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생물과 식물을 만든 다음 마지막으로 흙을 빚어 아담을 만든 후 갈비를 뽑아 하와를 만들어 아담의 배필로 짝을 지어준 후에 ‘보기 좋았더라’ 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을 통하여 생육하고 번성하며 만물을 다스리라고 명하신 그 명을 따라 만물 중의 영장으로 지금까지 수많은 세월을 살아오면서 인간들의 가장 간절하게 바라는 바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바로 ‘행복‘이라는 단어로 압축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행복해지기를 바라며 그 행복을 쫓아 힘들고 고단한 것도 참으며 열심히 일하고 험한 가시밭길도 마다 않고 먼 길을 걸어가고 있다.
지상의 230여 개의 나라 중에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가 부탄이라고 한다. 저 서쪽 아시아 끝자락에 자리를 잡고 있는 가난하고 작은 나라이지만 국민이 느끼는 행복지수는 세계에서 제일 높다고 하는데 과연 그 원인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그 기준이 물질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행복이라는 것은 정해진 규격이나 조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객관적으로 정할 수 없는 추상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의 문제라는 것이다. 똑 같은 상황을 보고 또 경험하면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행불이 좌우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경제적으로는 세계 10위권으로 경제대국이라고 자랑하지만 행복지수는 세계 60위권이라고 하니 물질과 정신은 반드시 비례한다고 볼 수는 없다. 다시 말하면 물질이 행복의 척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잘 먹고 잘 사는 지금은 어떤가? 시골에는 젊은 사람들은 모두 도시로 떠나고 늙은 노인들만 고향을 지키고 있는가 하면 빈집이 많아서 오히려 슬럼화 되어서 밤이면 동네도 골목도 썰렁하기 그지없고 심지어 수도권이 아닌 지방의 대도시, 우리나라의 2대 도시인 부산시도 젊은이들이 서울로 가고 그 숫자가 점차 감소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경제적으로 부요한 삶을 누리다보니 먹을 것이 넘쳐서 영양과잉은 물론 버려지는 음식물도 많을 뿐 아니라 아파트라는 규격화된 틀 안에 갇혀서 이웃도 모르고 아래 위층에 살면서도 서로 알지도 못하며 알려는 생각도 없고 오히려 관심을 보이는 것이 귀찮고 부담스러울 뿐이다. 출퇴근길에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나면 멀뚱하게 천장을 보거나 층수를 알려주는 숫자판을 보면서 잠시지만 지루하고 어색해 하면서 지내는 것이 현실이다. 층간 소음으로 칼부림이 나고 심지어는 행패를 부리거나 목숨까지 잃게 되는 비극이 심심치 않게 발생하고 있으며 아파트의 평수에 따라 사람의 수준을 매기고 사는 동네에 따라서 친구가 편을 가르는 어느 드라마를 보면서 씁쓸한 미소를 짓는 것은 나만의 편견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의 어린 시절 1950~60년대만 하더라도 모두가 가난하여 입에 풀칠하기가 쉽지 않아 먹을 수만 있다면 산으로 들로 다니며 뽑고 캐고 잘라서 빈 배를 채웠으며 아무리 먼 거리도 걸어서 다니고 웬만해서는 자동차나 기차를 탈 기회가 없었다. 그러던 것이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급속도로 잘 살게 되면서 거리에는 고급차, 외제차들이 질주하고 돈 많은 사람들은 고급주택에 살면서 부를 과시하는가 하면 전원주택이나 별장을 가지고 주말이나 휴가 때는 한가롭게 여유를 즐기고 누리는 시대가 되었고 맛집을 찾아 전국을 떠도는 사람들도 있다.
참으로 좋은 세상이요, 누구나 잘 사는 시대가 되었고 생활수준이 많이 좋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다 행복할까? 오히려 가난하면서 3대가 한 집에서 몸으로 부대끼며 아웅다웅하고 살던 때가 그리워지고 자연스레 어른을 공경하는 법과 질서를 배우고 혈연과 이웃 간에도 끈끈한 정을 나누며 살았다.
창녕 석빙고
그럼 진정한 행복의 조건은 무엇일까?
