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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 南進策의 再照明
< 南進基地였던 南平壤을 中心으로>
오순제 박사(한국고대사연구소 소장)
1.고구려(高句麗)와 낙랑국(樂浪國)
(1)평양(平壤)지방의 낙랑국(樂浪國) 멸망
요동(遼東)의 낙랑(樂浪)지역에 있었던 최숭(崔崇)이 번조선 안에서 위만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보고 불안을 느껴 BC195년에 재물을 모아 바다를 거너 막조선(莫朝鮮)의 수도였던 평양(平壤)지방으로 들어와 낙랑국(樂浪國)을 세우고 그북쪽에 자리잡은 북부여(北夫餘)에게 BC169년에 조공을 하였다. 그후 북부여가 멸망하고 졸본부여(卒本夫餘), 고구려(高句麗)로 이어지는 혼란기에 요동반도(遼東半島)의 남부지역을 장악하고 한반도 북부의 동부여(東夫餘),예맥등을 거느리면서 그 옛날 그들과 이웃하여 대방지역에 있었던 유민들을 받아들여 현재의 황해도 북부지역에 대방국(帶方國)을 세우게 하였다.
이들의 위치에 대한 기록은 {후한서(後漢書)}에는 "고구려의 남쪽에는 조선(朝鮮)과 예맥(濊貊)이 있다"고 하였고 "예(濊)는 북으로 고구려(高句麗)와 옥저,서로는 낙랑(樂浪)에 접했다"고 한것을 종합해 보면 평양(平壤)지방을 "조선(朝鮮)","낙랑(樂浪)"이라고 표기 하였음을 알수 있는데 조선이란 "막조선(莫朝鮮)"을 낙랑이란 "낙랑국(樂浪國)"을 나타낸 것이다.
이러한 낙랑국(樂浪國)은 북부여가 졸본부여에게 멸망당한 후에 한반도 북부의 맹주로 등장하여 중국(中國)과의 활발한 교역을 통해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였으며 백제(百濟)가 건국되자 말갈(靺鞨:예맥국)과 함께 그들을 공격해 갔다.
그러나 낙랑국의 마지막 왕인 최리(崔理)가 고구려 대무신왕(大武神王)의 공격으로 37년에 멸망당하자 그 유민 중에 5천여명이 신라(新羅)로 투항하고 나머지는 황해도지역의 대방국(帶方國)으로 옮겨와 명맥만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당시 낙랑국의 왕인 최리가 고구려의 호동왕자(好童王子)를 만났을 때에 그를 "북쪽나라 신왕의 아들(北國神王之子)"이라고 불렀고 백제(百濟)와의 교류에서는 "같은 일가(同一家)"로 인식하였다. 만약 그가 중국인인 낙랑태수였다면 조상이 같은 일가라는 표현은 부당한 것이 되고만다. 더구나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쓴 김부식도 낙랑국(樂浪國), 대방국(帶方國)에 대해서는 "국(國)", "왕(王)"이라고 표기 하였고 중국의 군현인 낙랑군(樂浪郡),대방군(帶方郡)은 "한(漢)", "위(魏)", "군(郡)", "태수(太守)", "현(縣)" 등으로 표기해 명백하게 구분하고 이어 그가 이두개를 서로 다른 것으로 인식했음을 알수있다.
이것에 대한 혼란은 일제하 식민사학자(植民史學者)들에 의해 저질러진 조작으로 그들의 아류인 이병도(李丙燾)가 이것을 충실히 이어받아 평양에 낙랑군을 설정하므로써 우리나라의 고대사를 기형적으로 변형시키고 말았다. 그의 이론은 제자들에 의해 확대, 심화되어 이제는 고질적인 병폐로 자리잡고 말았다.
(2)요동방도의 낙랑국 잔존 세력의 항거
낙랑국을 멸망시킨 얼마후인 56년에 고구려는 함흥지방에 자리잡고 있었던 동옥저(東沃沮)를 멸망시켜 한반도의 북부지역을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한편 요동반도(遼東半島) 남부에 자리잡고 있던 낙랑국(樂浪國)의 잔류세력들이 낙랑국이 멸망 당한 후인 44년까지도 고구려에게 계속 항거하다가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의 회유로 그들에게 투항하였다. 이에 고구려(高句麗)에게 복속 되어있던 세력들도 동요가 일어나 잠지(蠶支) 부락이 47년에 고구려를 배반하고 후한에게 투항한다. 그러나 114년에 고구려의 태조대왕(太祖大王)이 요동반도의 남해(南海) 지역을 순행한 것을 보면 이들이 56-114년 사이에 고구려에게 점령 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후 246년 위(魏)의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毋丘儉)이 고구려의 환도성(丸都城)을 함락하면서 이지역에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 대방태수(帶方太守) 궁준을 보내 이들을 고구려로부터 독립시켜 주겠다고 회유하다가 부종사 오림이 잘못 통역을 하여 한(韓)의 신지(臣智)가 격분하여 그들이 임시로 설치한 기리영(岐離營)을 공격해 대방태수 궁준이 전사 당하였다. 이사건으로 요동반도 남부지역에 낙랑군,대방군을 설치하려던 위나라의 야욕이 좌절되고 말았다
(3)낙랑국(樂浪國)의 유적(遺蹟)과 유물(遺物)
이당시 토성으로는 평양의 낙랑토성, 온천군의 어을동토성, 황해도 은률군의 은성리토성, 봉산군의 지탑리토성, 신천군의 청산리토성 등이 있는데 그중에서 평양의 낙랑토성(樂浪土城)은 대동강(大洞江) 남안에 위치해 있어 북쪽의 강적(强敵)에 대비한 것으로 둘레가 1.5km, 직경이 660m로 그당시의 다른 토성보다 갑절이나 큰데 그안에는 건물터가 있고 "천추만세(千秋萬歲)" 등의 명문기와가 나왔다. 그 주위 8이내에는 약1200여기의 고분이 산재하고 있어 그당시 이토성이 최고 통치계급이 자리잡고 있었던 중심토성임을 알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온달전에는 안장왕 때인 529년에 "낙랑의 언덕(樂浪之丘)에서 사냥을 하였다"고 한것이 바로 이토성이 있는 대동강 남쪽 언덕을 말하고 있다. "연가(延嘉)7년명 금동여래상입상"의 명문에 "고려국낙랑동사(高麗國樂浪東寺)"라고 하였는데 고려는 고구려이고 낙랑(樂浪)은 바로 평양(平壤)지역을 말함이다. 그런데 {제왕운기}에 "마한(馬韓)의 왕검성(王儉城)은 지금의 서경(西京)이다"라고 하였고 {고려사(高麗史)},지리지에서는 "서경유수관 평양부는 본래 삼조선(三朝鮮)의 옛 도읍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을 종합하여 보면 이곳이 전마한인 막조선(莫朝鮮)의 도읍이였음을 알수 있는데 현재 평양지방의 세형동검문화(細形銅劍文化)가 바로 막조선의 유물이며 그 뒤를 이은 평양의 낙랑토성이 낙랑국(樂浪國)의 도읍지였음을 알수있다.
평양 토성동의 귀틀무덤에서는 국왕(國王) 또는 그와 대등한 신분을 말해주는 옥도장이 나왔는데 거기에는 "영수강녕(永壽康寧)"이라는 최고의 길상어가 새겨져있었다.이무덤과 마주 놓인 파괴된 벽돌무덤에서는 "대왕(大王)"이라는 명문이 있는 벽돌이 수집되었고 정오동 5호분 및 왕광무덤에서는 "거왕(巨王)"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는 칠기 묶음이 나왔다. 또 평양의 낙랑토성 안에서는 "낙랑예관(樂浪禮官)", "낙랑부귀(樂浪富貴)", "천추만세(千秋萬歲)" 등의 명문이 있는 막새기와가 나왔는데 이것은 한나라의 하잘것 없는 변방태수 정도로써는 감히 쓸수 없는 것으로 왕급을 나타내는 유물이다. 왜냐하면 최근 중국에서 발간된 {한대고고학개설(漢代考古學槪說)}에 보면 전한(前漢)의 수도인 장안성(長安城)에서 유일하게 "장락미앙(長樂未央)", "장생무극(長生無極)", "천추만세(千秋萬歲)", "억녕무강(億年無彊)" 등의 최고의 길상어가 새겨진 기와가 나왔기 때문이다.
띠고리(帶鉤)는 평양지방에는 나무곽무덤에서부터 나오기 시작하는데 정백동 37호분과 정백동 92호분이 있다. 귀틀무덤인 석암리 9호분에서는 금띠고리가 나오고,석암리 219호분(왕근무덤)과 정백동 2호분(고상현무덤)에서는 은띠고리가 나왔다. 띠고리는 허리띠를 매기 위한 장식으로 옷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그당시 옷이 계급적, 신분적 제한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수있다. 왜냐하면 띠고리가 나오고 있는 무덤에서 나온 무기, 마구, 수레부속들은 모두가 금, 은도금으로 장식 되어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른무덤에서 나온 백동, 동, 나무 등의 재질로 된 도장에 비해 옥, 은도장이 나오고 있으며 긴쇠칼, 쇠뇌, 가지창, 쇠창을 비롯한 무기와 말자갈, 자갈멈추개, 말관자, 말방울, 말굴레장식금구, 수레굴대끝, 일산, 갑옷 등을 가지고 있는데 그양과 질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즉 귀틀무덤에서는 띠고리, 마구, 수레부속, 무기를 가진 첫째집단과 마구, 수레부속, 무기를 가진 둘째집단과 무기만 가진 셋째집단 등으로 명백히 구분되는데 그중에서 띠고리를 가진집단이 지배계급 중에서도 가장 높은 신분을 가진 자로써 이들은 고조선(막조선)의 세력 이후 고구려가 이지역을 차지하기 전까지 평양을 중심으로 평안도,황해도를 포괄하는 넓은 지역에 독자적인 왕권국가를 세웠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물증이다.
