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여러차레 시문용에 대해 악의적으로 쓴 글들에 대해 해명 반박하여 거의 사라 젔으나 최근 또 모 교수가 잘못 쓴 글에 대해 반박 글을 쓴 바있는데 그 내용을 소개 하겠습니다
우석대 김두규 교수의 잘못 쓴 글에 대한 반론
김두규(우석대 교수) ‘조선풍수학인의 생애와 논쟁’시문용(궁리출판사)
역사적인 자료를 근거로 저술한 책이라고 사료 되어 지나, 좀 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고 확실한 증거자료를 제출함으로서 해당 문중의 자부심이나 자긍심에 누가 되지 않는지 까지 헤아릴 줄 아는 학자가 후학들을 양성하는 초석이 되어 교단에 설수 있다고 본다. 이에 절강 시 씨 문중을 대신하여 시비를 가리고자 늦게나마 서면 질의에 임한다.
존경하는 김두규 교수께 질의 합니다!(이하 김 교수로 표기)
질의1. 시문용 은 과연 확실한 낙오병 이었는가?
질의2. 호화궁궐 건립에 관한 시문용의 역할과 권한?
질의3. 시문용의 처형 설에 대한 진상 규명
영의정 정인홍과 중국인 풍수 시문용
질의 1. 시문용은 과연 낙오병 이었는가?
시문용이 낙오병 이였다는 근거로 1615년 10월5일과 13년2월30일 ‘광해군 일기’를 인용한듯하다.
그리고 1617년(광해군9년) 4월에 시문용이 한양에 불려 올라간 것으로 소개 했는데 정확히 4월8일이며 실록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교하였다”
“이궁을 짓는 큰 역사를 장차 일으킬 것이니, 도내에 사는 시문용(施文用)을 속히 올려 보내라고 경상 감사에게 하유하라!”
【사신은 논한다.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킴에 괴귀(怪鬼)한 무리들이 나왔다. 성지(性智)와 일용(馹龍)이 사설(邪說)을 떠들어대고 자우(子羽)와 문용(文用)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이에 하유해서 부르기까지 하였으니, 통탄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
그리고 1615년(광해군7년)10월5일에도 경상감사에게 명하여 시문용을 올려 보내라고 한 내용이 있는데 아래와 같다
도망해온 중국인 병사(兵士)시문용(施文龍)이 아주 지리(地理)를 잘 안다고 한다 경은 그에게 말을 주어 빨리 올라오게 하라
【시문룡은 방서(方書)를 조금 잘 아는데 정인홍(鄭仁弘)이 질녀(姪女)를 아내로 삼게 해주 고 이 때 에 이르러 천거해서 궁궐터를 잡는 데 대비하게 하였다.】
김교수는 1617년에 올라갔다고 했으니 전 후 역사를 비교해 보고 그때 올라간 것이 사실이라고 판단하고 썼는데 그때는 도망병 얘기가 전혀 없다
그리고 1621년(광해군13년)2월30일 아래와 같은 내용이 실록에 기록되어있다.
땅을 물색하는 시문용에게 급료를 지급하라
전교하기를,
“중국인 시문용(施文用)에게 급료를 지급하라.”
