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철길
글/리 태 근
어릴 때부터 장난감 같은 기차를 보았다. 기차가 뽕-하고 기적소리를 내면서 고향마을을 지나갈 때면 내고향의 자랑이런가 온몸에 새힘이 부쩍 솟구쳤다. 해빛에 반짝이는 철길우에서 손오공처럼 외발로 새끼를 꼬노라면 어느새 학교에 닿는지 모른다. 끝간데 없이 뻗어간 철길에서 공짜로 놋쇠(금빛 반짝이는 쇠붙이)를 챙길 때도 많았다. 그때는 놋쇠가 금보다 더 귀했 던가? 놋쇠를 공소부(상점)에가져다 바치면 꽤나 큰돈이 되였다. 대식품세월 (식품이 없어서 고생하던 세월)이라 시래기밥도 마음대로 먹지 못하던 세월에 놋쇠는 금노다지였다. 철길 자갈밭에 괜스레 고무신 바닥이 닳는다고 늘쌍 맨 발로 다니였다. 빨래목 사이로 날이 선 자갈들이 깔려있는데 그런 철길 따라 걷노라면 죄꼬만 발이 성한데 없었다. 하지만 그런대로 철길 따라 걷는게 금놋쇠때문이였던가?...
여름이면 고기잡이를 하다가도 멀리서 기차가 흰 연기를 뿜으면서 달려오면 약속이나 한듯 철다리밑에 기여든다. 당장 깔아뭉갤듯 우룽우룽 천지를 진감하는 둔탁스러운 기차가 들어서는 순간이면 겁에 질린 녀자애들이 남자애들의 품속에 감기우는것이 상례이다. 그런 순간이 좋았던가? 이성이 뭔지? 사랑이 뭔지? 아직은 어섯눈도 뜨지 못한 나이였지만 녀자애들을 품에 안는 순간이 그렇듯 기분이 흥그러울수가 없었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멋이 좋아서 기차놀이도 자주 했었다. 봄이면 총총한 싸리나무 울바자너머에 갓 열린 가시 송송 돋친 애오이가 욕심이 난다. 하지만 손끝이 대이지 않으니 애간장만 태운다. 누가 먼저 발견했던지 철길우 레루 이음목에다 쇠못을 후려서 놓으면 기차가 지나가며 납작한 <낫>으로 된단다. 길다란 싸리나무끝에 <쇠줄낫>을 고정하여 울바자 틈에 밀어넣고 오이쪽지를 살짝 자른다. 꼭지 떨어진 오이를 콕 찍어 재치스레 훔쳐낸다. 오이를 훔치는데는 고슴도치도 울고 갈 지경이다. 남먼저 오이를 먹는다고 동네방네 자랑하던 아낙네들이 감쪽같이 사라진 오이를 발견하고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며 도리머리를 떤다.
농민에게 있어서 기차란 한갖 그림속의 떡이였다. 그때는 철로순시원이 얼마나 부러웠던가? 불볕이 오지게 내리쬐는 한여름날 사원들은 사래긴 밭에서 땀주머니가 되여 기음을 매는데 철로순시원은 나무그늘밑에서 초모자로 슬슬 부채질만 하고서도 여유롭게 살아가는 터이다. 놀보 매미가 개미를 부러워해야겠는데 되려 개미가 매미를 부러워해야만 하는 현실이다. 해 저무는 저녁 새하얀 초모자를 쓰고 망치를 둘러 메고 철길에서 코노래 부르며 지나가는 철로 순시원아저씨가 그렇게 부러울수가 없었다. 농민은 한평생 소궁둥이를 두드려도 가난이 꼬랑지처럼 따라다니는데 철로 순시원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달마다 하달되는 로임이 있어 암행어사 리몽룡 행사를 하고 다니니 그 당시 우리가 배를 들들 앓은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을것이다. 그 년대에 처녀들은 로임 받는 계층이라 하면 치마폭을 걷어 올리고 따라다녔다. 그때문이였을가? 차차 철이 들면서 기차가 반갑지 않았다.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작은 손을 저으며 반기군 했었는데 그것이 밉다못해 저주할 정도이다. 