정백동 8호분에서 무더기로 출토된 중국 남쪽 바다에서만 나오는 보배조개와 중국의 "촉군서공(蜀郡西工)", "광한군공(廣漢郡工)", "성도군공(成都郡工)" 등에서 제작된 칠기(漆器) 중에서 촉군과 광한군의 공관(工官)에서 제작된 칠기는 주로 중국의 궁중(宮中)에 공급되어 사용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승여(乘與)"라는 명문이 있는 것은 황제(皇帝)의 어용품이였다. 그런데 평양에서 출토된 전한의 칠기 45개 중에서 20개, 신과 후한의 칠기 15개 중에서 9개가 "승여"라는 명문이 있다. 현재 이칠기는 중국의 중앙 외에서는 귀주성(貴州省) 청진(淸鎭), 내몽고(內蒙古)의 노인울라에서 2개가 출토되고 있는 매우 희귀한 것이다. 그런데 중국의 황제가 쓰던 귀중한 칠기가 평양(平壤)지역에서 무려 29개씩이나 대거로 출토되고 있는 것을 본다면 이것은 중국변방의 태수로서는 감히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것은 그당시 평양의 낙랑국(樂浪國) 귀족(貴族)들은 매우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기 위해 그와 대등하거나 그이상의 값있는 물건을 주고 중국과의 대외무역을 통하여 얻은 것으로 이지역에는 고구려와 같은 국가적인 권력구조와 통치체제를 갖춘 독자적인 정치권력이 존재했다고 볼수 밖에 없다.
중국의 한나라에서는 토광목곽묘(前漢 초기)-->횡혈식 애묘(전한 중기)-->공심전묘와 채색벽화 발생(전한 중말기)-->전실묘(전한 중기이후)-->화상석묘(전한 말기에서 後漢)-->화상전묘(후한) 등으로 변천을 거듭하였고 사천성(四川省), 감숙성(甘肅省)에서 나온 녹나무, 잣나무, 전나무를 관으로 썼으나 평양지역의 관재는 이것과는 전혀 틀리다. 그리고 평양지역의 귀틀무덤에서 흔히 나오는 화분현단지, 작은 배부른단지와 금, 은 장식의 띠고리는 중국에서 전혀 찾아 볼수 없는 것이다.
{조선고고학개요(朝鮮考古學槪要)}에서는 평양지역의 귀틀무덤과 벽돌무덤은 방형인데 비해 중국은 장방형이고, 평양의 벽돌무덤은 궁륭식천정(弓隆式天井:Dome)인데 비해 중국 한데의 벽돌무덤은 아아치(Arch)천정이며 그형식이 토동묘,공심전묘(空心塼墓)이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목곽분이 은나라에서 춘추전국시대에 걸쳐 북방에서 사용되는데 평양지역에서는 AD 1세기에 목곽분(木槨墳:귀틀무덤)이 성행하여 150년 차이가 나고 있다. 벽돌무덤은 중국이 전한(前漢) 말기인 BC 1세기초에 나타나는데 비해 평양에서는 AD 2세기 전반기에 나타나 무려 200년 차이가 나고 있다. 이것은 전한의 낙랑군(樂浪郡)이 설치된 것이은 무제(武帝) 때인 BC 108년이고 전한 말기부터는 석실묘(石室墓)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후한(後漢:AD 25-220) 때에 성행하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중국에서 벽돌묘가 사라진 후한 중기에 들어서야 평양지방에 벽돌묘가 나타난다는 것은 매우 모순된 것이다. 왜냐하면 평양지방이 낙랑군의 고분이라면 적어도 전한(前漢)시대의 태원태수묘(太原太守墓)와 갗은 양식이여야 하기 때문이다.
BC 1세기의 나무곽무덤에 이어서 BC 1세기 말에서 AD 3세기 중엽에 걸쳐서 나타나는 것을 부부의 널을 갈라놓은 귀틀무덤-->부부의 널을 맞대놓은 귀틀무덤-->귀틀과 벽돌무덤-->나무천정(仰天壙式)의 벽돌무덤-->궁륭식(弓隆式) 천정의 벽돌무덤-->돌천정의 벽돌무덤으로 연속적으로 발전해 왔다. 이중에서 벽돌과 돌을 혼합해 사용한 형식은 중국에서는 전혀 찾아 볼수 없는 것이며 중국에서 부부(夫婦)가 합장(合葬)된 경우는 문제(文帝)와 경제(景帝) 둘뿐인데 반해 평양에서는 매우 빈번히 나타나는 현상으로 매우 모순된 것이다.
평양지역에서는 철기, 무기, 마구, 질그릇, 놋그릇, 거울 등이 나오는데 그중에서도 철기가 가장 많이 나오고 있다. 중국 한대의 유물에서는 질그릇, 거울, 무기, 철기, 몸치레걸이, 농기구, 화폐 등이 나오는데 그중에서는 질그릇이 가장 많이 나오고 있어 유물의 정황이 전혀 틀리다. 더구나 평양지역에서 나오는 세형동검,세형동모,수레부속 등은 중국에서는 전혀 찾아 볼수 없는 것들이다.
그리고 전후2실의 목곽분인 채협총의 전실 벽에는 기마도가 먹과 붉은 색으로 그려져 있어 묘실의 구성과 벽화장식이 고구려 벽화무덤의 선구가 되며 정백동 부조예군묘(夫租濊君墓)는 이지역에 요동지역에 있던 예족의 군장이 이동해온 것으로 추정된다.
2.고구려(高句麗) 동천왕(東川王)의 평양(平壤) 천도(遷都)와 그 유적
(1)평양(平壤)의 동천왕능(東川王陵)
고구려는 동천왕(東川王) 때에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毋丘儉)의 공격으로 환도성(丸都城)이 함락되었는데 그 다음해인 247년에 위(魏)와는 멀리 떨어진 평양으로 천도를 하였다. {평양지(平壤志)}에는 "시록(柴麓)은 평양 북동 30리에 있어 여러행의 새긴글자가 남아있는데 고구려 동천왕의 묘이며 시원이라고도 부른다"고 하였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평양조에 "시원은 고구려 동천왕이 죽자 그의 덕을 돌이켜 보아 능소(陵所)에 가서 자살하는 자가 많으므로 땔나무(柴)를 베어 그 시신들을 덮어 주었기에 그 지명이 되었다"고 하여 동천왕이 불타버린 환도성을 버리고 평양(平壤)지역으로 천도(遷都)해 그곳에서 죽었음을 알수있게 해준다.
현재 평안남도 평성시(平城市)에 있는 경신리 1호무덤의 주인공을 동천왕(東川王)으로 보기도 하는데 왜냐하면 {강동읍지(江東邑志)}에 "연희(延熙) 10년에 동천왕을 묻었다"고 되어있으며 높은 흙무지를 쌓고 그윗부분에 돌칸을 마련한 이러한 형태의 무덤은 5세기이후 평양부근의 큰 무덤에서는 찾아보기 어렵운데 반해 환도성이 있는 집안일대의 장군총(將軍塚), 태왕릉(太王陵) 등을 포함한 3-5세기초의 무덤들에서는 돌로 축조된 점만 다를 뿐 돌칸(石室)의 위치에서는 일정한 공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무덤은 강동군(江東郡) 한왕리(漢王里)의 대동강 기슭에 있는 18기의 고구려 무덤 중에 외형상 구조가 가장 큰 봉토분(封土墳)이며 이무덤의 봉토 윗부분 30센티미터 밑에서 씌웠던 붉은 기와의 무늬가 AD 3-5세기의 것이라는 점이다.
(2)고구려의 평양(平壤) 진출 초기(初期) 유적
최근 북한의 이순진(李淳鎭)은 평양(平壤)지방의 고구려 봉토분을 발굴하고 [낙랑(樂浪)구역 일대의 고구려 석실봉토분(石室封土墳)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글에 의하면 이들 봉토분의 축조년대는 고구려의 평양 진출(進出)시기를 밝힐수 있는 중대한 것으로 3가지 유형으로 나누었다. 제1유형은 연도가 없는 단실묘(單室墓)로 낙랑동 29호분이 여기에 속하고 제2유형은 연도( 道)와 현실이 있는 평천정(平天井)의 단실묘로 낙랑동 19호, 24호, 25호, 30호, 31호, 34호, 51호, 53호, 54호분이 여기에 속하며 제3유형은 연도와 현실이 있는 평행삼각형(平行三角形) 형태의 천정을 가진 단실묘로 정백동 101호, 낙랑동 36호, 남사리 37호분이 여기에 속한다.
이것을 시기적으로 보면 제1유형, 제2유형, 제3유형으로 차례로 발전해 왔는데 제일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제1유형의 낙랑동(樂浪洞) 29호분과 유사한 구조를 가진 평안남도 순천시(順川市) 남옥리(南玉里) 2호분은 횡혈식(橫穴式)의 기단식적석총(基壇式積石塚)의 구조상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적석총 직후의 초기(初期) 봉토분(封土墳)으로 여기에서는 내행화문장의자손경(內行花文長宜子孫鏡), 회백색호(灰白色壺), 흑회색호(黑灰色壺) 등이 출토되었는데 이것들은 평양(平壤)지방에서 AD 1세기경에 축조된 목곽분(木槨墳)에서 많이 출토된 것이므로 낙랑동 29호분, 남옥리 2호분은 대체로 AD 2세기 전후반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제일 늦은 시기에 속하는 제3유형의 정백동(貞柏洞) 101호분은 현실 상면(床面)의 관대(棺臺)를 낙랑지역의 벽돌무덤에 사용한 벽돌과 형태, 재질, 색, 문양 등이 거의 같은 것을 깔았는데 이것으로 보아 이고분이 전축분(塼築墳)과 같은시기에 축조되었음을 알수있다. 특히 이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제이식(金銅制耳飾)은 낙랑동(樂浪洞) 27호 전축분(塼築墳)에서 출토된 것과 크기와 형태가 흡사하여 이사실을 증명해 주고있다. 평양지역에는 벽돌무덤(塼築墳)이 수백기가 있는데 그 축조시기가 AD 2세기 초에서 AD 3세기 중엽이므로 정백동 101호분의 축조년대는 3세기 전반기, 낙랑동 36호분과 남사리(南寺里) 37호분은 AD 3세기 후반기로 추정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평양시 낙랑구역의 고구려 석시봉토분은 그 축조년대가 AD 2-3세기로 이시기에 고구려(高句麗)가 평양(平壤)지역을 지배하였음을 알수 있어 AD 4세기 초까지 중국의 낙랑군(樂浪郡)이 이지역에 버티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식민사학(植民史學)의 아류인 이병도(李丙燾)를 위시한 남한의 강단사학계의 이론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으며 민족사학자(民族史學者), 재야사학자(在野史學者)들이 주장한 낙랑국설(樂浪國說)이 옳았음을 알수있다.