하였다.【문용은 일본을 정벌할 때에 군대에서 도망하여 그대로 영남에 거주하였는데, 정인홍(鄭仁弘)이 사촌 누이를 시집보냈다. 더불어 땅을 잘 보는 것으로 천거되어 벼슬을 얻었다.】
이 무슨 이야기인가? 시문용은 4년 전에 불려 올라갔다. 이때는 경희궁은 완성을 했고 인경궁도 한창 짓는 단계 이고 선조 때 이미 중추부사의 벼슬을 받았으니 당연히 급료를 받고 있을 것인데, 새삼스레 땅을 물색하는 시문용에게 급료를 지급하라는 것이 앞뒤가 맞지 않다. 이는 인조세력들이 도망 병 얘기를 앞에 써 넣은 것을 잊어버리고 다시 썼다고 판단된다. 그 이유는 지난번에는 정인홍의 질녀를 시집보냈다고 했는데 이번에는 사촌동생이라고 했으니 이번역시 거짓말이기 때문이다.(시문용의 정부인(貞夫人)은 창녕 장 씨이다)
1621년2월30일의 위 내용이 진리를 추구하는 만대산님 블러그에 소개되어 있어서 본인이 시문용의 정부인은 창녕 장 씨 인데 어찌 정인홍의 사촌일수 있느냐 이는 인조세력들의 왜곡 이다. 라고 댓글을 달았더니, 정인홍의 친동생만 사촌이냐 외사촌 고종사촌 등도 있지 않느냐는 댓글이 올라 왔다. 그럴 수도 있다고 판단되어 서산정씨 대종회 부 회장인 정성천 씨께 사실의뢰를 해 보니 정인홍의 모친은 진주 강 씨이니 외사촌은 아니고 고모님이 없어서 고종사촌도 아니며, 처의 사촌인가 보았더니 정인홍의 부인은 남원 양씨라 이 또한 아니라고 하며, 이종사촌관계는 모른다고 하였다. 시문용의 정부인이 정인홍의 이종사촌동생이 되려면 정인홍의 이모가 창영 장 씨 집에 시집가서 시문용 부인을 낳아야 되는 것이다. 도서관에 가서 창영 장 씨 족보를 확인결과, 시문용의 장모님은 초계 정시였다. 따라서 인조 세력들이 두 번 다 왜곡해 놓은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시문용의 아래 역사를 보면 도망병인지 아닌지 확실히 알 수 있다.
임진왜란당시 선조가 의주에 피난을 갔을 때, 정곤수가 명나라에 가서 군대를 보내어 도와달라고 했으며, 이때 시문용의 아버지 시윤제(施允濟)는 병부시랑으로 있으며 접반사가 되어 조선에 딱한 사정을 알고 걱정하며, 파병에 힘껏 도운 사실이 정곤수 장계에도 있으며 영조 정조까지도 언급을 했다. 정유재란 때 시윤제는 아들 시문용을 파견했는데 직책이 중군(中軍) 이다.
천명의 단독군사를 거느리고 나온 것으로 되어있으며, 나중에 남 방위가 3,3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오자 이 부대의 행영중군이라고 소개되고 있으니, 사실상 부대를 통솔하는 중군장이다.
장수가 도망을 갔다면 임진왜란 사에 남을 일이다. 인조세력들이 왜곡한 말 대로 병사(兵士분대장이하)라면, 도망을 해도 모를 수 있으나, 엄연한 장수이다. 어찌 도망간단 말인가? 시문용은 수많은 전투중 특히 가야산 일대에서 큰 공을 세워 선조가 감사하다고 보낸 서찰 내용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진주 사천의 왜적이 합천 가야산의 아래에 많이 모여 있다가 전라도의 왼쪽 등성마루를 넘어 들어가, 산과 골짜기에 출몰하여 불태우며, 노략질함이 거의 두루 미치니, 호남과 영남 일대가 그로 인해 소란한 데도 작은 나라의 군대가 그것을 차단하지 못해 왔느니, 이 한 번의 승첩(勝捷)으로 왜적들의 기세가 크게 꺾이어, 피폐한 백성들이 흉적(凶賊)들의 화염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천자(天子)의 군병(軍兵)들도 이에 힘입어 사기를 북돋우게 되었도다.
後日掃蕩妖氣之績, 未必不因此一捷爲之基也.
후일에 요망한 기운을 소탕하여버린 업적은 반드시 이 한 번의 승첩(勝捷)이 그 기초를 이루지 않는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로다.” 하셨다.가(賈) - 명성, 평판.
용(勇) - 날렵하다.
이(移) - 알리다.
절하(節下) - 장수(將帥)
천병(天兵) - 천자의 군병들.
시문용은 1598년 진주와 사천성 에서 전쟁을 마무리하고 1599년 2월 마귀제독이 있는 울산에 합류 명군들이 철수하기 전 승전비인 동정기(東征記) 비를 세울 때 비문을 쓴 사람으로 기록 되어있다.
4월 마귀제독이 선조와 회담하고 선발대로 떠난 것으로 되어있으니, 이때 남은 것이 확실하며 이 후 현역 장수들이 많이 남은 역사가 있다.
