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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이야기> http://cafe.daum.net/kccma/Fkh0/187
<두번째 이야기> http://cafe.daum.net/kccma/Fkh0/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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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다섯번째 이야기>
검은 그림자
대관절 일상을 유지할 수 없었다. 정라와 얼굴을 마주하면 과연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도무지 생각을 정리할 수가 없었다. 각자의 집안이 겪었던 뼈아픈 과거가 이토록 어이없는 걸림돌이 될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이다. 그녀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사건이라지만, 영원히 정립되지 않을 과거 앞에 그녀를 만난다는 것 자체마저 두려워졌다. 해수욕장 사건은 나에게 그만큼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다.
하지만 나의 갈등과는 무관하게 무대뽀삼형제는 망상의 흥분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었다. 캠프파이어의 불꽃으로 사라진 기타는 진수를 제외한 두 명이 합심하여 새것을 마련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달되었다. 기타를 망가뜨린 사람은 정작 나였지만 이미 돈을 벌고 있는 영석과 봉기가 무대뽀 우정을 과시하였다. 더구나 녀석들은 내가 진수에게 기타를 전달하도록 배려했고, 기타를 받은 진수는 고마움에 모두를 하천 둑으로 초대했다. 그는 판쵸 일행들처럼 솥단지에 막걸리까지 준비해놓고 우리를 맞이했다. 솥단지에 양은종지가 띄워진 시간은 찢어지게 밝은 달밤이었고, 우리의 나이는 고작 열여덟 청춘이었다.
진수는 보란 듯이 새 기타로 유행가를 뜯기 시작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가락에 맞추어 손뼉을 치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솥단지에 떠다니는 종지는 수없이 돌아갔다. 나는 망상에서 놀란 배 속이 여전히 메스껍고 실수투성이가 생각나서 막걸리를 거절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녀석들은 서서히 취해갔다.
흥에 겨운 봉기는 양은사발을 엎어놓고 젓가락을 두드리며 장단을 맞추기 시작했다. 기타 소리와 어우러진 투박한 장단이 제법 멋스럽게 조화를 이루었다. 내친김에 영석과 나도 두드릴 것을 찾아 엎어놓고는 숟가락으로 마구 때리며 고래고래 노래를 불렀다. 노랫소리는 점점 커졌고 장단도 따라서 커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숟가락 대가리가 동강나며 하늘로 솟구쳤고 양은은 구멍이 뚫린 채 찌그러져 엉망이 되었다. 우리는 찌그러진 양은의 모양새가 우스꽝스러워 더욱 무식하게 때리고 또 때렸다.
“오빠들, 마을에서 시끄럽다구 하잖어. 여기서 왜들 이러는 겨?”
앙칼진 목소리에 노래와 동작이 일순간 멈춰졌다. 뜻밖의 훼방꾼이 나타나자 모두의 고개가 한쪽으로 몰렸다. 그곳에는 찢어지게 밝은 달빛을 등지고 웬 단발머리 여자가 도도한 몸짓으로 서 있었다. 팔짱을 낀 채 도사리고 있는 여자가 비로소 여동생임을 확인한 진수가 어이없다는 듯 대뜸 성깔을 부렸다.
“니는, 여기 웬일이여? 집에 아무두 없잖어!”
그러나 진영은 진수를 무시하고 딴청을 피웠다. 그녀는 오히려 무리 중에 섞인 나를 발견하고는 팔짱을 풀며 반색부터 했다.
“어? 양우 오빠두 있네! 아직 학생인 양우 오빠한테 술까지 믹이구 뭐여!”
평소에 무대뽀와 잘 어울리지 않던 내가 함께 있는 것이 신기하다는 표정이 여지없이 드러나 있었다. 진영은 비록 두 살 터울이었지만 학교를 일찍 들어가서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그녀는 워낙 단순하고 활달하여 누구에게나 스스럼이 없는 성격이었다. 나는 분위기를 의식한 나머지 평소와는 다르게 진영과 매우 친한 것처럼 지껄였다.
“왜? 나는 같이 있으면 안 되는 자리여? 그리구 난 술두 안 먹구 있어, 얘!”
“양우 오빠는 참, 하두 재밌게들 노니까 훼방 놓구 싶네! 며칠 후면 서울루 가겠네. 하마 개학이 얼마 남지 않았잖어!”
