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신화다 김운회님 압축본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80922153239&Section= (((김운회)))
들어가는 말 : 역사가 된 신화
지난 2000년 『The Jesus Mysteries』라는 책이 출판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2002년 동아일보사에서 『예수는 신화다』로 번역하여 출판했습니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이 책은 절판되고 말았습니다.
이 책은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뿌리를 흔드는 것이었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예수는 실존인물이 아니고 그 이전에 살았던 성인급 인물들의 '거룩하고 고상한 행적'들을 총동원하여 짜집기하여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하면서 그 증거를 일일이 들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인들은 유럽세계의 지배자였고 자기들의 모든 활동에 대해서 꼼꼼하게 기록을 남겼는데도 인간 예수에 대한 기록은 로마 문헌 어디에도 없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라는 이름은 당시에 지나치게 흔한 이름이었으며 유태인 역사가들의 저술 속에서도 역사적 예수에 대한 증거가 전혀 없다고 합니다.1) (1) Timothy Freke『The Jesus Mysteries(예수는 신화다)』(동아일보사 : 2002) 236~246쪽. 단 한 사람의 저서(요세푸스)에 예수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이것 조차도 당대의 기록이 아니라고 한다. 그 동안의 연구에 따르면 이 기록은 후대에 추가된 것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서 예수(Jesus Christ)의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한 분의 메시아(Messiah)의 전기(傳記)가 아니라 이교도(Pagan)의 유서깊은 이야기들을 토대로 한 하나의 만들어진 '신화'라는 것입니다.2)
(2) Timothy Freke 앞의 책, 21쪽. 그리고 이교도(Pagan)란 원래 시골의 거주자를 경멸해서 부르는 말이었다.
그리스도교인들이 이 말을 사용한 것은 고대인들의 영적 신앙이 원시적인 시골의 미신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아냥거리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같은 책, 43쪽).
예를 들면, 오시리스-디오니소스는 ☞12월 25일 동정녀에서 태어났으며 ☞결혼식 때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려내었으며, ☞영성체 의식으로써 자신의 몸과 피를 나누어주었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으며 ☞죽은 후 사흘만에 부활했다고 합니다.
어째 예수님의 일생과 완전히 동일한 듯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는 이교도들의 미스테리아가 유태인들에게 수용될 수 있도록 유태인 메시아로 변장한 오시리스-디오니소스라는 것입니다.3) (3) Timothy Freke, 앞의 책, 12쪽. 357쪽.
그래서 철학자인 켈수스(Publius Juventius Celsus, 67?~130?)는 예수의 이야기가 실제로는 이교도 신화의 저급한 모방일 뿐이며 그리스도교인들이 그것을 새로운 계시인양 유포시키고 있다고 비난합니다.

켈수스는 "그리스도교의 수많은 아이디어는 고대 그리스인들에 의해 더 잘 그리고 더 오래전부터 표현되어왔다. 그러한 표현들의 이면에는 과거부터 이미 존재해온 고대의 교리가 또아리를 틀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물고기의 상징은 피타고라스 (Pythagoras, BC582?~BC497?) 학파의 상징이었던 바로 그 물고기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가 죽은 지 나흘된 나자로(Lazarus)를 살려낸 것처럼, 엠페도클레스는 죽은 지 30일이 된 여자를 살려내었다고 합니다.4) (4) Timothy Freke, 앞의 책, 81쪽. 83쪽. 119쪽. 피타고라스는 희고 헐렁한 의상을 걸친 '방랑의 현자(賢者)'였으며 사제이자 과학자였다. 피타고라스는 고대 이집트 신전에서 22년을 보내고 고대 이집트 미스테리아의 입문자가 되었다. 피타고라스는 그리스로 돌아와 자기가 배운 지혜를 가르쳤고 기적을 행하여 죽은 자를 일으켜 세우기도 했다 (같은 책, 55쪽). 뿐만 아니라 피타고라스의 전기를 슨 이암블리코스(AD 250~325)에 따르면, 피타고라스는 '사도들이 쉽게 건너갈 수 있도록 강과 바다의 물결을 잔잔케한 기적도 많았다'고 한다 (같은 책, 80쪽). 예수의 12사도 역시 이스라엘의 12부족을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황도(태양이 지나는 길)의 상징적인 언급이며 피타고라스 학파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라고 한다 (같은 책, 85쪽). (아래에 엠페도클레스 자료 있습니다.)