3.고구려(高句麗)의 대방국(帶方國) 멸망과 후속조치
(1)대방국 멸망
대방국(帶方國)은 요동(遼東)의 대방지역으로부터 이주해온 유민들이 황해도(黃海道) 북부지역에 세운나라로 낙랑국(樂浪國)에 예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37년 낙랑국이 고구려에게 멸망 당하자 후원세력을 잃은 대방국(帶方國)의 왕(王)은 고구려에 대한 불안감으로 백제(百濟)의 책계왕(責稽王)에게 자기의 딸을 시집 보냄으로써 결속을 다진다. 그후 고구려의 서천왕(西川王)이 286년에 대방국을 치자 그의 사위인 백제의 책계왕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도와주었다. 이에 고구려가 백제를 원망하였기에 이들을 대비해 아차성(阿且城)과 사성(蛇城)을 수리하였다.
필자(筆者)는 황해도(黃海道) 은률(殷栗)에 있는 운성리토성(雲城里土城)을 이들의 치소(治所)로 추정하는데 이토성은 외성과 내성으로 구성되어 있다.외성의 둘레는 1킬로미터가 넘고 내성은 동서 100미터, 남북 80미터로 그안에 큰 주춧돌이 줄지어 있는 건물터가 있고 벽돌로 만든 우물이 있으며 주춧돌 사이에는 이미 파괴된 돌무더기와 기와가 흩어져 있으며 토성 밖에는 너비 8미터,깊이 1.4미터의 해자가 확인 되었다. 이성의 남쪽 야산에는 수십기에 이르는 고분군이 있으며 건물지(建物址)에서는 "천추만세(千秋萬歲)"라는 명문기의 숫기와가 나오고 있어 평양의 낙랑토성과 같이 최고 지배층이 거주했던 곳으로 추정한다.그런데 이고분들은 움무덤, 나무곽무덤, 귀틀무덤, 벽돌무덤, 독무덤, 기와무덤 등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리고 황해도 재령군 부덕리에서 나온 좁은놋단검에 쓰여진 명문에는 "()()皇朝用"이라고 되어있어 제왕들이 사용한 물건임을 알수 있는데 좁은놋창과, 좁은놋단검 등은 중국에는 전혀 없는 고조선계의 유물로써 막조선이나 대방국(帶方國)의 왕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300년에 고구려(高句麗)가 대방국을 쳐서 멸망 시키자 그옆에 있던 낙랑국의 잔류세력들과 대방국(帶方國)의 유민들은 신라(新羅)로 투항하였다. 이로써 백제와 고구려가 예성강(禮成江)을 경계로 마주하게 되었다.
(2)요동(遼東)지역 포로(捕虜)들의 평양(平壤)이남에로의 유치(留置)
1912년 세끼노(關野貞)가 황해도 사리원역 부근의 고분에서 얻은 장무이전(張撫夷塼)이라는 벽돌을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그사진을 싣고{고적도보해설}에 그전편과 문장을 수록하였는데 그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하늘이 소인을 낳으시와 군자를 공양하게 하셨도다. 천명의 사람이 벽돌을 만들어 부모로 장사하나이다. 이미 좋고 또한 경고하니 이에 글을 새겨 예를 밝히노라. 사군 대방태수 장무이여(天人小人,供養君子,千人造塼,以葬父母,旣好旦堅,使君帶方太守,張撫夷)
2. 슬프다 대인이여 문득 백성을 버리셨도다. 백성들이 슬퍼하여 아침저녁 편안하지 못하나이다. 길이 현궁 곁에서 원통한 마음 다할 바를 모르나이다.(哀哉大人,奄背百姓,子民憂戚,夙夜不寧,永則玄宮)
3.조주부가 명령하여 이 벽돌을 만드니 은근한 뜻을 마지 아니하도다.(趙主簿令塼,懃意不臥 )
위의 글중에서 2번째 끝부분의 "칙(則)"자는 {좌씨춘추(左氏春秋)} 양공 25년조에 "최씨가 장공(莊公)을 북곽(北槨)에 매장(則)하였다가 정해일에 사손이라는 마을에 장사(葬事)지냈다"고 한 것과 같은 뜻이다. 이것은 장공이 시해를 당하여 초초히 예를 이루지 못하고 애매하여 임시로 그곁에 두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장무이의 시신도 한쪽 곁에 묻은 것인 "칙(則)"으로 이것은 황해도 사리원이 대방군(帶方郡)이 있던 한(漢)나라의 땅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3번째 글에서는 "주부(主簿)"가 명령하여 벽돌을 만들었다고 하였는데 주부라는 벼슬은 그당시 중국에서는 쓰이지 않던 것으로 고구려(高句麗)의 5등관의 관직명이다. 이러한 고구려의 하급관리가 명령한 것을 보면 "대방태수 장무이"는 포로(捕虜)로 잡혀와 있다가 죽은 것으로 그당시 포로수용소장이 주부였음을 알수있다.
황해도 신천군 봉황리에서 나온 "수장잠장(守長岑長)"의 명문 중에서 "수(守)"란 이전에 장잠장으로 있었던 적이 있다는 뜻이다. 황해도 안악에서 수집된 "일민함자왕군전(逸民含資王君塼)"에서 "일민(逸民)"이라는 뜻을 {사원(辭源)}이나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을 보면 "속세를 버리고 은거한 사람"이라고 하였으니 이 벽돌의 주인공은 포로, 유민, 식객의 신세였음을 알수있다. 그리고 평양지방에서 출토된 "영화(永和) 9년(353) 3월 10일 요동한현도태수영동리조(遼東韓玄 太守領 冬利造)"의 벽돌은 "현도태수"라고 되어있어 이곳을 낙랑군(樂浪郡)으로 보는 것과는 맞지않는다. 그러나 {삼국사기(三國史記)},고구려본기 미천왕(美川王) 3년(312)조에 "왕이 3만의 군사를 이끌고 현도군을 쳐서 8천인을 사로 잡아 평양(平壤)으로 옮겼다"고 되어있는 것과는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고구려는 평양(平壤)지역의 낙랑국을 37년, 황해도(黃海道) 지방의 대방국을 300년에 멸망 시킨 후에 그들이 사용했던 토성(土城)을 요동공략에서 얻은 포로(捕虜)들의 수용소로 사용하였음을 추측할수 있게 해준다.
4.고구려 고국원왕(故國原王)의 평양(平壤) 천도와 남평양(南平壤) 건설
(1)평양성 증축(增築)과 천도
동천왕이 247년에 평양으로 천도한 이래 미천왕이 이곳에 중국의 포로를 유치하였는데 고국원왕(故國原王)은 334년에 평양성(平壤城)을 중축하여 고구려의 남쪽 중심지로 삼았다. 그후 그는 342년 8월에 환도성(丸都城)으로 재천도 하였으나 그해 11월 전연(前燕)의 모용황이 환도성을 함락시키자 다음해 다시 평양의 동황성(東黃城)으로 천도 하였다. {증보동국여지승람(增補東國輿地勝覽)},평양조에는 "목멱산은 평양부의 동쪽 4리에 있는데 그곳에는 동황성지가 남아있는데 일명 경성이라고도 하는데 세상에 전해오기를 고구려 고국원왕이 모용황에게 환도성이 함락되자 이곳으로 옮겼다(木覓山府東四里有黃城古址一名絅城世傳高句麗故國原王居丸都城爲慕容황비敗移居于此)"고 하였고 {문헌비고(文獻備考)},평양조에는 "동황성은 평양부 동쪽 4리의 목멱산에 있다(東黃城在東四里木覓山)"고 하여 고국원왕이 천도한 동황성이 현재의 평양(平壤)이였음을 명백히 해주고 있다.
그런데 민덕식(閔德植)은 고국원왕이 옮겨온 동황성(東黃城)을 청암동토성으로 비정하고 넓게는 평양성의 북성까지도 포함되는 것으로 보았다. 청암동토성(淸岩洞土城)은 둘레가 3675미터에 달하는 방대한 평지성으로 동서 약2300미터, 남북 약800미터 정도의 반원형을 이루고 있다. 남벽은 대동강에 임하여 강물이 굽어지는 우측 절벽을 이루면서 모란대까지 이어진다. 대성산과 사이에는 합장강이 흘러 비옥하고 넓은 평야가 전개 되어있으며 북쪽에는 동문지가 있는데 이곳에서 똑바로 대성산성 정문까지 도로가 나있다. 이성안에서는 투각화염문(透刻火焰文)의 금동관(金銅冠)이 출토되어 그 중요성을 높여주고 있으며 또 성안에는 청암리사지(淸岩里寺址)가 있다. 이절은 청암리토성의 중앙부에 위치한 광활한 평지에 있는데 그중앙은 강안에 뻗혀 넓은 대지를 이루고 뒤로는 구릉을 끼고 남으로는 대동강을 바라보는 가장 좋은 지점으로 각종 초석들이 부근 인가에 산재하여 있어 왕궁지(王宮址)로 추정되기도 한다. 한편 평양성(平壤城)의 북성(北城)은 내성의 끝인 을밀대에서 최승대를 돌아 청류벽 마루를 타고 부벽루를 거쳐 동암문으로 올라와 내성벽에 연속 되는데 둘레가 7809미터로 이성안에는 392년에 창건되었다는 영명사가 있고 동명왕의 궁인 구제궁과 동명왕이 기린마를 길렀다는 기린굴, 동명왕이 승천하였다는 조천석 등이 있다.
