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딤후 4: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이며 의사이다. 그는 바울의 제2차 전도 여행 때부터 바울과 더불어 활동하였으며 아시아, 예루살렘 등지에서도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로서 함께 복음을 전파했었다. 특별히 그는 바울이 가이사랴 및 로마에서 옥중생활을 했을 때 바울의 주치의요, 대필자로서 봉사하였다.
그래서 혹자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 있을 때 누가를 통해서 바깥 세계를 접촉할 수 있었으며 또한 누가는 본 서신의 전달자였다고 주장한다.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 마가는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 여행 때 동행하다가 중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런 연유로 바울은 2차 전도여행에 마가를 데려가기 싫어하였다.
따라서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갔으며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갔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 마가는 바울과 함께 로마에 있었다. 더욱이 후에 베드로와 같이 로마에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마가는 당시 로마의 형편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로마 감옥에 있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마가를 불러오라고 명령하며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고 말한다.여기서 '나의 일'이란 바울의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복음 사역으로서 바울은 로마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마가로 하여금 자신을 대신하여 복음 사역을 감당하게 하려고 한듯하다.
[딤후 2:20]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큰 집에는 - '큰 집'에 대해 혹자는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암시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가시적인 교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 바울은 그릇의 종류를 다양하게 표현함으로 하나님의 집인 교회안에도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음을 나타낸다.
한편 바울은 다양한 그릇을 기능별로 '귀히 쓰는 그릇'과 '천히 쓰는 그릇'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들의 의미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본절을 롬 9:21-23과 상관된 것으로 보아 '귀히 쓰는 그릇'은 "영광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이며 '천히 쓰는 그릇'은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으로 거짓 교사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2) 하나님의 교회 내에 귀하게 쓰이도록 예비된 교인과 천하게 쓰이도록 예비된 교인이 있다는 해석이다. 이러한 두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롬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진흙 한 덩이로...권이 없느냐 - 이것은 구약의 대표적인 두 선지자 이사야와 예레미야에 의해서 사용된 예화로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사상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대변해 주고 있다. 아울러 토기장이와 질그릇의 관계처럼 인간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길에 달려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자칫하면 '인간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면 인간의 노력은 전혀 무익한 것이냐'하는 존재론적 운명론과 하나님에 대한 원망에 빠질 위험에 봉착한다. 그러나 바울은 19, 20절에서 이에 대한 논리적 답변을 주기보다는 질문을 통해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의 바른 태도는 순종과 헌신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렌스키는 본절의 의미가 단지 천하게 만들어진 그릇이 토기장에서 항변할 수 없듯이 강퍅하도록 내버려진 자들도 항의할 수 없다는 의미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절은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귀하게 만들었느냐 천하게 만들었느냐 하는 것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일을 행하실 때에 자유하다는 사상, 즉 하나님의 주권은 무한한 자율성을 전제로 하고 있음에 강조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