그리고 김교수는 광해군이 시문용에게 벼슬을 주었다고 말 했는데, 광해군이 언제 무슨 벼슬을 주었단 말인가? 벼슬을 내린 왕은 분명 선조였다. 선조 35년 첨지중추부사의 벼슬을 내렸다. 역사 편찬위에 문의했더니 종2품이라고 했다. 선조는 도망병을 찾아다가 어전회의에 참석하여 국사를 의논 할 수 있는 벼슬을 내렸단 말인가? 더욱이 선조는 정인홍을 싫어한 사람이다. 싫어하는 사람이 도망병을 거두어 두었다고 벼슬을 내린단 말인가? 김교수는 선조 때 벼슬을 받았다고 하면, 도망병 이란 말을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을 것 같으니, 광해군 때라고 거짓말 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본인이 잘못 알 수도 있으니 광해군 때 무슨 벼슬 받은 내용을 반드시 밝히기 바란다.
또, 영조는 임진왜란 때 시문용의 부자(父子) 역사를 살피고 시문용에게 증 병조참판의 벼슬을 내리며 이 후손들에게 부역을 면제해 주라고 했고, 정조도(정조17년 7월27일)시문용의 역사를 하나하나 다시 얘기하며 후손을 더 불러 선전관과 훈련원첨정의 벼슬을 내렸다. 영조나 정조도 오랜 세월 뒤에 도망병이 호화궁궐을 건립 했다고(사실은 호화궁궐이 안임) 벼슬을 내리고 그 후손들 에게 마저 벼슬을 내리고 부역을 면제 해 주는 미친 왕 이었단 말인가?
이곳에 편갈송 장군 유적비가 있어야 하는데 없습니다 복사하여 붙이기 했는데 사라 젔네요 죄송합니다
울산 서생진 왜성 입구에 가면 좌와같은 비를 약 15년 전 임진왜란 때 나온 제독 중군 편갈송 후손들이 편 장군 유적 비를 세워놓았는데 이 비문에 유격중군 시문용등과 같이 전쟁을 했다고 되어있으니 편씨 문중에서 무었 때문에 도망병과 같이 싸웠다고 했겠는가
시문용은 황조인 충신록에도 기록되어있고 임진왜란 장수 편성표에는 어디든지 들어 있으며 정조도 언급을 했고 이여송 마귀 제독 등의 후손들 문중 기록 등에 거의 유격 중군으로 기록되어 하나하나 다 소개 할 수 없을 정도이다
둘째: 호화궁궐건립문제
김교수는 글에서 호화궁궐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인조반정의 세 번째 이유로 내 세웠으며 김교수도 거기에 편승해서 300여호 집이 헐린 엄연한 역사가 있는데도 수 천호 헐렸다는 내용만 인용 했기에 호화궁궐 건립으로 표현 함
당시 호화궁궐을 지었다는 근거로 1617년(광해9년)6월11일자 실록을 보고 한 말일 것이다. 이날 기록을 보면 세군데 궁궐을 짓는데 헐려 나간 집이 수 천 채이고 제조와 낭청의수가 수 백 명이라고 되어있다. 이를 근거로 했는지 과거 다른 개인기록과 얼마 전까지 인터넷에 광해군과 시문용 등은 경복궁 10배 규모의 궁궐을 지었다는 글들이 있었다. 헐린 집이 수 천 채였다면 경복궁 10배 규모가 거짓말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실록에는 분명 인경궁 터에서 200여 호, 경희궁 터에서 100 여 호가 헐렸다는 기록이 있다. 김교수는 이 내용은 누락한 채 언급도 없고, 애써 외면하고 인조세력들이 부풀려 끼워 넣었다고 생각되는 부분만 소개한 것은, 무슨 의도인가? 수 천 채라는 내용도 거짓이고, 제조낭청이 수 백 명이란 내용도 완전 거짓이다. 세일대학 모 교수가 광해군 당시 궁궐건립에 대해 박사학위 논문을 썼는데, 여기에 보면 제조의 수가 총25명으로 명단이 나왔고, 그것도 창덕궁 건립 시 제조까지 합친 수이고 또 광해군이 측근을 보강하기위해 필요 없이 추가로 뽑아 놓은 제조까지 포함해서 25명이라 했다. 따라서 헐린 집 수천 채 이야기와 제조 수백 명 이야기는 황당한 거짓말인 것이다.
호화궁궐이 아니라는 내용들을 더 증명해 본다.
1617년(광해9년)4월27일 아래와 같은 실록내용이 있다.
이궁 건축에 크지 않은 재목을 사용할 것을 전교하다.
“전교하였다.”
