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진리를 찾지 못한 썬다 싱의 마음은 더욱 분열과 충돌과 번민으로 들끓었다. 그는 갑자기 모든 것을 단념해 버리고 자살을 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구하는 평화를 얻지 못하면 차라리 자살을 해서 저 세상에 가서 구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생사의 기로에 서서 단호하고 비장한 마음으로 신에게 매달리며 절박하게 간구했다.
“이 천지간에 신이 있거든 소원을 이루어 주소서.
저에게 바른 길, 참 도를 가르쳐 주소서. 만약 당신께서 나타나 저를 붙들어 주지 않으시면,
저는 아침 첫 특급 열차가 지날 때 레일 위에 저의 목을 깔고 자살할 것입니다. 그러하오니 신이시여, 참으로 당신이 계신다면 제게 나타나셔서 이 암흑의 공포를 거두어 주시고, 저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그리스도의 현현
1904년 12월 18일, 자정 무렵이 되자 그는 밖으로 나와 찬물로 온 몸을 깨끗이 씻었다. 그리고는 단정히 앉아 생의 마지막 기도를 드렸다.
달도 어느덧 서편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죽음의 순간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얼마 후면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썬다는 등에 땀을 흘리면서 최후의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새벽 4시 30분쯤 갑자기 방안 가득히 강렬한 빛이 비쳤다. 썬다는 불이 났는가 하다가 곧 신이 응답을 보내 주신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계속 기도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그 찬란한 광채 속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영광과 사랑이 넘치는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
며칠 전까지만 해도 모욕을 가했던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가!
그는 거의 정신을 잃을 뻔했다. 그 때 그 빛 속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썬다야, 너는 왜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너와 전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나의 생명을 버렸단다.”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쓰러지듯 예수님 앞에 꿇어 엎드렸다. 그리고 이때까지 얻지 못했던 놀랄 만한 평안을 얻었다. 참으로 오랫동안 갈망했던 행복을 얻게 된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리이심을 깨달았다. 썬다가 일어났을 때 예수님의 거룩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썬다 싱의 마음에는 평안과 기쁨이 가득 찼고, 그 후로 언제까지나 남아있게 되었다.
썬다 싱의 신앙관
(1). 종교 사상
1. 그리스도 중심 사상
기독교의 뿌리가 그리스도에 있는 것 같이 크리스챤 사두의 종교사상도 그 중심이 살아 계신 그리스도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석가나 공자와 같이 역사적 과거의 성인이 아니요 그는 살아 계신 신이다. 다른 성현들 같이 그 끼친 바가
서적이나 교훈에 의하여 간접으로 그 진리를 받는 것이 아니요 그와의 영적 교통에서 직접 참 생명을 얻는 것이다. 사두의
회개는 생존하신 예수의 계시에서 나온 것이요 그의 놀랄만한 활동은 살아 계신 주님의 섭리에서 전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사두에게 있어 생명의 전부요 생활의 전부이다 .
나는 어떠한 경우에 있든지 그이 앞에 있을 때는 말할 수 없는 평화에 충만하고 있다. 심한 핍박 중에서도 평화와 회열과
행복을 느끼고 아무도 내가 주 안에서 얻은 기쁨을 빼앗을 자는 없다. 집에 있어도 거기 있고 옥에 있어도 거기 있다.
그에게는 옥도 천당으로 변하고 십자가는 은혜의 근원이 되었다. 다만 나의 마음을 천국으로 변케한 주님만을 요구한다.
그의 무한한 사랑은 다른 모든 사랑을 쫓아버렸다. 많은 신자들이 이 거룩한 생명을 체험치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그
머리와 성경 중에만 살아 있고 마음 가운데 살아 계시지 않은 까닭이다. 사람은 그 마음을 바치는 데서만 그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은 왕의 왕인 임금의 보좌이다.
2. 평화
마음의 참 평화를 얻은 것은 인생의 궁극적 희망이다. 그는 인도의 종교에서 이것을 얻고자 하였으나 얻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본 그 순간에 생각도 못한 없는 평화를 얻었다. 그는 진리요 생명이요 평화의 샘인 까닭이다.
그리스도의 임재, 이는 땅 위에 오신 天國이다. 세상이 줄 수 없고 빼앗을 수도 없는 한없는 기쁨이 그로부터 넘쳐
흐른다. 그는 큰 바다 속과 같은 평화가 항상 마음에 충만하고 있다.
그 전기의 저자 스트리타 박사는 「썬다싱과 한 시간 같이 있으면 잊을 수 없는 평화와 기쁨의 인상을 받는다. 하나님의
평강은 그의 얼굴에서 빛나서 곁에 있는 사람까지도 감화한다. 하늘은 벌써 그의 지상 생활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
고 기록하였다. 그리스도의 내재! 이것은 그 마음에 열린 天國이다 (눅 十七21).
「사두-」는 이 평화를 많은 사람에게 자각 시키고 체험케 하는 것이 그의 큰 사명의 하나라고 말하였다.
「이 평화를 얻은 사람에게 향하여는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라고 권할 필요가 없다. 누구나 이것을 받으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표현할 말이 없다 하였다.
「나는 이 놀랄만한 평화를 말하려고 하지만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표현할만한 말을 발견치 못하였다. 그러나 사람이 영의
눈이 뜨일 때면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보일 수도 없고 숨겨진 만나다.」이것은 체험으로 알 것이요, 말로 알 것이
못된다.
나는 티베트에서 놀랄만한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의복을 벗고 나에게 심한 상처를 보였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주를 위하여
이 같은 핍박을 받았으나 그 때에 몹시 기쁘다고 아래 같은 회심담을 증거하였다.「나는 처음 순교하는 사람을 보았다.
그가 심문을 받는 그 심한 고통 중에서도 그 얼굴에 나타나는 평화의 기쁨을 볼 때 누구나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라마승은 이것을 악귀의 소위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악귀가 이런 기쁨을 줄 힘이
있다면 나는 그것을 빌겠다. 이같이 생각하고 나는 기독교신자가 되었다. 그 순교자는「칼타-싱」이다.」
이같이 모든 신자에게 공개된 평강과 기쁨의 무한한 행복이 그 얻을 수 있는 범위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모르고
지나는 것은 마치 보배 무덤 위에서 죽은「네팔」의 거지와 같다고「사두-」는 안타깝게 말하였다. 그 평화는 十자가의
고통 속에 더 많은 축복이 숨어 있다. 예를 들면 그가「티베트」의 송장굴에 들어 갔을 때와「네팔」에서 거마리를 씌울
때 왠일인지 그 까닭을 알 수 없으나 한없는 평화가 심중에 솟아 올라 찬송이 입에서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한다.
