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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산문집 [시인의 서랍]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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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서랍]
이정록 산문집 / 한겨레출판(주) (2012.04.20) / 값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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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말의 뿌리는 모어母語다
이정록
1.
모든 말의 태반胎盤은 어머니다.
어머니에게서 멀어지자, 내 잡종 말은 술지게미를 먹은 것처럼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어쩌다 나누는 말은 틀니에 끊어지는 국수 토막같이 뚝뚝 부러진다. 항아리 위 감꽃처럼 부질없다.
2.
어머니 별명은 ‘농사 천재’다. 으뜸 농사꾼인 청년회장이 붙여준 거니까, 거짓부렁이 아니다. 청년회장은 벼농사, 밭농사, 인삼 재배, 표고버섯 재배에 축산업까지 정말 최고의 농사꾼이다. 아버님이 하늘나라로 떠나시고 혼자 경영하시는 텃밭 농사로 얻은 별호니 어머니만의 농사비법이 있는 게 분명하다.
“뭐 있겄냐? 그늘을 잘 다루는 거지.”
“그게 뭔 말이래요?”
“나도 옛날에는 햇살만 좇아 놓사졌지. 그늘이 뭔지 몰렀어. 근데 마당에 가로등이 생겼잖니.”
“가로등한테 비법을 전수받았다고요?”
“얘가 왜 이리 보채? 너 학교 선생 그만두고 어미하고 농사지으려고 그러냐?”
“아니, 어머니가 가로등 밑 거미처럼 느려 터지게 말씀하니까 답답해서 그러죠.”
“너, 얘들 가르칠 때도 이렇게 서두르냐? 애들도 말을 주뼛거릴 때는 다 그만한 사정이 있어서 그러는 겨. 그걸 기다리고 토닥일 줄 알어야 진짜 선생인 겨.”
“어머니는 왜 말씀을 자꾸 딴 데로 돌리는데요?”
“네 아비 생각나서 그러지. 혼자 짓는 소꿉농사에 천재 소리까지 들으니께 먼 데 계신 아버지 마음이 얼마나 짠허겄냐?”
“아이고, 가로등한테서 뭘 배웠는데요?”
“빛이란 걸 배웠다. 근데 내가 배운 게 맞는 건지 몰라서 내가 말을 자꾸 헛딛는 거여. 너한테 잘못 가르치면 안 되잖여. 네가 애들헌테 말허고, 또 글에다 옮기면 너나 나난 죄짓는 거니께.”
“알았어요, 내가 애들한테도 말 안 하고, 글로도 쓰지도 않을 테니까 말씀해보세요.”
“가로등 밑은 암것도 안 되어. 들깨도 안 되고, 강낭콩이니 녹두도 넝쿨만 뻗고, 그래서 내가 가로등 밑자리 여남은 평을 동네 청년들헌테 내놓을 거여. 시멘트 입혀서 동네 주차장으로 쓰니께 얼마나 좋으냐. 그런데도 텃밭으로 빛이 쳐들어오는 겨. 그래서 거기다 비닐하우스를 세웠지. 그러고는 하우스 귀퉁이에 방울토마토 네 그루를 심었는디 이놈들이 비닐하우스 천장까지 자라서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토마토를 매다는 거여. 하우스라 따뜻하지. 또 밤에는 가로등이 눈부시게 비추니까 밤낮없이 일헌 거지. 그 방울토마토로 온 동네 여남은 집 다 먹고도 남어서, 물러터진 건 염소도 주고 송아지도 주고, 아주 방울토마토 잔치를 혔다 혔어.”
“그거 하나로 농사 박사, 아니 농사 천재가 된 거예요?”
“텃밭 귀퉁이 호두나무 밑에다 취나물을 심었지. 산에서 스무 포기쯤 옮겨 심었는디 두어 해는 산이 그리운지 꼼짝 않더니, 몇 년 전부터는 낫으로 베서 동네 사람들 한 푸대씩 나눠주지. 그것도 방울토마토마냥 서리 내릴 때까지 먹어도 돼, 남는 건…….”
“염소도 주고 송아지도 주고.”
