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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복고 왕정(2)
제1차 왕정복고
세기의 독재자 나폴레옹과 그의 제국이 몰락하자 유럽 전체는 해방과 승리의 환성을 울렸다. 프랑스 국민도 패전의 쓴 잔보다 압정의 짐을 벗어버린 해방감에 들떴다. 프랑스 국민은 20여 년간의 혁명과 전쟁으로 약 200만 명의 인명 피해를 입고 경제생활도 날로 궁핍해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들은 평화와 자유 그리고 징발의 종결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무너져 폐허가 되어버린 프랑스 제국의 어디에서 어떻게 새 평화와 자유를 찾아야 할지 몰랐다. 모든 것은 막연하고 확실치 않았다. 전쟁은 끝나고 평화가 찾아온 것은 분명했으나 이 평화는 새 질서 위에 수립될 것인데 그 새 질서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는 분명하지 않았다. 갑자기 찾아온 평화는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을 안고 있었다.
연합군의 주요한 과제는 유럽 전체에 새 질서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유럽에 새 질서를 수립하는 첫째 조건은, 프랑스가 다시는 유럽의 평화를 깨거나 위협하지 못할 정부 형태를 결정하고, 프랑스에 의해 마구 그어졌던 영토상의 국경을 새로 변경하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새 정부 형태에 관해서는 연합국이 샤티옹 회의에서 이미 논의한 바 있었다. 첫째 혁명적 성격을 띠는 공화정의 수립은 어떤 형태의 것이든 영국이 강력히 반대하였다. 공화정과 보나파르티슴을 반대하는 데는 연합국 사이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으나 적극적으로 어떤 형태의 정부를 수립할 것인가에는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다만 프랑스 국민이 장래의 정부를 결정한다는 데에만 합의한 상태였다. 이 합의는 연합국이 국민주권의 원리를 시인한 것으로서 크게 주목할 만한 사실이었다. 이러한 갑작스런 변화 앞에서 어리둥절해 있는 프랑스 국민 앞에 나선 사람은 바로 탈레랑이었다.
탈레랑은 루이 18세를 자칭하는 프로방스 백작을 왕위에 앉혀서 부르봉 왕가를 복귀시키는 것 외에는 프랑스의 질서와 정치를 보장할 길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의 생각에 크게 반대한 자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트르 1세와 프랑스의 원로원이었다. 알렉산드르 1세는 프로방스 백작의 사람됨을 의심하였고, 원로원은 보나파르트파의 소굴이었다. 그러나 탈레랑은 알렉산드르 1세와 원로원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였다. 나폴레옹이 퇴위하는 날짜로 루이 스타니슬라스 그자비에(Louis Stanislas Xavier) 프로방스 백작은 루이 18세로서 프랑스의 왕이 되었다. 당시의 복잡한 사정 가운데서 연합국 사이에 최소한의 의견 일치를 볼 수 있고 또 프랑스 국민의 최소한의 합의를 얻을 수 있는 해결책은 사실 부르봉 왕가의 복구 이외에 달리 신통한 길이 없었다. 이때부터 50여 년 후 나폴레옹의 조카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Chales Louis Napoleon Bonaparte, 나폴레옹 3세) 제2제국이 무너졌을 때 임시정부의 수반이었던 티에르(Louis Adolphe Thiers)는 프랑스 국민의 분열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길은 공화정의 수립밖에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프랑스 제1제국이 무너졌을 때는 부르봉 왕가의 복구밖에는 프랑스 국민의 최소한의 합의를 얻을 길이 없었던 것이다.
나폴레옹의 실각 이후 몇 달 사이에 어려운 문제들이 신속히 해결되었다. 5월 1일에는 프랑스와 연합국 사이에 파리조약이 조인되고, 5월 3일에는 망명했던 루이 18세가 파리에 입성하고, 6월 4일에는 헌장(Chartre)가 반포되었다.
파리 조약은 프랑스의 국경을 혁명이 일어난 1789년 당시의 것으로 환원하였다. 식민지도 몇 개의 섬 이외에는 혁명 전의 것을 모두 그래도 보유하게 하였다. 프랑스는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지도 않았고, 연합군이 프랑스에 주둔하지도 ㅇ낳았다. 파리 조약은 패전국인 프랑스로서는 고맙게 받아들일 만한 너그러운 것이었다. 후일 탈레랑이 말한 바와 같이, 그 조약은 당시의 사정이 허락하는 한도 안에서 프랑스에 가장 유리한 것이었다.
