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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안순환(安淳煥)과 조선유교회 | | | 일반게시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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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안순환(安淳煥)과 조선유교회
<안순환>에 대해서는 이미 친일파 명단에 들어있어 친일행각의 혐의를 벗을 수 없다는 건 명명백백하다. 하지만 초기 행적에는 의도했던 아니했던 민족주의자들과 은연중에 이어진 일련의 사건들이 존재하여 이 무렵에 교류한 인사들을 일률적으로 친일파라고 단정 짓기에는 애매모호한 상황들이 적지 않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태화관>에서 일어난 <독립선언문> 선포 상황과 <명월관>에서 내밀하게 이루어진 다양한 정황들은 물론 <단군교>와 맺어지는 가운데 <조선유교회>를 창립하기까지의 기간 중에 일어난 문제들이다.
안순환의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 독립선언문 낭독
1918년 황토마루 명월관이 화재로 소실되어 안순환은 인사동의 이완용 별장 태화정을 사서 명월관 분점을 내고 옥호를 태화관으로 고쳤다. 1919년 3월1일 오후 2시 태화관 2층에 민족대표가 모였다. 33인 중 일부가 빠진 상태에서 손병희의 제의로 한용운이 독립운동을 다지는 결의에서 짧은 인사를 한 뒤 모두 일어나 만세 3창을 했다. 그리고 태화관 주인 안순환으로 하여금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갖고 축배를 들었다는 사을 알리게 했다. 곧장 달려온 일인 경찰에게 민족대표들은 순순히 끌려갔다. 결국 태화관은 일제의 압력으로 문을 닫았다
정훈모의 단군교와 안순환의 조선유교회의 만남
단군교가 어떻게 하여 녹동서원(鹿洞書院)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교인들이 조선유교회와 인연을 맺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그 핵심은 이즈음 단군교주였던 <정훈모>에게 있다는 점을 반드시 명심하기 바란다. 그가 원래부터 유학자 집안으로서 자신도 유학에 일가견이 있던 인물이라는 데에 주목해야 한다. 사실상 총독부의 술책에 의한 내분과 억압으로 창립 당시 상당하던 교세가 위축되어 가던 상황(충남 맹산 평양 순천 덕천 경남 등 6개 지방지부로 축소)에서 <國祖 단군>에 대한 믿음과 관념체계에 감명을 받은 <안순환 安淳煥>이 단군전(檀君殿)의 건립과 재정적 지원을 전면적으로 뒷받침해주게 된 것이다.
-그는 마침 회갑(回甲)을 계기로 조상인 문성공 안향(文成公 安珦)의 유교도덕을 전교(典敎)하는 녹동서원(鹿洞書院)을 시흥군 동면 송녹동(始興郡 東面 松鹿洞)에 세울 것을 결심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국조단군을 봉안하는 성전(聖殿)을 건립하기를 제안한다. 이를 알게 된 단군교인들도 감격하여 만장일치로 자나 깨나 소망하였던 단군전 건립의 제의에 합의하였다. <안순환>의 지원에 따라 여태까지의 부진에서 벗어나 다시금 활발한 포교활동을 벌이는데 이 와중에 많은 단군교인들이 합류하면서 뜻을 같이한 청년들도 많이 모여들어 그 가운데 <이유립>이 차츰 돋보이는데 명교학원(明敎學院)에 들어와 修學하는 동안 같이 있던 단군교당(檀君敎堂)에 수시로 출입하여 면학과 연구에 증진하는 모습들이 두드러지게 된다.
- <안순환>이 말년에 심혈을 기울였던 <유학儒學의 전당殿堂> 건립이 계획된 시흥 녹동서원 안에 본전(本殿)인 단성전(檀聖殿)과 강당인 계신당啓新堂은 물론 정문인 승화문(承化門)과 제실(齊室)까지 갖춘 당당한 건축이었다.
- 이윽고 <단군교총본부>도 <단성전> 안에 옮겨와 이에 따른 토지*건물*비품 일체를 <녹동서원>에서 지원받으며 <서원>의 양대 축으로 발돋음하게 된다(1930. 10. 3 300여명이 참관하는 가운데 단성전 낙성식과 단군성상 봉안식 거행)
- 1931. 10 단군성전을 항구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단군신전봉찬회 檀君神殿奉贊會-단성전봉찬회 檀聖殿奉贊會>가 발족되었다.