“그려, 내가 올해 결정적으로 고추 재배법을 한 가지 더 발견혔지. 고추란 게 햇볕이 좋아야 탄저병도 안 걸리고 붉게 잘 여무는 건디. 난 반대로 아삭이고추 네 포기를 담벼락 밑 가장 후미진 데다 심었어야. 하루 종일 햇볕이 두 시간이나 들라나? 근데 이 오이고추가 맨날 그늘이 드니까, 여물지 못하고 자꾸 풋고추만 매다는 거여. 얼마나 연하고 맛있는지, 또 그놈을 동네 사람들헌테 한 바가지씩 나눠주니께 붙어 댕긴 이름이여.”
“그건 염소 안 줬어요? 그러니까 우연히 붙은 이름이네요?”
“어라, 어미를 우습게 보는 겨. 나눠주면서 내가 동네 청년들헌테 한마디씩 보탰지. 청년들 나이가 다 쉰이 넘었어야. 주구한티 뭘 배우긴 어려운 나이인디, 내가 말허먼 잘 들어.”
“뭐라고 했는데요?”
“인생 농사도 그늘 농사라고 혔지. 아내 그늘, 자식 그늘, 지 가슴속 그늘! 그 그늘을 잘 경작혀야 풍성한 가을이 온다고 말이여.”
“그럴듯하네요.”
“돈이니 여자니 술이니 화투니, 재밌고 따순 햇살만 좇아다니먼 패가망신 쭉정이만 수확허니께, 그늘 농사가 더 중허다고 말이여. 걱정거리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겄냐? 그 그늘진 담벼락에서 고추도 나오고 취나물도 나오는 거니께 말이여. 어미 말이 어떠냐? 그늘 농사 잘 지어야 인생 늘그막이 방울토마토처럼 주렁주렁 풍년이 되는 거여.”
“천재 소릴 들을 만하네요.”
“그늘이 짙으면, 노을도 되고 단풍도 되는 거여. 사과도 홍시도 다 그늘이 고여서 여무는 거여. 뭣도 모르는 것들이 햇살에 익는다고 허지. 한잔 따라봐. 너나 나나, 그늘 농사뿐이지만 말이여.”
3.
맞다. 세상 모든 말의 뿌리는 모어母語다. 모어의 대궁을 타고 꽃이 피고 슬픔도 주렁주렁 열매 맺는다. 눈물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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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추억
이정록
제2훈련소에서 한 달간의 훈련을 마치고 부대 배치를 받는 날이었다. 어디로 가도 훈련소보다 혹독하리란 것을 알고 있지만, 자신에게 떨어질 운명을 점치느라 연병장이 술렁거린다. 부대 배치를 어디로 받느냐에 따라 남은 군 생활의 행복지수가 달라진다. 군 생활이란 것이 빵 봉지나 반합에 갇힌 개미 신세라 할지라도, 단팥빵이냐 식빵이냐가 다르고, 물 떠 마시는 반합이냐 라면 끓이는 반합이냐가 다른 것이다.
“훈련병 이정록 앞으로!”
뭔가 불길하다. 먼저 차출된 한 무더기의 훈련병들이 군용 배낭을 입에 물고 일차로 연병장 가장자리를 따라 오리걸음이다. 어디로 가는 걸까. 수군거릴 수도 없다. 입에 배낭에 물려 있으니 침만 질질 흘리며 불안하 눈망울을 둥글릴 뿐이다. 다른 훈련병들이 군용 버스와 트럭을 타고 떠난 해 질 녘의 연병장에는 일차로 차출된 이십여 명만이 녹초가 되어 있다. 배낭을 양손에 들었다가 어깨에 맸다가, 처녀보쌈에 나간 노총각마냥 숨만 헐떡인다. 언제 보쌈을 풀고 여인의 얼굴을 마주한단 말인가. 총 한번 쏴보지도 못하고 다리가 풀린 꼴이다. 어둠을 헤치며 오리걸음으로 당도한 곳은 제2훈련소 본부중대다. 가장 가까운 곳을 가장 멀리 왔다.
“너희들은 특기와 적성에 따라 소 본부나 각 연대로 배치될 것이다.”
다음 날 나는, 또다시 가장 먼저 차출된다.
“배낭은 그대로 놓고 나를 따른다.”
기간병 중에 제일 졸병이다. 이등병이다. 바래지 않은 군복이며 샛노란 송충이 계급장! 우리보다 일, 이주일 먼저 입대한 게 분명하다.
