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
예수성심상
인자하신 성모님
십자가와 민들레
성당 내부 ↓
오른쪽과 왼쪽 / 칸막이를 설치해 놓았다.
미사 집전하신 신부님
제대
미사가 끝나고 점심 식사시간
순례자들이 줄을 서 기다리는 동안 열심히 이곳저곳 다니며 사진 촬영하다.
옆모습
뒤에서 바라본 성당
조스 신부님과 라푸르카드 신부님 묘소
신부님 묘소 앞에 핀 봄꽃 ↓
할미꽃
양지꽃
묘소 올라가는 길에 흐드러지게 핀 봄까치꽃
점심 식사가 끝나고 십자가의 길을 걷기 위해 산으로....
이곳에 사시는 되재성당 회장님과 어르신도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걷기 위해 나서셨다.
이곳에서 만들어 놓은 나무 십자가를 하나씩 들고 십자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데
마른 대지 위로 은총의 단비가 한 방울, 두 방울...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다다른 14처
허리가 구부정하신 어르신도 14처까지 올라 오셨다.
되재 성당 회장님과 어르신을 뵈면서 신앙심이 참 대단하심을 느꼈다.
옛 순교자의 신앙심을 본받아 생활하시는 것을 느꼈다.
하나씩 들고 온 +자가를 이곳에 내려놓고 하산.
십자가와 생강나무... 부활
소재지 : 전라북도 완주군 화산면 승치리2구 되재마을
1801년 신유박해 후 전라도는 전국 신자들의 피난지가 되었고, 특히 고산 지방은 1866년 박해 후에
신자들의 교우촌이 되었다. 1890년까지 기록에 나오는 고산 지방의 공소는 저구리, 넓은 바위, 다리실(천호),
차돌박이(백석), 되재를 포함하여 57개나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 고을에는 심산유곡의 어디에나 신도들이
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교우촌이 많았던 만큼 이 지역에 박해도 심했고 순교자들도 많이 배출했다.
현재 천호 성지에 안장돼 있는 이명서(일명 재덕, 1821~1866, 베드로), 손선지(1820~1866, 베드로),
정문호(일명 계식, 1801~1866, 바르톨로메오), 한재권(일명 원서, 1836~1866, 요셉/베드로) 등
순교 성인 4위와 김영오 아우구스티노를 비롯한 순교자 39명이 고산 지역 출신이다.
◆ 되재 본당시기(1893~1944)
고산 성당의 전신인 되재 성당의 역사는 1893년 4월 비에모(Vellemot, 禹一模, 1869~1950, 바오로)
신부가 차돌박이(현 백석. 완주군 운주면 구제리)에 거처를 정하고 전교를 시작한 때로부터 시작된다.
비에모 신부는 다음해 초 거처를 되재(화산면 승치리)로 옮기고 성당 신축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동학 농민 운동으로 전라도 교회가 핍박을 당하자 일시 서울로 피신하게 되었다.
1895년에 완공된 되재 성당은 단층 5칸짜리 한옥으로 한국 천주교회에서 서울 약현(현 중림동)
성당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성당일 뿐 아니라 한옥 성당으로는 우리나라 첫 성당이다.
성당을 지을 때 화엄사와 쌍계사에서 나온 목재를 사용했다고 한다.
되재 성당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소실됐다.
그러나 되재 성당 터는 2004년 7월 30일자로 전라북도 문화재 기념물 제119호로 지정돼
2005년부터 국가와 도 지원을 받아 되재 성당 복원공사에 들어가 2007년 말 원형대로 복원되었다.
되재 마을에는 약 40호가 거주하는데 거의가 교우 가정이다.
실제로 되재 본당이 설립된 뒤 많은 신자들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성당 주변에는
큰 교우촌이 형성되었으나, 그 후 신자들의 이주로 교세가 위축되었다.
그러던 중 제10대 서병익 바오로 신부기 1944년 신병으로 본당을 비우게 되면서
다시 공소로 전락하였다.
되재 공소 강당 뒤편에는 되재 성당 설립 이전에 고산 지역에서 사목했던 조스
(Josse, 趙, 1851~1886, 세자 요한) 신부와 라푸르카드(Lafourcade, 羅亨묵, 1860~1888,
아르날도) 신부 묘소가 있다. 프랑스인 조스 신부는 1883년 1월 서울에 도착,
1884년 9월에 부임하여 사목하다가 과로와 열병으로 안대동 공소에서
판공 성사를 주는 중에 사망하였다.
