭다 하심을 받으면 용서는 따로 필요 없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죄를 덮고 용서하기는 했지만 하나님과 화목 시키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가 올 때까지 스올 곧 하데스에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에 빠진 부분이 He descended into the hell이란 내용입니다.
여러 말이 많으니 참조만 하고 알아들을 수 있는 만큼만 수용하시는 게 좋습니다.
죄에 대한 속량의 필요는 양심이 있는 모든 인간은 다 죄책을 느끼고 있습니다.
모든 종교들이 그들의 신들을 달래며 제사를 드리는 모습이 그를 증명합니다.
혹자는 “인간은 도저히 치료될 수 없는 종교적 존재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오직 나만 믿어 하는 그 자체가 나름의 신학입니다.
무신론은 현대문명이 만든 조작품입니다. 어느 민족에도 무신론은 없습니다.(전3:11)
인간은 원시적으로 양심에 의한 책임감과 죄성에 대한 의식을 지니고 태어납니다.
하나님을 섬기든지 미신이나 이방신을 섬기든지 인간은 그 신들을
달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식이 그들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습니다.(요 3:36)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드리워 있기 때문에 알지 못하는
죄의식이나 저주의식을 벗어내기 위해 별별 짓을 다 하기 마련입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로 치마를 해 입고 부끄러움을 가리는 모습입니다.
이와 같이 나는 죄 없다 하고 아담과 하와처럼 숨는 인간들에게 병을 진단하듯
X레이와 같이 율법을 주셔서 찍 소리 못하게 하시고 그 죄를 영원히 속량하시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그림자로 성전을 이스라엘에 주신 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율법은 스스로 다 지킬 수 있다고 아기죽거리고
죄를 처리할 성전은 장사꾼들이 득실거려 강도의 굴혈이 되고 말았습니다.
율법이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완성이 될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를
현대의 기독교가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지금의 기독교가 땅의
건물이 아닌 하늘 성소에 들어가는 진리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보십니까?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주님께 찬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