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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노리는 YS, 종횡무진 독설
"2년안에 내각제 개헌을 하겠다는 대국민 약속으로 당선된 김대중대통령의 정치적 임기는 올해말로 끝이오. 김대중·김종필씨의 내각제 약속이 안지켜지면 내가 어찌할 것인가는 두고 봅시다. 내 생각이 있어요"
1999년 7월 신동아
6월15일 오후 6시15분. 김포공항 제2청사 의전주차장 입구에는 ‘돌아온 YS’를 환영하는 3백여명의 인파가 몰렸다.
출국길에 같은 장소에서 벌어졌던 ‘페인트 테러’ 같은 사고를 막기 위해 삼엄하게 배치된 경찰병력의 긴장된 눈빛과는 달리 환영나온 청년·부인들에 손들어 답례하는 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의 얼굴은 밝았다. 일본을 방문하는 동안 ‘나라망친 대통령’이라는 멍에를, 적어도 주관적으로는, 완전히 벗어던진 홀가분함 때문일까?
13일간의 방일기간에 원색적인 용어까지 동원해가며 쏟아낸 김전대통령의 종횡무진 독설은 무질서한 속에서도 나름의 분명한 지향점을 갖고 있는 것같았다. 그것은 추락한 문민정부 대통령의 ‘명예회복’과 ‘DJ때리기’를 통한 자연스런‘정계복귀’라고 할 수 있다. 전직대통령으로서 정부를 도와야 한다는 설교도, 외국에서 본국을 성토하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다는 조언도 김전대통령의 거침없는 ‘언론자유’를 막을 수는 없었다. 물오르던 ‘40대 기수론’ 시절과 80년대 가택연금 시절의 오기가 되살아나는 듯했다. 김전대통령이 일본방문 기간 동안 쏟아낸 육성과 호흡, 그리고 속내에 관한 기자의 현장기록을 소개한다.
6월3일 일본으로 출국하기 직전 김포공항에서 터진 ‘페인트 달걀’ 투척 사건은, 안그래도 여행테마를 ‘김대중 독재’로 잡고 있던 김전대통령에게는 역설적으로 ‘울고싶은 데 뺨 때려준’격이 됐다.
느닷없이 날아온 페인트 세례에 눈과 얼굴이 범벅이 되어 상도동 자택으로 되돌아간 김전대통령이 ‘상도동 대변인’ 박종웅(朴鍾雄)의원과 전화로 연결된 것은 사건 발생후 30여분이 경과한 오전 11시25분. 박의원은 현장수습을 마친 뒤 김광일(金光一) 전대통령비서실장 유도재(劉度在)전총무수석, 이원종(李源宗)전정무수석 이각범(李珏範)전정책기획수석 표양호(表良浩)공보비서관 등 수행진과 함께 이미 티켓이 예약된 11시35분발 후쿠오카행 아시아나항공 132편 비행기에 올라 핸드폰 버튼을 눌렀다. 김전대통령은 눈과 얼굴에 묻은 붉은 페인트를 채 닦아내지도 못한 채 수화기를 잡았다.
(박의원)―각하, 눈은 괜찮으십니까.
(김전대통령)“괜찮긴 한데…, 아직도 눈을 뜰 수가 없어”
(박의원)―큰일날 뻔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놈들이 이런 만행을…. 범인은 일단 현장에서 경호원들이 잡아서 경찰에 넘겼지만 혼자서는 감히 이런 짓을 몬할 낀데….
(김전대통령)“하늘이 무서운줄 모르는 놈들. 절대 혼자가 아니야. 이건 계획적 조직적 살인행위다. 독재자의 최후발악으로 볼 수밖에 없다.
나~아쁜 놈들. 천벌을 받을끼라”
‘달걀세례’가 정치9단 YS에 의해 즉각 ‘독재자의 조직적 살인행위’로 규정되는 순간이었다. 자칫 ‘봉변’과 이로 인한 망신, 스타일 구김 등으로 신문에 묘사될 수 있는 사건을 순간적으로 ‘김대중독재정권’과 연결시킬 수 있는 YS는 역시 천부적인 ‘정치감각’을 타고난 것같다. 이후 김전대통령 측근들은 한번도 ‘달걀세례’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다. ‘페인트 테러’만이 반복적으로 사용됐다. 다소 불경스런 상상일지 모르지만 만일 김대중대통령이 퇴임후 같은 입장에서 이런 사건을 당했다면 어떻게 대처했을까.
비행기에 오르기 전 ‘정부의 경호의무 방치’정도로 의혹을 제기하던 김광일 전비서실장도 기내에서 상도동과 핸드폰으로 통화한 뒤 톤을 한단계 높였다. “틀림없다. 이런 정치테러는 정황상 단독범행일 수 없다. 확신한다”
조용한 기내에서 난데없이 ‘각하’ ‘독재자’ ‘살인적 테러’등 심상찮은 용어들이 난무하며 낯익은 얼굴들이 부산하게 움직이자 승객들이 여기저기서 술렁였다. 김전실장은 궁금해하는 승객들앞에 섰다.
“김영삼(전)대통령을 모시는 김광일비서실장입니다. 김영삼대통령께서 이 비행기에 탑승하러 귀빈실에 들어서다가 ‘테러’를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 일행이 현장을 수습하고 탑승하느라 비행기 출발이 다소 지연됐습니다. 나중에 저희들이 반드시 규명을 요구하겠지만 이 사건은 단순한 달걀세례 사건이 아닙니다. 조직적 계획적 테러사건입니다” 원래 다혈질 소리를 듣는 김실장이었지만 이날은 특히 목소리가 흥분됐다.
승객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청와대가 시켜서 한 거지, 혼자 했겠나” “맞데이, 하이고, 뻔하지 뭐”억센 부산 사투리의 두 중년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뒷줄에서 즉각 반격이 날아왔다. “대통령이 뭐가 할 일이 없어서 그런 걸 시킨다고 그래” “(김영삼정부가) 나라를 결딴내놓고 무슨 난리들이야”
비아냥대는 소리에 김실장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 아줌마, 호남 말씨네?” 순간 기내에 일제히 웃음이 터졌다.
―김광일전실장은 기내에서 메모지에다 뭔가를 열심히 써내려가더니 후쿠오카 공항에 내리기 직전 즉석에서 ‘긴급성명서’를 발표했다. 상도동측과의 통화내용과 기내 참모들의 의견을 모아 작성된 이 성명서는 후쿠오카 공항에서 일본기자들에게도 발표됐다.
“공공장소에서 전직대통령이 당한 테러에 대해 전직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상 정부와 청와대에 엄중한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김전대통령의) 원내총무시절 3선개헌반대 투쟁을 할 때 공권력에 의해 자행된 살인적 초산테러를 상기하면서….”
수행진은 김전대통령이 오후 늦게나마 출발하기로 했다는 연락에 따라 후쿠오카공항 대기실에서 김전대통령의 도착을 기다렸다. 김전대통령 시절 청와대 핵심비서진이 모처럼 대거 함께 한 여행인지라 대기실은 흡사 지난정권 시절 청와대 소회의실을 옮겨놓은 듯했다. 김광일 전실장이 아시아나 항공의 현지 사무실을 통해 긴급성명서 전문을 ‘상도동 어른’께 전송한 뒤 대기실로 돌아와 ‘즉석회의’를 주재했다.
(김전실장)―전직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상 일반국민보다 철저한 신체안전을 보장해야 할 의무가 정부에 있는데도 공공장소에서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 정부가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지 않고 딴 데 정신을 팔다가 이런 일이 일어났다
(이원종 전정무수석)―다른 곳도 아닌 공항 귀빈실 입구에서 경찰은 뭐했나. 상도동 경호팀도 있지만 강서경찰서가 기본 외곽경비는 해줘야 할 것 아닌가.
(박종웅 의원)-이 사건은 정치적 테러사건으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정치테러사건에는 배후가 없던 적이 없다. 절대 개인감정으론 못한다.어른(김전대통령)한테서 최근에 옛날 초산테러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원종 전수석)-각하께서 뭘 예견이라도 하셨나. 왜 하필 그 얘길 하셨을까.
(김광일 전실장)-전직 대통령이 외국에 가서는 국내 비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제 그 족쇄가 풀린 셈이다. 이제 누가 뭐라카겠노. 일본 경찰도 긴장할 거다. 김대중납치사건의 전철도 있으니까.