진영은 금방 기세를 낮추어 애교마저 떨었다. 그 애교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서울 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마을에서 내가 유일했고, 영석의 말처럼 동네 여학생 누구에게나 선망의 대상임을 늘 느껴오던 터였다. 학교가 그다지 내세울 만한 명문이 아니라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들에겐 단지 서울에 있는 학교라는 것이 선망의 대상일 뿐이었다.
“하루 전날 올라갈 참이여. 난 서울이 별루여!”
“그래두 난 서울이 정말 가보구 싶더라. 아직 한 번두 못 가봤거든!”
진영이 부러움의 눈길을 보냈다. 서울 이야기가 나오자 녀석들 또한 특유의 쪼그라드는 몸짓을 보이며 침묵했다. 그 몸짓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어린 나이부터 자연스럽게 습득된 동물적인 서열 습성, 어쩌면 녀석들과의 괴리감은 모범생으로 포장된 간극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갑자기 조용해진 분위기를 반전시키고자 오히려 너털웃음을 날렸다. 내 과장된 웃음을 금방 알아채고 진수가 못마땅하다는 듯 질투 섞인 목소리로 여동생을 꾸짖었다.
“기집애, 까불지 말구 어서 집에나 들어가.”
“피이, 오빠가 뭐 하천 둑 전세 냈나! 오라 가라 하게!”
하지만 진영은 여전히 진수를 무시하고 아예 내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수가 어이없다는 듯 삿대질을 해대며 다시 힐책하려고 하자 봉기가 만류하며 한마디 거들었다.
“야아, 야. 그냥 둬라. 어차피 뒤치다꺼리 할 사람두 없었는데 차라리 잘됐지 뭐!”
주봉기의 말에 진영은 뽀로통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그다지 싫지만은 않은 표정으로. 오히려 오빠 들 네 명의 주목을 동시에 받는다는 여자로서의 다분히 상기된 표정으로.
그녀의 등장으로 기타와 노래는 자연스럽게 중단되었다. 우리는 그제야 솥단지를 확인했고 가득하던 막걸리가 제법 줄어들었음을 알아차렸다. 녀석들은 갑자기 술 욕심을 부리며 다툼을 벌였다. 그 다툼이 하도 치열하고 전투적이어서 서로를 보고 한바탕 낄낄거렸다. 그렇게 아귀다툼 같은 객기가 오가는 사이 영석의 입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어? 저게 뭐여? 마을에 불난 거 아녀?”
그가 소리치며 가리키는 손가락 방향에서 붉은 불기둥이 곧게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치솟는 불기둥의 모양새가 예사 불이 아니었다. 찢어지게 밝은 달빛으로 인하여 불꽃은 더욱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주봉기가 소리쳤다.
“저기가 어디여, 진수네 집 같은데? 야, 빨리 가봐야 하는 거 아녀!”
신진수가 튕기듯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가 기타조차 팽개쳐 놓고 줄달음치기 시작한 시간은 채 1초도 걸리지 않은 순간이었다. 곧이어 슬리퍼를 질질 끌고 왔던 진영이 맨발로 부랴부랴 진수의 뒤를 쫓아간 것도 삽시간의 일이었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공회당 은행나무에 매달려 있는 마을의 위급 신호용 종소리가 요란하게 하천 둑까지 전파되었다.
영석이 널브러진 솥단지와 집기들은 그대로 팽개친 채 진수의 기타만을 급히 챙겼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현장으로 달려 나갔다. 나도 일어나 뛰기 시작했다. 녀석들은 이미 저만치 앞서서 달려가며 점점 작아져갔다. 나는 더욱 속도를 내어 뛰었다. 하지만 갑자기 숨이 턱밑까지 치밀어 자칫 토할 것만 같았다. 속도를 줄이고 숨을 고르기 위해 허리를 구부렸다.
그때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멀리에서, 자전거를 타고 쏜살같이 방장골 방향으로 내달리는 청년들을 보았던 것이다. 빠르기가 마치 활시위를 떠난 화살과도 같이 날아가는 것에 진배없었다. 자전거 하나에 둘이 타고서도 어찌나 빨리 허공을 가르는지 누구인지를 식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뜬금없이 뇌리에 스친 것은 정라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방장골로 내달리던 유복자 사촌의 영상이었다. 폐달을 밟는 발의 힘이 영락없이 석양으로 사라지던 모습 그대로였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 주변은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종소리를 듣고 모여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불길을 향해 물을 뿌리고 있었다. 물이 반도 담기지 않은 용기를 들고 미친 듯 뛰어다니는 꼬마들은 오히려 신이 난 모양새였다.