“이궁의 터가 크지 않으니 적당한 크기의 재목을 쓰는 것이 옳다. 일찍이 사대부의 집을 조성하는 재목과 같은 크기의 재목을 베어오는 일 및 안에서 내려준 포목으로 관동(關東)의 재목을 무역하는 일에 대해 하교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며, 심지어는 중사(中使)가 나아갈 때 안에서도 누누이 전교하였다. 그런데 도감에서는 전교를 무시하고 감히 감역관(監役官)이 내려가기 전에 먼저 공문을 보내어 재목을 베게 하였다. 완도(莞島)의 경우에는 2백 16조(條)가 모두 대목(大木)으로, 비록 끌어내리고자 하더라도 한달 안에 역사를 끝낼 수 없을 것이라고 하며, 변산(邊山)의 경우는 3천 2백 20여 조나 되는 바, 함부로 벤 것이 이처럼 많으니, 몹시 놀랍다. 앞으로 법궁(法宮)은 형세상 조성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재목을 베어내는 중대한 일을 어찌 범연히 공문을 보내어서 이 지경에 이르게 한단 말인가. 도감의 당해 제조와 도청·낭청을 모두 행공 추고(行公推考)하라. 그리고 이 서장을 급급히 의논해 처리하고, 일을 잘 아는 문낭청(文郞廳)을 내일 안으로 말을 주어 내려보내어 속히 가지고 오게 하라. 그리고 지금 이후로는 굵은 재목은 절대로 베어내지 말고, 비록 혹 베어오더라도 반드시 문낭청을 보내어 상세히 살펴 베어 오는 일을 유념해서 착실히 거행하라.
일반 양반 집짓는 크기의 나무를 베어다 궁궐을 짓고 안에서 내어준 포목으로 나무를 관동지방에서 무역해오라는 말을 수없이 했다고 했으며 그럼에도 미리공문을 보내어 큰 나무를 벤 것에 대해 처벌을 했다는 내용이다 이것 하나만 보아도 호화궁궐이 아님을 분명이 알 수 있다.
또 1617년(광해9년)5월12일 아래와 같은 실록 내용이 있다.
“ 전교하였다”
“신궐의 성 안으로 들어간 집의 주인들에게 숫자를 헤아려서 값을 주는 일을 속히
하여 서계하라는 뜻으로 선수 도감에 말하라.”하였다
도감이 회계하기를,
“신궐 안 및 후원(後苑)의 집터가 거의 2백여 채나 되는데, 그 주인이 혹 외방에 있거나
서울에 있으면서 제때에 오지 않아서 도감에서 알 수가 없습니다. 이에 단지 고로(故老)
들이 혹 서울에 있으면서 제때에 오지 않아서 도감에서 알 수가 없습니다. 이에 단지 고로(故老)들이 가리켜주는 것에 따라서 집주인의 성명을 현록(懸錄)하여 아뢰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조정에서 논상(論賞)하는 일이 있자, 이 기별을 듣고는 다투어 와서 정장(呈狀)하는데, 혹 ‘우리 집터인데 잘못되어 다른 사람의 이름이 현록되었다.’고 하거나, 혹 ‘내가 산 터인데 잘못되어 예전 주인의 이름이 현록되었다.’고 하면서 고쳐 주기를 청하는 자가 한둘이 아닙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미처 서계하지 못한 자들 역시 많이들 와서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감에서는 그들의 정소(呈訴)에 대해 믿기가 어려워서 가지고 온 문서를 조사해 살펴보는 즈음에 저절로 지연되어 제때에 일일이 서계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우선 조사해 보아 분명한 자만 먼저 서계합니다.
다만 생각건대, 말세의 인심이 각박해서 갖가지로 간사한 짓을 하는바, 그 사이에 은상(恩賞)을 받기를 희망해서, 문서를 위조하여 몰래 다른 사람의 집터를 차지해 자기의 집터라고 하는 자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뒷날에 만약 드러나는 자가 있을 경우 법사로 하여금 먼저 속인 죄를 다스리게 하고 그에게 준 상격(賞格)을 환수한 다음에야 분분하게 정소하는 폐단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혹 칸수의 다소에 대해 사실과 다르게 하는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니, 다시금 상세히 살펴서 잘 처리하라.”