여기에서 눈여겨 볼 것은 <단성전봉찬회> 취지서에 밝힌 구절과 어휘들이 같이 발족한 유학진흥을 위한 <명교학원>의 취지와 방향(人道大義, 大同光明, 正大光明, 天地人德) 속에서도 많이 발견되는데 이로보아 단군교와 유학의 공동발전이 <안순환>과 <정훈모>사이에서 깊이 논의되었음을 알 수 있고 이에 따라 두 교단에 서로 관련 人士들의 교류나 겸임(兼任-특히 儒學 쪽에 많다)은 물론 지부(支部)의 명칭(지교부支敎部) 등에서도 단군교의 사례를 취한 점이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아울러 <조선유교회>가 친일적인 요소 안에 민족주의적 성향을 동시에 갖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이러한 단군교와의 상호교류가 큰 영향을 끼쳤다고 여겨진다.
“上으로 성조재천聖祖在天의 위령威靈에 적장籍杖하며 下로 청구전족靑丘全※族의 효경孝敬을 합치하야 보본정시報本正始의 大禮를 광소光紹하며 崇天敬祖의 大義를 彰明코져 함으로써......神祖檀君은 우리의 수성首聖이요 조왕肇王이시라 人德이 天地로 함께 大하며 治敎-日月로 함께 明하시니 有史이래 半萬年에 이천만 함생含生의 무리가 생식번연生息蕃衍을 계계승승繼繼承承하야 독특한 문화를 건설하야 과거에 광영光榮잇든 생활을 ○久無强해 전하게 됨도 신조神祖의 창조수시創造垂示하신 바이며......”
【단군교】
- 교주 정훈모(鄭薰模- 찬의부 찬의사(贊議部 贊議士)와 유교회 측 산하단체인 모현사(慕賢社) 고문
- 강신한(姜信漢-단성전봉찬회원 겸 유교회 明理院 學士*찬의부 찬의사
권익상(權益相-大宣師*단성전봉찬회원 겸 유교회 明理院 理正*찬의부 贊議長)
김영달(金永達-대선사 겸 유교회 典敎部長
김영의(金永毅-평신도 겸 유교회 明敎部長*原職文學士)
김윤정(金潤晶-단성전봉찬회원 겸 유교회 明理院 法正)
김철윤(金喆允-단성전봉찬회원 겸 유교회 明理院 贊正*찬의부 贊議士)
김학조(金學祖-大宣師 겸 유교회 明理院 學士)
맹보순(孟輔淳-大宣師 겸 유교회 明理院 法正)
박연조(朴淵祚-단성전봉찬회원 겸 유교회 宗理司 司長)
백두용(白斗鏞-단성전봉찬회원 겸 유교회 찬의부 贊議士)
서재극(徐載克-大宣師 겸 유교회 明理院 學士)
심상희(沈相熙-大宣師 겸 유교회 明理院 贊正*찬의부 次席)
이범석(李範錫-단성전봉찬회원 겸 유교회 明理院 法正)
이병관(李炳觀-大宣師*단성전봉찬회원 겸 유교회 明理院 法正)
이상천(李相天-大宣師 겸 유교회 明理院 學正)
이종철(李鍾喆-大宣師*단성전봉찬회원 겸 유교회 明理院 學士*찬의부 贊議士)
장혁(張爀-大宣師 겸 유교회 찬의부 贊議士*明敎部 次席 및 講士)
전면조(全冕朝-大宣師*단성전봉찬회원 겸 유교회 찬의부 贊議士)
전성욱(全聖旭-단성전봉찬회원 겸 유교회 明理院 贊正)
조○규(趙○奎-大宣師 겸 유교회 찬의부 贊議士)
조종후(趙鍾厚-단성전봉찬회원 겸 유교회 찬의부 贊議士)
홍재호(泓在皥-大宣師*단성전봉찬회원 겸 유교회 찬의부 贊議士)
【대종교】
강기원(姜琪元-宣理部贊*大宣師*서무과장*단성전봉찬회원 겸 유교회 明理部 贊正*모현사慕賢社 서기)
문석열(文錫烈-贊敎*南一道本司 施敎員 겸 유교회 明理院 議正)
유진찬(兪鎭贊-贊敎*計理監正代辨*단성전봉찬회원 겸 유교회 明理院 法正)
지석영(池錫永-남도본사 贊敎*단성전봉찬회원 겸 유교회 明理院 法正)
최달빈(崔達斌-益善施敎堂 施敎員 겸 유교회 明理院 贊正)
※따라서 단군교와 조선유학회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탄생한 <일월시보>의 경학부 고문(經學部 顧問)인 민병식閔丙奭*정만조鄭萬朝*서상훈徐相勛*안인식安寅植 등은 모두가 친일 색채를 띤 경학원(經學院) 간부로서 이들이 [이유립]과는 그전에 만난 적도 없으며 다만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같은 동배나 동료로서 묶는 것은 이 무렵의 상황을 전혀 모른 채 그야말로 억지로 짜 맞추는 형국이니 一考의 가치조차 없다.
