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차크의 행복한 바이올린』
최 화 웅
세밑 한파가 기승을 부린 12월 마지막 불금. 들뜨고 설레는 마음의 허전함을 누르며 영화의 전당으로 나섰다. 수영만을 거슬러 오는 바람이 드셌다. 때마침 나의 일흔여섯 번째 생일날에 개봉한 다큐멘터리『이차크의 행복한 바이올린』을 보기 위해서 그동안 틈을 보고 있었다. 학창시절 클래식에 빠졌을 때는 바이올린의 선율이 귓전을 스치기만 해도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20세기 가장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 중의 한 사람으로 꼽는 이차크 펄만(Itzhak Perlman)은 1945년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 게토에서 용케 독일 나치의 아이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부모로부터 태어났다. ‘Itzhak’를 ‘이츠하크’ 또는 ‘이차크’, 심지어 ‘이작’으로 발음하지만 나에게는 이작이 입에 익었다. 그는 4살 때 고열을 동반한 소아마비를 앓아 끝내 두 다리를 잃은 뒤 목발에 의지하고 집안에서는 전동의자를 타고 생활한다. 어린 날 그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바이올린 연주에 귀를 빼앗겼다. 세 살이 되었을 때 바이올린을 잡기에 너무 작다는 이유로 음악학교의 입학을 거절당했다. 그 뒤로 그는 장난감 바이올린으로 바이올린을 배운 뒤 세계 유수의 무대에 올라 그래미상 15회, 에미상 4회를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장애를 가진 유대인 이민자 출신으로 살아가는 삶이 만만치 않을 처지에 신체적 핸디캡까지 극복하며 바이올린 연주에 재능을 보이기까지 험난한 길을 걸었다. 이발사인 그의 아버지 카임 펄만은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도 그를 텔아비브 뮤직 아카데미에 보내 레슨을 받게 했다.
미모의 앨리슨 셔닉 감독이 연출한 영화『이차크의 행복한 바이올린』은 역경을 넘어 기어코 한 분야의 거장이 된 치열한 삶의 여정을 보여주는 기도와 철학이 깃든 따뜻한 연주를 보여준다. 삶 속에 묻어나는 예술의 향기가 전편에 자연스럽게 풍긴다. 미국 TV 에드 설리반 쇼의 진행자는 1959년 그를 뉴욕으로 초청하여 그의 쇼프로그램 “Caravan of Stars”에 출연시킨다. 이를 계기로 이작과 그의 부모는 뉴욕에서 정착하게 된다. 줄리아드 음악학교에 등록하여 이반 갈라미안과 도로시 딜레이에게 사사를 받는 행운도 얻는다. 1963년 카네기 홀에 올랐고 이듬해 레벤트릿 콩쿠르에서 우승하였다. 곧 전 세계를 돌며 연주회를 가지고 여러 장의 음반도 냈다. 한편 1970년대부터는 미국의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하고 백악관에서 여러 차례 연주하였다. 이스라엘에서는 주빈 메타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은 물론 미샤 마이스키와의 교류도 이루어진다. 그는 네 살 때 앓은 소아마비로 연주는 앉아서만 할 수 있다. 그는 주로 솔로 연주가로서 활동하였으나 1990년 12월 레닌그라드에서 열린 차이콥스키 150주기 기념 연주회에서 요요 마와 제시 노먼, 상트페테르부르크 오케스트라의 명지휘자 유리 테미르카노프와 함께 연주하는 등 여러 차례 협연을 가졌다. 그는 늘 고된 형편에 어릴 때부터 라디오를 통해 들은 야사 하이페츠의 바이올린 연주에 매료되어 꿈을 품었나 보다. 13살 미국으로 건너가 이듬해인 1958년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하였다.
당시 이작 펄만과 나는 리투아니아 태생의 유대계 바이올리니스트 하이페츠의 연주를 들으며 예술적 감성에 젖었던 동시대인이다. 6·25 직전까지 서울 충무로에서 살면서 남산 기슭 명동 성당 계성유치원에 다닐 때였다. 세브란스에 다니던 큰형이 테잎 축음기에 가족들이 둘러앉아 맨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을 듣던 다다미방의 아련한 기억이 새삼 사무친다.『이차크의 행복한 바이올린』은 천재적인 바이올린 실력으로 바흐로부터 맨델스존과 비발디, 시트라우스와 모차르트, 브루흐와 챠이코프스키에 이르기까지 거침없이 활로 현을 훑어 나갔다.『이차크의 행복한 바이올린』은 ‘이차크 펄만’의 삶을 꿰뚫어보는 다큐멘터리다. 줄리아드 음악학교 시절 만난 훌륭한 스승이자 평생 동반자인 아내, 토비 프리드랜더와 결혼하여 음악과 더불어 살아간다. 토론할 수 있는 주변 친구들, 그리고 ‘펄만 프로그램’을 통해 교류하는 제자들까지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수다스러움과 유머라는 무기를 장착한 ‘이작 펄만’은 무엇보다 유대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이 뚜렷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난 이작 펄만의 연주로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 바이올린 솔로곡을 연주하여 세계의 눈과 귀를 모았다. 세계적인 첼리스트로 손꼽히는 ‘요요마’의 음악 여정을 담은 <요요마와 실크로드 앙상블>에 이어 만나면 좋을 다큐멘터리의 매력이다. 클래식 외에도 재즈 등 다른 장르의 곡을 연주 하였으며 영화 음악에도 다양하게 참여했다.