또 1617년(광해9년)7월7일 아래와 같은 실록 내용이 있다
영건 도감이 서별궁 안으로 민가가 많이 들어간 이유를 설명하다
영건 도감이 아뢰기를,
“도감의 초기(草記)로 인하여 전교하기를 ‘서별궁의 담장 안으로 들어간 민가가 1백여 집이나 된다고 하는데, 어찌하여 이와 같이 많은가? 다시 살펴서 아뢰라.’고 하시었습니다. 신들이 시문용·성지 등과 함께 서별궁 둘레의 응당 들어가야 할 땅을 두루 살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동쪽으로는 봉상시 큰길의 서쪽편에까지 이르고, 서쪽으로는 고 판서 신잡(申?)의 집까지 이르렀으며, 남쪽으로는 새문동(塞門洞) 큰길 남쪽편 산등성이까지 이르고, 북쪽으로는 현령 남이걸(南以傑)의 집 동산(東山)까지 이르러서 그 안에 있는 응당 들어가야 하는 민가가 자연 이와 같이 많게 되었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위와 같이 일반양반집 짓는 크기의 나무를 베어지으라고 누누이 당부했으니, 그것이 사실이고 인경궁과 경희궁 후원까지 세 군데에 헐려 나간 집이 분명 300여 호임이 확인되는데, 김교수는 이들을 모두 외면하고 인조세력들이 부풀려 끼워 넣었다고 보이는 헐려 나간 집이 수 천 채라고 말 한 내용만 인용한 의도가 의심스럽다.
셋째: 시문용의 처형 되었다는 문제
시문용은 실제는 인조원년에 고향 성주군 수륜면 보월동 예전에 살든 곳에 돌아와 살다가,
인조14년 인조가 청 태종에게 치욕적인 조건으로 항복을 할 때 명나라에서 나와 있는 장수 들을 잡아 보내라 했다하나, 인조는 반대로 장수들을 피신케 하여, 시문용도 용암면 군성산 아래로 유격파총 서학(徐鶴) 장군과 함께 들어가 은둔 생활을 하면서 군성산에 대명단 이라는 단을 쌓고 삭망으로 조복 입고 단에 올라 조국의 중흥을 기원한 역사기록이 수없이 있으며, 그 대명단이 지금도 남아있다는 내용이 여러 곳에 기록으로 남아있으며, 이때부터 마을 이름을 대명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대구의 대명동도 두사충장수에 의해 대명동이라 부르게 되듯 (과거에는 왕이나 유명한 사람이 살면 지명이 많이 바뀌기도 했다) 영조와 정조도 이 역사를 알고 말을 했는데 도망해온 병사가 살았다고 지명이 바뀐단 말인가?
실제와는 너무 다르게 처형되었다는 말이 있어서 처형에 대해 많은 문헌을 조사결과는 아래와 같다.
먼저 광해군일기 마지막에 인조반정의 역사가 몇 페이지의 내용으로 요약되어 있는데 처형부분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이이첨과 모모 30명을 먼저 처형하고 정인홍과 모모 4명은 나중에 처형하고 궁궐 관련해서 성지 시문용 복동 김일용은 달아나 있는 것을 잡아다 처형했다고 되어있다. 이 내용을 보고 처형 했다고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인조 실록을 보면
1623년(인조원년)3월13일부터 정권이 시작되는데 이로부터 2개월 내에 광해군 일기 마지막에 처형되었다는 40여 명 사람들을 실제 처형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한 두 명인가 인조는 살려주자 하고 대신들은 처형해야 한다는 사람 말고는 2개월 내에 하나하나 처형 시키는 기록이 있다.
3월14일부터 처형시켰으며 궁궐 관련해서는 3월17일 성지와 복동이 처형되고 4월3일 정인홍이 15명과 같이 처형되며 처형이 이어지다가 5월4일 김일용이 처형된다. 그 후 12월까지 읽어보고 이듬해 6월까지 읽어보아도 시문용은 처형사실이 없다. 따라서 처형이 되지 않았으며 그러기에 인조14년에 군성산에 들어간 역사 다른 역사 사실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국사편찬위에 문의결과 과거 역사를 보면, 재판할 때는 처형하기로 했다가 실제로는 처형 하지 않는 경우도 많은데 그렇게 된 것 같다고 말을 했다. 2차3차 확인을 했지만 잘못 볼 수도 있으니 김교수는 처형된 정확한 사실을 밝히기 바란다.