(김전대통령측은 당초 일본에 경호 요청을 했으나 일본측은 처음에‘일본의 치안이 별도로 경호를 해야 할만큼 취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직대통령에 대해 별도 경호를 해줘야 하는 법적 예산적 근거도 없다’는 소극적 반응이었다. 그러나 김포공항 사건도 있고 해서 일본경찰에 강력히 요청해서 경시청에서 뒤늦게나마 경호를 해주기로 했다. 사실 경호팀은 김포공항 사건 때도 경찰에 별도의 경호요청을 하지 않았다. 김영삼 전대통령이 그런 경호를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전실장)-우리 야당 출신 재야 출신들은 이럴 땐 확 피가 끓어오른다. 내가 76년에 김대중씨 변론을 할 때도 그랬다. 법정에서 재판을 받아야 할 유신정권이 감히 누굴 피고인으로 앉혀놓고 재판하는 것인지 피가 거꾸로 돌더라.
(일행 가운데서 누군가 얼마전 전두환(全斗煥) 전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일본경찰에서 취재진의 근접촬영까지 제한하는 등 삼엄하게 경호를 해줬다고 말했다. 이에 이원종 전수석이 ‘울분’을 토로했다)
(이전수석)-아니 전두환씨에게 전직대통령으로서 예우를 받을 자격이 있는가. 법적으로 유일하게 전직대통령 예우를 받는 분은 우리 어른 한 분인데, 전두환씨를 그렇게 모셨다고? 아이, 이거 정말 ‘핏대’ 나네. 전두환씨는 아마 나까소네와 ‘아니끼’(형님) 어쩌고 하는 관계라 그런 모양이지. 보수우익에 친밀한 나까소네의 영향력 때문에 일본경찰에서 신경을 많이써준 모양이야.
(김전실장)-게다가 전두환씨는 한국 정권에서도 감싸주는 사람이니까….
김전대통령이 오후 5시55분 JAL 972편 비행기로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했다.일본경찰에서 파견나온 경호요원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김 전대통령 일행을 태운 승용차와 버스가 숙소인 기타규슈 리가로얄호텔에 도착한 것은 이미 어둠이 짙게 깔린 오후 8시. 도착 즉시 기자회견을 할것이라는 김 전대통령의 ‘대기령’이 박종웅의원을 통해 전달됨에 따라 기자들은 객실이 아닌 4층 회견장으로 막바로 짐을 끌고 올라가 기다렸다. 참모들이 30여분간 김전대통령 방을 오가며 이날의 ‘정치테러’에 대한 향후 대응책 등을 논의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A4용지 7쪽에 달하는‘기자간담회 관련 보도자료’가 배포됐다. 잠시후 회견장에 내려온 김전대통령은 먼저 탁자에 놓인 물 한컵을 거의 단숨에 들이켰다.
“내가 오늘 물을 마시는 것은 마음의 안정을 기하기 위해서다. 내가 30여년에 걸친 독재정권한테 이런 일을 여러번 당하지만, 김형욱(金炯旭)이한테도 그랬지만. 오늘 김포공항에서, 이건 단순한 페인트가 아니다. 서너시간 동안 눈을 뜰 수 없었다. 눈이 조여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오늘 두 눈을 잃는다고 생각했다. 주치의가 동시에 우리 집으로 와서 최선을 다했는데 의사가 늦게 왔더라면 큰 일 났을 거라고 한다. 눈을 뜰 수 없었는데, (이건 사람을) 봉사로 만들어버리는 살인적 행위다. 오늘 김대중독재자는 무덤을 팠다고 생각한다. 살인적이고 독재적이고,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다. 아마 여러분 만나기도 어려웠을지 모른다. 폐인이 됐을 것이다. 4시45분 비행기를 예약해놓았지만 올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살인적인 것, 특수 제작된 페인트였다. 내가 사실 조용히 얘기하려 했는데 조용히 안되네, 나도 인간이니까”
그러나 ‘조용히 얘기하려 했다’는 김전대통령 말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김전대통령측은 일본 방문을 앞두고 이미 일본에 가서 발언 수위를 여전히 높일 것임을 예고해놓고 있었다. 다만 페인트 사건은 정권의 책임 유무를 떠나 김 전대통령에게 있어서는 ‘준비된 물주전자’의 뚜껑을 열어젖혀주는 매개 역할을 했을 뿐이다. 김전대통령은 쏟아지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겠다는 듯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페인트 테러’의 ‘배후’는 당연히 ‘김대중 독재자’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오늘 김포공항에서 살인정권이라고 규정하셨는데 아직 박의정씨의 범행동기나 배후가 밝혀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
“김대중정권은 살인정권이다. 그동안 해온 것도 살인정권이지만 오늘 한 것도 살인정권이다. 박의정이는 내가 보고받기론 (날보고) 통치권에 도전했다고 그랬다는데, 통치라는 게 도대체 뭐냐, 독재자나 쓰는 거―언방진(건방진) 말이다. 아니 내가 김대중한테 비판한다고 해서 통치권 도전이라고? 일반국민도 대통령을 비판할 수 있는 거다.”
-김대중 대통령에게 뭐가 가장 감정에 쌓여 있는가.
“개인감정 갖고 있지 않다. 30년을 같이 민주화운동하고 잘 해주길 바라는 사이다. 그러나 이젠 건너오지 못할 강을 건넌 독재정권이다. 질문 그만받고 내가 정리한 것을 한번 읽어보겠다. 아, 그전에 말이지. 기자라고 하는 분들이 김대중정권이 독재정권이라는 것을 모르나? 모르고 있다면 놀랄 일이지(좌중 웃음). 그래 갖고 어떻게 기자를 한다 말이오? 언론(사)에서 월급을 받는데”
김전대통령은 이미 배포된 회견문을 읽어 내려갔다. 회견문에는 김전대통령이 일본에서 강연이나 회견을 통해 내놓을 주요 메뉴들이 거의 다 망라돼 있었다. 서두는 왜 자신이 일본에 와서도 국내에서와 다름없이 한국의 ‘독재정권’을 비판해야 하는가에 대해 다소 장황한 설명들로 시작되고 있었다. 그의 일본방문을 앞두고 많은 지인과 측근들은 ‘해외에서는 국내 비판을 자제하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었다. 예컨대 김수한(金守漢) 전국회의장 홍사덕(洪思德)의원 김정남(金正男) 전교문수석 이각범 전정책기획수석 등이 그랬다. 그러나 그같은 건의와 관련한 김 전대통령의 답변은 ‘씰 데 없는 소리’라는 것이었다.
“이제 세계는 하나입니다. 아침은 서울에서, 점심은 동경에서 저녁은 하와이에서 가족들과 함께 먹으며 코소보 뉴스를 보는 세상입니다. 서울에서 한마디 하면 동시에 위성으로 생중계되어 뉴욕 파리 동경으로 전파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 ‘어디서 어떤 말은 하면 안된다’ ‘어디서는 다른 말은 말라’고 하는데 세상 어느 나라에도 이런 말은 없으며 유독 우리 나라에만 있는 말입니다. 군사독재를 비롯해 민간독재에 이르기까지 온갖 독재에 찌들어 그 말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이 말은 박정희(朴正熙) 군사쿠데타 정권 때부터 독재를 합리화하기 위해 만든 말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그 말을 한번도 듣지 않았습니다. 국내에서의 공공연한 비밀이 세계에서도 비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썩은 것은 국민에 알려 도려내야 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세계 어느 곳에 가서나 원칙을 가지고 일관성있게 말해왔습니다.”
자신이 일본에서도 ‘독재정권 규탄’의 깃발을 내릴 수 없는 이유에 대해 한참 설명한 김 전대통령은 이어 김대중정권에 대한 몇가지 비판을 ‘두서없이’열거해나갔다.
“현 정권은 고문과 도청 등 인권을 탄압하고 정치사찰과 회유 압력을 통한 정치공작을 일삼고…. 선거를 통하지 않고 국회의원 등을 여당으로 빼내 인위적으로 원내 과반수를 만들었습니다. 우리 역사에 유례가 없는, 군사쿠데타 세력이나 하는 작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독재자의 작태입니다.”
“오늘날 심각한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있는데 과거 정권말기에도 볼 수 없었던 추악한 작태입니다. 이 정권은 오랫동안 굶주린 이리떼처럼 가장 빠른 속도로 부패하고 타락한 정권입니다.”