3. 십자가
十자가는「사두-」의 가장 애착심을 끄는 신비한 은혜의 상징이다. 이는 자기를 괴롭게 하여 공적을 쌓으려는 고행과는
다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고「사두-」는 이를 영광과 감사와 즐거움으로 짊머진다.
그는 말하기를「十자가는 호도와 같다. 한없는 고통과 핍박에 거죽은 쓴 듯하나 그 속은 단맛이 있다. 十자가의 거죽은
못이 가득한 듯하나 그 속에는 큰 축복이 숨어 있다.」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十자가와 같은 것은 없다. 신은 이 十자가로 그 사랑을 人間에게 보였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이 사랑에 대하여 모르고 있다. 우리는 땅 위의 짧은 생애 중에서 十자가를 질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 이것은 땅위에 다시
돌아 올 수 없는 까닭이다. 나는 확신으로써 말할 수 있다. 十자가는 十자가를 진 사람을 끌어 올려 주의 앞에 까지 이르게
한다.」
그는 十四년 동안 人間의 당치 못할 많은 고난을 겪었으나, 十자가 고통의 뒤에 숨은 축복을 맛 본 경험에서 이같이 말한다.
「나를 위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모든 악하다 하는 거짓말로 비방하면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마 五11) 한 주의 언약을 나는 완전히 체험 하였다.
그는「네팔」의 옥중에 갇혔을 때 성경 첫 페이지에 이같이 썼다.「네팔」! 一九一四년 七월 七일! 그리스도의 임재가 나의
감옥을 변하여 축복의 천국으로 만들었다. 하물며 이 후에 하늘에 갈 때에는 그 축복이 어떠할까!」그는 십자가의
고통을 분담하는 것으로 一生의 의의를 삼았다. 간데마다 환영하고 성자라고 떠들고 존경하는 구미여행은 그의 즐겨하는
바가 아니요, 눈쌓인 「티베트」가 나의 갈 곳이라 하며 十자가를 찾아 갔다. 그러므로 그는 핍박 받고 끝까지 주를 증거
하다가 죽은 모든 순교자에 대하여 비상한 애착심과 흥미를 가지고 있다. 그 자신도 순교로서 끝마치기를 원했다.
파리에 갔을 때 무엇을 보고 싶으냐하고 물으니「이 나라의 종교와 순교자에 관한 것을 보고자 한다.」고 대답하였다.
「루-풀」박물관에 안내하니 그는 속히 보고 지나다가「세바스티안」이 화살에 맞아 죽고 있는 그림에 대하여는 주의를
끄는 모양이었다. 거기는 「밀레」의 만종, 기타 유명한 종교화가 있었지만 후에 이것을 「루- 풀」에 있는 최상의
그림이라고 말하였다. 여기 또 그가 큰 흥미를 가지고 늘 이야기하는 순교미담이 있다.「한 신자가 「티베트」에서
전도하였다. 그는 허다한 모욕을 받으면서 굴하지 않고 핍박에 저항하여 복음을 선전하였다.
그 때 사람들은 칼을 가지고 그의 피부를 째고 그 속에 지리 화약을 넣고 그 후에 소금을 쑤시어 넣었다. 그는 그런
고통에도 깜짝 하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앞서는 사단이 그 화살을 갑지고 나를 괴롭게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는
나의 상처를 고쳐주셨다, 그들의 주는 괴롬은 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하였다. 저들은 다시 고형을 더하려고 그의
가죽을 칼로 벗겼다.
그러나 그는「나는 제군에게 감사한다. 나의 낡은 가죽을 베끼면 얼마 안 되어 나는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게 될
것이다.」하고 그는 아직 남은 의식으로 주를 찬미하고 있었다. 그들은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그를 불 가운데 던져 버렸다.
그러나 그는「나를 불 가운데 넣은 것을 감사한다. 불꽃은 나로 하여금 높이 곧게 하늘에 올라 가게 한다.」고 말하고,
핍박자를 위하여 기도하며 기뻐하는 가운데 그 영을 하나님께 부탁하였다.
4. 三 位 一 體
三位一體의 사상에 대하여「사두-」는 입신의 체험으로 이같이 말하였다. 「어떤 때 나는 三位一體의 교리에 대하여
적지않은 곤난을 당한 일이 있다. 나는 三位가 다른 인격이 세 자리에 앉아 있는줄 생각하였더니 入神의 경험에서 이것을
밝히 알았다. 나는 입신으로 제 三天에 들어 간 때 이것은 바울이 이끌리어 올라 간 곳과 같은 것을 알았다. 나는
그리스도가 영광 있는 영체로 보좌에 앉으신 것을 보았다. 언제든지 내가 그 곳에 갈 때는 항상 한가지 모양이었다.
그리스도는 늘 中心인데 입으로 말할 수 없고 붓으로 그릴 수 없는 용모이시다. 그 낯빛은 햇빛과 같이 빛난다.
그러나 보기에 눈이 부신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곤란 없이 그 거룩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우러러 볼 수 있다.
항상 사랑이 충만하여 영광스런 미소가 넘치고 있다. 처음 내가 주를 볼 때 주와 나의 사이에는 어떤 옛적부터 있었던
관계가 있는 것을 느끼었다.」
그는 말하되「나는 그다. 나로 말미암아 너는 지음을 받았다.」고 말씀하였다. 그러나 말로서 한 것은 아니다. 나는 몹시
오랫동안 이별하였던 아버지를 만난 것과 같은 극히 강한 느낌을 가졌다. 나의 옛 사랑이 마음에 돌아 와서 나는 전부터
그의 종인 것을 알았다.「내가 처음 천계에 갔을 때 둘러 보고 「그런데 하나님은 어느 곳에 있는가」고 물었다.
그들은 대답하기를「하나님은 땅 위에 있을 때와 같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신은 무한인 까닭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계시다. 그는 신이다.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를 통하여서만 우리들이 신을 볼 수 있는 것은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한가지이다」.
「나는 또 빛난 물결 같은 조류가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와 평화를 주며 성도와 천사의 사이를 지나 어느 때에든지 신선한
생명을 보내는 것이 마치 여름 더운 날에 물이 모든 나무에 새로운 생기를 주는 것과 같은 광경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성신인 것을 이해하였다.」그는 다른 데서 성신을 인격으로 인식하였다.
5. 도성인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그 육체를 가지고 사람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사두-」의 도성인신을 설명하는 중심사상이다.「사두-」는 말하기를 "생명의 말씀이 육체로
나타난다든지 말씀이 육체 중에 들어 있다는 말에 대하여 나는 신이 육체를 쓰거나 인간의 형체를 쓸 필요가 어디 있는가
하고 종종 생각하였다. 내가 기독교신자가 되기 전에는 이 교리를 늘 비평하였다."