 ▲엠페도클레스(Empedokles B.C 490 - 430)
고대 그리스에서 이런 신인(神人)을 믿기 시작한 것은 BC 6세기부터였다고 하는데 이런 류의 신앙을 그리스어로 미스테리아(Mysteria)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런 류의 이야기들은 헤로도토스나 플라톤의 저술에는 도처에 나옵니다. 미스테리아에 대한 연구는 조지프 캠벨(1904~1987) 등의 연구에 의해 심도있게 밝혀집니다.5) (5) Timothy Freke, 앞의 책, 62쪽.
▲조지프 캠벨 (Joseph Campbell 1904-1987)
미스테리아의 핵심에는 죽어서 부활한 신인(神人)이 있고, 이 신인은 고대 이집트시대에는 오시리스(우시르), 고대그리스에는 디오니소스(우리에게는 술주정뱅이로 알려져 있죠), 소아시아에서는 아티스, 시리아에서는 아도니스, 이탈리아에서는 바쿠스, 페르시아에서는 미트라스로 불렸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교에 따르면, 예수는 3월 23일 죽었고, 25일 부활했다고 하는데 아티스의 죽음과 부활의 날도 바로 이날이라고 합니다.

▲Plutarchus(영:Plutarch) 예수는 사흘만에 부활하는데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오시리스도 역시 사흘만에 부활했다고 합니다.6) (6) Timothy Freke, 앞의 책, 24쪽. 107쪽.
그러면 누가 왜, 이 같은 일을 하였을까요? 그것은 바로 아우구스투스의 제국과 같은 로마를 꿈꾸었던 콘스탄티누스 황제(재위 : AD 306~337)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강력한 통치를 위해 그리고 자신의 제국이 영원무궁할 수 있도록 하기위해 그리스도교를 이용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책에 따르면, 성서(Bible)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철저히 국가적으로 기획되고 만들어진 국가 이데올로기 홍보용 책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소비에트러시아의 '스탈린주의(Stalinism)'나 북조선 인민공화국의 '주체사상'처럼<콘스탄티누스 주체사상>말입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주장인 하나의 제국, 하나의 황제를 확고히 하기 위해 하나의 신과 하나의 종교가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재건자로 성인처럼 알려져 있는 콘스탄티누스는 니케아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후 아내를 목졸라 죽였고 아들을 살해했습니다. 그는 임종할 때까지 일부러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잔혹한 행위를 계속하다가 최후의 순간에 세례를 받음으로써 천국의 자리를 보장받겠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했다고 하는군요.

▲ [그림 ②] 콘스탄티누스 황제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80922153239&Section=
『The Jesus Mysteries』에 따르면, 이 일을 주도한 사람은 이른바 교회박사인 유세비우스(AD 263~339)였고,

그는 이후 자기가 주도한 성서에 대해 조금이라도 어긋나거나 다른 주장을 펴는 모든 사람들을 제거하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기독교나 불교, 이슬람교 등과 같은 종교와도 다르지 않는 그리이스의 신앙체계를 거의 연예인 가십(gossip) 거리로 전락시켜버렸다는 것입니다 [사실, 올림포스의 남신(男神)과 여신(女神)들이 변덕스럽고 파벌적이며 온갖 엽색행각을 벌리는 것에 우리는 너무 익숙해있습니다].
유세비우스 덕분으로 예수의 기적은 신성함의 표시인 반면, 이교도의 기적은 악마의 활동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치 신데렐라 이야기는 신성하고 춘향전은 악마...?)
켈수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 맙소사, 똑같은 활동을 했는데도 어떤 사람은 신이고
그의 라이벌은 그저 '마법사'일 뿐이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논법인가?"7) (7) Timothy Freke, 앞의 책, 84~85쪽.
마태, 마가, 누가 등의 복음서도 원래부터 특정한 저자가 있었던 것이 아니며, 문제가 되는 내용들을 끊임없이 수정·보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무작위로 마가복음 10~11장을 뽑아 비교해보니 48 군데나 서로 달랐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역시 후대에 씌어진 것으로,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유창한 그리스어의 축어적인 장문의 설교는 유태인 목수의 아들이 구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8)
(8) Timothy Freke, 앞의 책, 257~259쪽.
그러면서 『The Jesus Mysteries』는 초기 기독교의 최고 권위자 가운데 한 사람의 말을 의미있게 인용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쓰는 자는 승리자들이다. 그들은 제멋대로 쓴다. 그러니 기독교의 기원에 대한 전통적 설명에서 자기들은 정통이고 적들은 '이단'이라고 정의했다고 해서 놀랄 것은 없다. 나아가 그들은 자신들의 승리가 역사적으로 불가피했다고 ― 종교적 용어로 말해서 '성령의 인도'를 받은 것이었다고 ― 선전했다.