또 인조는 시문용을 처형 할 수 없다고 본다. 인조는 철저히 명나라를 섬기다가 청나라에 항복까지 한 사람이며, 인조반정당시 왕이 되려면 명나라 황제의 허락을 받아야 하며 실제 명나라에 가서 인조를 왕으로 허락해 달라하니 잘하고 있는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이라 자처하는 사람을 왕으로 인정 할 수 없다고 버티다가 허락해 주지 않으면 청나라에 붙으면 곤란하다며 허락해 주었다고 한다.
또 시문용 아버지 시윤제는 조선에 군대파병에 적극 도운사실을 조정까지도 다 알고 있고 나중에 예부상서 장관까지 지냈으며, 그의 아들 시문용은 조선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고 실제는 호화궁궐도 짓지 않은 그를 어찌 처형한단 말인가?
또 시 씨 문중에서는 전혀 모르는 일인데, 대 학자 매산 홍직필 선생이 시문용의 유허비 비문을 써 주었는데 거기에는 우이추부록종신(又以樞府錄終身)이라 했으니 인조는 시문용을 종신 때가지 중추부사의 월급을 지급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본인은 이렇게 추측해 보았다. 인조 조정은 왕으로 허락받기가 어렵다는 것을 잘 아는 처지라 시문용을 특별대우하고 장관까지 지낸 아버지, 아니면 그분의 친지 분께 서찰이라도 보내어 도와달라고 했으리라 추측 된다. 아니면 매산 선생이 정신이 없어, 써 놓았을 리는 만무하다(매산 문집 원본확인)
이곳에 대명단 사진이 있어야 하는데 복사하여 붙이기를 했는데 사라 젔습니다 죄송합니다 뒤에 다시 올리겠습니다
위 대명단은 인조14년에 시문용과 유격파총 서학장군과 같이 군성산 아래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면서 두 분이 단을 조성하고 삭망으로 단에 올라 조국중흥을 기원한 단이며 시인 이은상씨 등 많은 사람들이 시문용의 조국 사랑하는 충정을 기리는 글도 썼다
과거엔 왕이나 유명인이 살면 지명이 바뀌듯 이때부터 마을 이름이 대명동이 되었다 (두사충장수에 의해 대구 대명동이 생기듯)이후 세상이 조용해지자 시문용은 본래 실든 수륜면 보월동에 가서 살다가 72세로 별세 묘소가 마을 뒷산에 있고 서학은 이 마을에 절강서씨 시조가 되어 정착하여 현재도 서씨들이 살고 있다
인조1년에 처형되었다면 이런 역사가 있을 수 없다
기타사항
1. 궁궐조성 때 보상 문제
1617년(광해9년)6월27일 실록을 보면 보상 가를 동산은 얼마 밭은 얼마 집은 얼마를 보상하겠다고 광해군에게 보고하니 광해군은 나라가 불행하고 내가 덕이 없어 궁궐을 새로 짓게 되는데 보상가격 마저 작으면 나의 부덕이 더할 것이니, 다시 측정해서 보고하라 했으니 보상 가는 충분했다고 보이며 터가 들어간 주인 중 상놈은 면천도 시키고 글을 잘 아는 자는 벼슬도 시키라는 내용 등도 있다.
2. 노역문제
1617년(광해9년)3월21일 실록을 보면 작년에 풍년이 조금 들어 지금까지 준 노임으로는 일을 하러 오지 않을듯하며 성곽 쌓는데 500명 다른 공사 500명이 필요한데 과거 국가에 큰 행사 때는 중들을 데려다 일을 시켰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하겠다고 보고하니 광해군은 그렇게 하라했다. 실제 그 후 수 천 명의 스님을 동원했는데 식량을 지고 와서 정확히 2개월씩 일을 시키고 보낸 기록이 있다.
이로 본다면 민폐는 크지 않았다고 본다. 민간인은 작지만 노임을 주었고 스님들 말고는 강제동원도 없었다. 지금도 부자들의 세금을 거두어 가난한 사람을 위해 일을 시키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고 본다면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을 구휼했다고 볼 수 도 있다.