세상에는 수육의 교리를 곤난 없이 잘 믿는 신자가 여러 만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슨 필요로 육체까지 되었는지는
대개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수시로 신을 보고자하는 깊은 요구가 일어난다. 人間은 본능적으로 신을 보고자 한다.
우리는 예배할 때 신을 보려고 하나 신은 무한한 존재이다. 나는 우상숭배자를 향하여「왜 우상을 섬기느냐」고 물으니
그는 대답하기를「신은 무한이다. 그러므로 이 우상에 마음을 집중하여 예배하는 가운데서 무엇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
고 하였다,
우리는 사랑하는 신을 보며 신과 말하려고 원한다. 그러나 곤난한 것은 신은 무한하여 우리는 볼수 없다. 언제 우리가 무한한
자가 될 때에는 신을 볼 수 있을런지 모르나 현재 여기서 우리의 창조주인 아버지, 생명의 부여자인 신을 볼 수는 없다.
이것이 그가도성 인신하신 이유이다. 그가 제한 있는 인간의 형체를 쓰고 나옴으로 인간은 비로소 신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 十四 9)
「사두-」는 아래와 같은 예를 들어 이를 비유로 인증하였다.「카시밀에 수백의 양을 소유한 자가 있었다. 그 종이 양을
먹이려고 들에 갔다가 저물 때 온 것을 보니 양 세 마리가 없어졌다. 그는 종을 명하여 양을 찾아 오라 하였으나 종들은
들짐승을 무서워 가기를 싫어하였다. 자기가 친히 찾아가도 양이 그 모양을 알지 못하였으로 그는 양같은 모양을 하기
위하여 양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찾아 갔다. 어떤 양은 방황하고, 어떤 양은 상하여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양들은
그를 자기와 같은 양인줄 알고 뒤에 따라 왔다. 집에 와서그는 양의 옷을 벗어버렸다. 지금은 양이 아니오 사람이다. 그는
잃은 양을 찾기 위하여 양이 된 것이다. 그 같이 신은 사람이 아니다. 사람을구히가 위하여 사람이 되셨다.
「타밀」에서는 아래와 같은 비유로 말하였다.」
「회교도의 한 박학한 대신이 있었다.「팔레스틴」에 가다가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듣고 신자가 되었다. 귀국한 후 신자가
된 것을 선언하고 "나는 죄인을 위하여 세상에 오신 구주를 믿는다"고 세상에 발표하였다. 그 말을 들은 王은 「만일 내가
무엇을 하려면 종에게 명령하면 다 시행한다. 만왕의 왕이신 이가 명령을 내리면 인간은 구원될 것이다. 무슨 필요로
친히 육체를 쓰고 사람이 되셨느냐?」대신은 회답하기 위하여 하루의 여유를 청하고, 정교한 목수를 불러서 금년에
만 한 살 되는 王子와 같은 인형을 만들어 내일 가져 와라고 부탁하였다. 이튿날 王과 대신들이 작은 배를 타고 선유하였다.
王은 어제의 회답을 하라고 재촉하였다. 그때 목수는 인형을 안고 언덕에 서 있었다. 王은 내 아들인줄 알고 손을 내밀어
받아 안고자 하였다. 목수는 약속 받은대로 인형의 王子를 물에 떨어 뜨렸다. 王은 王子를 건지려고 친히 물 가운데 뛰어
들어 갔다. 얼마 있다가 대신은 王을 향하여 『전하! 당신께서 친히 물에 들어갈 필요는 없습니다. 신에게 명하시면
충분하지 않습니까?』하였다. 왕은 생각한 끝에『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이다』하였다. 대신은『사랑은 그와같이 신이 크신
능력을 가지면서도 다만 말로만 아니하고 세계를 구하기 위하여 친히 사람이 된 것입니다.』고 대답하였다.
이것이『사두-』의 수육에 대한 해석이다.
6. 죄
죄 문제에 대하여『사두-』는 아래와 같이 여러 가지 재미 있는 비유를 가지고 여러 각도로 설명하였다.
1). 죄는 자유를 빼앗는다.
『어떤 날 나는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문득 작은 새 한 마리가 아래로 똑똑 뛰어 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서서 그것을
향하여 주의하며 보았다. 놀랜 것은 그 밑에는 뱀이 있어 그 자석과 같은 인력을 가지고 새를 제 앞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뱀의 독하고도 취하게 하는 그 눈에 이끌리어 새는 무의식적으로 뱀의 앞에 까지 가까이 오게 되었다. 뱀은 새가 도망할 수
없이 자기의 것이 된 줄 알고 나아가 잡아 먹었다. 새가 멀리 있을 때는 도망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같이 사단이 달콤하고
유쾌한 길로 우리를 꾀어 이끌어 가려고 유혹한다. 이것을 면할 길은 하나가 있다. 그것은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로
들리는 것이다』
2). 죄는 양심을 마비시킨다
『만일 우리가 죄를 상습적으로 범하고 산다면 마음의 눈인 양심은 소경이 되어 버린다.』나는 일찍『티베트』에 있는
한 수도승이 오랫동안 어두운 굴 속에서 살았다는 사람을 보았다. 저가 그 굴에서 나오니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 눈은 화색과 황색으로 되었다
내가 日本에서 돌아 오는 길에 한 의사를 만났다. 그는 눈 먼 고기를 병속에 넣어 가지고 있었다. 모양은 아름다운데 눈이
없었다. 겉가죽의 흔적만 짙어 있는 것을 보니 전에는 눈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그 고기는 어두운 가운데 사랑서 눈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눈이 없어진 것이다.
나는 히말라야에 있을 때 독 있는 풀을 먹고 사흘 동안 혀가 마비되어 아무 맛을 알지 못하였다. 그 같이 우리가 죄를
범하면 양심이 마비되어 하나님께 대한 맛을 잃는다. 언젠가 소제하는 사람이 한쪽 손에 냄새 나는 통을 가지고 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다른 손으로 음식을 먹으면서 갔다. 그는 그것이 습관이 되었다. 이같이 세상 사람은 죄와 악이 습관이
되어서 그것을 모르고 살아 간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 가운데서 내가 소제부를 보는 것보다 더 강한 냄새를 맛보신다.
그리스도의 고통이 十자가 질 때 뿐인줄 아는 것을 잘못이다. 그는 三十三년동안 十자가를 진 것이다. 회개한 신자는 그 죄를
다시 생각해 내어 가지고 늘 괴로워 할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그는 아래와 같이 대답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대의 죄를 사하셨는가, 사하지 않으셨가 하는데 대하여 걱정할 필요는 없다. 구원은 다만 죄 사하는 것
뿐 아니요 죄를 끊어 버리고 자유하게 되는 것이다.「시키무」에 폐병자가 있어 정신이상이 생겼다. 한 친구가 찾아 와서
그 이름을 부르니 저는 사과 깎는 칼로 그 친구의 목을 찔러 죽였다. 저는 살인죄로 어느날 오후 五시에 교형의 처분을
받게 되었다. 친척들이 왕에게 가서 병든 사실을 고하고 사면을 받아 가지고 왔다. 그러나 저는 병으로 벌써 죽었다.