그가 참여한 영화음악은 존 윌리엄스가 음악 감독으로 연출한 1993년작 영화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 1993)를 꼽을 수 있다. 1966년 이작 펄만은 음악 동지이자 아내와 결혼하여 5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차크와 메도마운트 음악학교의 동기로 만난 그녀는 그의 연주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한다. 그가 라벨의 ‘치간’을 연주하는 것을 보고는 청혼을 했단다. 이차크와 연인이 된 후 토비는 그에게 음악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이차크는 그녀의 영향으로 음악 세계를 넓힐 수 있었다. ‘남편의 음악을 들으면 숨을 쉬는 것 같다’고 말하는 토비와 이차크가 어떻게 사랑의 결실을 이루며 서로를 성장하게 만드는 동반자가 된 인연을 영화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2007년 5월 7일 백악관에서 열린 엘리자베스 여왕 초청 연주회에 이어 1995년에 아내와 함께 펄먼 뮤직 프로그램을 설립하고 젊고 유망한 연주가들에게 여름 동안 숙식을 포함한 실내악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그의 공식적인 데뷔는 1963년 카네기 홀에서 비니오스키 콘체르토(Wieniawski Concerto) F샾 단조를 연주했으며 레벤트리트(Leventritt) 대회에서 상을 타 레오나드 벤스타인이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한다. 다음해 그는 프로듀서 솔 휴록(Sol Hurok)에게 발탁되어 세계 순회연주에 나선다. 그 당시 그는 RCA레코드사와 녹음하기 시작했으며, EMI, 소니, 텔덱 등과도 음반계약을 맺었다. 그 후 30년 동안 녹음한 그의 음반은 베토벤, 브라암스, 시벨리우스, 멘델스존, 베르그의 콘체르토와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트리오, 드보르작의 소나티나, 파가니니의 카프리체 등 셀 수 없이 많다.
그는 가르치는 일에도 몸을 담아 1975년에는 브루클린 칼리지의 학과장이 맡았다. 그는 1970년대에는 TV프로그램에 정기적으로 출연하였고, 세서미 스트리트, 투나잇 쇼, 데이빗 레터맨과 미국 공영방송 PBS의 특집에 출연하게 된다. 또한 백악관 연주회에서도 자주 연주하였다. 레이건 행정부를 거쳐 오바마 취임 때까지 많은 연주를 하였다. 1986년 레이건은 그에게 미국을 위해 공헌한 이민자에게 주는 자유의 메달(Medal of Liberty)를 수여했다. 1990년까지 이작 펄만은 세계의 거의 모든 유명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였고, 그 대부분을 음반으로 출시했던 EMI와 계약하여 출판하였다. 1994년에는 PBS에서 루치아노 파바로티, 호세 카레라스, 플라시도 도밍고가 출연한 “Three Tenors, Encore!”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진행을 맡았으며 1995년에는 PBS의 ‘In the Fiddler's House’라는 ‘위대한 연주’ 시리즈를 제작하였다. 최근에는 2000년 탱글우드 페스티발에서 보스톤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모차르트 교향곡 29번과 브람스 교향곡 4번을 연주하였다. 이작 펄만의 바이올린은 '명품의 대명사'로 17세기 이탈리아의 현악기 장인인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가 1714년애 제작한 스트라디 바리우스 바이올린을 소개하기도 했다. 83분 러닝타임 동안 이차크 펄만의 탁월한 바이올린 연주는 인간 경험의 심연을 울리며 감동과 흥분으로 이어졌다. “최고의 연주자 99%는 노력으로 탄생한다.”고 한 이작 펄만의 말은 발명왕 에디슨에 못지않았다. 뉴욕 타임즈는 이작 펄만의 연주를 두고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연주할 수 있는 바이올리니스트!”라고 격찬한 외신 내용을 전단지가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