“김대중정권의 햇볕정책은 국민의 지지가 없을 뿐 아니라 김대통령 개인의 정책에 불과합니다. 나는 적극적으로 반대합니다. 금강산 관광객중 많은 사람이 무료로 다녀왔다고 합니다. 금강산 관광객의 자유는 감옥안 죄수의 자유보다도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완벽히 통제된 관광일정에 관광객의 행동까지 철저히 통제됩니다. 관광안내원은 우리나라 사람이고 여종업원은 연변조선족이며 버스운전사는 중국의 우리 교포이고 현지 매점에는 판매물건이 전혀 없어 판매원을 만날 수도 없습니다. 이처럼 북한주민들을 일체 접촉할 수 없으며 각종 벌금 또한 상당한 금액입니다. 담배를 피우면 300달러, 침을 뱉으면 20달러, 휴지를 버리면 50달러, 휴게소의 전시물을 만지면 50달러, 김일성과 김정일의 사진위에 앉으면 50달러, 화재가 발생하면 한평당 300달러입니다.
그리고 금강산의 유려한 기암괴석 곳곳에 붉고 큰 글자로 ‘위대한 김일성 장군 만세’ ‘친애하는 김정일 지도자 동지 만세’라고 박혀 있어 무엇을 관광하라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역행하는 게 아닙니까. 공산당 선전장을 보고 오는 것이 어떻게 민주주의와 관계가 있습니까.”
“빅딜은 한마디로 국민기만 행위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기업의 자율에 맡기겠다고 말하다가 자신이 직접 개입하는 등 수시로 말을 바꾸었습니다. 또한 빅딜은 특정기업에 엄청난 특혜를 주어 결국 천문학적인 국민부담을 초래하였습니다. 전세계 어느 나라에도 대통령이나 정부가 거대기업을 강제적으로 분리, 합병하는 곳은 없습니다. 이는 시장경제의 원리에도 어긋나고 민주주의에도 어긋나며 공산주의 국가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공무원은 나라를 지탱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기둥입니다. 이 정권의 심각한 부패와 무능으로 인하여 이들의 사기가 현저히 저하되어 있습니다. 특히 나라의 장래를 결정짓는 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언제나 진실을 가르쳐야 하는데 김대중 대통령이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고 있어 청소년 교육에 크나큰 악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초등학교 교사에서부터 중등교사, 그리고 대학교수에 이르기까지 크나큰 허탈과 고뇌에 빠져 있습니다. 이 정권은 거짓말만 있고 진실이 없는 정권입니다.”
김전대통령은 현정권에 대한 비판에 이어 자신의 재임중 ‘치적’들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나열하기 시작했다. 김전대통령의 현정권 비판은 ‘상도동 만찬’에서도 대부분 언급된 것들이지만 김전대통령 자신이 재임중 치적을 이날처럼 상세히 적극적으로 ‘홍보’한 일은 별로 많지 않았다. 김대중대통령이 ‘경제 성장 업적’하나를 갖고 ‘무덤속의 독재자’박정희를 살려내 손을 잡는 판에, 각종 개혁조치들을 통해 민주주의 기본틀을 갖추어놓은 자신의 공도 정당히 평가받아야 한다는 생각인지도 모른다.
“내가 대통령으로 재임중에 한 여러 가지 일 중에 물론 미흡한 점이 많이 있지만, 나로서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군의 개혁과 금융실명제 및 부동산실명제 실시, 공직자의 확실한 재산등록 실시, 공정한 선거를 위한 선거제도의 개혁 등이 그것입니다. 또한 역사바로세우기를 통하여 서울의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전직대통령들의 군사쿠데타와 부정축재 문제에 대하여 단호한 입장을 취했습니다. 그리고 5년 대통령 임기동안 누구로부터 단한푼의 돈도 받지 않았고 누구에게 주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일은 역대 대통령중에 없었던 일로 생각합니다. 2002년 월드컵을 유치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으며 FIFA 위원들을 서울로 불러서…”
김전대통령은 이어 IMF사태와 관련해 ‘박정희·김대중 책임론’을 폈다.
“우리의 경제구조는 박정희 18년의 장기독재정권때부터 이미 IMF로 가는 길이 싹트기 시작하였습니다. 부익부 빈익빈으로 인하여, 정경유착으로 인하여, 그리고 그것이 수십년간 연속되면서 결국 IMF로 가고 말았습니다. 노동법과 한국은행법 개정, 그리고 금융개혁법안 및 기아자동차 처리 당시, 유일야당 총재였던 김대중대통령이 당파적 정략적인 이유로 이를 절대반대하여 국가부도위기라는 비극적 상황을 초래하였습니다.”
김전대통령은 최근 옷로비 의혹 파동 등 지도층의 부패문제에 일침을 놓는 것도 빠뜨리지 않았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습니다. 윗물이 썩었는데 아랫물이 맑을 수가 있습니까. 오늘의 현실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무어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얘기입니다. 옷인가 뭔가 하는 얘기입니다. 더러워서 옷이라고 얘기 안하는 거지”
김전대통령은 이어 내각제 문제에 관해 가히 YS다운 감각이 돋보이는 논리를 들고 나와 김대중 대통령을 압박했다. 국민앞에 2년내에 내각제 개헌을 이루겠다고 약속하고 집권했으니 김대통령의 정치적 임기는 올해말로 끝이라는, 그야말로 ‘기발한’ 논리가 처음으로 일반에 선을 뵈는 순간이었다.
“내각제에 대한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금년말로 정치적으로 김대중 대통령의 임기는 끝납니다. 이것은 김대중 대통령 자신이 국민에게 공개적으로 약속한 사실입니다. 두 사람 간의 약속은 두사람만의 약속이 아니라 국민전체에 대한 약속입니다.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합니다. 내각제 약속은 두 사람이 밀실에서 적당히 결정할 성질이 못됩니다. 국민에게 약속을 해서 그것 때문에 김대중대통령이 게우(겨우) 당선된 것입니다. 국민이 큰 눈을 뜨고 보고 있습니다. 또 어떤 거짓말을 할까 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만 받을게요”
-올해안에 내각제가 반드시 돼야 한다고 하셨는데, 김전대통령께서 정치를 재개하거나 신당을 창당하실 용의가 있는 것입니까?
“김대중 대통령의 임기가 올해로 끝난다는 것은 국민과의 엄청난 약속이오. 대선때, 임기가 올해말까지만이라고 약속해서 국민이 표를 던진 겁니다. 2년만이라니까 믿어보자고 한 거지.
그리고 내가 언제 정계은퇴했습니까? 신문에선 자꾸 그렇게 쓰는데 나는 정계은퇴라는 말 한 번도 안했어요. 그렇다면 다음에 대통령할 거냐고 묻는데, 내가 쿠데타해서 대통령한 사람도 아니고 열화와 같은 국민의 지지를 얻어서 당선됐던 사람이오. 오늘 대통령하는 사람보다 9%나 더 얻어서 당선된 사람이오. 분명히 말하지만 앞으로 대통령 안 해요. 그러나 살아있는 독재자에 대해서는 분명히 말할 끼라. 내가 살아있는 한 말할 끼라. 내가 독재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도 말하지 않기에, 김영삼이마저 침묵을 지키면 안된다고 생각해서, 참다참다 못해 하는 말이오”
김전대통령의 이날 회견은 연초부터 언뜻언뜻 모습을 드러낸 ‘안방정치’가 ‘공개정치’ 형태로 발전했음을 상징하고 있었다. 지난 2월9일 전격적으로 기자회견을 가지려다가 측근들의 ‘조직적 만류’로 이를 연기했던 김전대통령이었다. 상도동을 다녀온 인사들의 ‘상도동 출구조사’로 따지자면 99%가 회견에 반대했다. 그러나 김전대통령은 4월초 부산경남지역 방문을 계기로 집 밖에서도‘할 말’을 하기 시작하더니 다시 2개월만에 바다 건너에 와서 기자회견 형식으로 ‘공식발언’을 하게 된 것이다.