살인죄는 병이 그 원인이 되었다. 죄는 용서 받았으나 병은 낫지 못하였다. 이것이「믿지 않으면 내 죄로 죽으리라」하신
뜻이다. 신은 여러분을 죽이지 않는다. 그러나 죄의 근원이 되는 병이 죽이는 것이다.
3). 죄는 사람을 죽인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죄가 저를 죽인다. 하나님이 죽이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누구나 지옥에 보내지 않는다. 죄가 그
자신에게 형벌을 가져 온다. 유다를 보라. 저가 주를 배반할 때 빌라도가 저를 죽인 것도 아니요, 제사장이 저를 죽인 것도
아니요, 사랑하는 주께서 죽인 것도 아니요, 동무 되는 사도들이 죽인 것도 아니요, 저를 죽인 것은 그 자신이요,
저를 목 맨 것은 제 손이요, 즉 그 죄가 죽인 것이다. 죄 가운데 사는 것의 종말은 결국 이런 것이다.」
4). 죄를 죽이라
어느 촌에 소녀가 있어 매일 거미줄을 소제하면서 기도하였다.『주여, 내가 이방울 소제하는 것 같이 내 마음을 깨끗게
하여 주소서』. 그때 소녀는 한 소리를 들었다.『딸아, 매일 거미줄을 쓸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줄 쓰는 거미를 죽이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면 거미줄 소제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 아니냐 』.
그 같이 우리는 매일 죄의 용서 받는 것으로 만족한 것이 아니다. 바울이 만할 것과 같이 옛사람이 죽어야 한다.
5). 주 안에 있으면 죄에서 떠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 지은 것이니 옛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었느니라.『석탄은 검다. 우리는 폰트의
비누를 가지고 씻어도 그 검은 것을 희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를 불 가운데 던지면 검은 것은 변하여 빛나는 광채가
난다. 우리도 마음을 그리스도에게 바쳐 성신의 불세례를 받으면 죄인된 우리가 세계 앞에 빛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주께서『너희는 세상의 빛이라』한 뜻이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니'라고 한 뜻을 나는 처음은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깨달았다. 죄는
대개 쾌락을 얻고자하는 욕구에서 오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한없는 기쁨의
샘 근원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다른 데 눈을 돌리지 않고 죄를 범하지 않는다. 마치 부자는 적은 삯전에 팔리지
않는 것과 같다』.
7). 고통은 사랑의 채찍
고통과 불행은 하나님의 벌이이고, 징계고, 진노하심이라는 견해에 대하여『사두-』는 반대한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의 일면의 표시로 해석했다. 인도의 인과응보의 사상 가운데서 자라난 몸으로 이같은 사상을 가지게 된 것은 저가
체험을 통해서, 고통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의 증험에서 나온 것이다. 저가 말하기를『하나님은 사랑이심으로
미워하여 벌하시지 않는다. 병이나 재난을 신의 징벌이라고 말하는 데는 나는 찬성할 수 없다. 그것은 말하자면 사랑의
채찍이다. 어떤 의사가 나에게 말하였다.
아이가 나기 전에는 호흡이 없으나 나면 호흡이 있어야 된다. 그러므로 아이는 산성(産聲)을 내어야 된다. 그런데 어떤
아이는 울지 않는 일이 있다. 그 때 산파는 매섭게 친다. 그래서 울게 하지 아니하면 폐가 수축하여 죽어 버린다. 그러나
어머니의 생각은 갓난 아이를 저렇게 때리다가는 죽겠다고 걱정할 것이다. 그러나 쳐서 울리고, 울어서 호흡이 시작된다.
그 같이 하나님은 때로 사랑의 채찍을 내리신다』.
『어느날 나는 현관에 앉았을 때 강한 바람이 불어서 작은 새 한 마리가 들어 왔다. 그때 한쪽에서 매가 뒤를 따라 날아 왔다.
작은 새는 어느 쪽으로 갈까 두가지 위험한 길 가운데서 내 무릎에 와서 앉았다. 작은 새는 사람에게 가까이 오기를 좋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통의 바람이 불어 오매 저는 이곳에 피난처를 찾았다. 그같이 하나님을 사모하지 않는 사람도
고난의 폭풍에 쫓기어 하나님의 품속에 들어오게 된다.』
한번은 해 저물어 길가에 보니 목자가 양들을 데리고 내를 건너는데 암소와 송아지는 오기를 싫어함으로 목자는 매우
고민하였다. 그때 나는 목자에게 『그 송아지를 먼저 이끌라. 그러면 큰 소도 따라 가리라』. 그 목자는 내 말대로 쉽게 큰
소를 데리고 갔다.『이같이 우리가 주께 나가기를 싫어할 때 우리의 사랑하는 자를 떼어 감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늘과
영혼을 사모하게 된다.』
8). 속죄
한번은 영국의 학자들이『사두-』를 향하여 묻기를,『성경에 있는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 얻는다는 말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니 그는 아래와 같이 비유로 대답하였다.『한 청년이 산에서 피를 많이 흘리고 죽게 되었다. 의사의 말에 의지하여 그
아버지는 많은 피를 빼어 아들에게 나눠 주고 자기는 죽고 아들은 살았다. 이같이 우리는 죄에 타락하여 영혼이 심한
상처를 받고 피 같은 속생명을 잃어 거의 죽게 되었다. 그 때 우리 구주는 그의 피를 부어 주셨다. 자기 생명을 부어 주시어
우리는 구원되었다. 누구든지 그 마음을 기뻐서 바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하여 구원된다는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피는 생명을 의미하고 또한 성질에 관계된다. 그는 계시중에 받은 것이라고 또 이 같은 기묘한 예를 들었다.
『남인도에서 이와 같은 병자가 있었는데 고양이의 피를 혈관에 많이 부어 넣었더니 고양이와 같은 성질이 많이 나타났다.
이것은 다른 데로부터 생명을 부어 넣을 때 그의 인격과 품성이 함께 변화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같은 계시 중에, 저들은 말하기를『그리스도 안에 접붙어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다른 종교에서는 선행을 하라
그러면 선인이 될 것이라』 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그리스도 안에 있으라. 그러면 선행을 할 수 있다』.
속죄나 죄를 씻는 그리스도의 피는 그리스도 안에 접붙이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그의 안에, 그는 내 안에, 가지에는
쓴물이 있었으나 접붙이면 원대에서 단물이 흘러 쓴물이 달게 변한다.』
이 위의 몇가지 비유는 신의 생명을 받아 새로운 생명을 얻는 구원을 말하였고, 이 아래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하여 대속하는 방면의 예를 말한 것이다.