여기에서 눈여겨 볼 사안(私案)이 있다. 이렇듯 두 단체의 인물들이 서로 겸임을 하고 있었던 상황이 빈번하지만 이상스럽게도 일본사문회(日本斯文會)등과 함께한 친일적인 행사나 日帝와 관련된 시책추진에는 의도적이든 아니면 타의에 의해서건 대한유교회가 거리를 조금씩 두고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가운데 단군교 인사들의 참여가 두드러지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반드시 한번쯤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다.
- 곡부(曲阜) 공자묘 위문단 파견에 참가한 녹동서원 원장 李義○*同都監 安敎煥*민병석閔丙奭*이병관李炳觀*정만조鄭萬朝*지석영池錫永*이종철李鍾喆
- 동경대지진에서 소실된 탕도성당(湯島聖堂-일본 최대의 공자묘)재건 기념 <탕도성당부흥기념제전>에 간 정만조(경학원 대제학으로 조선 측 대표연설을 함)*정봉시와 유진찬(鄭鳳時와 兪鎭贊-경학원 부제학)*김원진(金元鎭-경학원 司成)*이상호(李尙鎬-경학원 講師)*황석룡(黃錫龍-경학원 平議員)*대한유교회 敎正 안교환(安敎煥)*宗理司長 박연조(朴淵祚)
- 19354. 4. 28 일본 동경사문회(東京斯文會)에서 개최한 <유도대회儒道大會>에 참석한 전국유림대표인 경북 이상호, 평안도 황석룡, 황해도 공재철
하지만 親日의 기운이 감돌던 <안순환>의 영향을 무시하지 못해-그리고 30년대부터 부쩍 심해진 조선 내 유사종교 감시감독의 책임기관인 총독부의 입김을 벗어나서는 생존이 어려운 상황에서-많은 총독부 관료들이 이 會의 간부로 명의를 내걸었다(이는 종교단체 가운데 민족주의적 색채가 짙은 주목할 만한 敎團의 경우 적극적으로 적용되었던 시책이다). 그러나 이들의 主 활동은 겸임을 하고 있었던 <대한유교회>의 조력(助力)에 치중하는 바람에 같은 녹동서원에 자리했던 단군교단에 대한 감시의 역할이 훨씬 비중을 두었는데 결국 남도본사에 속한 대종교 신도들이 대거 가입해오면서 단군교 측에서 적극 임원으로 발탁하여 은연중에 나름대로의 방책을 강구하자 단군사상이 사회적으로 확산되는 것을 우려한 총독부가 同會의 해산명령을 내리게 된다. 이렇게 흘러갔던 추세를 보아도 삿사 미츠아키(佐佐充昭)의 논문에서 주장한 親日의 색채 운운은 근거가 희박하며 미리 예정한 결론에 맞춘 견강부회적인 해석임을 알 수 있다.
- (총독부측 임원) 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박영효, 중추원 찬의 신석린申錫麟*윤갑병尹甲炳*이겸제李謙濟*김윤정金潤晶*김창한金彰漢*김기태金琪邰, 경학원 부제학 유진찬 - 이들은 상당수가 <대한유교회>의 임원과 중복되어있다.
- (대종교 쪽 임원) 지석영池錫永, 유진찬兪鎭贊, 강기원姜璂元, 참교參敎 정두화鄭斗和 등으로서 이 가운데 총독부의 감시대상 인물이었음이 분명한 사람들을 보란 듯이 임원으로 선정한 사실로서도 증명된다.