정인홍과 시문용 그리고 궁궐관련에서 보듯 실록 원본은 수정하지 않고 부풀려 끼워 넣은 것으로 볼 때 원본을 수정한 것도 있을 것이며 한마디로 이긴자 자기들의 잘못을 정당화 하기위해 무슨 일인들 못 했겠는가 그런 내용들이 많이 확인 된다
첫댓글시문용 장군의 후손이신지요? 제가 올린 게시물이 사실과 다르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작년 모명재에 다녀온 이후 명에서 귀화한 6명의 장수들에 대해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알게된 내용을 이곳에 소개했습니다. 비교적 신뢰할 수 있는 곳에서 글을 가져왔다고 생각했는데 잘못된 내용이라면 정말 죄송합니다. 내화재는 '내화재와 시문용'으로 Daum에서 검색해 보시면 [경상북도 고령군 운수면 화암리에 있는 시문용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재실]이라고 백과사전에 소개되어있습니다.
역사에 대해 관심만 있을 뿐 지식이 없습니다.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는 곳을 분별하지 못하고 무례하게 글을 올린 점, 깊이 사과드립니다. 그리고 사실을 알리기 위해 동분서주 애쓰시는 천수님께 존경을 표합니다. 고맙습니다. 다시 한 번 깊이 사과드리며 제가 올린 게시물은 바로 삭제했습니다.
천수님 시문용 장군외 5명의 장수님을 모명제에서 6장군을뫼시고 영남 민속 보존회장 서상언 회장님과 수석부회장인 저와 민속보존회 회원님들과 영일만 월월이 청청 하얀나비님 클로버님 무무님과 함께 제사를 모셨습니다 역사에대하여 전문적인 지식은없으나 중국 관광객이 많이 오고있는 시점에 조선에서 공을세우고 귀화하신 분들을 많이 알리는 목적과 대구시의 시자금을 이용하여 이분들에 업적을 중국관광객들 많이 유치키위한 목적이 있었음을 알려 드린것이니 오혜는 하지마시기 바랍니다 보다더 시문용 장군에 대하여 알게되어 감사합니다
청청님 반갑습니다 좋은 일을 하시느라 수고가 많으시 겠습니다 글 내용 중 대구시에서 중국 관광객을 많이 유치하기 위한 목적의 하나로 귀화 한 분들의 업적을 알리고 저 하신다는 내용을 보고 제가 하나 소견을 드려 보고 저 합니다 두사충 장군의 업적 한분만 알리는 것 보다는 많은 자료를 보이는 것이 좋다고 생각되어 드리는 말입니다 현재 성주 용암 대명동 (현 문명동)에는 아시다 싶이 시문용이 유격 파총 서학과 같이 들어가 약 400년 전에 쌓은 대명단이 있으며 시인 이은상님의 글과 같이 조국 사랑하는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매년 음 3월 19일 여명에 시문용과 서학 후손이 모여 북향 4배의 의식을 400년간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 대명단을 그대로 모형을 두사충 장군 묘가 있는 산에 옴겨 놓고 시문용의 유허비 고령에 있는 시문용 불천위(不遷位)별묘 재실 등을 사진으로 전시관에 전시하고 다른 장수들의 유물도 있으면 같이 전시 하면 하나의 보여 줄 거리가 될 것이라 사료 됩니다 현재 보관중인 자료는 임진왜란 때 정곤수가 중국에 가서 약 40여 일간 청병 수와 물자에 대해 조율 했는데 한문이라 해석은 다 할수 없으나 어느날 시문용 아버지 시윤제가 정곤수를 석성의 집에 인도하자 정곤수가 통곡하며 조선을 도와 달라고 하는 등의 역사가 있습니다
당시 석성이 조선에 군대를 많이 파병 하여 반란군(후에 청나라)을 평정 하지 못했 다는 죄를 물어 처형을 당하게 되며 이때 석성은 두 아들을 불러 나는 처형을 면할수 없으니 너희 들은 조선으로 가라 혀여 실제 큰 아들은 해주 석씨가 되고 작은 아들은 위에서 소개한 유격파총 서학의 사위가 된 애틋한 사연도 있습니다 혹시 연락하실 일이 있으면 017-526-7373 이나 메일 scs6970@hanmail.net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시문용 장군의 후손이신지요?
제가 올린 게시물이 사실과 다르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작년 모명재에 다녀온 이후 명에서 귀화한 6명의 장수들에 대해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알게된 내용을 이곳에 소개했습니다. 비교적 신뢰할 수 있는 곳에서 글을 가져왔다고 생각했는데 잘못된 내용이라면 정말 죄송합니다.
