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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지만원
Subject
머리말(12.12의 진실)
12.12는 한국 정통역사에서 우뚝 서야 할만큼 매우 큰 위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국민 각자에게 비쳐진 12.12의 영상은 난무하는 소문에 따라 달라지고, 기자들의 글쓰기에 따라 달라지며, 누가 권력을 잡았으냐에 따라 달라지는 그야말로 천차만별의 것이었다.
세상은 머리속에 있는 것만큼만 보인다. 그래서 역사적 인물, 역사적 사건을 놓고도 사람마다 평가가 다를 것이다. 여기에 더해 한국 법관들의 판단력은 상당한 경우에 권력과 분위기에 영합해옴으로써 연연세세 세간으로부터 지탄을 받아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하기에 같은 12.12 사건에 대해 전두환 시대의 재판관들은 정승화를 죄인으로 재판했고, 세상이 바뀌어 민주화 세력이 사회여론을 지배할 때에는 헌법이 규정한 일사부재리 원칙까지 위반해 가면서 전두환을 죄인으로 재판했다. 어제의 역적이 충신이 되고 어제의 충신이 역적이 된 것이다.
최규하-전두환 시대, 1980.3.13. 정승화는 국방부 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김재규 내란을 방조한 혐의로 징역10년을 선고받고 같은 해 3.18. 관할관의 확인조치에 의해 징역7년으로 감형, 동년 3.25.에 항소를 취하함으로써 3.26. 확정되었다.
그리고 정권이 바뀌어 민주화 시대가 됐다. 1997.4.17. 대법원은 헌법상에 명시된 일사부재리 원칙을 무시하고 1980년에 했던 재판을 다시 했다. 1980년도에 사법부가 했던 판결은 무효라는 것이다. 민주화 재판관들은 "12.12는 신군부의 정치적 야욕이 작용한 하극상 반란 행위이고, 5.18은 신군부에 의한 내란목적 살인행위이며, 정승화는 억울한 피해자"라고 결론지었다. 전두환을 무기징역에 처하고 금 2,250억원을 추진하며, 노태우를 징역 17년에 처하고 금2,628억 9,600만원을 추징한다는 판결에 따라 왕년의 군출신 대통령 전두환과 노태우는 감옥살이를 했다.
지난 1970-90년대의 역사는 김대중-도시산업선교회-위장취업-386 주사파로 연계되는 소위 민주세력을 한 축으로 하고, 이들 민주화세력을 좌익세력으로 간주한 군사정권들을 다른 한 축으로 하는 좌-우 양 진영 간의 끈질긴 투쟁의 역사였고, 12.12 및 5.18은 이 두 세력 중 누가 정권을 잡았는가에 따라 정통역사가 반역의 역사로, 반역의 역사가 정통역사로 뒤바뀌어 왔다.
시류에 영합하는 법관들은 권력이 주도하는 역사재판에 도장을 찍어 준 들러리가 되었다. 전두환 시대의 법관들은 5.18을 김대중이 불순세력과 연대하여 일으킨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이라고 판결했고, 민주화 세력이 정권을 잡은 시절에는 5.18을 "12.12로 정권을 탈취한 반란 수괴 전두환 일당이 민주혁명을 주도한 광주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자, 민주주의 혁명을 이룩해낸 광주시민의 위대한 성공사로 규정했다.
5.18을 “광주사태-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이 아니라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5.18을 탄압한 전두환 군부 세력을 불법 내란 세력으로 단죄해야만 했고, 이 설계도에 따라 12.12는 당시 2성장군에 불과했던 전두환이 4성장군인 정승화 총장을 불법으로 체포하고, 최규하 당시 대통령을 협박하여 정승화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운 하극상 내란사건으로 몰아갈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5.18은 12.12와 동전의 앞뒤를 구성하는 하나이며, 5.18 역사를 쓰기 위해서는 반드시 12.12의 역사가 먼저 쓰여져야 한다.
5.18은 북한에서 가장 높이 평가하는 민중혁명으로 칭송되고, 민주화세력에게는 그들이 세를 확산시킬 수 있는 가장 큰 명분과 금전적 보상수단으로 이용돼 왔다. 광주를 민주화의 성지로 부각함으로써 한을 품을 만큼 차별대우를 받아왔던 호남의 위상이 변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무시하지 못할 수많은 국민이 5.18을 민주화운동이라고 보지 않으며, 민주화인사들을 민주주의를 쟁취해낸 순수한 애국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에도 아쉬운 게 하나 있다. 5.18 이 민주화운동이었다는 데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12.12의 정당성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전두환의 비자금 문제에 격분한 나머지 그가 한 행위 모두가 나쁜 행위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정리되지 않는 이러한 생각들이 ‘전두환을 무조건 5.18의 원흉’이라고 몰아붙이고 싶어 하는 소위 민주화세력에 힘을 보태주고 있는 것이다.
5.18과 전두환은 역사의 천적이다. 5.18을 살려내려는 사람들은 전두환을 악마로 몰아왔고, 그러기 위해 12.12를 하극상에 의한 군사반란으로 매도해 왔다. 전두환 등 군부세력은 선동-선전에 훈련된 민주화세력이 장악한 언론과 출판에 의한 여론몰이 인민재판에 속절없이 무너져 광주시민들을 학살한 내란의 수괴로 몰려온 것이다.
5.18을 "광주사태"로 규정한 세력도 정치세력이며,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한 세력도 정치세력이다. 누가 정권을 잡느냐에 따라 국민들의 인식이 달라진 것이다. 따라서 5.18은 권력에 영합하는 법관들이 써야 할 것이 아니라 남 보기에 객관적 위치에 있는 학자들이 다시 써야 한다.