필사적으로 불을 끄려는 무대뽀 틈에 석우의 모습이 눈에 확 들어왔다. 석우는 갈고리로 외양간 지붕의 거적들을 끌어내리며 불길이 안채까지 번지지 않도록 안간힘을 쏟고 있었다. 갈고리를 끌어내릴 때마다 붉은 불덩이들이 우르르 땅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석우는 어디에서 그런 엄청난 용기가 생겨난 것일까, 나서기를 좋아하지만 다분히 겁쟁이인 석우에게 저런 영웅적인 일면이 있었던가,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불길은 처마에 탈싹 달라붙어서 안채로 건너뛰기 시작했다. 꼬리를 물고 옮겨 붙은 화마는 벽을 타고 이동하는 지네처럼 방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매캐한 연기는 더욱 거세졌다.
“야아, 진영아! 빨리 나와. 집에두 불붙었어!”
진수의 울부짖는 목소리가 다급하게 허공을 갈랐다. 무언가를 꺼내기 위해 집 안으로 들어간 모양이었던 진영은 대답은커녕 그림자도 나타내지 않았다. 불기둥은 때마침 분 바람을 타고 금방이라도 집을 삼켜버릴 기세로 지붕 위까지 맹렬하게 핥기 시작했다.
진수가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광경을 본 석우가 뒤따라 서슴없이 불길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목격되었다. 석우의 무모함에 나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그저 넋이 빠진 채 물끄러미 바라보는 못난이가 되었을 뿐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눈이 그들이 뛰어 들어간 집 안으로 일제히 집중되었다. 안타까운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올 때쯤 다행스럽게도 석우가 영화에서의 영웅처럼 진영을 업고 등장했다. 진수도 뒤따라 가재도구를 가지고 나오는 것이 눈에 띄었다. 동네 사람들은 정라가 할아버지를 구했을 때처럼 누가 먼저랄 것도 없는 박수갈채를 보냈다. 나는 놀라 쪼그라들었던 가슴을 겨우 쓸어내렸다.
진영의 손은 수없이 토해내는 기침의 간격에 제멋대로 흔들거렸다. 군데군데 검댕이가 묻은 석우의 얼굴에 붙었던 볏짚은 흔들거리다가 떨어져 나갔다. 그가 앉은뱅이 자세로 진영을 내려놓으려는 순간, 그녀의 무릎이 ㄱ자로 꺾어지며 휘청거렸다. 진영은 넘어지지 않으려고 석우의 목덜미에 두 팔을 걸쳤다. 당황한 그가 진영을 얼싸안으며 균형을 잡았다. 그러나 진영은 좀처럼 석우의 품으로부터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남녀가 유별한 나이이고 동네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소스라치게 놀라 정신을 가다듬을 일이었으나 진영은 석우의 품에 한사코 포옹되어 있었다. 나는 너무도 놀란 나머지 그들을 지켜보면서도, 진영을 밀쳐내지 않는 석우와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진영의 행동에 오히려 민망한 생각이 들었다.
멀리서 불자동차의 사이렌 소리가 예상보다 빨리 들려오기 시작했다. 불자동차에서 뿜어내는 세찬 물줄기에 화재는 신속하게 진화되었다. 다행히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불의 확산을 막았고, 예측보다 일찍 도착한 소방차 덕분에 걷잡을 수 없이 번질 뻔했던 불길은 곧 잡혔다.
화재 원인이 조사되었다. 애초에 외양간에서 시작된 화재의 조사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이 확인되었다. 누군가의 방화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증언이 있었다. 증언자는 미친 아저씨가 불씨를 외양간에 투척한 것 같다고 증언했다. 현장에서 비실비실 웃고 있는 미친 아저씨를 발견한 것은 그때였다. 그러나 조사원의 추궁에도 그저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잣말만 지껄이는 통에 그가 범인인지는 쉽게 규명할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공회당에서 폭행사건을 당해 미쳐버린 그가 보복을 했다고 수군거렸지만 소방대원에게는 관심 밖의 의구심일 뿐이었다. 조사를 포기한 조사원은 새로운 사실이 있으면 신고하라는 말만을 남기고 되돌아갔다.