『두 청년이 도박하다가 잡혀서 옥에 갇히었다. 부자집 청년은 五백『루삐스』의 벌금을 내고 쉽게 나왔다. 그러나
구차한 청년의 어머니는 그 아들을 구해 내려고 날마다 힘든 노동을 하였다. 하루는 일하다가 돌이 굴러 떨어지며 여자의
손을 상하여 피가 흘렀다. 철장 속에서 이것을 내다 보고 있던 그 청년은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 그 손의 상처는
웬일입니까! 그 손가락에 피가 웬일입니까?"
어머니는 눈물 흘리며 목메인 소리로 아들을 쳐다 보며 대답하였다. "나는 너를 구하기 위하여 매일 이같이 노동하고
있단다." 이같이 하여 피값으로 五「백루삐스」를 얻어 그 아들을 옥에서 구해냈다.
그때 부자 아들이 또 찾아 와서 도박을 하자고 유혹하였다. 그러나 가난한 청년은 대답하되「나는 금후 결코 그런 일은 할
수 없다 너는 쉽게 돈 주고 나왔으나 나는 어머니의 수고와 번민과 상해와 피를 희생한 값을 주고 구해 나왔다. 우리
어머니를 괴롭게한 그 도박을 나는 장래까지도 영원히 들어 보지도 않을 것이다 」.
「부자 청년 같이 죄에서 구하는 것이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죄를 버리는 힘이 약하다. 그러나 우리 죄를
구하기 위하여 신이 친히 육체를 쓰고 그 피까지 흘리신 것을 믿는 자에게는 이같은 고통을 신께 끼치는 죄를 범하기를
즐겨하지 않는다. 또 형이 그 목숨을 바쳐 동생을 악에서 구해 낸 예를 들였다.」
「악한 동생은 제 집을 버리고 산중에 들어가 강도의 두목이 되었다. 그 아비는 이제라도 회개하고 돌아 오면 그 죄를
용서하려 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 산림 속의 위험을 무릅쓰고 들어 가서 이 소식을 전할 사람은 없었다.
동생을 사랑하는 형은 어느 날 용감히 길을 떠났다. 아버지는 도망 간 아들을 사랑하는 증거로 귀한 선물을 보내었다.
그가 山중에 들어 서자 귀중품을 강도들에게 빼앗기고 큰 상해를 받았다.
「나는 보물을 다 빼앗겨도 관계치 않다. 다만 나를 너의 두목에게 데려다 주기를 바란다」하였다. 강도들은 저를
데리고 두목에게 갔다. 두목은 그 소리를 듣고 제 형님인줄 알고, 그 무서운 상처를 보고 놀래며 마음이 아팠다.」
형이 말하기를,「나는 아버지가 너에게 전하는 소식을 가지고 왔다. 그는 지금도 너를 사랑하고 있다. 그 사랑은
언제나 변치 않는다. 만약 네가 지금이라고 집으로 돌아 오면 아버지는 너를 용서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여기 온
목적이다. 이 말이 끝나고 저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이같이 형은 동생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
두목은 형의 죽은 시체를 붙잡고 통곡하고는 후회하고 집으로 돌아 갔다. 자기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형을 생각하고
항상 탄식하였다. 예수는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희생하였다. 모든 사람들은 이 뜻을 알지 못한다. 참으로 이해한다면
어찌하여 제군의 마음이 아직까지 그로부터 멀리 떠날 수 있겠느냐.
또 바울이 말한바 막힌 담에 대하여 이같이 비유하였다.
「나는 얼마 전 히말라야 산중에서 높은 산벽으로 사이가 막힌 두 동리를 보았다. 두 동리의 직선거리는 심히
가까우나 돌아서 가면 일주일이 걸렸다. 한 사람이 이 길을 뚫으려고 계획하였다. 이 일을 위하여 생명까지라도 희생할
각오를 가지고 착수하였으나 애통하게도 그는 일이 완성되기 전에 살해 되었다. 나는 이 일에 대하여 죄인의 장벽이란
것을 생각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생명을 버려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길을 통하였다.」(엡 2장 13-14)
9). 최후의 심판
최후의 삼판에 대하여「사두-」는 입신 중의 체험에서 얻은바 즉, 하늘 위에서 天使들과 문답한 지식에 의하여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나는 천계에 들어 갔을 때「죽는 자는 다 한 곳에 서서 심판을 받느냐?」고 물었다. 그 때 천사가 대답하기를」
「아니다. 육체를 버리면 영은 그 지나간 일을 다 기억하고 똑똑히 알게 된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심판을 받고 있는
것이다. 하늘의 영광된 빛은 그들 자신의 행한 일을 다 나타냄으로 그들은 즉시 성도와 천사들이 사는 하늘에서 살지 못할
줄 안다. 그 곳은 모든 것이 그 자신에 맞지 않고 부적합함으로 하늘에서 떠나기를 원한다. 하나님이 몰아 보내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벽도 없다. 또 들어 가는데 입장권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입장권과 여행권은 그 사람이 가지고 온
과거 생애가 그것이다.
참으로 거듭난 사람은 천국이 살기에 좋고,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살기에 합당치 못하게 된다. 이것이 신이 자기와 인간
사이에 장벽을 만드는 것이 아니요 사람의 마음으로 생기는 것이다. 최후의 심판이란 것은 하나님의 참된 종들이 모든
창조물 앞에서 높이 들리는 것으로 인하여 최후의 결과를 발표하여 드러내는때의 일인 것이다. 또 나는 들었다.
육체의 내면은 영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를 범할 때에 마치 복사지에 글을 쓰면 윗장은 잘 보이지 않으나 밀장은
똑똑히 나타나는 것과 같이 죽은 뒤 영혼이 육체에서 벗어 나오면 상처 받은 영의 형상이 밝히 나타난다.
이것이 삼판의 대부분이다.」
10). 육체의 부활
육체의 부활에 대하여 배운 일이 있느냐고「사두-」에게 물으니「천사는 나에게 이같이 말하였다. "신자는 육체를 뒤에
두고 육체는 매장된다. 그러나 속의 영체는 자유로 나와서 제 二, 제 三 天을 차례로 그 발달된 정도에 따라 올라간다.
적어도 기독신자의 대다수에 대하여서는 이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영적생활에 대한 계단이 있다. 그리스도와 극히 밀접한
생활을 한 약간의 사람들은 육체가 고요히 변화하여 하늘에 끌려 올라 간다. 혈육은 영원한 생명을 이을 수 없으므로
이것은 완전히 변화된 것이다. 이것은 같은 육의 형상이 전혀 변화된 것이다." "그것은 육신으로 승천한 에녹과 엘리아와
같은 사람이냐?" 고 물으니 "그렇다." 대답했다. 또 모세에게도 적용하여 하늘에 있는 모세와 엘리아를 가리키면서
변화산에서 동일한 모양으로 나타났다고 하였다.