여기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대종교 쪽 人士들이 입교한 시기가 총독부의 단속과 탄압이 한층 심해져 거의 폐쇄상태로 되어진 1930년대이며 또한 유림(儒林)계통의 대종교 남도본사에 소속한 이들이 대부분이어서 [이유립]의 회고에서도 나타난 <1933년 경기도 시흥에 안순환(安淳煥)이 세운 명교학원(明敎學院-일명 朝鮮儒學會)에 입회해 유학을 수습하면서 이상룡(李相龍)의 《대동광의 大同廣義》, 이기의 《유서》, 량치차오(梁啓超)의 《음빙실전집 飲氷室全集》을 연구하는 한편 대종교(大倧敎)의 남도본사와 시흥 녹동에 있는 단군교본부의 활동상황을 주시하면서 보다 더 강력한 민족적 이념을 탐색하였다>는 이야기가 결코 허황된 말이 아니었음을 증빙하는 근거가 된다. [이유립]은 처음 생각과는 달리 친일색채가 점점 강해져 가는 <조선유교회>의 태도에 고민하다 그 대안으로 국내에서 끈질기게 민족정기의 맥을 이어가는 <대종교 남도본사>에 관심을 기울였고 그래서 접촉이 잦아진 듯하다.
대종교 남도본사 대종교의 교무·행정기관으로 한반도를 관할구역으로 하는 도본사(道本司)의 명칭. [내용] 『대종교규범』 제3장에 따르면 백두산을 중심으로 동·남·서·북으로 나누어 각각 도본사를 두도록 되어 있으나, 광복 이후로는 남한을 관할하는 남도본사만이 현존하는 실정이다.이는 다시 남1도·남2도·남3도·남4도의 4개구역으로 나누어 각각의 도본사가 있고, 부여·성주·부산·광주·밀양·상주·공주 등지에 지사(支司)가 있으며, 기타 각지에 시교당(施敎堂) 361개처가 있다.또한 광복 이후 교단의 원로인 이시영(李始榮)을 중심으로 단군전봉안운동을 전개한 결과 남한에 있는 공공단군전은 50여개소에 이르고 있다. |
- <대종교>는 명확한 항일주의를 내걸고 만주로 이전한 총본부측이 격렬한 독립운동을 벌였기 때문에 당연히 일제의 엄한 단속과 탄압의 대상으로 꼽혀 그의 관심을 끌었다.
이 무렵 이유립은 명교학원의 학업 틈틈이 구한말 실학의 대가중 한 분이며 민족주의자인 이기선생과 유명한 독립운동가인 석주 이상룡李相龍선생의 저술을 탐독한 듯하다(일주일에 평균 30-35시간이었으니 충분히 그럴 만 하다)
한편 1932. 9. 27 <정훈모>의 단군교를 품에 안은 <안순환>은 나름대로 포부를 가지고 있던 계획을 본격적으로 착수하는데 공자탄신일을 기하여 <녹동서원>을 기반으로 유림의 침목과 통합을 도모한다는 목표아래 <조선유교회>를 결성한다. 또한 靑年儒林들을 육성하기 위한 생각 하에 <단군교>와 공동보조를 취하는 가운데 명교학원이란 교육기관을 부설하고 아울러 <일월시보>란 기관지도 간행하였다. 이런 적극적인 유교부흥사업으로 <조선유교회>는 儒學을 대표하는 중심기관으로 발돋음하면서 젊은 儒生이나 뜻있는 청년들이 다수 참여하는 장소로 발전하게 된다.
두 단체가 은연중에 제휴관계를 맺었음은(하지만 敎勢와 재력으로 보아 조선유교회가 주동이 되는 가운데 단군교는 유교부흥운동에 편승하여 교세를 화장하는 동시에 민족 신앙을 확대하려 한 측면도 감지된다) 명교학원의 유생들에게까지 민족의 國祖로서 단군을 숭배하게 하여 민족의식을 앙양시키려는 뜻과 유교회 쪽에서도 단군교와 유대를 공고히 하여 조선유교의 저변을 확대한다는 목적이 공감대를 형성하였기 때문이다(이강오 교수 )
- 이는 명교학원의 교과목이 儒學에 치중하지 않았으며(一週當 四書5, 三經4, 종교3, 철학3, 문학4, 국어5, 산술4, 공민3, 강연3 - 二期는 영어와 심리도 추가) 목적에서도 <조선 道學의 진흥과 전통적 역사의식의 도모>라고 명시함은 물론 교육방침에도 <인재등용, 민중의지 선양, 4천년 檀聖殿 유지의 기초, 聖學의 진리 개명>이라 하였다.