먼저 정신적으로 성숙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질보다는 정신적 가치를 중요시하고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의 소양을 갖춰야 한다. 물질적으로는 국민소득 3만 불 시대를 맞아 부를 누리고 있고 세계 10위권이 되었지만 정신적으로는 반비례하여 점점 피폐하였고 오히려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을 느끼며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다. 그래서 돈 몇 푼에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가 하면 작금에 유행처럼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일이 어린자식을 학대하고 폭행을 하거나 굶겨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가 하면 서로 사랑하던 여자를 폭행하고 살인까지 하는 데이트 폭력을 보면서 참으로 한심하고 무서운 세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게다가 흉악범이 수시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가 하면 1950~60년대까지만 해도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며 입을 옷이 없어서 추위에 떨던 시절에도 이웃 간의 정이 있었고 가난하면서도 나눠 먹는 넉넉한 마음이 있었으며 먼 친척보다 이웃사촌이 낫다는 말도 그래서 생긴 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경제부흥으로 잘 살게 되면서 고급주택에 살고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오히려 이웃에 누가 사는지?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은 마음이나 생각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고독사라는 새로운 용어가 생기고 정신질환이 많아지며 음주한 상태로 운전을 하다가 역주행이라는 기상천외의 행동을 서슴치 않아 인명 피해를 초래하는 세상. 참으로 미래가 걱정스럽고 물질의 향상에 못 미치는 정신세계를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준법정신이 문제가 된다.
나는 산을 좋아하고 매주 두 번씩 등산을 하는데 깊은 산속에서 비닐이나 쓰다 버린 쓰레기를 보면서 또 외딴 섬에 낚시를 하고 바위틈에서 불을 피워 음식을 해먹고 쓰레기를 바위틈에 끼워 놓은 것을 방송을 통해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우리가 어린 시절 학교에서 배운 질서는 좌측통행이었는데 요즘은 반대로 우측통행을 해야 한다. 특히 전절을 타거나 환승역에서 한꺼번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올 때는 질서를 지키지 않으면 서로 부딪치며 불편한데 매일같이 느끼는 것이지만 제대로 지키는 사람이 많지 않다. 어른 공경은 사라진지 오래인 것 같다. 전철이나 자동차 안에서 노약자나 임산부가 타면 자리를 양보하던 시대는 옛 유물이 되었고 경로석에 앉아 있으면서 앞에 노약자가 서 있어도 양보하는 경우를 찾아보기 어렵다. 갈수록 삭막한 현실에 마음만 답답할 뿐이다.
신호등을 지키는 것도 그렇다. 건널목 신호가 파란 불이라 사람들이 부지런히 건너는 것을 보면서 우회전하는 차들이 마구 달리니 차가 무서워 스스로 몸조심하는 것이 제일이다 싶어서 차가 다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 상황에서 몇 년 전에는 내가 직접 경험을 한 적이 있다. 파란 신호가 들와서 앞을 보고 건너는데 갑자기 우회전하던 포토 짐차가 나를 치어서 그 자리에 넘어져서 잠시 아찔한 중에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려고 하니 옆구리가 결려서 힘들게 일어나 병원에서 검사를 하니까 갈비뼈에 실금이 갔다고 하여 삼 주간이나 치료를 받은 적이 있는데 막말로 좀 세게 바쳤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생각하니 그만한 게 다행이지 하는 마음에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하였다.
항상 易之思地의 마음으로 남을 이해하는 마음이 먼저여야 하고 올바른 준법정신과 질서는 불편한 것이 아니라 편하고 안전을 위한 최선의 길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다.
코로나로 2년 동안 참으로 답답한 생활을 하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서로 이해하고 양보하며 질서를 지키는 일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하리라 생각한다.
옛 속담에 천석군은 천 가지 걱정, 만석군은 만 가지 걱정이라는 말이 있다. 많이 가진 자일수록 근심걱정이 많다는 것이다. 세상에 어디 신경 안 쓰이는 것이 있으랴!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바로 정신적인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물질이나 외형적인 것보다 마음이 먼저고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모두가 행복한 삶을 영위하게 되리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올해는 우리 모두 정신적 가치를 중요시 하며 법과 질서를 잘 지켜 행복한 한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2022년 벽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