나도 그들을 보았다. 그들은 성화한 것이 한가지였다. 왜 그러냐 하면 하늘에서는 그 모양이 변치 않는 까닭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묻었다. 그러나 신의 묻는 방법은 인간과 다르다. 그것은 영체로써 싸는 것이다. 누구나 육체로 하늘에
들어 갈수는 없다. 그러나 이 몇 사람에게 대하여는 그리스도의 몸과 같이 변화한 것이다. 그러나 보통 신자의 대부분은
육체는 땅에 두고 영체로써 곧게 中간 즉, 제 二天에 간다. 거기서 어떤 자는 몇 주일, 혹은 몇 개월, 혹은 더 오래 머물러
준비가 되면 제 三天으로 오른다. 특별한 사람을 예로 든다면「아씨시」의「프린시쓰」나「기독의 모방」의 저자
「아켐비쓰」같은 사람은 영적으로 비상히 진보하였음으로 곧게 제 二天을 지나 제 三天에 간다.」
11). 두뇌와 마음
종교는 심정으로 체험할 것이요 지식으로 알 것은 못 된다. 세상에는 종교적 지식에 대하여 아는 자는 많을 터이나
반드시 그들이 신을 체험한 자는 아니다. 박학한 지식으로 신을 찾는 것보다 무식한 사람이 마음을 바쳐 믿는 것이 신을
받고 아는 점에 있어도 더 완전한 것이다. 지혜 있는 자의 지혜를 부끄럽게 하고 어린 아이에게 나타나는 진리라 함은
이것을 말하였다.
「사두-」는 이 점에 대하여 강조한다. 마치 바울이 유대종교 율법구원에 대하여 신앙 구원을 전한 것 같이
「사두-」는 인도철학의 주지주의에 대하여 심정의 종교를 역설한다. 그가 말하기를,「종교는 마음의 문제다. 만일
우리가 마음을 바치면 진리를 알 수 있다. 육안이나 지식으로 알 것이 아니요 마음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다른 종교는
서적을 통하여 배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서적의 지식으로는 얻을 수 없다. 다만 그 마음을 바침으로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종교는 생명의 만족을 구하는 것이다. 참 평화와 영혼의 기쁨을 얻지 못한다면 무용이다.
그런데 지식을 통하여서는 이것을 얻지 못한다. 나는 지식이 종교에 필요하다는 인도 종교가의 한 사람을 만났다.
나는 그에게 말하였다.
「갈한 사람에게는 물을 마시게 하는 것이 필요하고 수소와 산소로 물이 된다는 지식이 필요치 않다」.
한 어떤 인도 종교가들은 비상히 박학하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평화가 없다. 세상에는 박학한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들은 거의 가장 중요한 인생의 근본 문제에 대하여는 소경이다. 그러한 지식은 자신을 복되게 하기보다 불행하게
되는 일이 많다.
나는 인도의 하층사회 사람들에게서 들은 일이 있다.「학식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데 우리 같은 무식자가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느냐」고. 나는 이같이 대답하였다.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더욱 미련한 일이다. 그들은 세상 생활을 표준하는 문제에 대하여는 대가다. 그 의견은 큰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적 사건에 대하여는 어린애와 같다.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기도하는 사람이라야 그 종교에
대한 의견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영적 경험이 없는 과학자의 의견을 받아 가지고 종교의 문제를 결정코자 하는 것은 미련한 일이다. 학식 있는 사람은 언제
일식이 되는 것은 알는지 모르겠으나 죄에 대한 일은 조금도 모른다. 두뇌로 얻은 종교는 그 표면은 알아도 내면의
진수에는 이르지 못한다. 심정은 영혼의 가장 내적인 부분이다. 이것으로 무선전신과 같이 보이지 않는 세계로부터 오는
육신을 받는다. 두뇌는 유행의 사건에 관계하고 있다. 그러나 영적 실재자의 심정을 보거나 깨닫는 것은 심정이다. 나의
두뇌는 마음으로 본데 대하여 감심(感心)으로 복종한다. 만일 처음 심정으로 보지 못하였으면 두뇌로 알지 못한다. 마음은
두뇌를 초월하고 있다. 두뇌로 얻은 지식은 목구멍 아래로 내려가지 못한다.
나는 한번 못 가운데 있는 돌을 주어 깨트려 보았다. 六七촌까지는 젖었는데 속과 안은 전혀 말라 있었다. 그 돌은 물
가운데 있었으나 물은 돌 속에 없었다. 사람도 그와 같이 그리스도교회 안에 사는 자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대단히 많이
알고 있다. 그러나 심중은 마르고 있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마음 가운데 있지 않다.
인도에는 영혼의 구원을 얻은 사람이 많다. 그 중에는 극히 무식한 자도 있다.「한 사람은 전혀 일자무식이지만 훌륭한
신자로서 큰 증거를 세우고 있다. 그는 항상 말하되, "나는 소제부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 아들이 되었다. 나는 그를
안다. 그는 내 마음 속에 계시다. 여러분도 마음을 그에게 바치면 또한 그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고 하였다.」
(2) . 종교생활
1. 선다의 신비관
「썬다싱」은 기독교 역사상 보기드문 대신비가이다. 그는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 신비한 은혜는 보통 사랑은 얻기
어려운 귀족적 선물인 듯이 생각하는 점에 반대하고 이것은 누구나 얻을 수 있는 평민적의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썬다-」는 그 자신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신비가(미스트)라는 것은 미스트(안개)를 연상케 하는 무슨 몰롱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나 신인합일의 경지에서 신을 아는 자이다. 대 성자라 할지라도 깊이에 들어 간 자는 극히 적고, 나 같은
것은 초보요 영의 어미로부터 젖을 먹고 있는 자에 불과하다. 나는 다만 영의 아이 됨에 불과하다. 신비가란 이름을 듣기를
주저한다. 나는 인도에서「스와미」(신성한 사람)라고 부르는 것을 피한다. 나는 차라리 순수한「사두-」즉, (종교가)라고
부르는 것을 원한다」하였다.