“삽질 잘합니까?”
그러고 보니 함께 차출된 세 명 모두 어깨가 넓다. 운동으로 단련된 몸이 아니라 낫질과 지게질로 다져진 몸집들이다. 살벌한 이등병의 군기 속에서 우리가 하루 종일 할 일은 김장독을 묻는 것이었다.
“똑바로 해라. 확 묻어버리겠다. 요령 피우는 놈은 김장독 대신 그곳에서 겨울을 난다. 알겠습니까?”
어둠 속에서 삽자루를 메고 돌아오니, 남은 건 우리 농촌 출신뿐이다. 얼마 후, 둘은 소 본부로 가고 타자기를 다루지 못하는 나만 남는다.
취침나팔을 불기 십분 전, 나를 데리러 온 사람은 군인이 아니다. 긴 장화를 신고 있다. 들고 온 라면을 한 솥 내려놓는다. 27연대 취사병이란다. “넌27연대 취사장 보일러 병이다.”
잠이 안 온다. 취사장 군기가 제일 세단 말은 입대 전에 수도 없이 들었기 때문이다.
“27연대 병력은 2천 명도 넘는다. 매일 열여섯 명의 취사병들이 이들의 포도청을 책임진다. 긍지를 갖고 성실히 생활하길 바란다.”
다음 날 나는 200자 원고지 다섯 장을 받는다.
“삼일 동안 너는 원고지 다섯 장씩 받을 것이다.”
이 얼마나 가슴 뛰는 일인가? 내가 작가 지망생인 것을 어찌 알았을까? 역시 군의 정보력을 대단하다.
“너는 매일 식당에서 파리를 천 마리씩 잡는다. 잡은 파리는 원고지 칸칸에 풀로 붙여서 저녁식사 전까지 제출한다.”
하루 종일 팔이 떨어지게 파리채를 휘두르지만 이백 마리도 못 채운다.
‘이게 군인의 길이란 말인가?’
군기가 빠져서 그렇다고 저녁 내내 기합이다. 파리가 한 마리씩 들어 앉은 원고지가 원산폭격을 하고 있는 내 눈에 보인다. 제대로 숨을 거두지 않은 파리가 나처럼 발버둥을 친다.
다음 날은 파리채에 막대기를 묶어 천장에 붙어 있는 파리를 공략한다. 원고지 두 장을 채우지 못한다. 다시 기합이다.
삼일 째다. 팔을 올릴 힘도 없다. 이렇게 군 생활을 하느니, 차라리 파리가 되고 싶다. 궁하면 통한다 했던가. 머리에 꼼수 하나가 휙 스치고 지나간다.
‘바로 그거야.’
나는 창가 방충망으로 갔다. 역시나, 창턱에는 지난 여름에 목숨을 놓은 파리들이 수백 마리다. 잘 마른 미라는 조금만 힘을 주어도 부서진다. 조심조심 모아서 물에 담갔다가 그늘에 말린다. 방금 목숨을 놓은 것처럼 파리의 주검들이 촉촉해진다.
“사흘 만에 파리 잡는 끈끈이주걱이 되었군. 참 빠른 놈이야. 넌 취사장에서 쓰기 아까운 놈이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배낭을 메고 본부중대 행정실로 올라간다.
그로부터 사 년 후, 나는 원고지에 글자를 붙여 넣는 작가가 된다. 군의 예측력은 대단하다.
원고지를 앞에 두면, 지금도 나는 파리처럼 손을 비비는 버릇이 있다. 파리의 날개처럼 투명한 글, 파리처럼 더러운 곳도 마다하지 않는 글쟁이! 파리의 추억이, 나를 다시 닦아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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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다는 것
이정록
나는 ‘왕년 빵모자’를 싫어합니다.
어찌어찌 쉽게 등단해서 시인이라는 작은 닭 벼슬 하나를 얻었으되, 시는 쓰지 않고 그럴싸한 빵모자만 얹고 다니는 부류들, 그런 반 푼 시인들의 말이란 “왕년에 내가 말이야……”로 시작되는 허풍의 추억담이 대부분일 뿐이지요. 자신의 마음 안창에 현재의 튼튼한 주춧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왕년은 피땀으로 얼룩진 새벽정신이었을까요? 찬찬히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의 왕년이란 것은 촌닭 서너 마리만 올라도 금세 허물어질 삭은 횃대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놓을 만한 시도 시집도 변변찮아서 자신의 빈약한 문학을 왕년 빵모자로 대신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시로 말하고, 소설가는 소설로 말합니다. 시인이 시를 쓰지 않는다면 어찌 시인이겠습니까? 단지 모가가게의 마네킹에 불과할 뿐이지요.