루이 18세가 반포한 헌장은 국민대표가 제정한 헌법이 아니라 왕이 국민에게 내리는 흠정헌법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는 하나, 왕정의 복구가 혁명 전의 앙시앵레짐의 복구를 의미하지 않음을 보장하였다. 사반세기의 혁명이 이뤄놓은 것을 깡그리 없애버릴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 헌장은, 법 앞에서의 만인의 평등, 재능에 따르는 취업의 자유, 재산에 비례하는 납세, 관권의 자의적인 억압과 체포로부터의 자유, 종교와 출판 및 언론의 자유, 소유권의 불가침성 등을 보장하였다. 특히 중요한 것은 혁명정부가 교회와 망명 귀족에게서 몰수한 국유재산과 국민이 정부로부터 구입한 재산도 다른 재산과 마찬가지로 그 소유권이 보장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헌장은 나폴레옹 치하에서 국가가 국민에게 진 빚의 반제를 약속하고, 강제 징병제를 폐지하며, 나폴레옹이 멸시했던 정치적 자유의 문제도 해결할 길을 찾으려고 하였다. 이러한 헌장은 당시 유럽에서는 영국 이외의 어느 나라의 것보다도 가장 ‘리버럴’한 것이었다.
루이 18세는 제도상 적어도 양원제 의회에 기반을 둔 입헌군주로서 복귀하였다. 입법부는 대의원(Chambre des deputes)와 귀족원(Chambre des pairs)으로 구성된 양원제였다. 상원인 귀족원 의원은 왕이 임명하고, 하원인 대의원 의원은 제한선거에 의해 선출되었다. 하원의 선거인 자격은 300프랑 이상의 직접세를 납부하는 30세 이상의 남자에 한했고, 피선거인 자격은 1,000프랑 이상의 직접세를 납부하는 40세 이상의 남자에 한했다. 상원 의원은 세습이고, 하원 의원의 임기는 5년인데 매년 5분의 1씩 개선되었다. 내각은 왕이 임명하되 의회에 책임을 졌다. 따라서 의회가 내각을 불신임할 수는 있었으나, 왕은 의회 해산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상과 같은 골격의 정부 형태는 1789년의 이념을 일단 긍정한 것으로서 낡은 프랑스와 새 프랑스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최소한의 표현이었다. 그것은 프랑스 국민의 착잡한 이해관계와 국가적 통일을 강화시켜보려는 의도의 일환이었다. 프랑스는 이제 장래를 낙관해도 무방하였다. 연합국도 프랑스 국민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폴레옹을 항복시킨 연합군도 모두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실은 헌정상의 조화와 국민 간의 현실적 대립 사이에는 큰 거리가 있음이 입증되었다. 프랑스 왕국의 통일과 프랑스 국민의 조화의 징조로 수립된 부르봉 왕가가 헌장이 선포된 지 1년도 못 되어 아침 이슬처럼 맥없이 쓰러졌던 것이다. 나폴레옹이 유배지 엘바 섬을 탈출하여 리비에라 해안에 상륙한 것은 1815년 3월 1일 오후 3시였고 그가 파리에 입성한 것은 3월 20일 밤 9시였는데, 그 사이에 그는 아무 저항도 받지 않았다. 루이 18세가 급파한 군대도 “나는 황제다, 알겠나”라는 나폴레옹의 한마디 앞에 “황제 만세”를 외쳤다. 루이 18세는 3월 19일 총총히 파리를 탈출하여 벨기에로 도망갔다. 이른바 나폴레옹의 ‘백일천하’가 시작되었다. 부르봉 왕가의 국민적 기반이 얼마나 허약했는가가 여지없이 드러났다. 나폴레옹의 재집권은 100일을 넘기지 못하지만 그를 다시 실각시킨 것은 프랑스 국민이 아니라 연합국 군대였다. 나폴레옹이 다시 실각한 후 루이 18세가 망명지에서 다시 파리로 돌아와 왕위를 계속 유지하게 되지만 그의 복위를 가능하게 한 것도 프랑스 국민이 아니라 연합국 군대였다. 이렇게 볼 때 1814년의 복고 왕정은 겉으로는 프랑스 왕국의 통일과 프랑스 국민의 조화를 실현한 것 같았으나 실은 그렇지 못하였다. 복고 왕정이 1814년에 직면한 과제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건만, 부르봉 왕가는 그 난제를 짊어질 만한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당초 부르봉 왕가의 복구를 반대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들(부르봉 왕가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안다면 왕관의 책임이 그들과 같은 사람들에게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었다. 이 말이 옳다는 것이 이제 입증된 셈이었다.