언젠가 영국 학자가 아래와 같이 질문하였다.「신비적 소질이 없는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혹자는 음악을 잘하는
어떤 사람은 모르고, 혹자는 그림을 잘 그리나 어떤 사람은 못하는 것과 같이 종교에 대하여도 은혜 받는 힘이 있는 자와
없는 자가 다르지 아니한가?」
「썬다-」는 대답하되,「종교적 성질은 예술을 감상하는 능력과는 다르다. 이것은 차라리 갈하는 것과 같다. 갈하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느냐. 갈증이 사람을 물로 인도하는 것과 같이 종교적 갈망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오게 한다.」
학자들이 또 질문하였다,「그러나 확실히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큰 종교적 천재가 있지 않느냐. 어거스틴, 루터,
웨슬레 같은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선천적 소질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냐?」
그는 대답하되,「육체는 크고 작은 것이 다르다. 어떤 자는 두뇌가 크고 어떤 자는 작다. 그러나 영혼은 모든 사람의
수용력이 같다고 나는 믿는다. 어거스틴 같은 사람은 그 수용력을 더 잘 잘 발달케 한 자이다. 그들은 각각 영적 향상을
더하기 위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은 것이다.」
누구든자 기도와 명상에 많은 시간을 바쳐 살아 계신 주와 교통하는 생활 가운데서 살아 간다면 그는 영적 진경을 볼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현세의 미온적 기독교에 대하여 늘 이같이 말한다. 그리스도는 역사적, 과거의 도덕가가 아니요
살아계신 신이며, 신비적 최고의 모범이 아니라 구주시며, 각 사람의 정도에 따라 나타나시는 인격적 신인 것을 고조하며,
또 조물주와 피조물을 구별하여 동양류의 범신론을 부정한다. 이 아래의 기록을 보면 그의 사상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인도는 다만 도덕적 교사로서 가르치는 선교는 필요하지 않다.」
어떤 사람이『그리스도는 최고의 신비가라 하니 귀하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물으니,『그것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모르는
사람의 말이다. 그리스도는 최고의 신비가가 아니라 신비가의 구주시다.『그리스도는 역사상의 인물일 뿐 아니라 지금도
살아 계셔서 활동하신다. 그는 성서 중에 살아 있을 뿐 아니라 우리 마음 가운데 살아 계시다.』
그는 신비적 결합에 대하여 신인의 경계를 구분한다.『사람들이 말하기를 구원은 신 안에 결합되는 것이요 그것은 하늘에
사는 일이라고 한다. 우리가 그의 안에 사는 것은 그가 우리 안에 사는 것이다. 철이 불가운데 들어 갈 때 철은 빨갛게 된다.
철은 불 가운데 있고 불은 철 가운데 있다. 그러나 철은 불이 아니요 불은 철이 아니다. 그와같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도 우리 안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신이 아니다.
우리가 호흡하는 숨은 우리의 생명이다. 그러나 사람은 숨이 아니요 숨은 사람이 아니다. 그와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영을
호흡하나 우리가 신은 아니다. 마치 호흡으로 공기를 마시는 것같이 기도로 당신은 호흡한다. 다만 우리가 신에 가까울
뿐 아니라 그와 합체한다. 다만 결합할 뿐 아니라 생명을 받는다. 이 생명을 가지면 놀랄만한 사실을 실험한다
또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하여,『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왜 그러냐 하면 그리스도와 신자의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와 달라 더 깊은 것이 있다. 그리스도 신자는 그리스도의 한 부분으로 그리스도의 한 벗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
그 자신이다. 그리스도는 신자를 통하여 호흡한다. 그리스도는 항상 교회에 임재하신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 언제든지
그들의 마음에 숭배의 마음이 일 때는 그의 현재를 조금 자각할 때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결코 우리의 자유를 속박하여
우리에게 자기의 실재를 알리려고 강박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의 받은 정도에 따라 감당함에 맡길 뿐이다. 결코
강제적으로 간섭하는 것이 아니요 다만 노력에 따라 인도하신다.』
2. 영혼의 암흑
신비가들의 경험에 의하면 간흑 영혼의 암흑시기가 있다. 신과의 깊은 교통에서 늘 평화를 얻고 원기가 넘치던 사람도
혹시 감웅이 막히고 캄캄하여 신과의 사이에 무슨 장벽이 선 듯이 외로움을 느끼는 때가 있다. 이것이 사람에 따라 몇주일
혹은 몇 개월 되는 사람도 있다. 이런 때가『사두-』에게 있느냐고 물으니 그는,『어떤 때는 두 세시간 그런 때가 있으나
며칠이나 몇 주간씩 계속하는 일은 없다. 이것은 일종의 사랑의 유회다. 왜 그러냐 하면 항상 빛가운데 있는 것보다 잠시의
어둠이 도리어 기쁨을 더 크게 하며, 신과 인간의 영이 같지 아니한 것을 알게 하는 까닭이다. 만약 그렇지 아니하면 어떻게
분간할 수 있겠느냐. 물론 신은 결코 그를 버리는 것은 아니다. 잠깐 자기를 숨기는 것이다.』
그는 아래와 같은 이야기로 이를 비유하였다.『비겁한 아이를 가진 그 아버지는 이를 교정하고 용기를 양성하기 위하여
하룻밤 산림 속 나무에 얽어매어 혼자 두었다. 아이는 맹수가 올까 겁이 나서 울며 부르짖다가 그만 단념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간 것이 아니요 그 뒤에 숨어 총을 가지고 맹수가 오면 쏘아 죽이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 같이
우리들의 하늘 아버지도 전혀 우리를 내어버리거나 잊어버린 것이 아니다. 혹시는 죄로 인하여 신이 그 낮을 숨기고 어떤
때는 교훈 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경우가 있다. 혹 나는 혼자 버리운 것을 느끼는 때가 있다. 그래서 내가 무슨 죄를
범한 것이 아닌가, 그 죄는 무엇인가, 그 때문에 평화가 없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하였다.』
귀하는 그같이 영적 생애를 계속하는 데서 괴로움을 느끼는 일이 없느냐는 질문에 대하여,『인도에서는 오랜 가뭄과 더위
끝에 처음 비가 오면 더운 아지랑이나 안개 같은 것이 일어나 도리어 찌는 듯하게 된다. 그같이 내가 처음 은혜의 소낙비를
받을 때에 좀 견디기 어려운 듯 하였으나 두 번, 세 번 받는 동안에 그런 일이 없게 되었다. 특히 금식 후에 그렇게 되고, 그
후부터 입신의 경험도 쉽게 되었다 또 육체에도 상쾌함과 기쁨을 느끼게 되었다. 나는 그 전에는 보이는 세계를 많이
감하고 영계를 조금 감하였더니 금식 후부터는 적당하게 되었다.
또 영적 압박을 는끼는 일이 없느냐 하니,『만일 내가 평화를 잃게 되는 경우에도 기도로써 곧 회복한다.』고 대답하였다.
이같이 그에게는 오래 계속하는 영적 암흑은 없다.