그들은 자기 만족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9) (9) Timothy Freke, 앞의 책, 37쪽.
참고
엠페도클레스(Empedokles B.C 490 - 430)
에트나 산상에서 영원으로 뛰어든 원소론자

엠페도클레스는 그리스의 시실리 아크라가스에서 기원전 490년부터 430년까지 살았다고 전해진다.
정치가, 종교인으로서 활동하였을 뿐만 아니라 의술과 변론에도 매우 능통하였다고 한다.
그의 철학이란 변화와 운동에 대한 피타고라스 학파와 엘레아 학파의 견해 모두 얼마간의 장점을 지닌 것으로 파악하여
양자의 장점을 비난하거나 그대로 취하지 않고 양자의 관점을 결합시키는 것이었는데,
이는 자신에 앞서 논의된 철학적 공헌을 종합하려는 최초의 시도가 되었다.
엠페도클레스는 그의 철학을 시가(詩歌)의 형식으로 서술하였으나 그 중 몇 편만이 겨우 남아 전해지고 있다.
그는 독창적인 새로운 철학을 내세우지는 못하였으나, 변화가 존재한다는 주장과 실재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을 발견하였다.
그에게 있어 존재란 창조되지 않으며 파괴될 수 없다는, 따라서 존재는 단순히 존재하고 있을 뿐이라는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에 동의했다.
그에 의하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어떤 것이 발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존재가 완전히 소멸된다는 것도 있을 수 없으며 생각될 수 없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그것을 언급하는 모든 경우에 그것은 항상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엘레아 학파와는 달리, 그는 존재가 단순히 유일자로 구성된다는 데 동의하지 않았다.
유일자의 개념을 받아들이게 되면, 운동의 실재를 부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데,
이것은 엠페도클레스에 있어 매우 명백하면서도 동시에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유일자의 개념을 거부했고,
대신에 비록 존재가 창조되지도 파괴되지도 않는다는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은 옳지만,
그 존재는 하나가 아니라 다수라고 주장하였다.
즉 그에게 변하지도 않고 영원한 것은 유일(唯一 : the one)이 아니라 다자(多者 : the many)이었던 것이다.
엠페도클레스는 우리가 지각하고 경험하는 대상들이 실제로 생성되거나 소멸되기도 하지만 이 변화와 운동은
대상들이 다양한 물질적인 입자들로 구성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려 했다.
그러므로 헤라클레이토스의 주장처럼 대상들은 변화하지만 그것들을 구성하는 입자들은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처럼 변화하지 않는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다양한 대상들이 아니라 그것들을 구성하는 다양한 입자들이며,
그 입자들은 영원히 불변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 입자들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엠페도클레스는 대상들을 구성하는 입자들을 가리켜 영원성을 지닌 물질적인 원소들이라고 했다.
그는 밀레토스 학파의 탈레스와 아낙시메네스의 철학을 발전시켜 만물을 구성하는 재료가 단일한 원소가 아니라
물과 공기와 같은 단일한 요소로 구성된 몇 가지 형태의 기본적인 질료가 존재함에 틀림없다고 말하면서
물과 공기 외 흙과 불을 추가함으로써 존재의 생성 및 변화를 설명하려 하였다.
존재하는 것은 "단지 하나의 혼합과 혼합되어진 것들간의 교환뿐"이라 생각했고,
존재를 구성하는 기본 입자인 물, 불, 공기, 흙 이 네 입자는 변화하지 않지만,
대상들을 형성하기 위해 혼합되며, 우리가 상식적인 경험에서 지각하는 변화를 만들어내고 조절한다는 것이다.
엠페도클레스는 영원한 물질적 입자들의 다양한 형태의 상호 결합을 통해 대상의 변화를 위한 근거를 설명하는 것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그 변화의 과정에 생명을 불어넣는 구체적인 능력이나 힘들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밀레토스 학파는 자연의 재료가 단순히 다양한 대상들로 변형된다는 사실을 가정하였었다.
단지 아낙시메네스만이 공기는 농축과 희박의 과정을 통해 다양한 사물로 된다는 이론을 가지고 변화의 과정을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분석하려 했을 따름이었다.
엠페도클레스는 그들과는 달리 자연에는 어떤 능력이나 힘이 존재한다고 가정하였는데,
그는 이 힘들을 사랑과 증오, 혹은 조화와 부조화라고 불렀다.