루이 18세와 그의 측근들은 프랑스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시기에 외국에 망명하여 프랑스의 실정에 어두웠을 뿐만 아니라, 혁명과 제국이 이룬 영광스런 업적을 정당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를 이를 무시하고 혐오하엿다. 그것은 혁명과 제국에 직접 참가한 프랑스 국민에게는 고약하고 부당한 일이었다. 새로운 프랑스의 건설이라는 위대한 역사적 과업에 피와 땀을 쏟고 있었을 때, 외국에 망명하여 새 국가 건설을 반대하고 국민으로부터 멸시와 지탄을 받고 외국 땅에서 초라하게 살던 자들이 사반세기나 지나서 조국으로 돌아와서는 적반하장으로 혁명의 업적을 무시하고 혐오하다니, 그뿐만 아니라, 25년간이나 정반대의 생활환경에서 산 부르봉의 귀환자들과 프랑스 국민 사이에는 외국인들 사이에 느끼는 서먹서먹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샤토브리앙은 프랑스 왕실에 관한 책을 저술했을 때 마치 중국 황실을 설명하는 기분이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국왕과 국민 사이의 서먹서먹함은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약점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유럽 정치 문화의 전통에서는 외국인을 왕으로 추대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잘 알고 있듯이 영국 왕실은 독일 하노버 왕가의 조지 1세에서 시작했고, 영국의 명예혁명에 의해 군림한 오렌지 공 윌리엄 3세(William III of Orange)는 네덜란드 사람이다. 조지 1세나 윌리엄은 영어를 모르는 완전한 외국인으로서 국민과의 관계가 서먹서먹했지만 곧 쉽게 친근해질 수 있었다. 이러한 조건에 비하면 루이 18세의 경우는 훨씬 유리한 편이었다. 그는 외국인이 아니었다. 외국인 왕도 곧 쉽게 국민과 친근해질 수 있다면 루이 18세는 한결 더 쉽게 그 국민과 친근해질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런 일을 해낼 만한 인물이 못되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국민의 존경을 받을 만한 경력도 매력도 없었고, 나폴레옹과 같은 군사적 영광이나 정치적 업적도 없으면서 나폴레옹의 치적을 곧잘 무시하였다. 루이는 프랑스 국민이 평화를 수락한 것은 전쟁이 싫어서였고 자신을 왕으로 받아들인 것은 당시 사정으로서는 별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에 순수한 왕당파는 그리 많지 않았다. 따라서 프랑스 국민으로 하여금 새 왕정에 충성심을 품게 할 적극적인 계기가 마련되지 않는 한, 왕정에 대한 국민들의 서먹서먹한 태도는 비난으로 악화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국민의 충성심을 왕에게 돌리게 할 만한 적극적인 동기는 생기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첫째, 제대 군인, 귀환 포로, 나폴레옹 제국에서 일하던 관리들의 불만이 커져 갔다. 이들은 당장 직장이 없었다.
둘째, 헌장의 보장에도 불구하고 혁명으로 획득한 재산과 권리가 수포로 변할지도 모른다는 국민의 불안과 공포가 커져갔다. 루이와 함께 망명생활에서 돌아온 많은 귀족은 지난 25년 사이에 ‘잊은 것도 배원 것도 없는’ 자들로서 역사적 변화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혁명 이전의 토지와 권리와 특권을 되찾으려고 날뛰었던 것이다. 혁명의 결과를 유지함으로써만 안심할 수 있는 대다수 국민에게는 망명 귀족의 그러한 태도가 몹시 불안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왕이 하사한 헌장에는 모호하고 의아스러운 대목이 많다는 사실이 비판되면 될수록 국민의 불안이 더해졌다.
