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든 남자
박 은 주
바래다주는 그 남자의 발걸음이 집 앞 공터에서 멎었다. 깜깜한 밤이었지만 녹지 않고 쌓인 눈이 희끗희끗 보였다. 그가 가방에서 붉은 장미 한 송이를 꺼내더니 내 손에 꼭 쥐여주었다. 동시에 ‘처음 만난 그 순간이 좋았지 / 처음 느낀 그 눈길이 좋았지.’로 시작하는 노래가 잇달았다. 동짓달 밤, 찬 공기를 가르고 하얀 입김과 함께 갈라지고 떨리는 목소리로 노래는 퍼져나갔다. 그 세레나데 때문이었을까, 그 사람이 얼마 전 사 준 구두를 신었어도 움직이지 않던 걸음이 그에게로 한발 다가섰다.
결혼한 첫해 시월의 마지막 날, 아빠를 똑 닮아 쌍꺼풀이 또렷한 예쁜 딸을 낳았다. 병원에서 퇴원 후 친정에 몸조리하러 온 날 저녁, 회사 일을 마치고 남편이 기차를 타고 구미에서 왔다. 이번에는 지금도 참 촌스러웠다고 놀리는 각색 꽃이 잔뜩 섞인 한 아름이나 되는 큰 꽃다발을 들고서. 모든 꽃이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꽃다발 속 카네이션과 장미는 기억한다. 나와 나의 부모님 두 분, 그리고 태어난 아가를 위한 꽃을 송이송이 골라왔다고 했다. 상기된 얼굴로 아기 손가락을 만져보며 “장미는 당신을 위한 꽃, 카네이션은 당신을 낳고 길러 주신 장모님 꽃, 장인어른 꽃은…”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듣고 보니 우리 아기 꽃은 아기자기 사랑스럽고, 옛날 국민학교 졸업식장에 등장한 듯 알록달록하게만 보였던 꽃들이 모여 세상에서 하나뿐인 소중한 꽃다발이 되었다.
그와 함께한 세월 동안 집 앞에 온 꽃 트럭에서 샀다던 다알리아꽃도, 겨울의 프리지어 한 묶음도 노란 향기와 함께 기억 속을 스쳐온다. 폰 프로필 사진에 저장된 꽃들은 볼 때마다 옛날의 그 순간들을 소환해낸다. 사이사이로 돌돌 만 오만 원권 지폐가 든 꽃바구니를 안고 활짝 웃는 내 모습에는 십여 년 전 즐거웠던 생일이 담겨있다.
또 한 장 사진을 보니 주말부부 시절의 애틋함이 살아나기도 한다. 30년 결혼생활 동안 처음 떨어져 지냈던 그해, 추석 연휴를 집에서 보내고 근무지로 돌아가니, 터미널 근처에 세워 둔 차 안팎이 온통 흙탕물 천지였다. 엄청난 폭우가 동해안 지방에 쏟아져 내린 것이다. 결국, 오래 정들었던 차를 폐차하고 홀로 심란했던 그 가을밤 “사람 안 다쳤는데 아무 일 아이다. 당신 힘내라고 이 꽃 샀다.”라며 남편이 전화한 뒤 사진을 찍어 톡으로 보내왔다. 사진 속 그 꽃들을 자꾸자꾸 바라보니 캄캄했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점점 환해져 왔다. 주말에 집에 와보니 분홍 장미와 흰 마거리트는 시들했지만 폰에 저장된 그 꽃들은 지금도 명랑하고 화사하다.
산이 인접한 집으로 이사 온 후부터 남편은 더 자주 꽃을 들고 나에게로 온다. 봄에는 철쭉이나 수레국화가, 산이 온통 들꽃으로 가득한 가을에는 보랏빛 쑥부쟁이나 구절초가 주 레퍼토리다. 날 좋은 오후, 산에 다녀온 남편이 어설픈 중세의 기사 몸짓으로 등 뒤에 숨긴 꽃을 ‘짜잔!’ 하고 앞으로 내밀면 그때마다 난 팔자에도 없는 늙은 공주가 된다. 찬 바람 불고 들꽃도 시든 계절에는 붉은 망개 열매가 달린 가지를 가져다주기도 하고, 자기 딴엔 멋있게 엮어온 억새나 엉겅퀴 봉오리가 나중에 ‘펑’ 터지며 털이 날려 내게 지청구를 들은 적도 있다.
생각해 보면 특별한 날 받았던 꽃들은 네 잎 클로버처럼 뜻하지 않은 기쁨을 주어 좋았고, 소박한 일상 속 들꽃들은 세 잎 클로버의 꽃말, ‘행복’을 닮아 소중했다. 시간 따라 꽃은 시들었지만 주고받았던 순간마다 피어났던 웃음꽃을 떠올리면 다시 그 꽃들은 피어난다. 어느새 나도 ‘행복은 강도보다는 빈도다’라는 말에 공감하는 나이가 된 것일까. 빨강머리 앤이 말한 ‘진주알이 하나하나 한 줄로 꿰어지듯이 소박하고 자잘한 기쁨들이 조용히 이어지는 날들’이 내게는 이런 순간이다.