다음날인 4일 아침 5시가 되기도 전에 눈을 뜬 김전대통령은 비서들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다가 5시에 정식으로 기상, 숙소인 호텔주변을 3바퀴 산책했다. 평소 6시간 정도 수면을 취하는 김전대통령은 이번 방일 기간에 하루 서너시간밖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잠자리가 바뀐 탓인지, 할말을 다하게 된 설렘 때문인지, 페인트사건 때문에 노기(怒氣)가 오른 탓인지는 몰라도. 김전대통령은 특히 요즘엔 연설내용을 직접 준비하고 다듬는 일이 부쩍 많아졌으며 이 때문에 잠을 설치기도 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6월3일의 회견문도 김전대통령 자신이 틈틈이 말하고 생각한 내용을 직접 정리한 것이라고 한다. 측근들은 김전대통령의 연설 솜씨가 나날이 세련돼 간다고 입을 모은다. 김광일 전실장은 “어제 나도 깜짝 놀랐다. 재임시 말솜씨가 저 절반 정도만 됐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말했다”
김전대통령은 특히 요즘 ‘말씀’하실 때마다 햇볕정책 비판은 빠뜨리지 않는다. 3일 회견에서도 “이 자리에 금강산 갔다온 사람도 있지만 (금강산 관광은) 아주 잘못된 정책”이라고 강조했다. 회견장에는 이미 ‘개인적 소신’에 따라 금강산을 갔다 온 측근 박종웅 의원도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 김전대통령은 4일 아침에도 박종웅 의원이 국회 비서진을 통해 국내에서 팩스로 전송받은 김전대통령의 방일 관련 ‘국내언론 보도동향’을 보고받고는 “햇볕정책 비판한 것도 (신문에) 났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김전대통령의 ‘규슈발언’ 가운데 가장 큰 관심을 모은 것은 역시 내각제와 관련한 ‘독보적’ 해석이었다. 내각제 약속과 관련, ‘DJ임기 연말 종료’주장은 특히 수행참모들 사이에서 내내 화제가 됐다. 그동안 김전대통령이 내각제와 관련해 언급한 것은 지난 3월 상도동 만찬에서 “내각제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DJP연합은 위기를 맞을 것. 약속을 지키지 않는 쪽이 어려워질 것”이라는 게 전부였다.
그러나 ‘규슈발언’으로 내각제와 관련한 김전대통령의 정치적 행보가 보다 적극화될 것이 확실해졌다. 문제는 김전대통령이 김대중대통령의 내각제 약속이행을 ‘강제’하기 위해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여부다. 참모들은 대체로 내각제와 관련한 김전대통령의 ‘규슈발언’이 일회적인 것이 아니고 앞으로 더욱 진전된 형태로 발언이 나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광일 전실장은 내각제와 관련한 김전대통령의 의중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 3일밤 김전대통령에게 조용히 물어봤다.
(김전실장)―“각하, 오늘 회견에서 DJP약속 이행을 촉구하신 데 대해 앞으로 기자들이 세 가지를 물을 것 같습니다. 첫째는 그렇다면 각하는 연내 내각제 개헌에 찬성하시는 입장으로 정리한 거냐. 둘째, 각하께서는 한나라당이 내각제 추진에 자민련과 함께 나서도록 유도할 것이냐. 셋째, 내각제를 전제로 한 정치세력화(신당창당)를 추진할 것이냐 여부입니다. 기자들이 물으면 뭐라고 답할까요?”
(김전대통령)―“지금은 이 정도로 해두지. 그러나 때가 되면 곧 말할 때가 올 거요. 한나라당에서는 아마 내가 내각제에 대해 어떤 입장인지 궁금해하는 모양인데, 또 내가 한나라당에 내각제를 푸싱할(유도할) 것인지 궁금해하는 모양이지?”
김전실장은 내각제에 관한 김전대통령의 입장과 관련, “처음에는 단순히 국민의 반응을 보고 하겠다는 정도로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까 이 양반이 깊이 생각해 온 게 있는 것 같다. 언젠가 꼭 속편이 나올 것”이라고 예고했다. 지금 DJP가 8월까진 내각제 문제를 덮어두기로 했지만 정치권에서도 곧 얘기가 나올 것이고 그때가서는 김전대통령이 분명한 입장을 말할 것이라는 얘기다.
4일에는 규슈(九州)국제대학 초청강연 및 일본언론과의 회견이 있었다. 규슈국제대 강연은 이 대학의 고바야시 게이지(小林慶二) 교수가 다리를 놓아 성사됐는데 그는 YS와 오랜 친분을 갖고 있는 사이다. 주간지 ‘아에라’의 편집장을 지내기도 한 그는 아사히신문 서울지국장 시절인 82년 YS의 목숨을 건 단식소식을 외신에 처음으로 기사화, 한국의 현실을 바깥세계에 전하는 데 기여했던 인물이다.
강연장 입구에는 학생·교수 200여명이 나와 김전대통령 일행을 맞았다. 김전대통령은 역시 여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여학생들은 김전대통령의 팔짱을 끼고 기념촬영을 해달라고 졸랐다. 김전대통령은 ‘허허’ 웃으며 학생들과 나란히 서 포즈를 취해주기도 했다. 미처 기념촬영을 하지 못한 학생들은 안타까운 탄성을 지르기도 했다. 김전대통령의 사인을 받겠다며 A3 크기의 판넬을 들고 서 있는 남학생도 있었다.
김전대통령의 강연은 어린시절 일본인 은사에 대한 추억, 한일 양국의 불행했던 지난 시기, 새로운 천년을 맞는 한일의 협력관계 구축 등을 담은 상당히 세련되게 준비된 원고를 읽어가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김전대통령은 자신의 재임시절 닥친 한국의 IMF에 대해서도 ‘해명’했다.
“저 자신 대통령이 되자마자 새로운 세계적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한국이 산업화 시작 이래 40년 가까이 지속해 왔던 발전방식의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사회·경제의 투명화 정상화 합리화를 통해 시장에서 공정한 경쟁이 촉진될 수 있도록 하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야만 ‘세계화·정보화’라는 세계적 환경에 대응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변화와 개혁을 위한 이같은 노력은 여러가지 사회적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김전대통령이 그 저항의 대표적 예로 든 것은 물론 노동법개정, 기아자동차 처리, 금융개혁 등과 관련한 정치권과 사회일각의 반대를 말한다. 김전대통령은 강연에서도 ‘독재자’를 빠뜨리지 않았다.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한 마디 하겠습니다. 자국민들에게 한없는 슬픔과 눈물을 안겨주는 독재자들은, 특히 아시아의 독재자들은 하루속히 국민들에게 자유와 민주주의를 돌려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제가 말하는 독재자엔 박정희도 포함됩니다.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물론 포함됩니다. 이승만도 포함됩니다. 현 김대중대통령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저의 친구지만…지금은 독재자입니다. 나는 민주화투쟁시절 ‘잠시 살기 위해 영원히 죽는 길을 선택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바 있습니다. 저는 언제나 오늘이 나의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강연이 끝난 뒤 1000여명의 학생들은 일제히 뜨거운 기립박수를 쳤다. 그들이 무슨 생각으로 박수를 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전직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퍼붓는 한국의 현실이 그들에게는 어떤 느낌으로 와닿았는지, 한 전직대통령의 변함없는 ‘민주화투쟁’에 대한 인간적 존경과 신뢰의 박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여튼 그들의 박수는 우렁찼다.
김전대통령은 일어나 오른손을 높이 들어 환호에 답례했다. 김전대통령은 강연장을 나서며 ‘대도무문(大道無門)’ ‘호연지기(浩然之氣)’ 라는 친필휘호를 써 대학측에 기증하기도 했다.
이어 본관 회의실로 자리를 옮겨 일본언론과 기자회견이 열렸는데 김전대통령은 통역을 두고서도 줄곧 일어로 직접 답변했다. 김전대통령의 일어는 상당히 유창했다. 다양한 어휘가 구사되고 막힘이 없었다. 한국말도 저렇게 유창했다면 재임중 벌어졌던 불필요한 몇 가지 오해를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주로 북한문제에 관심을 보인 일본기자들 사이에 한국특파원들의 질문이 군데군데 끼어들면서 국내정치에 대한 언급도 많아졌다.
―어제 내각제와 관련해 김대중대통령의 약속이행을 촉구하셨는데 내각제에 대한 김전대통령의 입장은 정리된 것인가.
“그 얘기 전에 내가 얘기 좀 하겠다. 어제 내가 여기 올 때 테러를 당했는데 이는 초산과 페인트를 합친 것이다. 살인적인 일이었다. 지금도 약을 먹고 있는데 이건 독재자가 하는 짓이다. 김대중 독재자의 말로가 보인다. 어제 김대중정부가 공항에 경찰경호를 내보내지 말도록 지시한 게 밝혀졌다. 우리나라의 전직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상 경호를 받을 자격은 나밖에 없는데 말이다. 귀국하는 대로 유능한 변호사 전문가들로 중립적인 조사위원회 구성을 촉구하겠다. 우리는 상당한 증거가 있다. 어제 두 눈을 잃을 뻔했다. 내가 원내총무시절 집앞에서 초산테러를 당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도 눈을 노렸다. 돌아가서 페인트 성분을 철저히 조사하겠다”
김전대통령은 질문과 관계없이 말하려는 게 있는 듯 준비해온 메모지를 뒤적이다가 한 장을 꺼내들었다. 발언내용은 한국의 언론에 대한 불만이었다. 김전대통령에게서는 한국정부와 언론이 구분되지 않는다. 김대중정부에 대한 불만은 언론에 대한 불만으로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김전대통령은 사석에서는 “한국언론이 거짓말을 하기도 하지만 여기(일본) 온 기자들은 젊어서 그런지 눈이 초롱초롱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젊은 기자’들이 써서 송고한 기사가 부정적인 제목아래 보도된 것을 본 직후에는 ‘기자가 아니라 파파라치’라며 언론에 대한 혐오감을 여과없이 표출하기도 했다.