필자는 수리공학을 전공한 시스템공학자이며 학교 및 연구소에서 수리이론을 매체로 한 분석을 훈련한 사람이다. 수학적 기호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이 책은 수학적 사고방식으로 쓰여졌을 것이다. 이 책은 12.12에 대해 그 동안 그 누구도 접속할 수 없었던 방대한 원천 자료를 가지고 수학적 논리로 엮어 본 한국 최초의 역사 자료가 될 것이며,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뒤를 이어주기를 바라면서 그동안 금기시됐던 또 하나의 철문을 열고자 한다.
이 책은 정치권에 빼앗겼던 학문공간을 다시 찾기 위한 자유헌장에 대한 선언문이자 금단의 철문으로 굳게 닫혀있던 판도라 역사에 대해 제2, 제3의 연구를 이끌어 내기 위한 최초의 시도이니 만큼 또 다시 필자를 린치하거나 법적인 탄압을 하지 말기를 바란다. 이는 모처럼 가동된 역사연구를 탄압하는 또 다른 야만이 될 것이다.
필자 역시 방대한 자료를 조사하기 전에는 12.12를 하극상일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러나 방대한 수사 자료를 검토한 결과 12.12는 당시 47세에 불과했던 신참 육군소장이 이룩한 위대한 역사였다는 것을 발견하게 됐다. 그가 아니었다면 한국사회는 부하를 신뢰하면서 부하의 집에서 고단한 하루의 피로를 풀려했던 박대통령과 그의 경호원 8명을 순식간에 살육한 패륜아 김재규, 그리고 그를 도와 세상을 장악해 보려던 정승화 일당들에게 한 시대를 넘겨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반면 같은 수사자료를 가지고도, 같은 공판자료를 가지고도 역사바로세우기 판사들은 다른 판결을 했다. 정승화와 김재규 그리고 이 두 사람이 거느리는 군맥들에게 세상이 넘어가지 못하게 한 전두환이 반역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박대통령이 시해당한 10.26의 밤에 최규하 총리 이하 수많은 장관들과 장군들이 보여준 행동들을 보면,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한자리 하며 큰 소리 치던 인간들이 얼마나 비열할 수 있는지를 생각게 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챙겨야 할 역사로부터의 교훈인 것이다.
경호실장 차지철은 대통령을 방치한 채 제 몸 숨기기에 급급해 했다. 사고의 진상규명을 명령해야 할 최규하 총리는 김재규가 범인인줄 알면서도 김재규가 원하는 대로 국무회의를 주재했고, 회의 도중 빠져나와 김재규에 가결내용을 귀띔해주었다. 김재규 범행을 눈치 챈 정승화는 국방장관 등 그 누구와도 의논하지 않고 혼자서 김재규가 하라는 대로 계엄군 배치를 직접 주도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청와대 경호병력이, 청와대 울타리 밖에 동떨어져 있는 궁정동 사고현장으로 나가는 것을 차단하는 명령을 내려 사고현장를 한동안 은닉시키는 등, 컴퓨터보다 더 치밀한 조치를 순식간에 해치우면서 김재규에 중간보고를 했다.
노재현 국방장관은 멀리에서 나는 총소리에 놀라 8시간 이상 숨어 다니다 국방부 청사 어두운 계단 밑에서 초병에 의해 발각되었다.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은 김재규와 한 편이 되었다가 2시간 만에 마음을 바꾸어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것을 밀고했다. 대통령의 총애를 받던 내무장관, 법무장관 들은 있으나 마나였고, 대통령 정무수석이라는 사람은 사고 직후 병원으로 사라져 숨어있었다.
박대통령이 사라진 이후에는 어른이 없었다. 모두가 김재규와 정승화의 위세에 눌려 소리 없이 몸조심만 했다.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무주공산이었다.
정승화! 그는 자기 행적을 감쪽같이 속이고 대통령보다 더 막강하다는 비상계엄권을 휘두르는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약점을 알고 있는 전두환을 누르고 김재규를 옹호했다. 스스로 최규하를 2년 시한의 대통령으로 앉혔고, 김종필이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는 과정에 뛰어들어 이를 저지시키는 등 정치를 직접 주도하기에 이르렀다. 3군사령관, 특전사령관, 수경사령관을 위시한 수도권 일대에 포진돼 있던 내로라하는 군벌들은 모두가 김재규-정승화 계열, 대세는 이미 꺾여 있었다.
고관대작들은 새 세상에 적응하려고 몸조심하기에 급급했다. 정승화는 대통령보다 더 막강한 계엄사령관이 되어 새 세상의 정상에서 칼을 치켜들고 한 시대를 호령했다. 세상은 오직 정승화의 세상이었다. 누구도 정승화 앞에서는 감히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던 세상이었다. 그런 정승화를 체포한다는 것은 상상을 넘어도 한참 넘는 일이었다. 그런데 육군 소장으로 진급한 47세에 불과했던 청년 장교 전두환이 이끄는 소수의 군인들에게 기개와 애국심이 살아있었다. 그러했기에 전광석화의 속도로 김재규를 구속할 수 있었고, 이어서 정승화를 전격 체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념과 애국심이 없이는 꿈도 꿀 수 없는 생사를 건 도전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전두환이 대통령 직책을 어떻게 수행했고, 정권 말기에 어떻게 부패했는지 그건 별도의 문제다. 단지 여기에서는 12.12가 민주화세력이 매도하고, 민주화세력에 아부한 극소수의 법관들이 판결했던 바와 같은 그런 하극상도 아니며, 쿠데타도 아니며, 군사반란이 아니라는 것을 수시기록들을 통해 증명하고자 한다. 아울러 헌법을 스스로 능멸한 법관들의 곡학아세적 판결행위도 함께 고발하고자 한다.
20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