지어 기피하고 싶은 대상물로 되였으니 아마 세월이란 못하는 노릇 없었나보다. 이른봄 논뚝을 감다가도 일단 기차가 지나갈라치면 삽자루를 그대로 내밀며 "이거나 콱 먹으라"고 부질없는 불평도 뿜어댄다. 그럴 때면 기차도 농촌 총각들의 심경을 속속들이 읽어냈던지 쌍고동소리 기일게 울리며 하얀 증기를 팍팍 내뿜는다. 동정인지 아니면 깨고소하다는 뜻인지 알수 없는 그런 짓거리를 남기고는 지렁이처럼 구불구불 청승맞게 산굽이로 사라진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기차와 촌민들과의 인연은 상상밖으로 점차 가까와지는 추세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놈의 둔중스러운 기차도 실수할 때가 많았다. 밤을 자고나면 목재차가 탈궤하여 아무데나 재목들이 산더미로 부리워진다. 이렇게 철길녘에 무더기로 쌓여진 목재는 일손이 딸리우는지 한달이고 두달이고 내처 자리지킴을 한다. 주변의 동네에서는 슬슬 눈치를 보다가 동향이 없으면 밤중에 달구지로 실어다가 뒤울안에 파묻어 둔다. 시간이 퍼그나 지나 나무그루터기가 까맣게 변하면 널을 뽑아서 가구를 짰다. 그때는 죽물맛도 꿀물 맞잡이였던 때라 집집마다 온전한 가구 하나 갖추지 못하고 사는 형편이였는데 기차 덕분에 어마지두 이불장이요 찬장이요 하면서 너도 나도 가당치 않은 폼을 잡아보기도 한다. 아들 딸을 시집 장가 보낼 걱정때문에 밤잠을 설칠 지경이였는데 버젓이 가구를 갖춰주게 되였으니 그 기차가 어찌 눈물 나도록 고마웁지 않으랴. 기차는 내고향 처녀들에게 탐탁한 밑천을 선사해주었으니 말그대로 "구명차"였다고 할가.
기차는 동년의 배짱을 키워준 <천리마>였다. 철길을 달리는 구루마 (네 바퀴를 달아놓았는데 두 사람이 자새를 잦으면 몇백리도 씽씽 달려간 다.)가 철길우에 올려만 놓으면 제절로 달려가는데 너무도 신기했다. 올리막에서는 노젓는 배사공처럼 구루마자새를 힘차게 자으면 몇십리길도 단숨에 주름잡는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내리막길을 내릴 때면 급정거를 시킬줄 몰라서 쩔쩔 맨다. 그럴 때면 구루마는 고삐에서 풀려난 말마냥 내처 아래로 굴러간다. 그제야 애들은 덴겁한 소리를 뽑는다. 허면 모내기를 하던 사원들이 천방치축 주먹을 부르쥐고 달려온다. 일이 안될라니 느닷없이 저만치 굽인돌이에서 "괴물"이 시커먼 머리를 내저으며 질풍같이 짓쳐온다. 앗차, 위기일발의 순간이다, 영화 "철도유격대"의 한장면이 재현된다 결국 기차는 용케도 뒤걸음을 치면서 철길우에 모래주머니를 뿌려던진다. 그제금에야 정신없이 달리던 구루마가 모래무지에 골을 틀어밖고 멈춰섰다. 삼십륙계에 줄행랑이라고 했던가? 혼비백산한 우리는 급기야 산쪽으로 도망을 놓는다…
<구루마사건> 때문에 나는 하마트면 학교에서 쫏겨날번 하였다. 그때로부터 아이들이 철길에서 사고가 생겨도 내탓이요 뉘집 오이가 잃어져도 내탓이요 참외밭에 도독이 들어도 내탓이요 아이들이 학교를 가지 않고 놋쇠를 주어도 사사건건 내탓이란다. 나한테 씌워지는 "죄장"은 이에 그친게 아니다. 애들이 탈곡장에서 담배를 피우다 들키워도 내탓이요 뉘집에 닭알이 없어져도 무조건 내탓이란다. 실은 내가 닭알을 훔쳐오라고 시킨것도 아니였다. 닭알노란자위를 화투장에 빛이 반짝반짝 윤나게 칠해서 견장을 만들어 주면 애들이 겨끔내기로 닭알을 훔쳐온것이였다. "구루마사건 "을 계기로 나는 동네에서 "뿔난 송아지"로 평이 나게 되였고 아이들속에서는 범을 때려잡은 "무송"으로 받들리우게 되였다.