“오늘 한국 신문에 여론조사가 나왔는데 내가 일본에 가서 한국을 비판하는 것에 대해 75%가 부정적이라고 났다. 옷사건 때도 김태정을 경질하지 말라는 의견이 65%라고 거짓말하더니, 한국언론이 이래도 되는 건가. 무―서운 변을 당하게 될 거다”
―2002년에 한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개최하는 ‘월드컵을 어떻게 하면 성공적으로 열 것인지’ 좋은 의견이 있으면 말해달라.
(이 질문에 대해서도 앞서 질문과 마찬가지로 동문서답이 나왔다)
“월드컵 한·일 공동개최는 내 임기중 결정된 일인데 아주 잘된 일이다. 한·일 어느 한쪽이 개최했다면 양국간 국민감정이 엄청 상했을 것이다. 양국간 협력발전의 계기가 됐다. 아주 만족스럽다”
―어제 DJ의임기는 연말까지라고 주장하셨다. 그렇다면 DJ는 연말에 물러나야 한다는 얘긴가?
“나는 개인적으로 대통령제론자이고 현재 여론조사 결과도 대통령제 지지가 높지만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여론 또한 60%이상이다. 이 조사는 맞는 것이다. 한국언론이 거짓말도 하고 여론조사 조작도 하지만 내 경험상 이 여론은 맞는 것이다.”
―일본에서 미·일 가이드라인 관련법안이 통과됐다. 얼마전 북한 괴선박이 출현했을 때 이 가이드라인에 따라 자위대가 출동했다. 어떻게 생각하나.
“미·일 가이드라인은 우리로선 대단히 심각히 걱정하고 있다. 정부는 암―말또(아무말도) 안하고 있지만 우리 국민은 대단히 걱정스레 생각한다. 나도 걱정하고 있다. 일본의 군사력 활동 확대에 대해 중국은 특히 아주 심각히 생각하고 있다”
전직대통령의 공개적인 대(對)일본 강경발언에 일본 관계자와 기자들의 표정이 굳어졌지만 YS는 눈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이후 일본기자들로부터는 더 이상 질문이 나오지 않았다.
김전대통령 일행은 6월5일 승용차와 버스편으로 벳푸로 이동했다. 이름난 온천휴양도시 벳푸는 김전대통령이 97년 1월25일 일본의 하시모토 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졌던 곳이다. 숙소인 스기노이호텔에서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총리 초청으로 만찬이 있었다. 무라야마는 이 곳에 지역구를 둔 현역 중의원(사민당·오이타 현)이기도 하다. 만찬의 화제는 역시 김전대통령 재임시 성사된 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였다.
그러나 이날 만찬에 하시모토 전총리는 없었다. 하시모토는 재임시절 김전대통령과 3차례나 정상회담을 가져 남다른 우의를 과시했던 인물. 그러나 1차 정상회담 직후였던 96년 독도 영유권 시비가 불거지자 김전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쏘아붙인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돌출발언으로 상당한 배신감을 맘속에 품었을 것이라는 게 한 관계자의 설명이다.
김전대통령 일행은 6일 오이타 공항을 출발, 도쿄 하네다 공항에 도착했다. 이날 저녁 숙소인 뉴오타니 호텔에서 재일한국상공회의소(회장 홍채식) 주최로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만찬이 열렸다. 김전대통령은 이날 행사에서만큼은 ‘독재자’ 소리를 하지 않았다. 대신 해외에서도 고국의 큰 일이 있을 때 잊지 않고 도움을 준 해외동포들을 격려하는 데 신경을 썼다.
“과거에 태풍 수해 올림픽 등 큰일이 있을 때 해외동포들은 호주머니를 털어가며 많은 도움을 줬다. 여러분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자다. 이국땅에서 싸우고 싸워 일어난, 성공한 여러분이다. 우리 한국사람은 짓밟히면 밟힐수록 일어나는 저력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가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머잖은 장래에 이 어려움에서 벗어날 것으로 믿는다. 우리 조국, 아시아 평화, 세계평화, 우리 조국의 자랑스런 민주주의와 미래를 위해 건배하자”
김전대통령은 이날 만찬장에서 방일기간 중 유일하게 모처럼 활짝 웃는 모습을 보였다. 김광일 전실장도 테이블을 돌며 중국술 ‘소홍주’를 권하기도 했다. 이날 참석자들 가운데는 야당시절부터 김전대통령을 도운 인사들이 적지 않았다. 특히 한창우(韓昌祐·68) 재일 한국상공회의소 명예회장 같은 이는 이번 김전대통령 일행의 도쿄체류(6~8일) 경비 일부를 부담하기도 했다. 20여명에 이르는 김전대통령 일행의 이번 방일 경비는 기본적으로 ‘더치페이’였다는 게 김전대통령측 설명. 강연을 초청한 규슈국제대학이 김전대통령 내외와 권오기(權五琦) 전통일부총리, 김기수 비서관 등 4명의 3~5일 체제경비를 부담한 것을 빼고는 각자 개인이 여행경비를 냈다는 것이다.
김전대통령은 6월7일 한국기자단과 조찬 간담회를 가졌다.
환한 얼굴로 입장한 김전대통령은 기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눈 뒤 자리를 잡으며 말했다. “오늘 아침 모처럼만에 조깅을 했다. 5시45분부터 6시45분까지 한 시간 가량 했는데 코스가 참 좋아 너무 상쾌했다”
박종웅 의원이 “기자들이 연일 각하 일정을 커버하느라 고생이 많습니다”고 말을 꺼내자 김전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근데 기사는 별로 나지 않던데”라고 농담을 건넸다.
“난 보지도 않았지만 어느 방송에서는 내가 일본에서 냉대를 받았다고 보도했다는데, 나는 대통령때보다 더 환대를 받았어요. 무슨 소리요, 일본 사람들이 재임시보다 더 친밀하게 대해주고 있는데”
김전대통령은 이어 처음 정치하던 시절로 화제를 옮겨 갔다.
“내가 정치한지 그리 오래지 않았을 때 얘긴데, 날보고 결혼을 어떻게 했느냐고 라디오방송국에서 묻더라고. 그래서 내가 ‘대학 3학년때 만나 결혼했다’고 하니까 졸업도 안하고 결혼했다고 항의전화가 오는 통에 혼이 났어요. 그때가 결혼 2년후였는데 그 후론 다시 그 얘기를 안했어요. 고르바초프도 대학다니던 때 결혼을 해서 부부가 평생을 같이 지내오고 있어요. 나의 재임시절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연임에 실패한 뒤 한국에 왔는데 소련대사관에서 전화가 와서 만나지 말라고 강력히 압력을 넣는 거야. 현직 (소련)대통령과의 관계도 있는데 만나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이지. 하지만 나는 옛날 친구와 우정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만났어요.
옆자리에 앉아있던 김광일 전실장이 짖궂은 질문을 던졌다. “그동안 만나신 국가원수 부인중에서 누가 제일 매력적이었습니까?”이 자리에는 다행히도(?) 부인 손명순 여사는 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다.
“그야 물론 힐러리지. 만찬할 때 내가 미국의 보험관계 얘기를 물었더니 숫자를 끝도 없이 대가면서 자―꾸 설명하는데 하이고, 혼났어. 야, 이거 괜히 얘기를 꺼냈다고 얼마나 후회가 되던지(좌중 웃음)”
김전대통령은 잠시 준비된 음식을 든 뒤 준비해온 몇장의 메모지를 꺼내들었다.