내화재는 '내화재와 시문용'으로 Daum에서 검색해 보시면 [경상북도 고령군 운수면 화암리에 있는 시문용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재실]이라고 백과사전에 소개되어있습니다.
역사에 대해 관심만 있을 뿐 지식이 없습니다.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는 곳을 분별하지 못하고 무례하게 글을 올린 점, 깊이 사과드립니다.
그리고 사실을 알리기 위해 동분서주 애쓰시는 천수님께 존경을 표합니다. 고맙습니다.
다시 한 번 깊이 사과드리며 제가 올린 게시물은 바로 삭제했습니다.
사과를 하시니 제가 오히려 송구스럽습니다
그리고 내화재에 대해서는 제가 오히려 죄송합니다 몇개의 재실중 현재 관리가 안되는 재실이고 사진 상으로 보아선 전혀 모르는 재실로 보여서 어디 있는 재실 이냐고 했습니다 사과 드립니다 자주 대화 나누기를 부탁드립니다
천수님 시문용 장군외 5명의 장수님을 모명제에서 6장군을뫼시고 영남 민속 보존회장 서상언 회장님과
수석부회장인 저와 민속보존회 회원님들과 영일만 월월이 청청 하얀나비님 클로버님 무무님과 함께
제사를 모셨습니다 역사에대하여 전문적인 지식은없으나 중국 관광객이 많이 오고있는 시점에
조선에서 공을세우고 귀화하신 분들을 많이 알리는 목적과 대구시의 시자금을 이용하여 이분들에
업적을 중국관광객들 많이 유치키위한 목적이 있었음을 알려 드린것이니 오혜는 하지마시기 바랍니다
보다더 시문용 장군에 대하여 알게되어 감사합니다
저도 클로버님 무무님 청청님 하얀나비님과 함께
대구 묘명재에 갔을때 처음으로 귀화한 장수분들이 계셨다는걸
알았는데 게시글을 올려주시니 참 으로 반갑고 공부도 돼어 감사합니다^
청청님 반갑습니다
좋은 일을 하시느라 수고가 많으시 겠습니다
글 내용 중 대구시에서 중국 관광객을 많이 유치하기 위한 목적의 하나로 귀화 한 분들의 업적을 알리고 저 하신다는 내용을 보고 제가 하나 소견을 드려 보고 저 합니다
두사충 장군의 업적 한분만 알리는 것 보다는 많은 자료를 보이는 것이 좋다고 생각되어 드리는 말입니다 현재 성주 용암 대명동 (현 문명동)에는 아시다 싶이 시문용이 유격 파총 서학과 같이 들어가 약 400년 전에 쌓은 대명단이 있으며 시인 이은상님의 글과 같이 조국 사랑하는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매년 음 3월 19일 여명에 시문용과 서학 후손이 모여 북향 4배의 의식을 400년간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 대명단을 그대로 모형을 두사충 장군 묘가 있는 산에 옴겨 놓고 시문용의 유허비 고령에 있는 시문용 불천위(不遷位)별묘 재실 등을 사진으로 전시관에 전시하고 다른 장수들의 유물도 있으면 같이 전시 하면 하나의 보여 줄 거리가 될 것이라 사료 됩니다
현재 보관중인 자료는 임진왜란 때 정곤수가 중국에 가서 약 40여 일간 청병 수와 물자에 대해 조율 했는데 한문이라 해석은 다 할수 없으나 어느날 시문용 아버지 시윤제가 정곤수를 석성의 집에 인도하자 정곤수가 통곡하며 조선을 도와 달라고 하는 등의 역사가 있습니다
당시 석성이 조선에 군대를 많이 파병 하여 반란군(후에 청나라)을 평정 하지 못했 다는 죄를 물어 처형을 당하게 되며 이때 석성은 두 아들을 불러 나는 처형을 면할수 없으니 너희 들은 조선으로 가라 혀여 실제 큰 아들은 해주 석씨가 되고 작은 아들은 위에서 소개한 유격파총 서학의 사위가 된 애틋한 사연도 있습니다
혹시 연락하실 일이 있으면 017-526-7373 이나 메일 scs6970@hanmail.net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천수님 좋은글 잘보고감니다
감사합니다 고운휴일 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