- 명교학원 수료생 가운데 상당수가 단군교인들이었다(1期 이유립, 3期 施敎課長 전재주全在周 등)
- 이런 경향은 1935년 2월에 처음 창간된 <일월시보 제1호>에서도 단군에서부터 조선 유교의 연원을 삼아 논리를 전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정훈모>도 원래 성리학의 교양을 갖춘 전형적인 유학자로서의 덕성을 갖추었음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다.
물론 이런 관계가 이루어지는 데는 일면 초창기 유교회에 참여했던 유림들이나 지역유교단체들의 성향과도 무관하지 않다. <안순환>도 <유교의 단합>을 구상하면서 이런 지역단체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무렵 지방 유림들은 강한 민족의식을 키워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는 물론 지역별로 조직되어 있던 단군교 세력들도 한 몫을 거든 것으로 파악되어진다. <안순환>이 처음 <조선유교회>를 결성하면서 임명한 지교부장(支敎部長)들의 면면을 보아도 금방 깨닫게 되는데 주로 향교(鄕校)나 문묘文廟의 장의(박승익*장두인*장기원*전승제 등)나 향교 훈장(박봉진)과 면장(이규한)은 물론 성균관 박사(신응균)와 같은 지역 鄕士나 儒林들이었고 또 그들이 지역운동의 구심체였기 때문이다.
- 1920년대 유림건약소(대표 정병원)는 향교재산을 매개로 유림을 통제하려는 총독부의 시책에 강력히 반발한 것이 불씨가 됨
- 1922. 1월 김영수(金英洙)를 중심으로 <유교연합>을 창립하여 물산장려운동 등 민족자강운동지지 활동 전개.
※이후 1922. 11월 유림단 총부(摠部)와 평양 대동유림회 결성(평남지역 유림회원 흡수)*12월 평남유림연합회의 본격 활동과 더불어 충북과 충남과 경남 등 각 지역에 道 중심의 연합체와 각 지역 유림단체 설립이 왕성하였다. 이에 주목한 총독부에서 1932년 유학의 정진과 발전을 모색하고 있던 <안순환>의 행보에 눈길을 돌린 듯 하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추구하는 궤적(軌跡)이 달랐던 <유교회>와 <단군교>는 차츰 냉각기가 도래하는데(의식하던 하지 않았던간에 이상하게도 이유립이 주필로 올라선 시기부터 이런 경향이 짙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만주사변을 계기로 군국주의로 치닫던 일제가 총독부의 주관으로 <유사종교탄압정책>을 본격화 하면서 정식 인가를 받아 포교활동을 하던 단군교에 대해 예의 주시하던 끝에 1936년 7월 <단성전시교부 檀聖殿施敎部>의 해산명령이 내려진다. 이에 따라 녹동서원의 <단군교 본부>는 사실상 폐쇄상태에 이르게 된다(이후 경성부 관철정(貫鐵町)에 있는 총교부총장 민병한의 집으로 이전).
- 무라야마(촌산지순村山智順)의 <조선의 유사종교>에서도 대종교에 대한 부분은 많은 오류가 보이나 단군교에 대해서는 거의 정확히 보고를 하고 있음으로 미루어 총독부에서 활동을 세밀하게 감시*파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총독부의 관심사업인 <조선사 편수>의 핵심문제와 맞물려있기 때문이다.
두 교단 간에 냉각의 기운이 형성된 근본적인 까닭으로서 단군교에서 신봉한 단군사상이 조선유교회의 儒林들 사이에 차츰 널리 보급되어갔으며 고조선시대로부터 전래된 한민족 고유의 종교임을 자칭한 단군교단에서는 유교를 중국인에 의해 창시된 외래종교로 경시하는 경향이 있어 이런 차이가 원인이 된 듯하다.
1) 紀年문제
단군교는 단군을 국조로 인식하여 기원전 2333년을 원년으로 하는 <단군기원>을 사용하였으나 조선유교회는 공자를 유조(儒祖)로 숭상하여 탄생년인 기원전 551년을 원년으로 삼는 <공자기원>을 채용.