두가닥으로 나란히 뻗어간 철길우에는 내동년이 쌍무지개처럼 비끼여있다. 곱단이 순이 영철이랑 함께 철길우를 걷던 때가 사무치도록이 그리워진다. 언젠가 다시 한번 그 시절 아이들과 함께 철길우에서 퐁퐁퐁 까치걸음을 걸어볼가? 해 솟는 아침마다 학교로 가는 우리들한테 고동소리 울려주며 반가이 달려오던 정다운 기차도 흘러가 버린 세월처럼 어데론가 가뭇없이 사라졌다. 몇년전에 고향에 들려보았더니 철길마저 말끔히 걷어버렸었다. 어릴적에는 그 철길을 따라 가고 또 가면 신기루라도 있을거라는 환상도 가져보았는데 그 환상마저 말끔히 걷어가버린것이다. 그것이 어찌나 마음에 알찐하였으면 고향에 다녀오던 그날 밤 나는 꿈에 철길을 보았었다. 런닝그바람에 반바지를 대충 허리에 걸고 레루우에 귀를 바짝 대고 있는 나를 보았다. 아이는 그 어떤 동음이 들리나 일어날념을 않고 요지부동이다...
꿈에까지 찾아온 철길을 보니 아마 철길은 완연 없어지지 않았나 보다. 아, 알고보니 철길은 워낙 진작 내 가슴속으로 자리를 옮겨버린것이였다! 나이테를 둘러가는 나를 동무하여 언제든 언제든 녹 쓸지 아니하고 빛을 낼수 있는 철길이 있기에 내 여생은 운행을 모르는 렬차로 다시 부활한다...
첫댓글 추억 속의 철길은 끊이지 않고 남아 있듯, 두만강님의 향수를 달래는 글
보아오고 있습니다.망향의 정을 잘 그리셨습니다.
-----위에 '원고를 고치다란 말로 '수개고'라 쓰셨습니다.
쓰여진 글 활자화에 이르기 까지
고치고 고쳐도 한이 없는 것을 경험 합니다.
이곳에서는 쓰여진 원고를 고친다는 말을 퇴고( 推,밀 '퇴' 민다.敲, 두드리다.)
'推 敲'(퇴고)라고 씁니다.인터넷에 '퇴고'를 검색해 보면 밝혀주듯, 중국 고사에서
나온 유래를 따라 쓰고 있습니다. 한국의 詩文學이 중국의 고전에 따라 쓰여지는
문자가 많습니다. 어찌 보면 한국이 문학에 있어서 중국보다 중국적이라 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본인의 생각으로는 '수개'보다 '퇴고'라는 표현이 좋을 듯 합니다.
---퇴고의 유래,,,,
당나라의 가도라는 사람이 나귀를 타고 가다가 詩 한 수를
떠올립니다.
' 새는 연못가 나무에 지고 중은 달 아래 문을 민다.
( 鳥宿池邊樹檜 '推月下門 인 데,)
문을 민다 보다는 (퇴, 推 ) 두두린다 ( 고,敲 )가 어떨가 생각에 잠겨
마침 벼슬아치 한유의 행차길을 침범 했던바, 韓兪 앞을 끌려간 賈島가
詩를 생각하다 그랬다고 이야기 하자, 한유가 노여움을 풀고,,,,,,,,
" 내 생각에는 민다는 것 ( 推 )보다 두드린다,( 敲 )가 좋겠군 "하며
동행 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문장을 다듬고 고치는 일을 '퇴고'라 불렀으며 이 고사를
들어 ,,,이곳에서는 퇴고라 쓰고 있습니다.
잘 알았습니다. 늘 관심해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