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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진의 문학 향기] 사과와 배
1937년 7월7일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가 출생했다. 시오노 나나미는 자신의 `로마인 이야기`를 ``소설로 읽어 달라``고 공언한 것으로 알려진다. 소설 `삼국지연의`가 정사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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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7월 7일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塩野七生가 출생했다. 시오노 나나미는 자신의 저작 《로마인 이야기》를 “소설로 읽어 달라”고 공언한 것으로 알려진다. 소설 《삼국지연의》가 정사 《삼국지》와 크게 다른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녀의 발언은 아주 적절했다고 하겠다.
그런데 서양과 일본에서는 알 수 없으나 우리나라에서는 《로마인 이야기》가 ‘소설’ 아닌 ‘역사서’로 소개된다. 대형 인터넷서점의 누리집들을 검색해보면 ‘이 책이 속한 분야 : 역사/문화 > 서양사 > 유럽사 > 로마사’로 나오는 곳도 있고, ‘역사/문화 > 서양사 > 국가별 역사/문화’ 또는 ‘역사/문화 > 세계사 > 건국사/멸망사’로도 나온다. ‘이 책의 주제어’로 '유럽사, 로마사'를 제시하기도 한다. 이는 “소설로 읽어 달라”는 저자의 말과 전혀 다르다.
물론 소설과 역사서를 구분하지 못한 최종 책임은 독자에게 있다. 조선 시대에 소설을 낭독해주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어떤 전기수傳奇叟가 너무나 실감나게 악행 장면을 읽어준 나머지 진짜 나쁜 사람으로 오인받아 그 자리에서 맞아죽은 사건을 예로 들어보자. 전기수 본인은 훌륭한 예인이었을 뿐 아무 죄가 없지만 그를 죽인 사람은 그저 살인자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휴가를 나온 프랑스 군인이 배우를 사살한 사건이 있었다. 군인은 연극 관람 중 질이 낮은 남자배우가 여성을 괴롭히는 장면을 현실의 일로 착각한 나머지 “수많은 청년들이 전쟁터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후방에는 저런 나쁜 작자가 멀쩡하게 활개를 친단 말인가!” 하고 분노에 찬 방아쇠를 당겼다. 그 군인 역시 살인자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로마인 이야기》를 ‘로마사, 유럽사, 세계사, 건국사, 멸망사’ 등으로 소개한 분류는 잘못이다. ‘사史’를 붙였다는 것은 독자에게 역사서로 읽으라는 주문을 한 것이다. 역사서가 아닌 책을 역사서로 읽으라고 하는 것은 수기를 소설로 읽으라고 하는 것과 같다.
김동리 〈까치소리〉와는 이야기가 다르다. 〈까치소리〉는 “단골 서점에서 신간을 뒤적이다 〈나의 생명을 물려 다오〉 하는 얄팍한 책자에 눈길이 멎었다. ‘살인자의 수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 생명을 물려준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중략) 나는 그 책을 사왔다. 그리하여 그날 밤, 그야말로 단숨에 독파를 한 셈이다. 그만큼 나에게는 감동적이며, 생각게 하는 바가 많았다. (중략) 거의 그대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로 시작한다. 김동리는 자신의 소설에 최대한 사실감을 불어넣기 위해 기교를 부렸을 따름이다. 김동리는 아무 죄가 없다.
그에 견주면, 《로마인 이야기》를 역사서로 소개한 사람에게는 '죄'가 있다. 독자들은 《로마인 이야기》는 재미로 읽고, 역사 공부를 위해서라면 학자의 학술서를 따로 탐독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로마인 이야기》가 역사서보다 격이 낮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누군가는 사과를 좋아하고, 누군가는 배를 좋아하듯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