“지금까지 한 얘기도 있지만 리마인드 시켜드리기 위해 재임중 얘기 몇가지를 적어보았어요. 내 재임중에 한 개혁조치를 전부 말할 순 없고 생각나는대로 말해볼께요. 먼저 군개혁인데, 하나회 청산한 거 말이죠, 이거 안했으면 우리나라 문제가 심각했어요. 내가 취임해서 하나회 조직 파악해서 4성장군을 포함해서 별 몇십개를 날렸어요. 그때 그렇게 안했다면 우리 군은 전부 하나회 천국이야. 국회의원들도 얼마나 맞았어요. 술집에서 두드려맞고. 만일 당시 하나회를 정리하지 않았으면 우리나라 민주주의 안됐어요. 전부 자기들끼리 돌아가며 요직 해먹고 참모총장도 순서 정해서 해먹는 그런 게 말야, 30년 군사정권 동안 계속돼왔다 이 말이오. 이거 없애지 않았으면 김대중씨도 대통령 안됐을 거요. 인도네시아처럼 군인들이 정치를 잡고 흔드는 후진적 군사정치가 계속됐을 거요”
“또 취임후 보고를 받아 보니까 ‘안가’라는 게 9개나 있더라고. 이게 전부 술먹고 여자하고 노는 데라. 여자들도 그냥 여자가 아니야. 내가 누구라고는 얘기하지 않겠어요. 내가 전부 뜯어버리고 ‘무궁화동산’이라고 간판 붙여 공원으로 만들어 가지고 서울시에 기증해서 시민들에게 개방했어요. 만일 지금 안가라는 게 있다면 또 그짓하고 있는 것이에요”
“또 무서우리 만큼 철저하게 공직자 재산공개를 실시했어요. 지금 그때 당한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데, 하늘 아래 우스운 얘기요. 개가 웃을 일이야. 금융실명제도 안했다카면 개혁이 잘 안됐을 거예요. 당시 언론들이 ‘금융실명제 하나만 해도 김영삼 대통령이 위대한 대통령으로 남을 것’이라고 썼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모든 사설이 그랬어요. 나는 이것을 하지 않으면 부익부빈익빈이 확대되고 공정분배가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금융실명제를 안했다면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한 사람들과 부패공직자들을 색출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지금 이걸 다 후퇴시켜 버리고 있어. 이게 국민을 위해 하는 짓이에요? 자기돈 감추기 위해 한 짓이지”
“선거개혁을 위해 돈 안 드는 선거 정착에 온 노력을 다했어요. 내 자신이 재임중 돈을 일전 한 푼 안받았어요. 솔직히 말하면 재일동포들도 포함해서 내가 과거엔 돈을 받았어요. 20년 가까이 야당총재를 하면서 혼자서 당을 이끌고 가야 하는데 돈이 있어야 하기에 받았어요. 하지만 재임때는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일체 안받았어요. 누구한테 돈을 주거나 한 일도 없어요. 그래서 돈 안 드는 선거를 치르는 게 가능했던 거요. 그리고 공명한 선거를 위해 고건 총리를 임명했어요. 고건 총리를 임명하면서 내가 그랬어요. 당신은 대통령선거를 치르는 게 임무다. 이거만이라도 제대로 해달라. 이것도 내가 그렇게 고건 총리를 임명하지 않았다면 김대중씨가 15만표를 가져갈 수 있었겠어요? 김대중씨 30만(39만)표는 이쪽(당시 여당) 표를 15만표 가져가면서 생긴 표차 아닙니까. 공명선거가 됐기 때문에 잡음없이 선거가 이루어졌던 겁니다”
“총독부건물 철거는 말이죠, 당시에 언론사에서도 반대가 있었어요. 이거는 역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것이라면서 공공연히 반대하는 단체를 만들어가지고 보존하라고 들고 일어났어요. 그러나 중앙청앞에 총독부 건물이 있어서 일본사람들이 관광 와서 ‘우리가 지배하던 권부가 바로 여기’라고 기념사진 찍고 야단예요. 지금 광화문에 그게 없으니까 얼마나 화통하게 다녀요? 바로 북한산이 탁 보이고 청와대도 보이고 그때 나는 대단한 용단을 내렸어요. 우리나라 역사를 위해 후대의 정의를 위해 누가 뭐래도 난 지금도 잘했다고 생각해요. 역사바로세우기도 말이죠, 12·12군사쿠데타세력의 단죄, 광주민주화운동을 국민운동으로 승화시킨 거, 광주 묘지를 그렇게 확장했다는 거. 그것도 다 내가 했잖아요.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때까지는 광주민주화운동을 법적으로는 혁명이라고 생각 안했거든요. 그리고는 쿠데타세력들의 부정축재 자금을 회수한 거예요. 아직까지 회수가 진행중에 있지만 이런 것들이 전부 역사바로세우기에 큰 역할을 한 것이란 말이에요”
재임시의 ‘치적’을 스스로 나열하던 김전대통령은 ‘최대의 실정’으로 흔히 지적되는 IMF사태 원인에 관해 상세한 소명을 했다. 경제청문회 증인출석 문제 등으로 정치적 쟁점이 됐던 IMF사태와 관련, 김전대통령이 육성으로 증언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김전대통령은 우선 자신이 외환위기 가능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세간의 비판을 적극 반박했다.
“IMF얘기들을 많이 하는데 여러가지 잘못 알려진 게 많아요. 언론에서 잘못 보도하는 게 참 많아. 나는 금융위기에 대해 사태를 다 파악하고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금융실명제를 내가 빨리 시행한 것도, 이거 안하면 우리나라가 상당히 어려워진다는 것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요. 관리들은 다 잘되간다고 보고한 것도 사실이었어요. 뭐 기초(펀더멘털)가 좋습니다. 수출이 얼마되고 수입이 얼마되고 이런 식으로 보고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 안했습니다. 경제가 좋아진다고 생각 안했어요. 나빠진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노동법 개정을 하라고 당에 몇차례나 얘기했는데 잘 안됐어요. 결국 했죠. (노동법 개정안 처리를) 하기는 했는데 다소 무리가 있어서 취소하고 다시 하라고 했는데 끝내 못했죠. 그때 개정안 처리를 반대한 게 누굽니까. 김대중대통령 아닙니까. 또 한국은행법, 이거 또한 금융관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꼭 해야 하는 건데 뭐 국회에서 데모하고 행정부에서 데모하고, 나라가 어찌되겠어요. 그런데 김대중씨가 거기 놀아나서 끝까지 물고 늘어졌어. 그리고 지금 브라질 태국 소련 말레이시아 일본 등 세계가 현재 금융위기에 처했거나 IMF구제금융을 받고 있지만 이걸 사법처리한 나라가 어디 있어요. 강경식 김인호가 구속됐고 재판을 받고 있는데 이런 나라가 어딨어요. 이건 전적으로 나한테 대한 정치보복이예요. 김대중씨는 입만 열면 거짓말이고 일만 저지르면 정치보복이에요.”
김전대통령은 외환위기 대처과정과 관련, 미국 일본과 관련한 몇가지 비화도 공개했다. 특히 일본측이 금융지원 약속을 갑작스레 깨는 바람에 충격을 받았다는 얘기도 밝혔다.
“클린턴하고 나는 약속이 돼있기 때문에 밤중에라도 전화하면 받아야 돼요. 내가 전화하면 자기가 받아야 하고 자기가 (전화)하면 내가 받아야 하고. 내가 전화를 해서 그랬지. 이거 큰일났다, 어렵다, 좀 도와줘야겠다고 우선 급하게 전화를 하고 APEC에서 구체적으로 의논을 하자고 해놓고 APEC에 갔어요. 그때 사실 일본돈이 많이 빠져나간 거예요. 일본도 어려워가지고, 일본이 우리한테 차관을 제일 많이 들여놓은 나란데 빠져나간 거요. 그래서 미국이 빠지고 유럽이 빠지고, 순서가 이리 된 거예요. 그래서 APEC에서 클린턴과 정상회담할 때 심각하게 얘기한 거요. 그때도 클린턴은 IMF로 가야 된다는 얘기를 했어요. 내가 그랬어요 IMF로 갈 건데, 실무자들 얘기가 돈이 나오는데 아무리 빨라도 20일이 걸린다고 해요. 20일동안 견디기가 어려운데 너무 길다, 그래서 일본한테 도움을 받는 것이 좋겠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내가 하시모토(총리)를 통해서 우리가 IMF로 갈 때까지 좀 도와달라고 했고 하시모토는 알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러고 왔는데 내가 급해서 4~5일 뒤에 하시모토한테 전화했는데 하시모토가 말이 싹 달라진 거야. 아이구, 지금 빌려주는 게 정치적으로 어렵다는 거예요. 그래서 직접 빌려주는 것 어렵다니까, 남의 돈 빌리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억지로 되는 게 아니라 말이지. 그래서 대신 그럼 IMF에 좀 얘기 해라. 빨리 빌릴 수 있도록 당신이 유럽의 IMF이사들 책임 좀 져라고 그랬어요. 내가 전화를 직접 하기는 했지만 하시모토도 했을 거라고. 그러는 사이 클린턴한테 다시 전화가 와서 그러더라고, 자기가 생각했던 거보다 심각하다고. 그래 내가 그랬어요. 그래 내가 뭐라 그러더냐, 지금 와서 그런 소리하면 무슨 소용있느냐, 당신이 책임져라, 당신이 빨리하면 된다. 그래서 그때 동시에 이루어진 거예요. 그때 4일만인가, 5일만에 결정이 난 거요. IMF전문가들이 (대출결정에) 20일 걸린다는 것이 4일만에 결정이 난 거요. 그때 비환데 얘기하는 거요. 첨 공개하는 거요.”