2) 기념일 문제
단군교는 단군강림일인 음력 10월 3일을 <개천절開天節>이라 하여 경축일로 삼았으나 조선유교회는 공자탄신일인 음력 8월 27일을 <대성절大成節>과 <유교회창립기념일>로 경축.
3) 인식의 차이 문제
단군교는 단군을 國祖로 기자를 道學의 선조로 해석하여 단기(檀紀)의 역사의식을 강조함으로서 유교사상을 그 아래로 흡수하려 했으나 조선유교회는 단군을 전면으로 내세우는 민족의식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한민족의 조상인 단군에 대한 “효”를 강조함으로서 전통적인 유교사상의 일부로 포함시키려 하는 입장.
안교환의 단군교를 보는 입장변화
그는 한민족문화를 창조한 최초의 성인인 단군과 동양도덕의 근간을 수립한 성인으로서의 공자를 동시적으로 인정하였지만 이를 근간으로 한 발전에 있어서는 미묘한 인식을 보여준다. 즉 <일월신보 제2호 1935. 4월>에서 언급한 관념체계가 이 무렵에 이르러 대동아 공영주의와 맞물려 한층 강해진 느낌이 감지되고 있었다.
<동양인에게는 동양인의 도덕문화가 있다>는 논리로 일제의 <大東亞主義>를 강조하면서 본래 강력한 항일사상으로 만들어진 단군사상을 더욱 친일화 되어간 유교사상과 융합시켜 <대 아시아주의>의 일부로 포함시키려는 의도가 강하게 엿보인 것이다.
- ......전에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고 하얏지만은 今에는 東勢西漸하는 시대이니 이는 순환의 리치이다......大東亞主義가 점차 실현할 전제로 일중제휴(日中提携)가 이로부터 견고할가 우리의 이상이 실제화 할가 만심상쾌(滿心爽快)하엿섯다. 동양인은 동양인의 도덕이 잇고 동양인의 문화가 잇다......선성공자(先聖公子)께서 탄강(誕降)하심에 至하야는 왕성(往聖)을 계술(繼述)하며 래학(來學)을 개도(開導)하야 萬世의 법정(法程)을 세우섯나니 어시(於是)에 동양도덕의 근간은 확립되고 유교의 전성시대를 본 것이다. 특히 우리 동방에 잇서서는 檀君께서 수출(首出)하사 정교(政敎)를 병진(竝進)할 새 관실官室*의복衣服*음식飮食*농상農桑의 制를 창시하야 人民을 도화(道化)하섯다. 그래서 그 개물성무(開物成務)의 위업은 문질(文質)이 共히 찬연(燦然)하여 人民은 각각 그 業에 安하야 불행이 업섯다......(안교환 일월시보 제2호 1935. 4월 “조선청년은 읽으라”) |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총독부의 儒林에 대한 적극적인 간섭과 통제를 목적으로 10. 16일 <조선유학회>는 <조선유도연합회>로 탈바꿈하여(1935. 11. 1 문묘낙성식을 계기로 전국유림대회 개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대동아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국민총동원체제를 구축하는 <황도유교>의 선봉에 선다.
안순환의 생애
안순환은 1871년 음력 2월8일 참봉을 지낸 아버지 안순식과 어머니 청주 한씨 사이에서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2세 때 친모의 갑작스러운 사망과 집안의 쇠락으로 어려서 생활고를 심하게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친은 16세의 안순환을 서당에 보내 한학을 공부시켰다. 1890년에 혼인을 한 안순환은 자립을 하기 위해 이듬해에 서화상이 되었다. 그러면서 1895년 관립영어학교에 입학하고 이어서 무관학교에 들어갔으나 생활의 어려움으로 중간에 그만두었다. 하지만 안순환의 실력과 성실함을 알고 있던 주변 사람들이 천거를 하여 1898년 탁지부 전환국의 건축 감독이 되었다. 그 후 판임관 육등, 전환국 기수 등을 거쳤다. 안순환은 1909년 1월21일에서 1910년 8월29일 사이에 전선사 장선을 맡았다.
전선사 장선이란 직책은 어떤 일을 하는 자리였는가? 1905년 3월4일 시행된 궁내부 관제 개정 때, 전선사는 “임금의 음식상과 연회를 맡아본다”고 했다. 전선사의 장선은 황실의 연회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우두머리 벼슬이었다. 안순환은 이 자리에서 종3품까지 했다. 그러니 안순환을 두고 직접 음식을 만들던 요리사라고 보기는 어렵다. 단지 임금의 음식상과 연회를 책임진 부서의 행정 책임자였을 뿐이다. 당연히 대한제국의 마지막 주방장이었다는 말은 잘못되었다.