그에 의하면 이 물질적인 힘들은 네 가지 원소의 결합과 분리의 원인이 된다.
사랑의 힘은 원소들이 서로를 끌어당겨 어떤 구체적 형태나 생명을 조립할 수 있게 해준다.
반면에 증오의 힘은 사물의 해체를 촉진하거나 분열과 격리를 야기한다.
엠페도클레스는 이 성능을 그의 시적인 문체로 이렇게 표현하였다.
"이 과정은 인간의 사지(四肢)를 통해 명백히 나타난다.
육신에 달린 사지는 사랑을 통해 하나로 뭉쳐지며, 가장 훌륭한 삶을 표현한다.
그러나 증오에 굴복할 때, 그것들은 삶의 파괴자들에 의해 따로따로 방황한다.
이와 유사하게 초목들은 숲에서, 물고기는 그들의 물 속의 집에서,
야수들은 산의 동굴에서, 날아다니는 새들은 공중에서 방황한다."
개개의 변화의 출발점에서 이 네 원소들이 충실히 혼합되며 지배적인 사랑의 원리에 의해 조화가 유지되다가 동시에
존속하는 증오의 힘은 그들 가까이 숨어 기다리다가 그것이 사물에 침투해 들어가면 입자들은 부조화의 상태로 변하여,
공기 입자들, 흙 입자들, 불 입자들, 물 입자들이 같은 종류로만 구성된 네 개의 서로 분리된 집단을 형성할 때까지
계속 분리의 과정을 밟는다. 그러면 다시 사랑의 힘이 요소들을 서로 끌어당기게 하고 그 부조화는 조화로운 상태에로
이끌려 서로가 서로에게 결합을 이루게 하는 새로운 순환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언제나 끊임없이 계속된다는 것이 엠페도클레스의 4원소론의 기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는 최후에 신(神)의 계열에 오르려는 염원으로 에트나 화산의 분화구에 뛰어들어 일생을 마감하였다고 전해지는데,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의 정신적 단편을 엿보게 하는 일화가 되었으며,
그의 철학을 기념하는 추억을 조성하였다.
불과 물과 공기와 흙으로 구성된 그의 육체적 생애의 흔적을..
철학과 삶 http://sang1475.com.ne.kr/philo/empedokles.htm
조지프 캠벨 (Joseph Campbell 1904-1987)

조지프 캠벨 (Joseph Campbell, 작가프로필 보기) - 1904년에 뉴욕 주 화이트플레인스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로마가톨릭 신앙에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아메리카 인디언 문화에 큰 관심을 갖고 관련서를 탐독했다.
다트머스 대학에서 생물학과 수학을 전공했지만,
나중에 컬럼비아 대학으로 옮겨서 중세 영문학으로 학사와 석사학위를 취득한다.
1927년 캠벨은 컬럼비아 대학에서 제공하는 장학금을 받고 유럽으로 건너가,
이후 2년 동안 파리 대학과 뮌헨 대학에서 공부한다.
1929년에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영문학 대신 인도 철학과 미술 쪽으로 공부를 계속하려 하지만,
대학 측의 반대로 결국 박사학위를 취득하지 못하고 학교를 떠난다.
때마침 대공황으로 인해 경제가 불황을 맞이한 상황에서,
캠벨은 이후 5년 가까이 칩거하며 독서와 사색, 그리고 습작에 몰두한다.
1934년에 캠벨은 미국의 명문 여자대학인 새러 로렌스 칼리지에 문학 담당 교수로 부임하고,
1972년 퇴직할 때까지 38년 동안 재직한다.
그리고 그 와중인 1938년에는 제자였던 현대무용가 진 에드먼과 결혼한다.
캠벨은 어려서부터의 관심사였던 인류학과 민속학을 바탕으로,
비교종교학과 분석심리학 등의 이론을 이용하여 신화와 종교 연구를 지속해 명성을 얻는다.
그의 대표작인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1949)은 세계 각지의 신화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영웅의 여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주목을 받았다.
이후 그는 주저인 4부작 『신의 가면』(1959-1968)을 비롯하여
『신화와 함께 하는 삶』(1972),
『신화의 이미지』(1974), 그리고 최후의 역작인 총 2부 5권의 『세계신화지도』(1983-1989) 등을 펴냈다.
하지만 조지프 캠벨이라는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결정적인 계기는
미국의 PBS 방송국에서 제작한 대담 프로그램 ‘신화의 힘’(1988)이었다.