(2)황해도(黃海道) 지방의 남평양(南平壤) 건설
고구원왕(故國原王)는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함과 아울러 현재의 황해도(黃海道) 신원군(新院郡) 아양리(峨洋里)의 장수산성(長壽山城)과 하성(下聖) 부근에 대규모 동시(都市)를 건설해 남평양을 두고 369년에 최초로 백제(百濟)의 치양(雉壤)을 쳐들어가는 강력한 남진(南進)정책을 썼다.
북한의 장수산성(長壽山城) 발굴에 의하면 이성은 아양리 북방 1.5킬로미터에 있는 장수산에 축조된 것으로 동북으로 비옥한 재령평야가 펼쳐져있고 동남으로 재령강이 흐르고 있으며 동으로는 멸악산, 북으로는 정방산, 서로는 구월산과 불타산, 남으로는 수양산 등의 험준한 산들이 둘러쳐져 있다. 그리고 이곳은 교통의 요충지로 북으로 봉산, 사리원, 황주를 경유하여 평양으로 통하고 남으로는 해주, 연안, 배천, 개성으로 통하여 서울로 향하며 서북으로는 재령, 신천을 경유하여 안악으로 통하는 곳으로 재령강의 수로를 이용하여 평양과 서해안을 용이하게 왕래할수 있는 곳으로 고구려의 수도였던 집안(輯安), 평양(平壤)과 지리적 환경이 비슷하다.
이성은 고구려산성(高句麗山城)의 특징은 고로봉식으로 평면이 불규칙한 삼각형으로 둘레가 약10.5킬로미터로 외성의 둘레가 약 7950미터, 내성은 4700미터이다. 성벽에 쓰인 성돌은 사각형으로 대성산성, 농오리산성의 성돌과 같은 형태로 폭 30-40미터, 높이 15-20미터, 길이 30-40미터 정도이다. 성벽은 하부의 폭이 3.2-3.5미터, 상부의 폭이 2.3-2.5미터인데 하부의 일부분이 계단식(階段式)으로 축조되어 있는데 이것은 평양성의 을밀대 축대, 황룡산성, 농오리산성 등의 계단식 성벽 축조 방식과 같다.
성문(城門)은 외성에 남문, 북문, 동문이 있고 내성에는 남문, 북문, 서문이 있다. 장대(將臺)는 외성에 중앙장대, 북장대, 남장대, 동장대가 있고 내성에는 북장대, 남장대가 있다. 건물지(建物址)는 약 80여동이 있는데 외성의 중심부에 있는 제1호 건물지는 동서의 길이가 35미터, 남북의 폭이 13미터로 이곳에서는 전형적인 고구려의 적색기와가 출토되고 있다.
연못(池)은 외성의 중심부에 직경 13-14미터의 원형으로된 쌍자지가 있고 내성의 서문 부근에는 길이 9미터, 폭 3미터의 장방형 연못이 있는데 이연못의 벽은 성벽과 동일한 수법으로 돌을 쌓았다. 우물(井)은 제1호건물지 부근에 길이 6미터, 직경 1.2미터의 원통식 우물이 있는데 그 구조가 평양시 대성구역 고산동에서 발굴된 고구려 우물과 구조가 비슷하며 그속에서는 고구려의 적색기와가 출토되었다.
내성의 남문지 부근에는 6개의 제철지(製鐵址)가 있는데 이것은 방형의 용철로를 야석으로 쌓은 후에 흙을 두껍게 바른 것으로 제1호 제철용철로의 크기는 높이 2미터, 폭 0.95미터, 길이 3미터이다. 성내에서 출토되는 유물로는 와편과 벽돌이 있는데 이중에서 적색기와는 제1호건물지와 내성 남문 부근의 건물지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다. 벽돌은 큰 것이 길이 30센티미터, 폭 15센티미터, 두께 5센티미터로 작은 것은 길이 25센티미터, 폭 14센티미터, 두께 4.5센티미터이다.
산성 밑에 있는 유적으로는 아양리(峨洋里)의 성현동(聖賢洞), 감천동(甘泉洞)의 건물지와 월당리(月堂里)의 방송동(盤松洞), 상월동(上月洞), 용호동(龍湖洞)의 건물지가 있는데 이중에서 성현동과 용호동의 문화층은 아래로부터 청회색기와층, 적색기와층, 회색기와층의 3층으로 나뉘어진다. 제일 아래의 청회색와층(靑灰色瓦層)의 유물은 고구려가 이지역을 점령하기 이전 1-3세기 고조선 유민의 문화전통이 농후하게 남아있다. 중간의 적색기와(赤色瓦)는 고구려의 전형적인 기와로 장수산성의 축조년대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유물인데 특히 양아리 성현동 건물지의 적색기와층에서 출토된 "영가(永嘉) 7년"의 명문이 있는 벽돌(銘文塼)은 313년에 해당하는 것인데 이와 동일한 형태의 장수산성 안의 제1호 건물지와 산성 밑에 있는 월당리 건물지의 적색기와층에서도 출토되고 있어 장수산성의 축조년대가 4세기 초엽임을 밝혀주고있다.
(3)백제(百濟) 근초고왕(近肖古王)의 고국원왕 죽임과 안악(安岳) 3호분
고구려의 고국원왕은 371년에 이곳을 공격한 백제(百濟) 근초고왕에 의해 전사 당하였다. 북한(北韓)의 전주농은 안악 3호분이 규모가 가장 크고 벽화의 행렬도(行列圖)에 동원된 인원도 500여명에 달하는 거대한 것이며 벽화의 주인공은 왕만이 쓰는 백라관(白羅冠)을 썼으며 기치에는 왕을 나타내는 "성상번(聖上幡)"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뽈때 이것이 왕릉임을 알수 있어 이무덤을 미천왕능(美川王陵)으로 보고있다.
그러나 남한의 김원룡(金元龍)은 이것을 "동수묘( 冬壽墓) "로 보았는데 그것은 묵서명(墨書銘)에 나타난 "영화(永和) 13년"이 동진(東晋)의 년호로 357년을 나타내고 있으며 평양지방의 낙랑군이 313년에 고구려에게 멸망 당한 후에도 이곳에 남아있던 중국계의 세력에게 위임 통치되었다고 보았다. 이무덤은 이러한 낙랑고토의 주민들에 의해 구축된 무덤으로 336년 전연(前燕)의 모용인 휘하에 있다가 고구려(高句麗)로 투항해온 동수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최근 북한의 박진욱(朴晋煜)은 4세기초엽에 고구려의 남평양으로 건설된 장수산성(長壽山城)의 발굴로 인하여 이고분의 주인공을 남평양(南平壤) 건설의 주역인 고국원왕(故國原王)으로 볼수있음을 강조 하였다. 그리고 북측 장하독(帳下督)의 머리 위에서도 묵서를 발견하였는데 원래 20여자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안(安)", "호(好)", "유(遊)" 등의 3글자 만을 확인 하였다. 이것은 남측 장하독인 동수( 冬壽)의 묵서와 아울러 같이 쓰여진 것으로 이무덤이 동수묘가 아님을 확인 시켜주고 있다.
왜냐하면 평양(平壤)지방에서 출토된 "영화9년(永和九年:353) 3월 10일 요동한현도태수영동리조"의 벽돌은 동수( 冬壽)가 죽기 4년전의 것인데 주인공인 동리( 冬 利 ) 는 동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인물로 요동군(遼東郡), 현도군(玄 郡)과 관계있는 전연인으로 동수처럼 요동지방에서 고구려로 망명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무덤이 전축분(塼築墳)인 것을 보면 동수묘도 전축분이여야 하는데 안악3호분은 고구려의 전형적인 석실본토분(石室封土墳)으로 동리묘와는 전혀 달라 이무덤이 동수묘가 될수 없음을 알수있다.
그리고 한번 약탈 당한 미천왕(美川王)의 시신을 수도의 곁에 묻지않고 사이가 좋지않은 백제(百濟)와 가까운 안악 땅에 내어다가 묻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아 미천왕능으로도 볼수 없다. 더구나 동수는 미천왕이 죽은지 5년이 지난 후에야 고구려로 망명해와서 미천왕과는 전혀 관계가 없고 도리어 고국원왕(故國原王) 6년 고구려로 망명해와 22년간을 지낸 후에 고국원왕 27년에 사망하였다. 그는 고국원왕 때에 전연이 환도성이 함락하고 미천왕능이 파해쳐 그 유체를 가져가자 전연(前燕)으로부터 그것을 돌려받는데 큰역활을 하여 고국원왕의 총애를 받아 장하독(帳下督)이란 관직에 임명되었다.고국원왕 전연을 쳐서 복수를 하여 점령할 경우 그를 낙랑, 현도, 창여, 대방의 4군의 장관에 임명하고자 약속하였다고 생각되는데 그가 죽은 후에도 그의 공로를 잊지않고 자기의 분묘에 자기의 분묘에 생존시 자기와 관계가 있던 장하독 동수( 冬壽)를 남측에 묘사한 것이다.
또 그는 고국원왕은 "국원왕(國原王)", "강상왕(岡上王)"으로 불리웠졌는데 충주(忠州)가 "국원성(國原城)"으로 불리웠던 것을 참고로 한다면 그가 묻힌 "고국원(故國原)", "국원(國原)"은 집안이 아니라 안악(安岳)지방이였음을 밝혔다.왜냐하면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 평양과 함께 이곳만 11기의 벽화고분(壁畵古墳)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안악 2호분(5세기말)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4세기에 편년이 되고있어 그당시 이곳이 고구려의 남평양이였던 장수산성과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볼수있다.
안악지방과 장수산성의 관계는 평양(平壤)과 강서지방과의 관계와 같은데 각각 90리의 거리에 있다. 왜냐하면 강서(江西)에는 강서3묘를 비롯하여 왕릉급의 벽화고분과 그외에도 큰 규모의 벽화무덤이 여러개 있는데 이와같이 안악은 장수산의 후방으로 구월산성(九月山城)이 있어 군사적으로 안정되고 수륙교통이 편리한 곡창지대로 고인돌을 비롯해 원시 및 고대유적이 있어 일찍부터 문화가 발달된 곳이기 때문이다.