진수 남매는 비로소 공포에 떨기 시작했다. 대관절 어떤 앙심에서 비롯된 사건인지는 예측할 수 없었으나 표적이 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더없이 두려워했다. 시내 친척의 제사에 갔던 진영의 부모가 급한 전갈을 받고 도착했다. 화재 수습은 늦게까지 이어졌다. 마을 사람 몇몇이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현장수습을 하는 일행 속에 석우도 끼어 있었다.
나는 해수욕장에서부터 혹사당한 몸이 고단했고, 자꾸만 구토가 치받는 느낌 때문에 먼저 현장을 떠나왔다. 몸을 뉘었으나 이리저리 뒤척이는 각도마다 뼈마디 언저리가 불편했다. 더구나 밑도 끝도 없는 불안으로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화재 현장에서 보았던 뜻하지 않은 석우의 행동 때문이었다. 비틀대며 목덜미에 매달린 진영을 한참 동안 보듬고 있던 석우가 자꾸만 떠오른 탓이었다. 진영을 보듬고 있는 자세가 결코 평범한 몸짓은 아니었고, 진영을 대하는 눈빛 또한 범상치 않았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둘 사이에 존재하는 것인가, 몸집은 성인의 티를 갖추었으나 이제 겨우 고등학교 1학년인 진영을 석우가 어찌했을까, 도리질을 쳤다. 쓸데없는 억측이었지만 내가 잠들기 전까지 그가 돌아오는 인기척은 끝내 확인할 수 없었다.
이튿날 아침, 동네는 스산한 소식으로 또 한 번 술렁거렸다. 미친 아저씨가 방장골 논바닥 진흙탕에 머리가 처박힌 채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조사 과정에서, 제방 둑으로부터 논바닥 비탈로 선명한 자전거바퀴자국이 발견되어 운전 부주의로 인한 단순한 사고사라고 판명되었다. 미친 아저씨가 왜 방장골로 내려갔는지, 언제나 걸어 다니기만 하던 아저씨가 왜 자전거를 탔는지, 역시 규명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은근히 진수 아버지를 의심하는 눈치들이었지만 근거 없는 유포일 뿐 명백한 확증은 없었다.
나는 화재와 미친 아저씨의 시체가 방장골 인근에서 발견된 것이 일치하는 것에 불안을 떨었다. 자전거를 타고 도망친 무리들이 유복자였다면 공회당 폭행사건과 연관된 사건이 아닌가를 의심하기에 이르렀으나 목격자가 없는 두 사건을 감히 연결 지을 수는 없었다. 마을사람들은 죽어서 말이 없는 그의 죽음을 단지 미친 아저씨라는 이유로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데 채 며칠이 걸리지 않았다. 유독 나만이 머릿속을 맴도는 엉킨 의문을 수없이 되뇌며 불안을 품었다.
개학은 피해 갈 수 없는 현실이었다. 정라에게는 조심스럽게 상경 소식만을 전해주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모를 불안함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리움으로 변해갔다. 결국 치미는 목마름에 무작정 우이동행 버스를 잡아탔다.
목적지에 도착해서는 언제나처럼 먼저 공중전화를 했다. 사실 먼 거리에서 전화를 하고 그녀의 의중을 염탐하기 싫었다. 미주알고주알 약속시간이나 장소 따위를 정하는 데 요란을 떨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가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할 시간인가를 생각한 다음 내처 달려와 피할 수 없도록 압박하고 싶었다. 적어도 정라에게만은 그녀의 한 걸음보다 나의 열 걸음이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곧바로 공원에 등장했다. 그동안 보아오던 고등학생의 모습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화사한 스카이블루 색상의 원피스로 경쾌함을 한껏 뽐내었다. 더구나 한결 예뻐 보이려는 듯한 사뿐사뿐한 걸음걸이에 심장마저 멎을 지경이었다. 나는 그녀 집안과의 과거를 잊고 금방 들떠 올랐다.
“너무 이쁘다!”
나의 아낌없는 칭찬에 정라는 싫지 않은 듯 ‘피이’하며 예쁜 콧방귀와 함께 벤치에 앉았다. 산에서 내려오는 신록의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살랑거렸다. 흩날린 머리카락은 성근 손가락에 의하여 정갈하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엉큼하게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먼 산으로 시선을 옮겨 딴전을 피웠다. 정라는 눈을 흘기더니 오히려 내 손을 꼭 잡아주는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녀가 물었다.
“방학 때는 시골에서 뭐 했어?”