그의 생애 막바지에 제작되어 결국 사후에 방영된 이 프로그램에서,
캠벨은 저명한 방송인 빌 모이어스와의 대담을 통해 신화가 현대에 지니는 의미에 관해 설명했다.
이 프로그램을 토대로 한 대담집은 오늘날까지도 신화에 관한 가장 훌륭한 개론서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조지프 캠벨은 1987년 10월 30일,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사후에 아내인 진은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조지프 캠벨 재단을 설립하고,
캠벨의 유고와 대담, 그리고 강의록 등을 정리, 출간하고 있다. http://foreign.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160237080X
플루타르코스 [Plutarchos]
개요
(라)Plutarchus (영)Plutarch. 46경 그리스 보이오티아 카이로네이아~119 이후.
그리스의 작가, 전기 작가.
16~19세기 유럽의 수필· 전기· 역사 저술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약 227편에 달하는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와 로마의 군인·입법자·웅변가·정치가들의 고상한
행동과 성격들을 상술한 〈영웅전 Bioi parallloi〉과 윤리적·종교적·물리적·정치적·문학적 주제들에 대한
60편 이상의 수필을 모아 엮은 〈모랄리아 Moralia〉(또는 〈에티카 Ethica〉)이다.
생애
플루타르코스는 역시 전기 작가이자 철학자였던 아리스토불로스의 아들이었다.
66~67년에 아테네에서 철학자 암모니우스 문하에서 수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그후 공적인 임무로 여러 차례 로마에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철학을 강의하고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으며,
트라야누스 황제나 하드리아누스 황제와도 교분을 나누었다.
〈수다 사전 Suda lexicon〉(AD 1000년경의 그리스어 사전)에 의하면 트라야누스 황제는 그에게 전집정관이라는
높은 직위를 주었다고 한다. 거기까지는 사실인지 모르지만,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그를 그리스의 총독으로 임명했다는
4세기의 교회사가 유세비우스의 기록은 아마 사실이 아닐 것이다.
델포이의 한 명문(銘文)은 그가 로마 시민권을 가졌었다는 것을 알려주는데,
그의 성(姓) 메스트리우스는 로마의 집정관인 친구 루키우스 메스트리우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 분명하다.
그는 그리스 중심지, 스파르타, 코린트, 파트라이(파트라스), 사르디스, 알렉산드리아 등지를 여행했지만 주로 카이로네아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그는 행정장관직을 위시한 여러 공직을 지냈고 철학, 특히 윤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교과과정을 지닌
학교도 관리했다. 아테네에 있는 아카데미(그는 아테네 시민권도 지녔음) 및 델포이 신탁소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95년경부터 죽을 때까지 델포이에서 성직자 생활을 했다. 그는 신탁을 다시금 성행시키려던 트라야누스로부터 관심과 지지를
얻었던 것 같다. 그의 가족의 규모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들의 딸이 갓난아기 때 죽은 것에 대해 아내 티목세나를
위로하기 위해 쓴 글인 〈위로 Consolatio〉에서 그는 4명의 아들에 대해 말했다. 이중에서 적어도 2명은 살아남았고
다른 아이들도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방대한 문학작품을 남겼다. 그의 아들이 만든 것으로 추측되는
그의 작품 목록(람프리아스 목록)에 실린 227개의 제목이 모두 믿을 만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반대로
그가 쓴 모든 것이 그 목록에 언급되었다고도 할 수 없다. 집필의 순서도 알 수가 없다.
〈영웅전〉
플루타르코스의 인기는 주로 〈영웅전〉에 의거한다.
〈영웅전〉에 실린 〈데모스테네스〉·〈테세우스〉·〈디온〉의 생애에 나오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친구 소시우스 세네키오에게
바쳐진 이 책은 그리스인과 로마인 사이의 상호존중을 북돋우기 위해 씌어진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고상한 업적과 성격을 보여줌으로써 모범이 될 만한 행동규범을 제시하려는 목적도 지니고 있었다.
첫번째 쌍인 〈에파미논다스와 스키피오〉와 아마도 그 앞에 실렸을 서론과 공식적 헌정사는 없어진 것 같다.
그러나 플루타르코스의 계획은 가능한 한 성격과 경력이 유사한 그리스와 로마의 영웅들을 쌍으로 소개하고
그 각각을 공식적으로 비교하는 전기집을 연속적으로 펴내는 것이었다.
작품 내의 단서들로 미루어보아 〈영웅전〉은 그의 나이가 꽤 들었을 때 쓴 것으로 보이지만,
구체적인 집필 순서는 부분적으로밖에 알 수 없다.