점심을 먹으면서 남편이 “아까 오면서 보니까 영산홍이 활짝 폈더라. 우리 장모님 보고 싶네.” 한다. 봄 이맘때면 언제나 우리 집에 오셨으니까 엄마 생각이 났으리라. 엄마가 구미에 오신다는 전갈을 받으면 남편은 화초를 좋아하는 장모님 환영 선물이라며 봄꽃 화분이나 카네이션 바구니를 사두곤 했다. 우리 집에 들어서시며 아파트 화단과 집안의 꽃들을 보고 흐뭇하게 미소 지으시며 좋아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봄꽃 필 무렵 언제나 막내딸 집 오시던 엄마는 하염없이 꽃이 지고 또 다른 꽃들은 피어나던 3년 전 봄날, 망망茫茫 먼 길을 떠나셨다. 그해 2월 초 엄마가 위암 말기라는 급작스러운 소식을 오빠에게 전해 들었다. ‘고관절 수술 후에도 자식 고생시키지 않으려고 그렇게도 재활하시려 애쓰셨는데…….’ 차마 엄마 얼굴을 볼 수 없을 것 같았고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만 흘렀다.
엄마를 뵈러 친정으로 가는 길, 이번에도 남편은 꽃집에 들르자고 했다. 꽃집 사장님께 편찮으신 어른께 드리려고 한다니까 예쁜 꽃을 골라 정성스럽게 묶어 주셨다. 친정집에 도착하자마자 남편은 “장모님, 이 꽃이 천년초 만년초랍니다. 건강하세요.”라며 엄마를 꼭 안았다. 엄마의 파리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도 야위신 그 모습을 떠올리면 애잔하고 가슴 아리다.
내 침대 머리맡 사진 속 엄마는 웃고 계신다. 우리 엄마지만 참 곱기도 하다. 옷맵시도 곱고 예쁜 꽃을 꽂은 모자를 쓰고 있다. 우리 일곱 남매가 모두 가지고 있는 사진이니 매일 저렇게 미소 지으시며 당신 자식들을 지켜보시겠지.
구미에 와 계셨던 늦봄 어느 주말, 엄마와 우리 부부 셋이서 가까운 김천으로 드라이브를 하러 갔다. 해는 아직 길고 바람이 분다. 둘이는 강변을 가득 채운 들꽃 사이를 산책하고 엄마는 강둑 벤치에 앉아 쉬신다. 노란 금계국 한 송이와 붉은토끼풀 두 가닥을 들고 남편이 엄마 앞으로 다가가 한 무릎을 세우고 느닷없는 사랑 고백을 한다. 남편이 그 꽃을 모자에 꽂아드리고 소녀같이 어여쁜 엄마 모습을 찍는다. 그렇게 담은 엄마 모습을 액자로 만들어 드리고 언니들에게도 그 사진을 한 장씩 나누어 주니 모두가 “우리 엄마 참 예쁘다!” 하고 좋아했다.
남편 말처럼 정말 영산홍의 자태가 눈부신 봄날이다. 봄바람 속에 라일락 향까지 날아와 그리움을 불러낸다. 다시는 오지 못할 엄마와의 참 좋았던 그 순간들을 펼쳐본다. 그날 남편이 만들어 준 토끼풀 꽃반지와 팔찌를 끼고 활짝 웃는 우리 모녀와 미소를 머금고 꽃을 선사하는 사위를 바라보는 엄마 사진을 바라보는 내 입가에도 덩달아 미소가 번진다. 남편의 생일 저녁 식탁에서 엄마는 생선을 추려 주시고, 남편이 축하 편지를 손에 들고 있는 사진도 보인다.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쓰신 쪽지 편지의 글자를 본다. “……건강하여 자네 부부가 백년토록 해로하기를 기원하네. 사랑하네.” 마치 편지글이 엄마 목소리가 되어 들려오는 듯하다.
34년 전 눈 내린 겨울밤, 꽃을 든 그 청년이 불렀던 노래 뒷부분도 들려온다.
‘… 하루하루 사랑은 깊어갔었지/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기쁠 때나 슬플 때나/둘이 둘이, 둘만이 둘만이/이 세상 끝날까지 함께 살리라’
하루하루가 이어져 오늘이 되었고 또 내일이 될 것이다. 저기서 이젠 예순을 훌쩍 넘어 머리 희끗하고 주름 깊어가는 그 남자가 내게로 오고 있다. 나도 그에게로 한 걸음, 두 걸음 다가간다, 여전히 다정한, 다정히 꽃을 든 내 남자에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