“어, 농사일 도와주었지. 참, 애들이랑 강원도 해수욕장두 갔었어. 망상이라는 곳이었는데 엄청나게 재미있었어.”
대화거리가 생긴 것에 안도하며 대뜸 활기를 찾았다. 해수욕장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출발에서부터 그간에 있었던 스토리를 신이 난 듯 조목조목 되뇌었다. 야간열차를 타고 출발하여 바다를 처음 대한 새벽의 일출과, 시비 걸린 싸움과, 판쵸 이야기를 했다. 정라는 판쵸 이야기에 이르러 자지러지듯 웃으며 눈물까지 찔끔거렸다. 이야기를 듣고 흥미 있어 하는 그녀의 해맑은 표정을 보니 오히려 내가 더 행복해졌다.
“나는 아직 바다를 본 적 없는데. 한번 가보구 싶다! 그리구 다음은 어떻게 됐는데?”
“돈을 모아서 진수 기타를 사주었어. 녀석이 한턱낸다구 하천 둑에 모였어. 양재기를 엎어 놓구 장단을 맞추는데 어찌나 세게 쳤는지 숟가락이 동강나구 양재기에 구멍이 다 뚫렸어.”
정라가 또 웃다가 눈물을 찔끔거렸다. 이제 그만 웃기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깔깔대는 그녀를 보노라니 와락 얼싸안고 싶은 충동마저 거침없이 솟구쳤다.
“그런데, 그때 진수 집에 불이 났어! 다행히 외양간만 탔어. 불을 겨우 잡았거든!”
“불? 큰일 날 뻔했겠네.”
진수와 그다지 친하지 않았을 정라는 화재 사건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때마침 계곡에서 달려온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또 다듬었다. 정갈해진 머리카락은 다시 흩날렸고 흩어진 올은 반복적으로 다듬어졌다. 순간순간 정리되는 머리카락 틈으로 몰랐던 매력이 눈 가득히 고여 들기 시작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더 자연스러운 소녀의 청순함, 귀밑과 목덜미 그리고 이마에 송송 돋아난 참새의 깃털 같은 여린 솜털의 매력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순수함이었다.
미칠 노릇이었다. 정라의 입술을 훔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해수욕장이 불현듯 떠오르더니 바다 냄새가 났고 파래 맛이 났다. 눈 안에 낀 이물질을 불려다가 기습적으로 키스해버린 여러 가지 향긋한 맛이 죽순의 속살처럼 다시 돋아났다. 하지만 조상들의 실타래 같은 과거가 머릿속을 맴돌며 감정을 통제하였다. 교차되는 부모들과의 관계, 영석에게 들었던 반목의 과거사, 나는 피해자의 딸을 사랑하는 가해자의 아들이었다. 운명이라기에는 가혹한 형벌, 정라를 애초에 포기하지 않을 바에는 그녀도 알고 있는 내용인지 필히 짚고 넘어가야 할 숙제였다.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높은 장벽을 의식하며 조심스럽게 입술을 열었다.
“정라야. 나…….”
“왜? 무슨 할 말 있어?”
그녀는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습 키스 때처럼 얼굴을 턱밑 가까이에 들이댔다. 무구한 표정이 환하게 점령해 들어왔다. 그런 그녀의 표정 앞에서 차마 조상들의 이야기가 떨어지지 않았다. 정녕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결국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훼방꾼의 조종을 받은 주책없는 말이 입 밖으로 달음박질쳤다.
“나…… 니한테…… 키스하면 안 돼?”
정라의 얼굴이 순간 빨개졌다. 귓불까지 빨개졌다. 수줍음을 잔뜩 머금은 홍조였다. 곧이어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할미꽃처럼 고개를 떨어뜨렸다. 나 또한 맹랑하게 튀어 달아난 말을 수습조차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서로의 발끝만을 내려다보는 침묵이 이어졌다. 주워 삼킬 수 없는 말, 그것도 공원에서 어떻게 그런 말을 뱉을 수 있었을까? 어이없는 놈, 그러나 그건 순전히 내 의지가 아니었다. 내 안에 웅크리고 있는 또 다른 나의 못된 짓이었다. 할 말이 없었다. 위기를 모면하려면 어떤 말이라도 꺼내야 했지만 침묵은 줄곧 이어졌다. 그런데 때마침, 다행스럽게도 그녀가 먼저 말문을 터뜨렸다.