“빅딜 문제는 요전에도 얘기를 했지만 아마 공산주의 국가를 빼고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그렇게 하는 나라가 없어요. 미국이 그리합니까, 일본이 그리합니까. 어떻게 대통령이라는 자가, 재무장관이라는 자가, 이 따위 버르장머리가 어디 있어요. 가만히 놔두면 주~웅대한 문제가 발생할 거요. 잡음이 생기는 거지, 이게 경제원리지.”
“오늘 아침 보고를 받았는데, 이번 테러사건 관련해서 뭐 한명으로 끝냈다고. 과거 테러사건에서도 언제나 걸리면 단독범이라 그랬어요. 김구 백범선생 암살범도, 당시 안두희라는 단독범이라 그랬는데 몇 년 지나고 보니까 안그래요, 배후가 있어요. 모든 범죄가 그래요. 이거 우리 전부다 확보하고 있어요. 증거 확보하고 있어요. 홍모라고, 내가 이름까지 다 알고 있는데 이미 조사가 진행되고 있어요. 이런 것을, 경찰을 믿을 수 있어요? 검찰조사를 믿을 수 있어요? 단독범이라고 본 것은 언어도단이요. 공범중 하나는 우리집까지 왔다갔어요. 최소한 이번 테러에서 내가 두 눈을 잃을 뻔했어요. 완전히 내가 일본에 가는 것을 막으려는 방법이오. 이런 김대중정권의 부도덕한 말기적 발악, 김대중정권의 불행한 말로가 가까이 있어요. 참, 요전에 햇볕정책에 대해 얘기했는데, 세상에 간첩을 1년동안 한명도 못잡았다, 이거 있을 수 있는 일이요? 북한이 지난번 (해상에) 침범했을 때도 간첩이 왔다간 거 아니요? 우린 간첩이 많이 있다는 거 알고 있잖아요. 내가 집권하고 있을 때 독일의 콜수상이 얘기하던데, 참 공산주의자는 이거 못믿어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는데도 불구하고 간첩이 내려오더라. 지금 북한은 말할 것도 없어요. 내가 말하는데 북한은 미군철수와 국가보안법철폐는 절대 양보 안해요. 오락가락하며 말하는 게 많아도 이거 두가지는 절대 변하지 않아요. 이건 우리 국가안보상 최고의 보루, 최고의 목표 아니오. 그런데 햇볕정책이라는 건 옷을 벗으라고 하는 말인데, 아니, 옷을 벗으라고 하면 벗나요? 이 문제에 있어서 미국 일본은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일본은 미사일이 자기 꼭대기까지 날아가고 미국은 알래스카까지 가는데 한국은 한마디도 안하고 있어요. 제일 심각하게 말해야 하는 게 한국인데. 이건 국민들이 각성을 해야 해요. 김대중정권이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질문해봐요.”
―IMF 관련해서 당시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고 하셨는데…
“우리가 노동법개정하려고 할 때(96년), 벌써 그 몇 달전에 IMF 위기를 느끼고 있던 기라. 이거 안하고는 도저히 안된다고 생각한 거요. 그리고 한은법 개정, 기아자동차 처리 안하면 안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특히 기아자동차 처리는 빨리 안하면 절대 안된다고 생각한 거요. 돈이 빠져 나가니까. 그것은 기초적으로 알고 있었고 윤진식비서관 말한 거는 (사태의 심각성을) 확인시켜 준 거에 불과하지. 처음으로 알게 됐다는 것은 말이 안돼요. 1년전에 알고 있었다니깐”
IMF사태와 관련해 일종의 ‘미니 청문회’라고 할 만큼 질문이 뜨거워지면서 김전대통령의 표정도 점차 붉어졌다. 김전대통령은 자신이 경제를 잘 알고 있었다는 사례로 자동차 산업의 수요 공급 현황을 거론했다. 그러나 공급과잉이라는 점은 얘기하면서 재임시 삼성자동차 허가를 내준 이유는 따로 설명하지 않았다.
―IMF로 가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시점은 언제입니까.
“관리들도 내가 IMF가야 한다고 얘기하니까, 이거 참 한국의 대통령 체면에 관한 거라고들 그러더라고. 그래서 내가 ‘나라가 살고 봐야지 체면이 문제냐’고 그랬어요. 대통령으로서 모두 알고 있었어요. 내가 얘기 안하고 있었는데, 자동차 말이요, 내가 퇴임할 때 우리나라가 2백만대를 생산하게 됐는데 그때 우리나라 자동차 수요가 110만대야, 국내수요나 수출소요 다 합쳐서. 그러니까 당연히 90만대는 남아도는 거지. 그러니 자동차공업이 될 수 있나, 안된다 이 말이오. 그런데 얼마전에 어느 재벌회장이 딴 회사는 다 내버려도 자동차는 하겠다고 그래. 난 도저히 이해가 안되더라고요. 이거 절대로 안되는 기업인데. 그래, 경제의 큰 흐름을 내가 대강은 다 알고 있었어요. 경제를 내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고 언론이 거짓말 쓰고 있는데, 아니, 모르긴 왜 몰라. 모르면 대통령 아니게? 대통령이 맨날 보고 신경쓰는 게 경제하고 북한 문제인데. 그게 ABC인데”
―강경식 김인호씨가 처벌받은 것은 보고를 늦게 했다는 건데, 김전대통령께서 이미 다 알고 있었다면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차이가 있는 얘긴데….
“정책적인 결정을 가지고 처벌을 하는 나라가 어딨어요? 강경식 김인호를 잡아넣었는데, 정책적인 결정을 가지고 잡아넣는다면, 김대중이도 가야지. 정책적인 착오가 얼마나 많은데…. 경제적인 문제나 안보문제나. 그럼 지금 자기는 감옥갈 준비하고 있는 거요? 정책적인 결정을 갖고 감옥에 잡아넣으면 누가 결정을 한단 말이오”
―11월16일 임창렬부총리를 임명하실 때 IMF로 가야 한다고 인수인계 지시를 하신 건지 논란이 많았는데….
“그건 상식에 맡겨요. 아니, 큰사람 바꿀 때 그런 걸 전제로 안하고 얘기하겠어요? 내가 (지금) 임창렬 같은 사람갖고 어찌됐다 얘기하면 우찌돼요? 내가 데리고 있던 사람 갖고 어쨌다고 하면. 그 사람 그냥 잔뜩 그리하게(거짓말하게) 내버려 둬요. 깡드쉬와 다 합의한 거요. 강경식이가 다 결정한 거요.
―내각제와 관련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DJP 약속을 이행토록 하실 작정이신지….
“다음에 내가 어찌할 것인지 얘기는, 그후 내가 어떻게 하는지 두고 봅시다. 김대중·김종필씨가 약속을 안지키면 어찌할 거냐, 그건 그때 가서 얘기합시다. 내가 생각이 있다고…. 어느 경우든 생각이 있어요.”
―내각제에 관해 하나 더 질문하겠는데요, 김전대통령께서는 90년 3당 합당할 때 내각제 하기로 약속한 게 나중에 비밀문서에서 밝혀졌습니다. 그런데 그때 내각제 문서가 공개되면서 파장을 일으키고 그것을 김전대통령께서 항의하면서 결국 내각제가 무산됐습니다. 그런데 지금 김대중·김종필씨더러 내각제 합의 약속을 지키라고 하시는데 그때 당시와 어떻게 다른 것인지….