대한매일신보 1908년 9월8일자에는 “명월관에서는 작일은 해관(該館) 설시(設始)하던 제5기념일인 고로 국기를 고양하고 기념식을 설행(設行)하였다더라”는 기사가 실렸다. 그렇다면 명월관은 1909년이 아니라 1903년 9월17일에 문을 열었다. 그 이름도 본래 명월루였다. 처음에 개인 집을 빌려서 시작한 명월루에 손님이 붐비자 안순환은 같은 자리에 1906년 9월 2층 양옥을 새로 짓고 이름을 명월관이라고 바꾸었다. 그 자세한 이야기가 1906년 10월2일자 만세보에 실렸다. “황토현 명월관에서 내외국 요리를 구비하고 각인의 청구를 수응하는 것은 사람들이 다 아는 바이니와 허다한 청구는 점증호대하고 가옥이 협착한 일이 있더니 대확장을 계획으로 2층 양옥을 신건축하고 각국 요리를 일신 준비하고 목욕탕을 정결하게 신설하는데 일전부터 공역에 착수하여 제반제도가 극히 굉장하다더라”고 했다. 황토현은 바로 ‘황토마루’라고 불렸던 지금의 광화문 사거리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이렇게 확장된 명월관에서는 어떤 음식을 제공했을까? “국내외의 각종 술과 엄선한 국내외 각종 요리를 새롭게 준비하고 주야로 손님을 맞으려 합니다. 각 단체의 회식이나 시내외 관광, 회갑연과 관혼례연 등에 필요한 음식을 마련해 두고 있습니다. 심지어 사람을 보내어 음식을 배달하기도 하는데, 진찬합과 건찬합, 그리고 교자음식을 화려하고 정교하게 마련해 두었습니다. 필요한 분량을 요청하면 가깝고 먼 곳을 가리지 않고 특별히 싼 가격으로 모시겠습니다. 군자의 후의를 표하오니 여러분께서는 많이 이용해 주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주요 음식물 종류는 다음과 같습니다. 새롭게 개량하여 만든 각종 교자음식, 각국의 맥주, 각종 서양 술, 각종 일본 술, 각종 대한 술, 각종 차와 음료, 각종 양과자, 각종 담배, 각종 시가, 각국 과일, 각종 소라, 전복, 모과.”(만세보 1906년 7월14일자 광고)
비록 조선음식이 주된 메뉴였지만, 그렇다고 오롯이 조선음식만을 내놓지는 않았다. 외국음식과 술, 심지어 담배도 명월관에서 다루었던 메뉴 중의 하나였다. 사실 조선시대에는 상업적인 목적을 가지고 손님을 맞이했던 전문적인 요리옥이 없었다. “양반의 연회는 자기 집에서 하든지, 아니면 관청 소유 건물인 누정에서 기생을 명령으로 불러서 오게 하여 술을 따르게 하였다. 거기에서는 돈을 낼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요리옥의 필요가 없었다. 아울러 돈을 가지고 있는 젊은이들이 뻔질나게 다니는 곳으로는 기생집이 있었으며, 여기에서 노는 경우도 있었다.”(이마무라 도모에 <경성 화류계의 변천>, 1937년) 이에 비해 명월관에서는 일정한 시설에 정해진 메뉴, 그리고 전문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영업을 했다. 당연히 이를 두고 한국 최초의 근대적인 조선요리옥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듯하다.
불행하게도 조선요리옥 명월관의 탄생에는 에도시대 말기에 형성된 일본요리옥이 영향을 주었다. 일본요리옥이 서울에 진출한 때는 대략 1885~86년쯤으로 보인다. 일본의 조선 침탈이 본격화하면서 서울의 일본요리옥은 더욱 번창하였다. 특히 조선통감부 설치 이후에는 일본요리옥이 서울에서 대단한 성업을 하였다. 여기에는 ‘풍류통감’이라고 불렸던 이토 히로부미(1841~1909)의 공도 있었다. 1906년쯤 서울에 있던 일본요리옥으로는 화월루·국취루·청화정 등이 일류였고, 송엽·명월·광승 등이 이류였다. 이 중에서 화월루에는 30여명의 게이샤가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이미 1890년에 개업한 화월루는 서울의 대표적인 일본요리옥으로 자리를 잡았다. 화월루의 성공이 사업가로서의 본성을 지녔던 안순환으로 하여금 명월관 전신 명월루의 문을 열도록 만들었다. 이토 히로부미 역시 명월관의 단골 고객이었다.