“어? 저기 정호 오빠 올라가네!”
그녀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나는 고개를 들어 공원 입구를 쳐다 보았다. 정호가 숨을 헐떡이며 급히 집으로 오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뜀박질은 민첩했다. 하물며 어찌나 다급해 보이는지 금세 골목으로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정호 형은 많이 바쁜가 벼. 저렇게 급하게 뛰는 걸 보면!”
“나두 잘 몰러. 대학 들어갈 때는 몰랐는데 2학년이 되니까 못 볼 때가 더 많어. 방학 때는 충주 큰집에 내려간다구 하구선 지금 보름 만에 나타나는 거여!”
“방장골?”
“으응, 아랫방장골! 동아리들끼리 정부에 반대하는 데모를 너무 해서 아부지가 걱정이 많으셔! 성격이 꼭 돌아가신 큰아부지 같다며 걱정이 태산이여! 난 빨리 집에 올라가봐야겠어!”
정라가 불안한 듯 벌떡 일어섰다. 원피스 엉덩이에 나무벤치의 가로줄 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불쑥 낯설음이 새겨진 뒤태였다. 짧은 순간 멈칫하던 그녀가 살같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잡을 명분이 없었다. 다급하게 뛰어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곰곰이 생각했다. 어쩌면 정호는 공회당 사건과, 아버지들의 얽힌 과거를 낱낱이 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피신을 목적으로 방장골에 은신했다면, 진수 집에 담뱃불을 던지고 사라진 자전거의 검은 그림자가 유복자와 정호일 수도 있다는 심증은 더욱 짙어졌다. 그렇다면 미친 아저씨의 죽음은……. 정호의 성품이라면 자기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 그다지 망설일 사람이 아니었다. 머릿속은 엄청난 혼란으로 곤두박질쳤다. 하지만 근거 없는 위험한 억측, 머리를 도리질 치며 벤치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공원 입구를 나오며 정라가 사라졌던 언덕을 몇 번씩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사라진 골목에는 몽실몽실한 수국송이가 불어오는 바람에 출렁이고 있었다. 수국은 양손으로 감싸고 싶을 만큼 수북하여 마치 중랑천에 걸린 브래지어와도 같이 탐스러웠다. 그녀가 사라진 집 언저리와 브래지어 같은 수국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지척지척 힘없이 언덕을 내려올 때였다.
“오빠아!”
난데없는 정라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메아리쳤다. 목소리 방향으로 몸을 틀어 언덕을 쳐다보았다. 정호가 쏜살같이 내려오는 것이 시야에 잡혔다. 그 뒤를 마치 어린아이처럼 정라가 뒤따라 내려오며 정호를 애타게 불렀다. 영락없는 도망자와 추격자의 모양새였다.
“오빠, 아부지 엄마 만나구 가. 금방 들어올 거란 말이여!”
“니가 알아서 잘 말혀. 난 지금 그럴 시간 없어!”
“그래두 얼굴 보구 가! 나보구 뭘 어떻게 하라구 그려. 오빠가 직접 말혀!”
“군대 가서 연락할 겨. 지금은 그게 최선의 방법이여.”
정라는 마치 버림받은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면서 정호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정호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정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속 오른팔만을 가래질쳤다. 그런 남매의 낯선 행동에 내가 더 얼어붙어 꼼짝도 못하고 말았다. 이윽고 정호는 내 앞 가까이 와서는 벽에 부딪힐 듯 미끄러지며 멈추었다. 의도했던 바는 아니었는데 결국 그를 가로막고 선 꼴이 되고 말았다.
“니는 뭐 하는 새끼여. 왜 남의 앞길을 가로막구 지랄이여. 저리 안 꺼져?”
정호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그제야 상황 판단이 된 나는 옆으로 찔끔 비켜섰다. 다음 순간, 그가 힐끗 째려보더니 콧김까지 훅훅 불어대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는 내 얼굴을 다시 한 번 훔쳐보았다. 그러고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두세 차례 갸웃거렸다.
“니, 혹시…….”
“예에, 저…… 양우입니다. 전양우!”
“이게 어떻게 된 겨. 니 눔이 왜 여기에 있어?”
정호가 단박에 날 알아보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궁지에 몰린 쥐새끼처럼 몸을 움츠렸다. 그때 정라가 쏜살같이 내려와 정호 옆에 넘어질듯 멈추어 섰다. 그녀는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오빠, 이렇게 떠나면 우리는 어쩌라구 그려! 어무니는 매일같이 오빨 걱정한단 말이여!”