현재의 판본들이 따르고 있는 순서는 대부분 각 쌍의 처음에 나오는 그리스 인물들의 연대순에 따라 훗날 재배열된 것이다.
모두 다해서 22쌍(1쌍은 〈아기스·클레오메네스와 그라쿠스 형제들〉처럼 2명이 1조를 이룸)과
아르타크세르크세스·아라투스·갈바·오토 등 쌍을 이루지 않는 4명의 전기가 남아 있다.
〈영웅전〉에는 대단한 학식과 연구가 나타나 있다.
많은 출전들이 인용되어 있고 이 모든 자료를 자신이 직접 찾지는 않았겠지만 그의 조사는 매우 광범위했으며 이것을 수집하는
데만도 여러 해가 걸렸을 것이다. 로마인에 관한 〈영웅전〉에서 그는 라틴어를 잘 몰라서 제약을 받았다.
그는 라틴어를 나중에야 배웠는데, 이는 〈데모스테네스〉에서 설명되어 있는 것처럼 로마와 이탈리아에 머무르는 동안 모든
시간을 정치적인 사업과 철학을 가르치는 일에 바쳤기 때문이다.
〈영웅전〉의 형식은 이전의 전기나 헬레니즘 역사서와는 다른 새로운 업적으로 평가되었다.
일반적인 전개는 출생과 젊은시절, 성격, 업적, 그리고 죽을 때의 상황 등으로 이루어지며, 윤리적 고찰들이 자주 끼어든다.
그러나 그 세부적인 면에 있어서는 주제와 사용 가능한 출전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띠게 되는데,
그는 역사가뿐 아니라 일화수집가, 회고록 작가 등이 쓴 여러 가지 출전을 사용하고 있다.
그는 역사를 쓴다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그에게 있어 역사와 전기는 엄연히 구별되는 것이었다.
그의 목적은 독자들을 즐겁게 하고 교화하는 데 있었으며, 자신의 개인적 입장을 숨기지 않았다.
이 점은 특히 스파르타 왕과 장군들의 언행에 대한 애정어린 찬탄에서 잘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그가 BC 5세기의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를 부당하리만큼 신랄하게 공격한 것은 헤로도토스가
아테네를 실제 이상으로 높이 평가하고 보이오티아를 실제 이하로 낮게 평가했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모랄리아〉
윤리·종교·자연과학·정치·문학에 대한 주제를 다룬 현존하는 그의 작품들은 통칭 〈모랄리아〉 또는 〈에티카〉로
알려져 있는데 60편이 넘는 이 수필들은 주로 대화나 탄핵문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대화들은 틀에 박힌 대화들을 모아놓은
것으로부터 플루타르코스의 가족 모임에서 가족 구성원들간의 격식을 차리지 않은 대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대화들의 날짜와 극적인 상황들은 거의 밝혀져 있지 않다.
탄핵문들은 때로 BC 3세기의 풍자가 메니포스의 농담반진담반의 작품들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단순하고도 원기왕성하다. 이러한 글들은 그리스의 시, 특히 에우리피데스 및 다른 극작가들의 운문을 자주
인용함으로써 그 문학적 가치를 더하고 있다.
정치적 쟁점들을 다룬 논문들은 특히 흥미롭다.
〈정치적 교훈〉은 당시 그리스의 정치적 생활을 자세히 보여준다.
〈사람은 늙어서도 정치에 종사해야 하는 것인가?〉에서는 친구인 에우파네스에게 아테네의 공직 수행을 계속하라고 했다.
〈배우지 못한 지도자에게〉라는 짧은 글과 〈철학자는 특히 왕자들과 대화해야만 한다〉라는 단편적인 글 중에는
스토아 철학사상이 나타나 있다. 종교사와 고물수집 문제에 대한 그의 관심은 일군의 인상적인 수필들에 나타나 있다
(→ 그리스 종교). 초기의 〈소크라테스의 다이몬〉,
델포이와 관련된 나중의 세 작품, 즉 신탁의 쇠퇴가 인구의 쇠퇴와 연관되어 있다는
〈신탁의 실패에 대해〉와 사원 입구에 새겨진 EI라는 단어를 해석하는 〈델포이의 E에 대해〉,
신탁에 대한 믿음을 재정립하려는 〈피티아의 응답에 대해〉 등이 있다.
이것들과 동시에 나온 〈이시스와 오시리스에 대해〉는 신비적 어조를 띠고 있으며, 〈유쾌한 질문〉(9권)과
〈그리스와 로마의 질문〉은 오래된 전승을 널리 모아놓은 것이다.