손영종(孫永鐘)도 고구려가 247년에 평양(平壤)에 부수도(副首都)를 설치한 후에 4세기초엽에 장수산성을 예성강 이북의 중심지로 건설하였는데 이성의 아래에는 대도시유적이 발굴되어 이곳이 백제(百濟)가 371, 377년에 공격한 남평양(南平壤)으로 보았으며 그 전투에서 전사당한 고국원왕(故國原王)의 능이 바로 안악(安岳) 3호분임을 밝혔다.
허순산은 이 고분의 동쪽 능선 500미터 지점에 있는 유실된 고구려 고분(古墳)자리에서 금귀걸이 하나를 발견하였다. 이것은 고구려의 귀걸이로써 굵은 고리와 고리아래에 직접 입체형드림 장식을 가진 첫째형태, 얇은 금판을 접어 만든 기본고리 아래에 가는 고리를 연결하고 거기에 간단한 입체형 드림 장식을 한 둘째형태, 기본고리 아래에 꽃바구니 장식을 꿰고 그밑에 입체적인 것과 평면적인 드림장식을 연결한 셋째유형의 고구려의 3가지 유형(類型)의 귀고리 중에서 형식과 수법이 둘째유형과 같지만 드림장식에서 가운데 꽃바구니장식은 셋째유형과 같다. 고구려시기에 큰 왕릉급 무덤 근처에는 작은 무덤들이 많이 분포되어있는데 이러한 무덤들에 묻힌자들은 큰무덤(안악 3호분)의 주인공과 인연이 있는 것이였음을 알수있다.
필자(筆者)는 고국원왕이 소열제(昭列帝), 쇠열제(釗烈帝) 등의 황제(皇帝)로 불리워졌음을 확인하여 그것이 고구려 석실묘(石室墓)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안악3호분의 규모와 걸맞는 칭호라고 생각하며 그가 남평양인 장수산성을 건설한 장본인으로 이곳에 묻힌 것을 당연하다고 본다.
5.고국원왕 전사후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의 전쟁
고구려는 375년에 백제의 수곡성(水谷城)을 치나 패하였는데 수곡성은 현재의 황해도 신계(新溪)이다. 376년 백제의 북변을 치자 377년에 백제가 3만으로 평양(平壤)을 쳐들어왔고 10월에 백제를 쳤다. 389년 백제가 쳐들어와 남변을 노략을 노략질을 하고 돌아갔다. 390년 9월 백제의 달솔 진가모(眞嘉謨)가 도압성(都押城)을 파하여 200인을 사로 잡았갔다.
이당시 고구려와 백제의 전투는 예성강을 중심으로 수곡성인 신계와 남평양인 신천을 중심으로 황해도(黃海道)지역에서 이루어졌음을 알수있다.
6.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의 백제(百濟) 공략과 평양지방
(1)백제 관미성(關彌城) 공략
392년 7월에 고구려의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은 백제를 쳐서 석현(石峴) 등 10여개 성들을 빼았았고 그해 10월에는 북쪽의 요충지인 관미성(關彌城)까지 빼았았다. 윤일녕(尹日寧)은 오두산성(烏頭山城)을 관미성으로 비정하고 그 탈환작전이 접근로를 통해 20여일간 공격한 끝에 탈환하게 된 것을 오두산성 부근의 모식도를 통해 밝혔다. 그것은 고구려가 한강을 경유하는 백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검단산(黔丹山:151m)과 한록산(漢麓山:101m)을 빼았아 포위망을 구축한 후에 3개는 오두산성의 북쪽 능선으로 연결된 100미터 정도 고지(高地)의 북쪽을 공격하고 2개는 고지와 오두산성을 고립시키기 위해 연결부를 양쪽방향에서 공격하여 고지를 점령한후 능선(稜線)을 타고 오두산성 북쪽을 공격하면서 두개의 방향은 오두산성의 동서, 서남쪽 방향에서 견제 공격을 하여 백제군의 방어력이 북쪽에 집중되지 못하게 하고 함락시킨 것으로 추정하였는데 이것은 매우 타당한 견해라고 본다. 통일전망대를 조성하면서 오두산성을 경희대학에서 발굴하였을 당시 필자(筆者)가 답사하여 보았는데 동북쪽 사면에 나타난 성벽은 세겹의 층으로 나타나 있어 적성의 칠중성(七重城)과 같이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양천의 관산토성(關山土城:일명 宮山土城)이 행주산성과 마주보면서 한강의 수로를 차단하는 빗장의 역활을 하였기 때문에 "빗장 관(關)"자를 사용한 것을 보면 이곳이 바다에서 조강을 통해 들어오다가 임진강과 한강으로 갈라져 들어오는 공을 차단하는 곳으로써 "빗장 관(關)"자를 사용하였음을 알수있다.
(2)백제(百濟) 수도 한성(漢城)의 함락
{광개토대왕비문(廣開土大王碑文)}에 보면 백제와 신라는 옛부터 고구려의 신민이었는데 신묘년(辛卯年:391)에 백제와 왜가 연합하여 신라(新羅)를 쳐서 신민으로 삼자 6년 (306)년에 대왕은 육군과 수군의 두방향으로 나누어 한강(漢江) 이북의 18성과 한강 이남인 후방의 40여성을 빼았는데 대왕(大王)은 아리수(阿利水:한강)를 건너 백제의 도성인 한성(漢城)을 함락시켜 아신왕(阿辛王)으로 부터 남녀 천여명과 세포 천필을 받고 또 그로부터 노객(奴客)이 되겠다는 서약을 받은 후에 백제왕의 아우와 대신(大臣) 18명을 데리고 개선하였는데 이때 58성 700촌락을 취하였다.
{환단고기(桓檀古記)}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에는 대왕 스스로 바다를 건너 왜를 격파하였는데 왜(倭)는 백제의 보좌로 백제(百濟)가 왜와 밀통하여 그들로 하여금 신라(新羅)의 경계를 계속하여 침범하게 하였다.대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임천(林天:부여군 임천면), 규산(蛙山:보은), 괴구(槐口:괴산), 복사매(伏斯賣:영동), 우술산(雨述山:대덕), 진을례(進乙禮:금산,무주), 노사지(奴斯只) 등의 성을 공격해 차지하고 가는 길에 이른 아침에 속리산(俗離山)에서 제천(祭天)을 하였다고 하였다. 박성봉(朴性鳳)도 비문에 나오는 수묘인(守墓人)의 출신지와 비교하여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쳐서 차지한 58개의 성이 경기도(京畿道)와 충청도(忠淸道) 지역에 분포되어있음을 밝혔다.
필자(筆者)는 비문의 내용을 미루어 보아 광개토대왕은 5(396)년 군사를 두 방향으로 나누어 한 방향은 한강인 아리수를 건너 한성(漢城)을 공격하고 다른 하나는 대왕(大王)이 직접 주력인 수군(水軍)을 이끌고 관미성을 출발하여 백제의 후방인 금간(錦江)을 거슬러 올라와 북상하여 배후의 퇴로를 차단하고 도성을 포위 강타하여 아신왕으로 부터 항복을 받아내어 58개성을 점령한 것으로 본다.
[고구려국본기]에는 광개토대왕이 마리산(麻利山)의 참성단에 삼신(三神)에게 친제(親祭)를 하였는데 천악(天樂)을 사용하였다고 한것을 보면 이 당시 백제가 강화도를 고구려에게 빼았겼음을 알수 있다.
(3)고구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의 왜국(倭國) 경략
광개토대왕 영락(永樂) 9년(399) 에 백제가 서약을 어기고 왜(倭)와 통호하니 백제를 방비하기 위하여 대왕이 평양(平壤)으로 순시하였다. 이때 신라(新羅)의 사신이 와서 왜가 신라를 쳐들어오니 구원하기를 요청하였다.
그래서 영락 10년(400)에 대왕(大王)이 보병과 기병을 5만을 파견하여 신라(新羅)를 구원하고 왜를 쫓아 임나가라(任那加羅)에 이르러 안나인(安羅人)을 술병(戌兵)으로하고 시라성(始羅城)과 도성(都城)을 쳐 궤멸시키자 항복하였다. 그들이 다시 싸우려고 훼(喙),기탄(己呑),탁순(卓淳)등과 모의하여 병사를 일으키자 관병이 곧바로 탁순(卓淳)을 취하고 좌군(左軍)은 담로도(淡路島)로 하여 단마(但馬)에 이르고,우군(右軍)은 난파(難波)를 지나 무장(武藏)에 이르르니 대왕께서 곧 바로 배로 건너 축사(筑斯)를 공격하니 여러적들이 무너지매 그들을 나누어 군국을 삼고 안나인(安羅人)을 술병(戌兵)으로 하였다. 이에 신라(新羅)의 왕이 조공을 했다.
14년(404년) 왜(倭)가 대방(帶方)지역을 침입하여 약탈하고 석성도(石城島)로 부터 배를 연이어 띄워 바다를 덮으니 대왕이 노하여 평양(平壤)의 군사를 곧바로 보내 싸우게 하였다. 적을 깨치자 패하여 죽은 왜구의 수가 셀수 없었다.
{일본서기(日本書記)} 이중(履中) 5년(404)조에는 "축자국(築紫國)에 자리한 삼신(三神)이 궁중에 나타나 말하되'왜 나의 백성을 빼았아가는냐 나는 너를 참사하게 할 것이다'라하고 바람같은 소리가 있어 공중에서 외쳐가로되'검도태자왕(劒刀太子王)이다'라고 했고 뒤이어 천황이 담로도(淡路島)에서 사냥하였고 황비가 죽었다. 이해 10월에는 축자(築紫)의 차지부(車持部)를 파하고 그 땅을 모두 삼신(三神)에게 주노라"하였는데 검도태자왕이나 삼신은 고구려의 호태왕(好太王)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도 "난파연은 고구려국의 호태왕에게서 나왔다(難波連,出自高麗國,好太王也)"이라 하여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이 신라를 침공한 왜(倭)를 쫓아 일본의 구주(九州)를 차지하고 본주(本州)를 침공하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 당시 이중천황(履中天皇)은 담로(淡路)에서 싸우다가 황비(皇妃)가 전사 당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이러한 고구려(高句麗) 세력의 진출로 5세기에는 구주(九州)의 일부에 횡구식(橫口式),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1972년 나라현(奈良縣) 비조촌(飛鳥村)에서 발견된 다까마스(高松) 고분은 고구려 계통의 벽화(壁畵)가 그려져 있었고 1975년 나라현 조일향촌(朝日香村)에서도 고구려 계통의 고분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고구려(高句麗)의 광개토대왕은 400년에 왜를 쳐서 대마도와 구주지역에 임나연정을 설치하고 405년에 이중천황을 제거한 후 406년에 고구려 계통의 반정천황(反正天皇)을 세운 영향으로 본다.
