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동사다 글 德田이응철(수필가)
주문진에 평화봉사단이 부임하던 1961년이었다. 개발도상국의 교육 기술 향상을 위하여 파견한 미국의 피터 바돌로뮤는 강릉 한옥 선교장에서 주문진을 출퇴근하면서 그는 한국 고교생에 인기를 독차지하게 되었다. 동생을 통해 서양인을 알게 된 누나는 스쳐 간 평화봉사단과의 숨겨둔 첫사랑 이야기를 한 웅큼 꺼냈다. 자서전반에서 허심탄회하게 발표하는 누나의 빛바랜 사랑 이야기는 종강파티에 백미였다.
동생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외국인 바돌로뮤는 파란 눈에 항상 미소가 넘치고 에티켓이 반듯했다. 방년 24세, 누나는 동갑나기와 한국무용을 관람하러 자주 다니고, 이태리 양식도 처음 맛보며 사랑을 이어갔다. 3년간 가깝게 친해진 서양 친구는 무엇하나 흠잡을 만한 곳이 없었다. 파티에서 많은 이들에 인기를 독차지한다. 특히 영어로 누나를 멋지게 소개를 한다.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으로 이사 와서도 남친으로 으레이 만남의 장소에 초대되곤 했다. 서울 와서 바돌로뮤는 고래등 같은 한옥에 남다른 관심을 가진 분이셨다.누나는 서울로 직장을 옮겨 어려운 집안의 가장으로 종종 한옥을 방문할 때쯤이었다. 바돌로뮤는 시골서 올라온 십여 명의 학생들 앞에게 누나를 소개한다. ㅡ아름답지요. 영화배우 문희(文姬)같지요.제 여자 친구예요. 하며 우레같은 박수를 받아내곤 했다.
파란 눈동자의 바돌로뮤를 좋아한 가장 큰 이유는 반듯한 예의범절과 동심 어린 미소였다. 하버드 대학원 법학과 입학을 위해 잠시 고국으로 돌아갔으나, 낙마해 다시 한국을 오면서 가장 먼저 그는 누나를 찾았다. 누나는 이미 바돌로뮤를 깊이 사랑하고 있음을 스스로 느낀다. 워낙 수준 차이로 바돌로뮤를 항상 존경하면서도, 큰 변화는 보이지 않아 긴가민가하고 사랑을 저울질해 본 것 또한 한 두번이 아니라고 한다. 그는 전 세계를 여행하여 견문 또한 넓다. 평화봉사단은 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뉴프런티어 정책의 일환이 아닌가! 2년 기한으로 76개국에 7천명이 파견한 청년 중 한 명이다. 조선시대 동방예의지국을 익히 잘 알고 있다.한국 역사, 특히 그는 한국의 가옥구조에 대해 남다른 관심이 높아 한옥을 구매하기도 하던 외국인이다.
두 동생 학비와 생계를 책임진 누나는 당시 27세가 되면서 혼인 적령기를 고민할 때였다. 바돌로뮤와는 끊임없이 만나 언제나 정신적인 교감을 나눈다. 숭고한 사랑이다. 먼저 결혼을 꺼낼 수 없는 조급함이 누나에겐 큰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는 영화감상을 특히 좋아해 자주 영화관에 가지만, 단 한 번의 스킨쉽도 없었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분위기상으로 얼마나 사랑을 주고받을 찬스인가! 숨죽여 기다린다. 끝날 때까지 단 한 번 스킨쉽도 없이 바른자세로 극장을 떠난다. 누나는 얼마나 실망스러웠던가! 그렇다고 먼저 사랑의 진도를 나갈 수 없다. 그저 불감청 고소원不敢請 固所願인 셈이리라.
딱한번 손잡던 일을 꺼내놓는 누나! 둘이 야외에 나갔을 때, 갑자기 불길이 치솟았다. 바돌로뮤는 잽싸게 누나의 손을 낚아채듯 잡고 현장을 빠져나온 일이 있었다. 그런데 아뿔싸! 그곳을 지나자 이내 잡은 손을 놓는 게 아닌가! 달콤한 순간이 정지한 셈이다. 익히 한국문화를 의식해서일까? 자문자답하며 바돌로뮤를 이해하려 했으나 정체된 감정은 계속 쌓여 희망조차 사그라지려 했다. 순간의 행복은 쉽다. 분위기로 서로를 만족케 하지만,그는 좀처럼 감정을 발전시키는데 주저한다. 사랑을 확대 발전시키려는 의지보다 현상유지의 결핍이 결국 소멸로 끝나는 게 아닌가 두려웠다.
심리학자 스캇펙은 사랑의 개념을 무엇보다 드러나는 행동에 주안점을 두었다. 사랑은 머물러 있지 않고 겉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사랑은 먼저 행동이다. 사랑은 ㅡ오늘 밤 수영하러 가고 싶다가 아니다. 오늘 밤 수영하러 간다고 표현한다는 것이다. 풀은 물을 줄 때 가장 푸르다. 그러나 항상 그 상태에 머무른다면 위기에 봉착한다고 했다. 새로움은 또 하나의 시작이다. 결국 혼인 적령기를 넘으면서 집안 생계를 책임진 누나는 주위 친지들의 권유로 유명 기업사원인 현 남편과 결혼하게 된 것이다.
결혼식 때도 동생이 바돌로뮤에 소식을 전해 참석하게 된다. 결혼식이 다 끝나고 구식혼례인 폐백을 오랜 시간 마칠 때까지, 바돌로뮤는 결혼식장 한 귀퉁이에 힘없이 앉아 있었다고 동생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스물네 살에 푸른 눈동자의 외국인과의 사랑 이야기, 단언컨대 모든 것을 다 주려고 다짐까지 했다고 양심을 책상위에 꺼내놓던 누나! 결혼 후에도 몇 차례 바돌로뮤가 초대하는 곳을 남편과 셋이 참석도 했는데, 예전과 같이 누나의 곁에 앉아 무덤덤한 자세였다고 한다. -그래, 뇌경색으로 눕고 있는 남편의 생이 끝나면, 아직도 독신인 포항에 석유 시추 부사장인 그분과 대화는 계속하게 되겠지. 평소 희망이요 바람이던 속내였다.
그 후, 어느 날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동생이 신문을 보내왔다. “한국인보다 더 한옥을 사랑한 미국인! 한국서 잠들다” 한옥 지킴이인 그는 왕립아시아학회 이사로 서울 한옥에서 생을 마쳤다. 76세로 어쩜 누나만 그리며 홀로 살다가 떠났는지도 모를 바돌로뮤! 누나는 그날 아무것도 손에 잡히질 않았다고 주섬주섬 흩어진 사랑을 고백하고 발표를 마친다. 듣는 모든 이들은 형언할 수 없는 아쉬움에 약속이나 한 듯,이스터 섬의 모이나 석상이 되었다.진정 사랑은 정체되어 있는 명사가 아니고, 성장시켜 발전하는 동사임을 모두는 공유하나보다. 허한 가슴이 밀물처럼 스친 날이었다. (끝) 원고지15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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