명월관 기생들의 가무장면을 담은 일제강점기 사진엽서
명월관은 1912년에 3층 양옥으로 증축되었다. 또 1918년에 안순환은 광화문의 명월관 규모가 작다고 판단하여 인사동 194번지에 명월관 지점을 열었다. 원래 태화관은 이완용의 개인 집인 순화궁으로 안순환이 1918년에 이 집을 사들여 조선요리옥으로 바꾸었다. 이곳에서 1919년 3월1일 오후에 연회를 마친 33인의 지식인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였다. .
그렇다면 명월관의 내부 정경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1917년 2월에 발간된 ‘신문계’ 5호의 ‘경성유람기’라는 글에 그 대강이 묘사되어 있다. 이 글의 스토리는 함경남도 금성에 사는 이승지가 우연히 만난 모던보이 김종성과 함께 기차를 타고 경성으로 가서 문명개화의 성공을 감탄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당연히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선전하기 위해 지어진 글이기도 하다. “때는 열한시 반이라. (중략) 이때 인력거 두 차가 황토현을 향해 몰아가니, 이는 김종성이 이승지를 연회 대접을 하려고 명월관 요리점으로 가는 것이라. (중략) 조란화동(彫欄畵棟)과 분벽사창(粉壁紗窓)이 황황한 전기 광선에 비치여 영롱찬란한 광경이 그릇, 수정궁궐에 들어감을 깨닫지 못할지라. (중략) 두 사람은 보이의 안내를 따라 3층루 한편 처소에 좌정하였는데” 술을 몇 잔씩 마시다보니, 문이 열리면서 “종용히 들어와 날아가는 듯이 앉으며 ‘안녕하세요’ 하고, 두 사람을 향하여 인사하는 여자는 곧 광교 조합에 유명한 기생 춘외춘과 매홍이니, 이는 김종성이 이승지를 접대하기 위하여 청한 것”이었다. 손님과 기생이 서로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고, 매홍은 거문고, 춘외춘은 양금을 연주하였다. 당시 광화문 명월관의 시설은 3층에 20호가 넘는 방이 있었다. 더욱이 기생들이 조합을 만들어 요리옥과 유곽 등을 전전할 때이다. 이승지와 같은 시골 양반이 명월관에서 이런 호사를 누리는 일 자체가 조선총독부 덕택임을 여실히 드러내준다.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안순환 역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더하여 1919년 5월23일 새벽에 기생과 놀던 한량의 부주의로 광화문 명월관의 집고각이 불에 타면서 전체가 소실되어버렸다. 결국 명월관을 다른 사람에게 판 안순환은 1920년대 초반에 지금의 서울 중구 명동2가에 식도원이란 조선요리옥을 다시 설립하였다. 1920년대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의 근대도시에는 일본요리옥과 청요리옥, 그리고 조선요리옥이 도심의 중심가에 자리 잡고 성업을 하였다. 서울에는 앞에서 언급한 식도원과 명월관은 물론이고 명월지점·국일관·장춘원·고려관·태서관 등이 지금의 서울 강북 도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안순환은 식도원을 1929년까지 직접 운영하면서 엄청난 돈을 모았다. 그런데 선친이 항상 강조했던 조상 안향(1243~1306)에 대한 흠모를 버리지 못했다. 결국 1930년 봄에 지금의 시흥시에 녹동서원을 세우고 황해도 해주에 있던 안향의 묘소도 옮겼다. 또 명교학원을 세워 젊은이들에게 유학 교육을 시켰다. 1935년 4월28일에는 도쿄에서 개최된 동양유도대회에 다른 유림 대표들과 함께 조선 대표로 참석하는 등 공자교 운동에도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안순환은 근대적 지식인이면서 사업가였다. 아울러 한국 최초의 근대적 음식업 창시자였고, 후에는 조선음식 전문가가 되었다. 그는 1942년 8월20일 72세로 사망하였다. <주영하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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