(4)평양(平壤)의 9사(九寺)의 건립,남변(南邊) 7성의 축성(築城),예성강(禮成江) 부근의 청자도요지(靑磁陶窯址)
고구려의 불교는 전진(前秦)의 왕인 부견이 372년에 순도를 소수림왕에게 보냄으로서 전파 되었는데 374년에 아도가 왔고 375년에 고구려가 초문사와 이불란사를 지었다. 이당시 백제에 대해 항복을 받아냈던 광개토대왕이 393년에 평양(平壤)지역에 9개의 절을 지은것을 보면 이곳을 매우 중요시 여겼음을 알수 있다. 그런데 경남 의령(宜寧)에서 1963년 7월에 발견된 연가 7년의 불상은 현재까지 알려진 한국의 불상(佛像) 중에서 가장 오랜된 것으로 그 명문(銘文)을 보면 "연가(延嘉) 7년 기미년(己未年)에 고구려국 낙랑(樂浪)의 동사(東寺)에서 주지(住持) 경과 그 제자승인 연 등 사제 40인이 힘을 합해 현겁의 천불(千佛)을 만들어 세상에 유포키로 하였는바 금년에 만든 이 29번째의 불상은 비구 도영이 출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고 하였다. 김원룡(金元龍)은 연가(延嘉) 7년을 고구려 안원왕(安原王) 9년인 539년으로 보았는데 이 불상은 고구려가 낙랑인 평양지방에 9사를 지을 당시 동쪽에 건립한 사찰인 동사(東寺)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알수 있다.이당시 이절외에도 영명사지(永明寺址), 정릉사지(定陵寺址), 금강사지(金剛寺址) 등이 이 당시 건립되었던 절터로 추정되고 있다.
고구려는 394년 7월에 백제(百濟)가 쳐들어오자 왕이 정기 5천을 거느리고 격파하였고 9월에 국남(國南)에 7개성을 쌓아 백제에 대비하였는데 395년에 왕이 백제와 패수(浿水)에서 싸워 대파하였다. 이것은 고구려가 예성강 이북에 성곽을 배치함으로서 북진하려는 백제의 세력을 차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 황해도 평산군(平山郡) 산성리에 있는 태백산성(太白山城)으로 이곳은 험한 산세와 하천을 이용하여 쌓은 포곡식의 산성으로 서쪽으로는 서흥, 사리원, 평양과 통하고 남으로는 금천, 개성, 서울로 통하는 요충지이다. 이성은 둘레가 2425미터, 높이가 7미터로 동쪽은 예성강에 면하여 있는데 성내에는 수원이 풍부하여 여러 연못이 남아있고 창고 등의 건물지가 나아있다. 그리고 황해도 봉산군의 녹과산에 있는 휴류산성(休鳥留鳥山城)은 이곳이 본래 고구려의 휴암군로 성내에서 출토되는 와편과 장방형의 절석을 이용하여 들여 쌓기한 축성법은 고구려성임을 알 수 있다. 신막에 있는 대현산성은 고구려의 오곡군을 지키던 산성으로 둘레가 7000m의 큰성으로 394년에 축성된 7개 의 성중 하나로 고구려 시기 군소재지의 도시구성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유적이다. 그외에도 태봉산성, 안악의 구월산성 등이 있다.
최근 북한의 김영진(金榮搢)은 황해도 봉천군(峰泉郡) 원산리(圓山里)에서 발굴된 청자(靑磁)요지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이것은 1, 2, 3, 4 요지(窯址)가 있다고 한다. 이중에 제 2호요지에서 발견된 청자는 고려(高麗) 정종능(定宗陵)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데 정종능의 하한년대는 9449년이다. 또 제 4호요지에서 발견된 고배(高杯)의 각부(脚部) 밑면에는 "순화3년임진태묘제4실향기근공왕공탁조(淳化三年壬辰太廟第四室享器近王公托造)"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고려초기자기(高麗初期磁器) 중에서 대표적이고 유일한 "순화4년계사태묘제1실향기장최길회조(淳化四年癸巳太廟第日室享器匠崔吉會造)"의 기년명을 가진 이화여자대학(梨花女子大學) 소장의 것과 같다. 이것이 태묘(太廟)인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묘 제일실의 제사기(祭祀器)임을 알 수 있는데 위으 명문 중에서 "최길회(崔吉會)"나 "왕공탁"은 이것을 만든 장인(匠人)들의 이름으로 이곳에서는 "왕공탁(王公托)"외에도 "이미거(李味巨)", "심기(沈祁)", "심규(沈圭 )", "최금만(崔金蔓)", "최금항(崔金恒)" 등의 장인명이 들어 있는 청자편이 나오고 있어 이화여자대학 소장의 것도 이곳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알수 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만들어진 청자는 고려의 정종능, 태묘등의 중요한 곳에 쓰여졌던 것이다.
제1호요지에서 출토된 도기(陶器), 옹(瓮)과 같은 것이 평양시 대성구역의 안학궁지(安鶴宮址)에서 나오고 있어 원산리 제1호요자는 안학궁이 존재한 427년-586년 사이로 추측된다. 이곳에서 출토된 반구장경도기호류(磐口長頸陶器壺類)와 자기류는 길림성 집안현 동대파(東大坡)의 석실봉토분365호분과 우산묘군(禹山墓群) 기단적석총 M3315,충남 천안군(天安郡) 성남면 화성리,서울시 석촌동(石村洞)과 몽촌토성(夢村土城) 유적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것으로 현 사학계가 이것들을 4-7세기에 중국으로 부터 들어온 것으로 말한 것은 그와 같은 자기 요지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와 같은 형태의 도자기의 산지가 원산리(圓山里)에서 발견됨에 따라 이러한 견해는 수정되어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와같은 형태의 유물이 최근에 새로 발견된 봉천군(峰泉郡) 봉암리요지(鳳岩里窯址)에서도 알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도기를 기본으로 하고 자기도 일부 생산하던 것으로 여기에서는 반구장경도기호와 나팔형구호 등이 나와 원산리 1호요지의 것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이 요지의 상면(床面)에서 청자발(靑磁鉢),명(皿) 등 청자편이 나오고 있는데 이것은 반구장경호 등의 도자기를 만들었을때에 이미 청자도 만들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원산리1호요지와 봉암리요지의 것은 중국에서 들어왔다고 생각해온 것들과 같을 뿐만아니라 안학궁지(安鶴宮址)에서 출토되는 것과 공통되는 점이 매우 많다. 목탄(木炭)의 방사선탄소년대 측정한 결과 원산리1호 요지의 것은1438+-88(512+-88년),봉암리의 것은 1294+-115(656+-115년)이다.
일제시대에는 자기(磁器)의 생산을 고려(高麗)시대로 잡고있으나 발해(渤海)의 상경 용천부에서 백자편과 경주(慶州)의 안압지에서 청자편이 발견되어 남북국시대에 자기가 생산되었다고 생각해왔다. 부여(扶餘)의 부소산성에서는 청자 윤화발, 익산(益山)의 미륵사에서는 11변의 백자윤화명, 경주 황룡사(皇龍寺)의 목탑심초하에서는 백자환호, 공주(公州)의 무녕왕능에는 백자등잔이 나왔다. 이러한 것들을 중국에서 들어온 것으로 보아왔는데 이것과 완전히 같은 형태의 질 높은 자기가 원산리 요지에서 많이 출토되어 외국의 것이 아니라 국내에서 생산된 것임을 알수 있다. 더구나 만포시(滿浦市) 연상리 2호묘군 7호분의 고구려(高句麗) 초기의 무기단적석총에서 백자편3점이 나왔고 집안(輯安)의 적석총에서도 회백색의 원시자기류가 출토 되었는데 백자편(白磁片)이 원산리 요지와 안학궁지에서도 출토되었다. 다시말해서 이러한 자기류가 중국에서 수입된 것이 아니라 국내에서 생산된 것으로 그 시작이 삼국시대(三國時代)였음을 알 수 있다.
박종숙(朴種淑)도 가원도 원성군 부론면 법천리,서울 석촌동, 충남 천안군 성남면 화성리, 전북 익산국 웅포면 입점리, 공주 무년왕능 등 백제(百濟)에서 발견된 청자, 백자등의 자기를 중국의 월주요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는 것에 대해 강하게 반박하였다.
7.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의 평양(平壤) 천도와 안학궁(安鶴宮),대성산성(大聖山城)의 축조
고구려(高句麗)의 장수왕은 427년에 수도를 만주의 집안(輯安)에서 평양으로 천도를 하였는데 현재 북한에서는 이당시 사용한 평지성인 안학궁터와 피난시 사용한 대성산성을 발굴하였다. 그런데 안학궁성(安鶴宮城)은 남북과 동서의 길이가 각각 약620m의 네모난 평면으로 그 안에는 남북방향의 3축을 기준으로 건물을 배치하였는데 이것의 중앙의 중심축에는 남쪽으로 부터 외전(南宮), 내전(中宮), 침전(北宮)등의 구역을 차례로 배치시키고 남궁인 외전의 동쪽과 서쪽에는 각각 같은 규모의 동전,서전을 두어 중심축 기준의 완전 대칭 형식이 되었다. 그리고 궁궐의 동북쪽에는 별도로 동궁(東宮)이 있고 이 건물의 앞에는 정원(庭園)이 있으며 북궁인 침전의 뒷편 북쪽에는 인공의 조산(造山)을 만들어 후원 시설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대성산성(大聖山城)은 평양 중심지에서 동북쪽 약12에 위치한 묘향산(妙香山) 줄기의 지맥인 대동강(大洞江) 북쪽의 을지봉을 비롯한 6개의 봉우리를 연결하여 축조한 포곡식 산성이다. 이성은 동서 2.3km, 남북1.7km로 성의 밖같은 석축(石築)으로 쌓았고 안쪽은 흙으로 채웠으며 성에는 치(雉)가 설치되어있고 19개의 문지가 확인되었는데 남문(南門)은 소문봉과 주작봉에서 내려오는 성벽이 마주치는 골짜기의 평지 중앙부에 있는데 이러한 만문지 주변의 성벽은 2중으로 되어있다. 성안에는 2개의 큰 계곡을 가지고 있으며 170여개의 연못을 확인하였다.