간혹 쓸 것이 없어서 못 쓰겠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그에게 간곡하게 말합니다. 지금 전화하는 곳에서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는 것을 말해보라고 합니다. 그걸 쓰라고 합니다. 곁에 있는 것부터 마음속에 데리고 살라 합니다. 단언컨대, 좋은 시는 자신의 울타리 문지방 너머에 있지 않습니다. 문지방에 켜켜이 쌓인 식구들의 손때와 그 손때에 가려진 나이테며 옹이를 읽지 못한다면 어찌 문밖 사람들의 애환과 세상의 한숨을 그려낼 수 있겠는지요.
시인이란 모름지기 그때그때 데리고 사는 어떤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시정신이나 시대정신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시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좋은 시의 씨앗이 싹을 들이면, 그 시상의 뿌리와 오래도록 놀아야 합니다. 전광석화처럼 치고 들어온 시상을 쓰다듬으며 오래 데리고 살면, 시는 물렁뼈를 억세게 세우고 비곗덩어리에서 기름을 빼내는 것입니다. 어느 때는 버드나무의 상처로 살고, 어느 때는 짜장면 그릇을 덮고 있는 오후 세시의 신문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내 시에 모셔둘 그 무엇들과 십 년 이십 년을 동고동락하는 것이지요. 수많은 동거를 하는 것이지요. 어디 시뿐만 그렇겠습니까? 무릇 예술가는 수도 없이 동거를 일삼는 바람둥이인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목소리를 가져야 합니다. 백석에겐 백석의 언어가 있고, 소월에겐 소월의 가락이 있지요. 나팔꽃이 올해엔 기필코 해바라기꽃을 피울 것이라고 마음 다잡는다고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나팔꽃이란 이름을 갖고 있으므로 잠들어 있는 세상의 미명 위에 굵은 나팔 소리를 낼 것이라고 호돌갑을 떤다고 그게 이루어질 일입니까. 자신의 시가 나팔 소리로 끽끽거리거나 해바라기로 고개가 꺾이지 않도록 마음 다독여야지요. 나팔꽃은 산골 처마 밑에서도 덩굴을 올리고 도심 한복판 가로등을 타고 오릅니다. 먹는 이슬이 다르고 내다보는 세상이 다르고 끌어올리는 목마름이 다르므로 남과 자신이 다른 것이지요. 아, 나팔꽃은 오늘에도 있지만 삼십 년 전 생솔 연기 매캐한 부엌 뒷문 밖에도 있었고 남한강 자락이나 지리산 낮은 골짜기에도 있을 것이므로 시 속에 가라앉아 있는 시간과 넓이와 들끓음이 다 다릅니다. 자신의 나팔꽃을 들여다보고 내다보고 훑어보고 째려보아야 하지요. 자신의 눈초리가 박히는 곳에 시의 싹눈이 오롯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지요.
음보音步라는 말이 있지요. 소리가 걸음마를 땔 때까지 퇴고를 많이 하십시오. 시가 펜을 놓을 때까지 고치십시오. 시가 나를 풀어줄 때가 되면 시는 드디어 자신의 맨발을 땅에 딛고 사람들 속으로 걸음마를 떼지요. 음보는 시인의 산보가 아니라, 시의 걸음마지요.
시상詩想이란 것도 운명이 있어서, 저 무한천공의 어둠 속에서 억만 겁을 떠돌다가 한 시인의 가슴을 겨누고 들어닥치는 것이지요. 그러니 어찌 왕년 빵모자에게 깃들겠는지요? 억만 겁을 떠돌던 단 하나뿐인 생각이라면, 자신의 방에 알전구를 밝혀줄 시인에게 깃들지 않겠는지요? 그러니 좋은 시상 하나가, 떡하니 쳐들어왔다면 어떻게 모셔야 하겠는지요? 그와 눈 딱 감고 살림을 차려야겠습니다. 출산할 때까지 같은 주소에서 살아야겠습니다. 처음에는 끙끙 데리고 놀다가, 나중에는 시상이란 녀석이 나를 데리고 놀도록 몸과 마음을 내맡겨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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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채찍 휘두르라고
말 엉덩이가 포동포동한 게 아니다.