더이상 진짜 그의 작품이 아니라고 여겨지는 작품 중 중요한 것으로는 아폴로니우스에게 그의 아들을 위해 쓴
〈위로 Consolatio〉와 〈10명의 웅변가의 생애〉·〈운명에 대하여〉·〈왕과 지도자의 금언〉·〈스파르타인의 금언〉·
〈알렉산드리아의 속담〉 등이 있다.
평가
플루타르코스의 영원한 매력과 인기는 부분적으로는 불안한 해결은 피하면서 특정 인간사를 다루었기 때문이다.
그는 많은 일화를 인용하며 피상적으로 쉽게 글을 썼다.
그의 문체는 그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던 동시대 그리스어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아티카 풍이 지배적이었다.
수사학 이론에 따라 단어 사이의 모음충돌을 피했으며, 조심스러운 산문의 리듬을 사용했다.
그의 글은 명백하지만 다소 산만하다.
그의 철학은 플라톤주의를 중심으로 하여 스토아 학파, 피타고라스 학파, 소요학파(그러나 에피쿠로스 학파는 아니었음)를
고루 차용한 절충주의였다. 비록 말년에는 신비주의적 측면으로 기울기도 했지만 그의 주된 관심은 윤리학이었다.
그는 디오니소스 숭배의 비의(秘義)에 입문했으며, 플라톤주의자로서나 비의 입문자로서나 영혼의 불멸을 믿었다.
그는 또한 그리스 문명의 우수성과 공적, 그리고 로마 황실의 신성함을 믿었다.
개인적으로 그는 작은 보이오티아 마을의 시민으로서 조용하고 인간적인 삶을 좋아했고,
그의 저작과 가르침은 1세기 그리스의 암담한 지방 생활에 빛을 던져주는 것이었다.
명성과 영향
플루타르코스가 후대에 끼친 영향은 매우 깊다.
그는 자신이 살던 시대와 고대 후기에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그의 〈영웅전〉은 수사학자 아리스티데스와 역사학자 아리아누스에게 영감을 주어 이와 비슷한 비교 방식을 쓰게 했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마르코만니와의 전쟁에서도 그 복사본을 몸에 지니고 전쟁터로 나갔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의 명성은 서부의 라틴어권에서는 점점 사라져갔지만,
동부의 그리스어권에서는 철학자와 학자들에게 계속 영향을 끼쳤으며 그의 작품들은 교과서로 쓰였다.
프로클루스, 포르피리오스, 율리아누스 황제 등은 모두 그의 글을 인용했으며,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성 바실리우스 등 교회의 교부들도 출전을 밝히지 않은 채 그를 모방했다.
그의 작품들은 교육받은 모든 비잔틴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으며,
그들은 이교적인 과거와 그리스도교적인 현재 사이에 아무 장벽도 두지 않았다.
그들을 감동시킨 것은 주로 〈모랄리아〉였지만, 9세기의 비잔틴의 학자·대주교인
포티우스는 친구들과 함께 〈영웅전〉을 읽었다.
그의 작품들은 15세기의 고전 연구의 재부흥에 힘입어 비잔틴 학자들에 의해 이탈리아에 소개되었고,
이탈리아 인본주의자들은 1509년 이전에 그것들을 이탈리아어와 라틴어로 번역했다.
1509년에는 그의 작품들 중 그리스 원어로 인쇄된 최초의 작품인 〈모랄리아〉가 베네치아의 유명한 알디네출판사에서 나왔다.
그리스어로 된 〈영웅전〉의 최초 인쇄본은 1517년 피렌체에서, 1519년에는 알디네출판사에서 찍었다.
〈영웅전〉은 프랑스의 주교이자 고전학자인 자크 아미요가 1559년 프랑스어로 번역했다.
그는 〈모랄리아〉도 번역했다. 1572년 프랑스 인문주의자에 의해 만들어진
그리스어 텍스트의 최초 완결판은 텍스트의 개선에 큰 진보를 가져왔었다.
라블레가 〈영웅전〉과 〈모랄리아〉를 많이 인용한 점으로 보아 그가 플루타르코스에 정통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몽테뉴는 아미요가 번역한 플루타르코스의 작품을 읽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
몽테뉴의 〈에세 Les Essais〉(1580~88)의 문체는 〈모랄리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영웅전〉에서는 설명적인 일화와 주석으로 인물을 나타내는 플루타르코스의 방법을 빌려 자기 탐구에 적용해보기도 했다.