8.장수왕의 백제(百濟) 수도 함락과 개로왕(蓋鹵王)의 죽음
평양(平壤)으로 천도한 고구려의 장수왕은 455년, 469년에 백제(百濟)를 쳤다.그리고 475년에는 전날에 개로왕(蓋鹵王)의 왕권 강화책에 불만을 품고 고구려로 달아난 귀족인 재회걸루(再會桀婁), 고이만년(古爾萬年)을 앞세운 고구려가 백제 도읍인 한성(漢城) 중에서 북성(北城)인 하남위례성을 7일간 공격해 함락시키자 남성(南城)인 남한산성으로 옮겨 격전 끝에 개로왕은 서쪽으로 달아나다가 잡혀서 아차성(阿且城)으로 끌려가 죽는다.
이당시 태자인 문주(文周)는 신라(新羅)에 구원을 요청해 1만의 군사를 얻어 돌아오나 이미 한성(漢城)이 함락 되었으므로 도읍을 웅진(熊津)으로 옮기므로서 백제의 한성시대는 막을 내리고 만다.
이당시 고구려가 한강(漢江)유역을 장악하게 된 사실을 증명해 주는 유뮬로는 고구려 장수왕 때에 건립된 남한강 상류인 중원군의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와 한강변의 구의동(九宜洞)의 고구려 유적과 몽촌토성에서 발견되는 광구장경사이옹류(廣口長頸四耳甕類)와 같은 고구려 토기가 있다. 평양을 수도로 하고 있던 고구려는 북쪽의 국내성과 같은 기능의 "국원성(國原城)"을 최남단인 충주(忠州)에 설치 운영하였는데 이것은 충주가 고구려 남진(南進) 정책의 매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9.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신라(新羅)의 충돌
495년에 고구려(高句麗)가 백제(百濟)의 치양(雉壤)을 치자 신라가 도와 주었다. 그리고 신라 소지왕 때의 기록을 정리해보면 고구려가 3년(481)에 말갈(靺鞨)과 함께 신라(新羅)의 북변을 쳐서 호명(狐鳴) 등의 7성을 취하고 다시 미질부(彌秩夫)로 진군하므로 백제(百濟), 가야(加耶)의 구원병을 얻어 그들을 쳐서 추격하여 니하(泥河)의 서쪽에서 파하여 천여급을 참수하였다. 6년(484)고구려가 신라의 북변을 치자 백제와 함께 모산성(母山城)에서 대파하였다. 11년(489)에는 고구려가 신라의 북변을 쳐서 과현(戈峴)에 이르러 호산성(狐山城)을 함락하였다. 16년(494)에 장군 실죽(實竹)이 살수원(薩水原)에서 고구려와 싸워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 견아성(犬牙城)을 지키매 고구려가 이를 에워쌓자 백제(百濟)가 구원병 3천을 보내 구해 주었다. 18년(496)에 고구려가 우산성(牛山城)을 쳐들어 오자 장군 실죽이 니하(泥河)에 출격하여 그들을 격파하였다. 19년(497)년에 고구려가 우산성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이것은 안성천(安城川) 이북의 한강 유역과 청주, 진천, 음성, 충주, 영월, 단양, 제천과 강릉이북을 점령한 고구려가 백제보다는 신라를 계속 공격해 들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신라(新羅)는 내물왕 37(392)년에 고구려가 강성 하므로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볼모로 보냈다고 다시 실성왕 11년(412)에 내물왕의 아들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는데 이때가 바로 광개토대왕 당시이다.
그리고 {삼국사기(三國史記)},지리지를 참고하여보면 고구려는 백제쪽으로는 직산, 양성, 안성, 일죽, 진천, 음성, 괴산, 충주까지 차지하고 신라(新羅)쪽으로는 울진, 영덕, 영일, 봉화, 영주의 순흥, 안동, 청송, 영천의 예안까지 차지하였음을 알수 있다.
경주(慶州)의 호우총(壺木于塚)에서 출토된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에 대한 명문이 있는 청동합(靑銅盒)과 서봉총에서 출토된 고구려 연수원년(延壽元年)의 명을 가진 은함, 건흥(建興)4년을묘에 세워진 중원고구려비문에 의하면 신라영토 안에 파견된 고구려 군사인 당주(幢主)라는 뜻의"신라토내당주"라는 문구와 충주 노은면에서 발견된 불상에는"건흥(建興)5년세제병진"이라는 명문이 있는데 {환단고기},[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에는 "장수흥제호태열제는 건흥(建興)으로 개원하고 강토를 회척하여 웅진강 이북을 다 차지 하였는데 신라(新羅) 매금(寐錦)과 백제(百濟) 어하라(於瑕羅)가 남평양(南平壤)에서 모여 납공과 수병의 수를 약정하였다"고 하였는데 현사학계에서는 이것을 모르고 건흥을 문자왕(文咨王)의 년호로 보고 있다. 앞책에 따르면 문자호태열제의 년호는 명치(明治)로 되어있다. 즉 건흥 4년을 을묘(乙卯)년으로 장수왕이 백제의 한성을 함락하고 개로왕(蓋鹵王)을 죽인 475년으로 추정되며 건흥 5년은 병진(丙辰)년으로 그 다음해인 476년이 된다. 그런데 현사학계에서는 이 불상(佛像)을 백제의 것으로 오인하여 건흥을 백제(百濟)의 년호로 보고 있으나 필자는 위와 같이 종합적으로 검토해본 결과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때의 것임을 확인 할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이 백제와 신라를 제압하고 중국의 유주(幽州)지역을 차지한 고구려는 모두루묘지명(牟頭婁墓誌銘)에서 "천하사방지차국향최성향(天下四方知此國鄕最聖鄕)"이라 한것과 같이 자기들이 살고 있는 차국향을 최성향이라하여 천하(天下)의 중심지(中心地)요 문화의 중심지로 인식하게 되었다.
10.백제(百濟) 무녕왕(武寧王)의 북진(北進)과 고구려(高句麗)의 패퇴(敗退)
무녕왕 1년(501)에 그는 달솔 우영으로 고구려(高句麗)의 수곡성(水谷城)을 치게 하였는데 {삼국사기(三國史記)},고구려본기 문자왕 12년에도 백제가 수곡성을 쳤다고 하였다. 그러나 현사학계에서는 이것을 무시해 백제가 웅진(熊津)으로 천도하여 멸망할 때까지 북진하지 못한 것으로 못박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백제가 황해도의 신계까지 북진하여 옛강역을 회복한 것으로 {양서(梁書)},백제전에 무녕왕이 521년에 남조(南朝)인 양(梁)나라에 사신을 보내"여러번 고구려에게 파멸당했다가 이제와서 비로소 함께 좋게 지내기 시작했고,백제는 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다(累破句驪,今始督通好,而百濟更强國)"이라고 하여 고구려의 세력을 무력으로 격퇴하고 강국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대외에 천명하였다.그리고 공주 무녕왕능의 묘지명에 황제(皇帝)만이 쓰는 "붕(朋)"을 쓰고 있고 그의 시호(諡號)가 무력으로 편안함을 누렸다는 뜻의 "무녕"이였다는 것 등은 음미해 봄직하다.
무녕왕 2년에 고구려의 변경을 치자 3년에 말갈이 마수책(馬首柵)을 태우고 고목성을 쳐들어오므로 5000천으로 격퇴하였고 6년에 말갈이 고목성(高木城)을 쳐들어와 600을 살상하였다. 고구려가 연천과 포천 쪽을 공격해오자 백제는 무녕왕 7년에 고목성 남쪽에 두개의 책을 세우고 장령성(長嶺城)을 쌓아 말갈에 대비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고구려본기 문자왕 16년에 왕이 고노로 하여금 말갈과 함께 한성(漢城)을 치려고 황악(橫岳)의 밑에 주둔하였다가 격퇴당하였는데 이것은 고구려 군이 한성인 광주지역을 목표로 하였음을 알수 있어 백제의 주력이 한성에 주둔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하여 이곳은 전일의 수도로서가 아니라 웅진(熊津)시대에 있어서 최북방(最北方)의 요새(要塞)로 화하게 되었다.
무녕왕 12년에 고구려가 가불성(加弗城)을 공취하고 원산성(圓山城)을 깨트리자 기병 3000으로 위천(葦川)의 북에서 격파하였는데 고구려가 다시 연천쪽으로 공격해 들어온 것으로 추가령지구대를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무녕왕 23년에 왕이 한성(漢城)에 행차하여 한수(漢水) 이북의 장정을 징발해 쌍현성(雙峴城)을 쌓게 하고 한성에서 돌아왔는데 21년인 양(梁)나라 무제 보통 2년에 사신을 보내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백제가 고구려에게 패하여 남쪽인 웅진으로 옮겼다가 다시 북진(北進)하여 한강(漢江)유역을 찾았으며 고구려의 공격을 계속 막아내는 강국(强國)이 되었음을 말한다. 성왕(聖王) 1년에 고구려가 패수(浿水)에 이르자 지충으로 이를 물리쳤다. 이것은 백제가 한성시대와 같이 예성강을 경계로 고구려와 대치하고 있음을 알 수있다.