3. 활동과 봉사
봉사는 기독교정신을 나타내는 특색 있는 생활이다. 동양의 종교들은 은둔적 경향이 있으나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봉사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나는 자아의 완성에 목표를 두는 것이나 하나는 신의의 완성에 목표를 두는 것이다. 『사두-』는
그 일생을 봉사의 생활에 바쳤다. 그러나 중세기의 은둔생활을 전혀 부정한 것은 아니다.
『한 수도승은 그리스도의 모방과 같은 것을 쓰지 않았느냐』는 『아켐비쓰』의 이 저서에서 큰 감동을 받고 늘 이같이 그
가치를 인정하여 말하나 자기의 사명은 봉사에 있다고 믿는다.『만일 귀하에게 한 주일 밖에 남은 시간이 없다면 귀하는
기도와 명상을 하겠느냐, 활동봉사를 하겠느냐?』고 묻는 말에 그는 대답하기를,『우리가 한 주일 동안 물만 먹을 것인가,
밥만 먹을 것인가묻는다면 우리는 물과 밥을 다 요구할 것이다.』하였다. 그는 하룻동안이라도 그 시간을 전부 명상에만
보내는 일은 극히 적다. 히말라야에서 몇 주간 지날 때에도 그 기간에 숨은 촌락을 찾아서는 전도하고 있었다.
『제 목숨을 아끼는 자는 이것을 잃고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생명을 버리는 자는이것을 얻으리라』한 것은 일반
크리스챤의 생활표어이다. 그는 자기의 경험을 들어 이같이 설명하였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기는 쉬우나 그를 위하여 살기는 어렵다. 죽는 것은 한두 시간만 괴로우면 되나 사는 것은 나날이
죽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수년 동안 이같이 하여 그리스도와 사람에게 봉사하였다. 주께서 부르는 날이면 하늘에
갈 것이다. 그러나 내가 땅에 생존하여 있는 동안 활동할 의무가 있다. 이 점에 대하여는 전혀 인도의 은둔자와 생각을
달리한다. 그러므로 나는 나를『산야시』라고 부르지 않는다.『산야시』는 세상을 버린 사람이다. 그들은 모두 이 세상을
악한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세계는 다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또 나의 것이다. 만일 내가 세상을 버린다면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나에게
주신바 어떤 은혜도 버릴 것이다. 나는 다만 그 중의 악한 것만 버린다. 금전과 지위를 얻고자 하는 욕망은 영적 높은
생활로부터 사람을 끌어 내리기 쉽다. 그 증거로서 부자가 전도를 위하여 헌신하는 것은 극히 작은 일이다. 그런고로
인도의 왕후들은 종종 둔세가가 되었다. 불타도 그런 사람이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이 즉 쁜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이 나쁜 것이 아니요 그것을 적당히 쓰지 않는 때에 그 결과가 나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비록 저들의 생각이 그릇되었다 하더라도 그 진리를 얻고자하여 기왕의 호화로운 생활을 버리고 출가한 용기를
존경하는 자이다. 그 한 예로『우쟌왕『빠-라토리하리시짠도라의 사적을 생각한다. 나는 그의 장려한 궁전을 보았다.
그리고 수마일 격한 곳에 그가 은둔하였던 지하굴을 보았다. 이 두 곳의 현저한 대조를 생각할 때 이 세상에서 영혼의
만족을 얻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을 생각하였다. 王子의 생활도 좋기는 좋았으나 그러나 그 가운데 있어서는 거룩한 영적
갈망을 채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고행하는 인도 행차들에게 늘 전도한다. 그 그릇된 관념에 붙들려 생을 값없는 고생으로 보내는 것을 볼 때 불쌍한
생각을 금할 수 없다.『나는 한사람의 인도『사두-』를 만나 그에게 말하였다.『그대는 제 몸을 괴롭게 하는『사두-』다.
나는 봉사전도하는『사두-』다. 나는 괴롬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절로 제 몸을 괴롭게 한 것은 아니다. 나는 세상을 버리지
않고 세상 중에 있기를 원한다. 그러나 세상에 속한 사람은 아니다.』
그는 아래와 같은 예를 들어 세상에 대한 그 태도와 가진 생각을 말하였다. 『나는 한번 히말라야의 한 동리를 지나다가
진애와 비료를 쌓아 놓은 큰 두엄무더기를 보았다. 거기서 나는 악취에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며칠 후에 또 그 곳을
지났다. 그런데 아름다운 향기가 악취를 덮어 버렸으므로 놀라서 자세히 본즉 아름다운 작은 꽃들이 일면에 피어서 향기를
발하고 있다. 태양에서 오는 열과 빛이 꽃에 아름다운 빛과 향기를 준 것이다. 장소는 더럽다. 그러나 티끌 그 자신의
거름으로 말미아마 변화된 것이다. 그 같이 우리도 오예와 홍진 세상에서 살아 갈지라도 우리 마음을 의의 태양을 향하여
열면 그로부터 영적 빛과 향기를 받아 이 세상이 비료와 같이 우리의 생활을 돕는다.』생각하였다. 이것은 신이 자기의
필요로 지은 것이 아니요, 천사나 사단을 위함도 아니요, 그렇다고 금수를 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위하여 지은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 이것을 버릴 것인가.』
그는 이같이 세상의 사물을 대할 때 거기 속박되지 않고 감사와 찬미로써 영의 자양이 될 진리를 섭취한다. 누가 묻기를
『귀하의 생애는 양육할 가족이라든지 사업이라든지 얽매일 것이 아무것도 없음으로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기 쉬우나
다른 사람들은 부양할 가족과 일이 있으니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하매,『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기 심히 곤난한 일이다. 나의 곤난도 크다. 비록 그 정도는 다르다 할지라도 이 세상에 사는 이상
곤난 없는 자는 없다. 그러나 그 고통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면 우리가 다음 세상에 들어가 그 장애가 제거 될 때는 그
순간에 크고 높은 곳에 달하는 힘을 얻을수 있다. 옛 사람들은 경주를 연습하는데 무거운 쇠줄을 맨 채로 달렸다. 그래서
자유로 달릴 수 없고 힘들기는 하나 경주하는 날 그 줄을 풀어 버리면 몸이 경쾌하게 되어 평시보다 속히 달릴 수 있다.
그들은 부자유중에서 힘을 양성한 까닭이다.』
봉사는 신의를 받드는 생활이다. 인간의 최고 목표는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는데 있다. 불교류의 자아 완성만을
목적하는 은둔생활은 신의의 한 쪽만을 알고 다른 쪽을 모르는 생활이다. 신이 부여한 모든 본능은 이것을 사용치
아니하면 위축하게 되는 것이다. 봉사는 일면 타인을 완성하는 동시에 다른 면으로는 자아를 완성하는 도리가 된다.
「사두-」는 그 일생을 더 의미 있게 최선의 힘을 다햐여 봉사에 바치려 했다. 우리의 주위에 있는 모든 불완전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