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기획 - 세계의 한복판으로]
[4] 경부고속도로 40년 - 미래로 가는 네트워크
멀리 길게 본 박정희 리더십 … 산업화 20~30년 앞당겼다
박정희 “경제 핏줄 만들어야" "부자 도로" 반대 뚫고 강행
한국 넘어 일본~유럽을 잇는 아시안 하이웨이로 도약
"FTA . 녹색성장도 미래 경부고속도로 될 것"

산업화의 동맥이었던 경부고속도로가 한반도를 넘어 아시아와 유럽으로 뻗어 나가 21세기형 세계 네트워크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1970년 개통 당시의 서울 톨게이트. 8차로는 현재 32차로가 됐고 주변 논밭은 분당신도시와 수지지구로 변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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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 하이웨이 AH1 일본, 한국, 중국, 인도, 터키’.
경부고속도로 서울 영업소(상행선)를 나서면 이런 이정표가 나온다. 일본 도쿄에서 시작해 부산~서울~신의주~중국~인도~이란~터키로 이어지는 1번 아시안 하이웨이(AH)를 가리킨다. AH는 2004년 28개국이 무역과 관광 촉진을 위해 건설에 합의했고 올해 2월 도쿄에서 세부 사항을 논의한다. 한국교통연구원 권영인 선임연구원은 “경부고속도로는 아시안 하이웨이의 한국 출발점으로 세계의 중심으로 나아가는 대한민국을 상징한다”고 말했다.
경부고속도로가 올해로 개통 40주년(1970년 7월 7일 개통)을 맞는다. 당시 자본·기술·장비·경험 등이 거의 전무한 상황에서 건설돼 산업화를 20, 30년 앞당겼다. 미래를 보는 지도자의 혜안과 추진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1967년 박정희 대통령이 선거 공약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내놓자 “차도 없는데 웬 고속도로냐” “일부 부유층의 유람로가 될 것” 등등 반대가 극심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승철 전무는 “경부고속도로는 그 당시 상황으로는 안 되는 사업이었지만 경제 핏줄을 만들려는 지도자의 결단으로 탄생했다”며 “국가 중대사를 현재 기준으로만 판단하는 것은 곤란하며 50, 100년 후를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경부고속도로는 창의성과 기업가 정신의 결정체였다. 가장 힘든 구간은 충북 옥천의 당재터널. 500여m를 뚫는 데 13차례 낙반사고가 났고 7명이 숨졌다. 지층이 암반이 아니라 절암토사였기 때문이다. 그때 나온 아이디어가 조강시멘트(High Strength Cement). 일반시멘트보다 20배 빨리 굳고 2~3배 강한 고급제품이다. 정주영 당시 현대건설 사장은 단양 시멘트 공장 라인을 일주일 만에 개조해 조강시멘트를 만들었다. 공영호 전 현대건설 토목담당 부사장(당시 포장과장)은 “정 사장이 ‘주판을 엎어라(손해를 감수하라는 의미)’고 지시해 공기를 맞췄다”고 말했다.
경부고속도로는 미래의 네트워크로 도약을 시작했다. 한국국토연구원 이백진 연구원은 “아시안 하이웨이는 아시아와 유럽 32개국으로 연결돼 세계로 뻗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연세대 김호기(사회학과) 교수는 “경부고속도로가 70년대 오프라인 고속도로였다면 21세기에는 유·무선 초고속 인프라, 즉 온라인 고속도로를 건설해야 한다”고 말했다.
삼성경제연구소 김득갑 글로벌연구실장은 자유무역협정(FTA)이 ‘미래의 경부고속도로’이며 이의 확대에 전력하자고 제안한다. 김 실장은 “FTA는 세계를 거미줄처럼 연결하고 소통하는 인프라”라며 “경부고속도로를 뚫어 놓고 자동차가 늘어났듯이 FTA에 선제적으로 투자하면 무역·서비스·문화 등의 교류가 증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경부고속도로가 화석연료를 이용한 성장이었다면 앞으로는 녹색성장의 인프라로 변모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한국기후변화학회 김인환 회장은 “정부가 풍력·태양열 등의 신재생에너지 사용 비율을 2030년까지 11%(지금은 2.4%)로 높이기로 목표를 잡았지만 이를 달성하기 위한 고속도로(인프라)가 없다”며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제품 가격을 올리고 국민들이 고통을 분담하며 산업구조를 재편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성식·장정훈 기자
“박 대통령, 집무실에 지도 붙여놓고 노선 그려”
경부고속도로 건설 주역들 모임 ‘77회’ 방동식 회장

박정희 대통령이 1967년 경부고속도로 예정지를 순찰하고 있다. [도로공사 제공] |
경부고속도로 건설 주역들의 모임인 ‘77회’ 회장 방동식(79) 전 도로공사 기술본부장은 “경부고속도로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나라에서 국민이 하면 된다는 의지 하나만 갖고 이뤄 낸 자랑스러운 역사”라고 말했다. ‘77회’는 건설 과정에서 희생된 77명을 기리고 개통일(7월 7일)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모임이다.
- 당시 어떤 일을 했나.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1967년 12월 말 나를 포함한 공병대 장교와 건설부 공무원 등 다섯 명을 청와대로 불러 파견단을 꾸렸다. 박 대통령은 집무실에 75만 분의 1 지도를 붙여 놓고 연필로 노선을 그리고 색칠을 했다. 현지 답사를 해서 공사비를 엄격히 책정하는 게 주 임무였다. 군대에서 산길을 몇 번 깐 경험으로 공사비를 책정하라니 말이 되나. 그만큼 대통령 의지가 강했다.”
- 건설 당시 사회적 상황과 관심은.
“박 대통령은 ‘공산당을 이기려면 경제 건설밖에 없다. 그러려면 경제의 핏줄인 고속도로가 필요하다’며 독려했다. 국민이 동참해 논 밭을 내놓고 도시 건물을 허물었다. 야당 등 일부에서 반대했던 것도 사실이다.”
-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의미는.
“‘하면 된다’는 자신감과 불굴의 의지가 있어 가능했다. 또 대통령의 강력한 리더십이 있었기에 모든 국민이 똘똘 뭉칠 수 있었다. 나라의 동맥을 만들었다는 자부심을 갖고 산다. ”
장정훈 기자
즐겁고 행복한 나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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