라푸르카드 신부도 프랑스인으로 1887년 1월 서울에 도착하여
그해 봄에 고산 얼음골에 부임하였으며, 1888년 2월 고산 빼재(수티)로
부임하여 사목하다가 같은 해 7월 11일 과로와 열병으로 사망하였다.
1984년 12월 7일 공소 강당 뒤편에 있는 두 신부 묘소에서 묘비 제막식을 가졌다.
▒ 비에모(Villemot) 신부
비에모(1869∼1950, 禹一模) 바오로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1892년 사제품을 받은 뒤 조선의 선교사로 임명되어 이 해 6월 조선에 입국하였다.
1893년 전라도 고산의 차돌박이를 근거로 전라도 일대에 전교하였고,
1894년 동학 혁명이 일어나자 전주에서 전교하던 보두네(Baudounet, 尹沙勿) 신부와
서울로 피신했다가 이듬해 다시 전라도로 내려가 전라도 지방의 모교회(母校會)격인
고산 되재(升峙) 본당을 신설, 건축하고 1898년까지 사목했다.
1898년부터 1916년까지 서울교구 당가(재정부장) 신부로 서울교구의 재정 문제를
담당하고, 1916년부터 1926년까지 약현 성당(현 중림동 성당) 주임 신부,
1926년부터 1942년까지 서울교구 부주교 겸 명동 성당주임 신부 등을 역임하였다.
1942년부터 노령으로 일선 사목을 떠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지도 신부로
재직하던 중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이해 7월 북한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교황 사절 번(Byrne) 주교, 춘천교구장 퀸란(Quinlan) 주교 등과 함께 평양으로
끌려갔고, 거기서 다시 만포(滿浦)에서 중강진(中江鎭)까지 250리의 산길을
걷는 소위 ‘죽음의 행진’을 겪은 뒤 11월 11일 중강진에서 옥사하였다
[한국문화 스토리에서 옮김]
2014년 3월 25일(화)
첫댓글 직접 가서 보았을 때보다 향기님의 사진으로 보니 더 멋지고 새롭게 다가오네요.
구석 구석 빠트리지 않고 모두 담으셨군요. 관찰력이 돋보이십니다.
십자가의 길이 인상적이고 가슴에 울림으로 전해지네요.~~~
친절한 설명과 함께 나누어 주신 귀한 선물 같은 사진들 즐감했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고산성당을 못보고 온 것이 아직도 큰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아무래도 개인적으로 다녀와야 될 것 같네요. ^^*
사진만 봐도 성지에 함께 다녀온듯 ...ㅎㅎ~~
되재 성당 좋은사진과 자세한 소개글 감사드립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돼지가 아니고 되재예요. ㅎㅎ
물론 오타이겠지만....
유엔오님 덕분에 웃음이 빵~터졌습니다.
감사합니다. ^^*
@숲꽃향기 ㅎ;ㅎ;~~ 제가 실수를 했군요.
저도 숲꽃향기님 답글읽고 ㅎㅎㅎ~ 이런 이런 하고 한바탕 웃었습니다.
성당이름이 특이하다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런 실례를 했는지 몰랐군요.
성당이름이라 오타 수정을 합니다. ~~ ㅎㅎ 좋은 하루 되세요.
봄과 같은 사람 / 이해인
봄과 같은 사람이란
아마도 늘 희망하는 사람
기뻐하는 사람
따뜻한 사람, 친절한 사람
명랑한 사람, 온유한 사람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고마워 할 줄 아는 사람
창조적인 사람
긍정적인 사람일 게다......
자기의 처지를 불평하기 전에
우선 그 안에서 해야 할 바를
최선의 성실로 수행하는 사람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과 용기를
새롭게 하며 나아가는 사람이다
-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 중에서 -
숲꽃향기님도 봄과같은 사람 되시도록 축복합니다.
고맙습니다. 유엔오님! ^^*
행복한 주말 저녁 되시고
기쁜 주일 아침 맞이 하시길 바래요.
되재성당 가보고 싶어지네요~~^^
특히 나의십자가를 들고서 십자가의길 기도를 바치는...
향기님사진 아름다워요~~^^*
고맙습니다. 운초님!
미리내 성지에 철쭉꽃은 피었을까요...^^*
@숲꽃향기 이번주 토요일에 들어가가는데 다녀와서 보고드릴께용~^^
@운초 예.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