“그게 전혀 성질이 달라요. 이것은 국민들에게 공개적으로 약속한 거요. 그때 나는, 지금도 대통령중심제론자이지만, 내각제를 생각 안한거요. 내가 내각제를 합의할 때는, 내가 살아있고 김대중씨가 살아있는 동안은 절대 정권교체 안된다고 생각한 거요. 50% 이상의 (두사람) 지지표가 반으로 쪼개지니까. 그러니 내가 어느 한쪽과 통합해야만 민주쟁취가 되겠다고 생각한 거지. 통합은 노태우대통령이 먼저 제의해왔어요. 나중에 내각제 불온문서가, 내가 서명한 문서가 발견돼 내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7시간 30분동안 노태우와 싸웠어요. 대통령 안해도 좋다, 민주주의가 먼저라고. 또 통합때 얘기가 들리기를, 김종필씨도 같이 했으면 좋겠다 그래요. 그래 좋다 하니까, 내각책임제 약속을 해줬으면 좋겠다 그래요. 그래서 내가 국민이 대통령중심제를 압도적으로 원해 지금은 어렵다고 하니까 ‘세 사람만 알게, 국민지지가 있을 때 한다는 전제를 붙여서 금고속에 영원히 비밀로 묻어두자’고 제안을 해요. 그런데 그게 언론에 가 버렸어요. 나쁜놈들, 더러워서 너희들과 안한다고, 우리 민주계가 마산 와서 탈당한다고 서명까지 받고 하니까 나중에 사과받았어요. 다시는 안그런다고. 이건 합의라고는 하지만 비밀각서고, 국민이 동의하는 것을 전제로 한 건데, 처음엔 내각제 얘기도 없던 거고. 그런 깁니다. (DJP의 내각제 합의와) 전혀 성질이 다른 깁니다”
―내년 총선에서 부산지역 공천에 영향력을 행사하신다는 얘기가 많은데….
“내가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오. 쿠데타한 사람 아니잖아요. 5년동안 임기를 착실하게 마친, 최선을 다한 사람이오. 문민정부를 세운 사람이에요. 국민들이 지금 쿠데타하자고 가자 하면 내가 갑니까? 실제로 민간인이 처음으로 대통령된 것 아닙니까. 내가 또 대통령이 되겠습니까? 지금 그거(공천) 관심 없어요. 지금도 많이 와요. 국회의원 하고 싶다고, 그러나 일체 얘기 안합니다. 그냥 해봐라 그래요. 일체 대답 안합니다”
김전대통령은 조찬간담회를 마치고 일어서면서 언론에 대해 한마디 했다.
“진실을 좀 써요. 고하 송진우씨 얘기가 있는데, 그때 조선총독부에서 외정문제는 전부 잘되고 있으니까 내정문제를 조선사람이 좀 맡아달라고 그랬대요. 그래서 고하가 난 그런 엄중한 일은 절대 못맡는다 그러고 나왔대요. 이틀 뒤 몽양 여운형이 또 그런 요청을 받았는데 고하에게 상의했대요. 그래 고하가 “아니, 내일모레 망해갈 놈한테 맡으면 뭐하노”라고 했다는 거요. 그래 몽양이 맡으면 안되겠다고 버텨서 일본이 끝내 내정을 못맡겼다는 거요. 하마터면 일본하고 같이 죽을 뻔했지. 내가 보기엔 요즘 언론들,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진실을 써요. 누구 죽으면 같이 죽을 거요?”
간담회를 마치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김전대통령은 “아이구, 오랜만에 하고 싶은 얘길 다 하니까 쏙(속)이 다 시원하네”라고 말하며 웃어보였다.
6월8일에는 도쿄 근교 쿠니다찌(國立)시 히도쯔바시(一橋) 대학에서 초청강연이 있었다. 강연은 이 대학 총장과 친분이 있는 최광 전 복지부장관(崔洸·현 외대교수)이 다리를 놓아 성사됐다. ‘새로운 천년의 한일관계’라는 제목의 강연이 끝나고 난 뒤 학생들의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남북문제를 어떻게 전망하고 있나.
“내가 2~3년 전 김일성과 정상회담을 하기로 하고 내용까지 다 정해놓고 있었는데 1주일 남기고 김일성이 죽어버렸다. 아쉽다. 미국의 클린턴과 전화로 사후대책을 논의했다. 통화의 주요내용은 북한이 곧 망할 것이란 점이며, 어떻게 망하게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북한은 도저히 모르겠다. 얼마전 김정일의 핵심측근인 김영남과 페리가 만났을 때 김영남은 미국과만 관심있다는 태도였다. 한국이나 일본과의 관계엔 관심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이게 북한의 태도다. 어제 김영남이 상해에 갔는데 상해는 경제학적으로 중요한 도시다. 그런데 경제문제와 관계없는 국방장관 등만 잔뜩 데려갔다. 이건 이상하다”
―대학원 석사 1학년생이다. 한국언론을 전공하고 있다. 김전대통령께서는 경제위기에 대해 이는 박정희시절부터 이뤄진 역사적인 문제라고 하셨다. 본인의 재임중 책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한국언론, 그거 전공 안하는 게 좋을 것이다(장내 큰 웃음). 한국언론은 군사독재 30년동안 아부에 전념하는 데 익숙해 왔다. 요즘 방송도 악의적이다. 내가 일본와서 말한 것 나오지도 않는다. 신문에도 사진 한 장 안나온다. 그것이 오늘의 한국이다”
―아까 경제위기에 대한 자신의 책임문제를 물었는데 답변을…
“경제위기가 내 임기중 있었으므로 내 책임이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박정희시대부터 시작된 경제구조를 바꿔나가는 게 중요했다. 내가 집권해보니 옛날부터 쿠데타로 집권한 사람들은 다 돈을 받고 있었다. 돈 많은 사람 불러다 돈받는 ‘안가’라는 게 있었다. 싹 없앴다. 쿠데타한 군인들 별도 떼고. 당시 일본 신문도 ‘김대통령이 군사정권 잔재를 청산하는 어려운 개혁을 하고 있다’고 썼다. 92년 대선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됐다면 그런 것 못했을 거다. 김대중씨는 사실 대통령될 가능성이 전혀 없었는데 내가 그런 청소를 다 해줘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강연회를 마친 뒤 장소를 옮겨 가진 한국인 유학생들과의 간담회에서 한 남학생이 질문을 했다.
―일본까지 오셔서 하는 정부비판 활동에 대해 스스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아니, 사람 말이 한결같아야지, 어찌 외국나간다고 말이 다를 수 있나. 부시나 카터는 밖에 나가서 나라 얘기를 안하고 어쩌고 하는 언론이 많은데, 이거 미친 놈이오. 미국은 민주주의 하는 나라요. 독재자를 독재자라고 해야지. 미국 언론이나 일본 언론이 여기서 말 다르고 저기서 말 다릅디까? 같죠. 같아야 민주주의지”
김전대통령은 일본에서 참으로 ‘많은 말’을 했다. 그러나 국내에서 김전대통령의 방일행보를 바라보는 다수 국민은 아직 김전대통령의 언행에 냉소적인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김전대통령측은 이번 일본방문을 통해 그동안 입속으로만 삼켜온 ‘문민 치적’을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등 ‘제2역사바로세우기’의 첫발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내디뎠다는 표정들이다. 김전대통령은 이같은 자평의 연장선상에서 귀국 후 방일 결과 설명 명목으로 민주계를 중심으로 한 한나라당 의원들을 자택으로 초청, ‘상도동 정치’를 재개할 예정이다. 또 ‘페인트 테러 사건’도 본격적으로 공론화한다는 계획이다.
YS는 중요한 정치고비마다 싸우지 않고 거저 얻은 게 없다. YS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게 제일 좋다’는 손자병법의 병술을 제일 싫어한다. ‘무엇을 위한 싸움이냐’는 의문에도 불구하고 YS는 벼랑으로 떨어졌던 ‘문민정부’ 깃발을 다시 들고 ‘역사와의 투쟁’에 나선 셈이다.
박성원 기자
첫댓글 위 자료를 정리하면서도 자꾸 "과연 김대중 대통령은 지면서 이기는 법을 진즉부터 터득하신 분이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ㅎㅎㅎ 소인배들은 어쩔수 없읍니다.
이분이...이런 독설을 퍼부울때마다..점점 더 이분에 대한 감정이 안좋아짐을 느낍니다 큰인물이면 큰인물답게 행동해야죠..악감정으로 자꾸만 김대중전대통령님을 헐뜯을수록 누워서 침뱉기밖에 더 될까요?
다울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자꾸만 연민의 정이드는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