셋째, 왕과 그의 대신들의 우매한 실수가 급격한 변화에 자극된 국민의 긴장과 불안과 공포를 더욱 격화시켰다. 예를 들면, 루이 18세가 국민에게 보내는 첫 선언에서 자기가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총 다음으로 영국 왕의 덕분이라고 했다든가, 국왕이 최초로 행한 공식 행사가 연합군의 사열이었다는 것 등은 프랑스 국민의 국민적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다. 또 왕의 질녀, 즉 루이 16세의 딸이 망명길에서 파리로 돌아올 때 상복을 입었다든가 하는 것도 파리 시민을 매우 불쾌하게 하였다. 거기에다가 유럽을 정복했던 삼색기를 없애고 부르봉 왕가의 가기(家旗)인 백색기를 국기로 부활시켰다. 심색기는 혁명을 상징하고 백색기는 혁명의 부정을 의미했다. 이 국기 문제는 앞으로 19세기에 정치적 변화가 일어날 때마다 제기되는 문제가 되었다. 백색기의 부활과 함께 앙시앙레짐의 낡은 상징들과 예의범절이 많이 부활하면서 불안한 국민을 한결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넷째, 경제정책에서 대륙봉쇄의 철폐에 따라 관세장벽이 낮아져서 영국 상품이 대량 유입하여 국내 산업에 압박을 가하고 술이나 담배 등에 과하는 간접세(droits reunis)의 폐지 약속을 지키지 않고 계속 징수하는 데에 대한 국민의 불평이 높아지고 있었다.
그러한 판국에 1814년 12월에는 혁명기에 국가가 몰수했다가 아직 처분되지 않은 국유재산을 본래의 소유주에게 반환해주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이것은 중세에 허덕이는 국민에 대한 우롱일뿐만 아니라 앞으로 혁명의 결과를 모조리 무효화시키려는 망명 귀족의 음흉한 의도를 표출한 것으로밖에는 달리 해석할 길이 없었다. 국민의 불만과 불안은 날로 커가기만 했는데 국민의 정당한 의사를 표시할 언론은 계속 정부의 검열에 묵여 있었다. 그만큼 국민의 불만은 소리없이 누적되어 갔다.
나폴레옹 실각 후, 프랑스의 모든 환경은 왕을 중심으로 한 새 지도층의 현명한 지혜와 고도의 정치 기술을 요구하고 있었지만 왕과 그의 정부는 그러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왕 개인의 의도는 현장을 지키고 평화를 유지하려는 데 진지했으나, 그는 혁명의 벗과 혁명의 적을 연결시키는 다리로서의 지혜와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비록 그의 역량과 리더십이 모자라고 국민의 불만이 커지고 있었더라도 복고 왕정을 전복하려는 음모나 국민 봉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또 갑작스런 어떤 변화가 일어날 형편도 아니었다. 루이 18세가 파리를 떠나 벨기에로 도망해야 했던 이유는 오로지 군대의 충성을 얻지 못한 데에 있었다. 군대의 충성만 얻었더라면 능히 나폴레옹을 무찌를 수 있었다. 복고 왕정과 군대의 관계는 매우 복잡했다. 루이가 물려받은 군대는 패전에 실망하고 평화조약에 불만을 품은 군대인 데다가, 20만의 제대 군인은 일자리가 없어 방황하고 잇었고, 1만 3,000명의 퇴역 장교는 연금이 형편없어 초라한 생활을 해야 하는 한편 경찰의 감시마저 받고 있었다. 특히 그들의 분노를 자극한 것은 삼색기의 폐지와 왕당파 군벌의 탄생이었다. 그들은 삼색기를 앞세우고 유럽 천지를 누빈 영웅들로서 삼색기의 폐지는 자기들에 대한 하나의 큰 모욕이라고 격분하였다. 그리고 혁명군에도 나폴레옹 군대에도 복무한 일이 없는 왕당파 가운데서 새 장교들을 임명하여 옛 군벌을 다시 조직하려는 움직임도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이 군대의 재편성에 1,000만 프랑이라는 막대한 세출을 낭비하고 있었다.
군대의 불만이 이러하였으니,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한 후 그에게 대항하도록 파견한 정부군이 나폴레옹의 개인적 위엄 앞에 굴복하고 또 많은 옛 부하들이 그를 다른 것은 별로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