정라가 정호의 팔을 잡고 애원했다. 검은 눈썹꼬리를 실룩거리며 애원하는 모습은 거의 절규와도 같았다. 그녀가 안쓰러워 나의 심장은 요동쳤다.
정호는 긴 한숨을 토해내며 마침내 나에 대한 의문점을 문책했다.
“그런데, 이 눔은 여기 웬일이여? 정라 니 혹시 그동안 이 녀석 만난 것 아니여?”
눈치 빠르고 명석한 정호는 나와 정라의 만남을 쉽게 유추해내었다. 정라는 손등으로 눈두덩을 닦으며 그렇다는 긍정의 고개만을 끄덕였다.
“환장하겠네. 정라 니, 얘들 집과 얽힌 과거를 알기는 허냐?”
정라는 모른다는 부정의 표현으로 머리를 가로저었다. 영석에게 들었던 이야기의 내용을 정호는 정확하게 알고 있음이 명료해졌다. 기회를 봐서 정라에게 넌지시 이야기하고 그녀의 반응을 조심스럽게 살피려 했었다. 그런데 결국 교활한 놈으로 낙인찍히게 되어버렸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싶었다.
정호는 한심하다는 듯 정라를 쳐다보고는 내게 물음표를 던졌다.
“야, 니는 알구 있냐? 서루 원수지간인 것 말이다!”
“예……. 얼마 전에 친구한테 조금 들었어유.”
“그걸 알면서 정라를 만나러 오구 그랬어. 장마 때, 기껏 할아버지 구하는데 힘 한 번 썼다고 용서될 줄 알구 있는 겨? 지금 이게 가당키나 혀?”
정호는 앞뒤 가릴 것 없이 대차게 궁지로 몰았다. 나는 어떤 항변이나 변명의 여지도 찾지 못했다. 죄인처럼 머리를 떨어뜨리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영문도 모르고 정호에게 혼쭐이 나고 있는 내가 측은했던지 마침내 정라가 거들며 두둔했다.
“오빠, 도대체 왜 그려. 얘가 뭘 잘못했다구 그렇게 야단이여!”
“기집애, 대가리에 피두 안 마른 것들이 공부는 안 하구 벌써부터 연애질이여!”
“오빠, 너무혀. 진짜 미워 죽겠어. 오빤 항상 지 멋대루여!”
“까불지 마, 기집애야. 아버지한테 왜 서루 원수지간인지 말해달라구 혀. 오늘은 내가 시간이 없어서 그냥 간다. 야. 전양우! 앞으루 내 눈에 띄지 마. 그러다가 정말 뒈지는 수가 있어!”
정호의 험한 말에 소름이 오싹 돋아났다. 진수네 집의 방화사건도 정호였을지 모른다는 심증이 있던 터라 그의 언행은 더욱 날카롭고 섬뜩했다. 정호는 그렇게 일방적인 엄포를 안겨놓고 옷가지와 가방을 들쳐 메고 사라졌다. 대관절 얼마나 다급하고 촉박하면 부모도 만나지 않고 도망치듯 가버렸을까, 쫓기듯 떠나는 곳이 군대라면 강제입영이 아닌가, 근래에 학생들의 데모가 유독 심해져 대학 언저리마다 연일 매캐한 최루탄 연기로 가득하고 주동자들이 연행되는 사건이 비일비재했다. 그 핵심에 정호가 연루되었다면? 더 이상의 추측은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예기치 않았던 상황에 놓인 정라와 나는 멀뚱하니 서로의 얼굴만 살필 뿐이었다. 한참의 침묵이 흘러갔다. 조바심이 난 내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우리, 다시 공원에 가서 얘기할려?”
“아니, 나중에 혀. 지금은 아무 말두 귀에 안 들려!”
정라의 목소리는 작고 힘이 없었다. 어린아이 같은 훌쩍거림은 더욱 증폭되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아야만 하는 내 마음은 찢어질 듯 괴로웠다. 아렸다. 그러나 겨우 손짓만으로 정라의 귀가를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그녀가 먼저 돌아섰다. 담장 위를 침범한 보랏빛 수국송이는 여전히 바람에 출렁거렸다. 그녀의 화사한 원피스가 불현듯 나약한 하늘거림으로 여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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