11.고구려 안장왕(安藏王)의 재남진(再南進)
성왕(聖王) 7년에 고구려(高句麗)의 안장왕이 백제(百濟) 북변의 혈성(穴城)을 치자 연모가 3만으로 오곡원(五谷原)에서 싸우나 패하여 2000명이 죽었다고 하는데 {삼국사기(三國史記)},지리지를 참조하면 안장왕(安藏王)이 즉위하기 전에 고양군 지역을 미행하다가 한씨(韓氏)처녀와 정분을 통하였는데 그가 즉위한 후 그 처녀가 고봉산에 올라 봉화(烽火)로 신호를 하여 이곳을 빼앗기니 백제의 달을성현(達乙省縣)인 이곳을 고봉(高烽)으로 고치고 계백현이였던 행주는 왕봉(王縫)으로 바꾸었다. 그래서 고구려는 고양, 행주, 김포, 강화등을 점령하게 된 것이다.
{고양신문}에 정동일기자가 이지방에 내려오는 전설을 발굴 개제한 내용을 보면 안장왕이 미행하여 이곳의 한주라는 처자와 정을 통하고 동아가 즉위하였는데 그후 한주의 아름다움에 반한 이곳의 백제 태수가 그녀를 취하려 하나 말을 듣지 않으므로 하옥시켜 죽이려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안장왕은 이곳을 칠 장수를 널리 구하였는데 왕이 동생인 안학공주(安鶴公主)를 사모하고 있던 을밀(乙密)이 나서서 결사대를 조직하여 나서서 한주를 구하고 이곳을 점령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에 을밀(乙密)는 유리왕 때의 을소(乙素)의 후손으로 안장왕 때에 조의( 衣)가 되어 나라에 공을 세운 후 대(臺)를 세우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그를 따르는 3000의 무리를 모아 책을 읽으며 활을 쏘며 수련을 하였고 삼신을 노래하고 다물흥방의 노래를 제창하였는데 그를 기리기 위해 그곳을 을밀대(乙密臺)라 하였다고 한다.
북한의 박진욱(朴晋煜)은 황해도 신천의 장수산성은 고국원왕 시기인 4세기 후반에 남진기지로 설치한 남평양(南平壤)으로 그가 이곳을 순시하다가 백제의 공격에 의하여 죽었었다. 그후 고구려가 한강 유역으 백제를 공격해 충청북도 지방까지 차지한 후에는 경기도 양주지역으로 옮겼다. 평양성(平壤城)의 글자가 새겨진 성돌을 보면 "한성하후부(漢城下後部)"라고 되어있어 평양성이 축성된 6세기 후반에도 한성(漢城)이 존재하였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그러나 신라에 의해 한강 유역을 상실하자 현재의 황해도 하성(下聖)부근으로 다시 옮겨 한성(漢城)을 건설하였다고 하였다. 고구려 멸망후 검모잠과 함께 안승(安勝)이 후고구려국(後高句麗國)을 건설한 한성(漢城) 또한 바로 이곳이다.
12.백제(百濟) 성왕(聖王)의 고구려 공략
백제(百濟) 성왕은 29년에 신라(新羅)의 진흥왕과 함께 고구려를 쳐서 한강유역을 쳐서 남평양을 빼았았다. 이것은 529년 고구려의 안장왕의 공격으로 빼았긴 한강유역을 공격한 것으로 그는 국운을 쇄신하고자 도읍을 사비(泗 )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바꾸기도 하였다.
그리고 재위 7년에는 무녕왕(武寧王)이 율장을 구하기 위해 인도로 보낸 겸익(謙益)이 돌아왔는데 그는 율장을 구하기 위해 중인도(中印度)로 가서 그곳의 상가나 대율사에서 5년간 인도글을 배워 능통하게 되자 율장을 깊이 공부하여 계율에 통달하였다. 그리하여 인도승려 배달다 삼장과 함께 범어 원전 논장과 56부 율장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이에 성왕(聖王)은 우보 고취로 하여금 교외까지 나가 맞이하여 흥륜사(興輪寺)에 살게하고 나라 안의 명승 28인을 소집하여 겸익법사와 함께 율장 72권을 번역하게 하였다. 이어서 담욱, 혜인 두법사가 율장의 주석서 36권을 지어 왕에게 받치자 왕은 논장과 새율장의 서문을 써서 태요전에 이책을 보관하고 장차 판각하여 널리 배포하고자 했는데 미처 겨를을 내지 못하고 서거하였다.율장은 중국에서 이미 5세기에 번역되었는데 백제불교는 이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직접 인도로 건너가 구해다가 번역하여 해석까지 하였다. 이것은 성왕이 불교(佛敎)를 일으켜 전시의 민심을 미륵(彌勒)사상을 바탕으로한 계율(戒律)로서 수습하고 사상적 통일을 기한 군주였다.
13.신라(新羅) 진흥왕(眞興王)의 한강유역 진출과 백제(百濟) 및 고구려(高句麗)의 패퇴(敗退)
신라(新羅) 진흥왕은 553년에 백제가 되찾은 한강(漢江)유역을 빼았아 광주(廣州)지역에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김유신의 조부인 무력을 신주의 군주로 삼았다. 이것은 진흥왕이 552년에 백제와 동맹을 맺고 거칠부로 고구려를 쳐서 죽령(竹嶺)이북 고현(高峴)이남 10군을 빼았고 왕이 낭성(娘城)에 이르러 하림궁(河臨宮)에서 우륵의 가야금을 들었다. 현재 남아있는 단양적성비(丹陽赤城碑)와 서울의 북한산순수비(北漢山巡守碑), 이원의 마운령비(摩雲嶺碑), 함흥의 황초령비(黃草嶺碑)에는 당시 신라의 북진경로를 잘 대변해주고 있다. 그 중에서 마운령비와 황초령비는 진흥왕 태창원년(太昌元年:568)에 세워졌는데 거기에는 "짐(朕)", "제왕건호(帝王建號)", "순수(巡守)" 등의 글귀가 보이는데 그것은 중국 천자(天子)와 같은 제왕적(帝王的) 자부심을 실현하려는 의지를 과시하고 있음을 알수있다.
14.온달(溫達) 장군의 전사와 고구려(高句麗) 말기(末期)의 남변(南邊) 상황
고구려(高句麗)는 양원왕(陽原王) 8년에 현재의 평양성인 장안성을 축조하고 평원왕(平原王)은 28년에 장안성(長安城)으로 천도를 하였다. 이성은 1.6km로 동남은 대동강, 서측은 보통강이 삼면을 둘러 쌓아 해자의 역활을 하고 있으며 내성, 중성, 외성, 북성의 4구역으로 나누어 지는데 내성은 궁성,중성은 관아,외성에는 일반 백성이 있는데 이곳의 가로에 강자갈을 깔고 좌우에 배수로를 내는 등 도시계획에 의거해 조성되었다. 북성(北城)은 내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이성은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동성으로 사용하였다.
위와같이 안정된 도성체계를 구축한 고구려는 영양왕( 陽王)이 즉위한 590년에 신라에게 빼았긴 계립령(鷄立嶺)과 죽령(竹嶺)이서 땅을 치기 위하여 온달장군을 출정시키나 아단성에서 전사하고 만다. 그런데 고구려 온달장군(溫達將軍)은 한강유역의 아차성(阿且城)을 친것이 아니라 춘천-->홍천-->횡성-->원주-->제천-->영월-->단양으로 진출하여 영춘(永春)에 있는 온달산성에서 전사한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 서울의 아차산성(峨嵯山城)에는 온달과 관령된 지명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반면 이곳의 향토사학자 윤수경(尹洙慶)의 연구에 의하면 영춘의 온달산성(溫達山城) 주위에는 온달과 연관된 온달산성, 온달동굴(溫達洞窟),장군목(將軍項), 대진목(大陣項), 온포동, 공주굴(公主窟), 장수물(將軍水), 온달발자국, 분산골, 장방터, 이동산(移動山), 피바위, 진담, 쉬는돌, 망굴여울, 면위실(免危谷), 꼭두방터(上防垈), 중간방터, 아래방터 등의 지명이 산재하고 있고 또 영춘이 고구려 때에 "을아단현(乙阿旦縣)"으로 불리웠졌는데 "을(乙)"이란 "위(上)"의 뜻으로 남한강 상류의 윗쪽에 있는 아단성(阿旦城)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후 603년 고구려가 신라(新羅)의 북한산성(北漢山城)을 공격하므로 진평왕(眞平王)이 친히 일만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막았다. 608년 고구려가 신라의 우명산성(牛鳴山城)을 쳐서 빼았았다. 629년 신라가 용춘, 서현, 김유신을 보내 고구려(高句麗)의 낭비성(娘臂城)을 쳐서 빼았았다. 638년 고구려가 신라의 칠중성(七重城)을 치나 알천에게 패하였다.
이것을 보면 고구려는 백제로부터 한강유역을 빼았은 신라를 쳐서 청주(淸州)지역까지 밀고 내려갔으나 신라의 공격에 의해 다시 임진강(臨津江) 이북으로 밀려 올라갔음을 알수있다. 윤일녕(尹日寧)은 감악산(紺岳山)의 비석을 또 다른 진흥왕순수비로 보고있으며 {세종실록지리지},{여지도서},{신증동국여지승람},{연려실기술},{대동지지} 등에서는 철원(鐵原)의 고석정(孤石亭) 옆에는 진평왕(眞平王)의 비가 남아있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신라가 적성과 철원지역을 매우 중요시 여겼음을 알수있다.
642년에 백제(百濟) 의자왕에게 40여성을 빼았긴 신라(新羅)의 김춘추는 고구려로 들어가 구원을 요청하지만 고구려(高句麗)는 그들의 땅이였고 온달이 차지하고자 결심하고 출정하였다가 실패한 마목현(麻木縣)과 죽령(竹嶺) 이북의 땅을 요구하였다. 이렇듯이 고구려가 이당시 남진의 의지는 있었으면서도 수(隋),당(唐)과 맞서 싸우느라고 신라에 대해 강력한 남진책을 수행하지 못했다.그리고 백제(百濟)는 사비로 천도한 후에는 아산, 평택, 직산, 안성, 천안, 목천, 청주, 문의, 옥천으로 연결된 선을 북방 경계로 하여 신라(新羅)와 대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