또한 〈에세〉는 플루타르코스가 인물 표현을 통해 또는 명백한 말로 표현한 고대의 '고귀한 덕과 영웅적으로
도덕적인 인간'이라는 이상을 널리 알렸으며, 이 이상은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적 이상이 되었다 (→ 르네상스인).
1579년 토머스 노스 경은 아미요의 번역을 다시 영어로 번역했다.
그의 힘차고 경구적인 문체는 〈그리스·로마 영웅전 Lives of the Noble Grecians and Romans〉을 영국의 고전으로
만들었고 그것은 1세기 이상 동안 표준 번역본으로 남아 있었다. 더 정확한 번역본이 나왔을 때도 그것은 엘리자베스
산문 문체의 보기로 계속해서 읽혀졌다. 노스의 플루타르코스 번역본은 로마를 배경으로 하는 셰익스피어 극들의
모체가 되었으며 셰익스피어의 '비극적 영웅'이라는 개념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노스 번역본의 문학적 가치는 셰익스피어가 약간의 손질을 가했을 뿐 그의 전단락들을 그대로 옮겨 쓴 사실로도 알 수 있다.
1603년에는 그리스어에서 영어로 번역된 최초의 〈모랄리아〉 완본이 나왔다.
그 영향은 1612년에 나온 프랜시스 베이컨의 〈수필 Essays〉에서도 보이는데,
여기에는 분명 플루타르코스에서 나왔을 공공도덕과 개인적 미덕에 관한 충고들이 들어 있다.
베이컨은 이야기꾼이나 인물 묘사꾼으로서의 플루타르코스보다는 도덕주의자로서의 플루타르코스에게 더 매료되었지만,
르네상스 정신은 그 둘의 혼합에서 그의 특별한 매력을 발견했다.
역사적 한담과 일화, 도덕적 이야기 등에 대한 그의 취향과 인물들을 선악의 유형들로 묘사하는 방식(도덕극의 방식으로),
그리고 위대한 인물들의 몰락을 초래하는 운명의 반전에 대한 강조 등은 모두가 시대 분위기에 적합한 것이었고,
고대인들의 '합리적' 윤리 철학에 관한 르네상스적 개념도 그로부터 기인한 것이었다.
16, 17세기의 역사학자와 전기작가들은 윤리적 원리에 따라 인물을 다루는 플루타르코스의 방식을 따랐다.
17세기 영국의 전기작가 아이작 월턴은 플루타르코스에 대해 잘 알았고,
그의 〈영웅전〉(1670, 1675년 수집됨)은 인물들의 성격에 유약함보다 강인함을 깃들게 함으로서 플루타르코스를 모방했다.
17~18세기에도 플루타르코스의 작품은 계속 읽혀졌다.
영국의 시인·극작가인 존 드라이든은 1683~86년에 처음 간행된 〈영웅전〉의 새 번역판을 냈고 1710, 1713, 1718년에는
요약본이 나왔다. 〈모랄리아〉는 1683~90년에 다시 번역되었고 자주 출판되었다. 프랑스에서는 19세기초까지도 여전히
아미요의 번역판이 재출판되었고, 이것이 프랑스의 고전적 비극의 발전에 끼친 영향은 노스가 셰익스피어에게 미친 영향에
맞먹는 것이었다. 폭군을 전복시킨 영웅들에 대한 플루타르코스의 찬사와 도덕적 가치에 대한 존경은 프랑스 혁명의
지도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혁명적 지도자인 장 폴 마라를 암살한 샤를로트 코르데는 거사 전날 플루타르코스의 작품을 읽었다고 한다.
독일의 고전적 시인들, 특히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프리드리히 폰 실러, 장 폴(요한 파울 리히터)은
그의 작품에 영향을 받았고 베토벤과 니체도 역시 그의 작품을 읽었다.
19세기에는 그의 직접적인 영향은 줄어들기 시작했는데, 이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반작용의 결과였고,
낭만주의 운동의 태동이 새로운 가치를 소개하고 통제보다는 자유로운 형식의 극을 강조했기 때문이며,
또 역사적 정확성에 대한 학자들의 보다 비판적인 태도로 인해 그가 사실 제시에 있어 취한 편파적 태도에
관심이 쏠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존경받았고,
특히 미국의 시인·철학자·수필가인 랠프 월도 에머슨의 찬사를 받았다.
20세기에 들어서는 그의 직접적인 영향은 별로 크지 않지만 일반 대중의 그리스·로마의 역사에 대한 지식은
여전히 그의 책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F. W. Walbank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