번쩍 잡아채라고
토끼 귀가 쫑긋한 게 아니다
아니다
꿀밤 맞으려고
내 머리가 단단한 게 아니다.
― 졸시 <아니다> 전문
재미없는 산문집이라고 꿀밤을 먹일 것 같아서, 글머리에 <아니다>라는동시를 올렸습니다.
첫 산문집을 정리하다가 담배를 다시 물게 되었습니다. 이십칠 년이나 피우던 담배를 끊은 건 동시 덕분이었는데 말입니다. 동시는 나에게서 니코틴을 씻겨주고 라이터를 숨겨주었습니다. 열쇠꾸러미와 지갑과 핸드폰과 담뱃갑으로 불룩했던 주머니를 한결 납작하게 덜어주었죠.
삼천 매 가량의 산문 원고를 덜어내고 추스르는 동안 담배 연기가 솔솔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동시는 다시 답배갑 뒤로 숨어버렸습니다. 동시에게 참 미안한 일입니다.
산문집을 꾸리며 느낀 한 가지만 뽑으라면, ‘이짓, 정말 못 하겠다’였습니다. 옷이 다 벗겨진 느낌이랄까요. 산문 어디에서나 왕따가 된 아이가 훌쩍이고 있었습니다. 한구석에서 오소소 떨고 있는 어린 정록이가 안쓰럽게 느껴졌습니다. 그 애가 자라서 시인이 되고 아버지가 되고 선생이 되어 이 글을 묶습니다.
혹, 보탬이 됐으면 하고 제 시와 시작詩作의 비밀 서랍을 몽땅 드러내보였습니다. 제 시를 조금이나마 좋아했던 분들이 이 글을 읽고 다 달아날까봐 걱정이 듭니다만, 시집보다 이 책을 먼저 펼쳐본 이들이 제 시를 찾아 읽는 행운도 있었으면 하고 욕심을 내봅니다.
그래도 이만한 꼴을 갖추게 된 것은 순전히 김수영, 김윤정, 이지은 님 덕분입니다. 조금은 착해진 느낌이 듭니다. 고맙습니다.
저는 더 좋은 시를 줍기 위해 꽃샘추위 속 꽃망울처럼 다시 실눈을 뜰겁니다.
2012년 봄
이정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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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이정록 시인의 글을 읽으면서 마음에 맑은 샘 하나가 파였다. 그 샘에서 ‘삼베만큼 설운 색깔’의 이야기가 솟았다. ‘젖통이 분 암소의 길’이 어른어른 환하게 춤추며 모난 마음을 주물러주었다. 웃음과 눈물이, 설움과 신명이 합장하며 뭉클, 감동으로 마음을 꽃처럼 피워주었다.
사람 사는 냄새가 진동하는 그의 글을 읽으며 사람 살아가는 모든 풍경이 새삼 아름답게 다가왔다. 그의 글이 피워준 촉촉한 마음꽃, 오래 시들지 않게 세상의 맑은 것들 자주 만나며 상아야 할 것이다.
― 함민복 시인
서점에서 툭 뽑아 본 시집이 이정록 시인의《의자》였다. 읽다보니 시 안에서 충청도에 계시는 우리 엄마 말투가 들린다. ㅎㅎ 그렇게 웃다가 이정록 시인을 알게 되었다.《시인의 서랍》에는 엄마랑 외할머니랑 모두 계신다. 활자를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듣게 되는 느낌이다. 아니다. 눈으로 듣는 느낌이다. 사람들은 이 책을 얼마나 고상하게, 진지하게 읽을까? 난 낄낄대며 읽었다.
― 남희석 MC겸 코미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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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록 시인 ∥
∙1964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1989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와
∙1993년 <동아일보>신춘문예에 시로 등단했다.
∙2001년 김수영문학상과 2002년 김달진 문학상을 받았다.
주요 도서로
∙시집《정말》《의자》《제비꽃여인숙》《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풋사과의 주름살》《벌레의 집은 아늑하다》
∙동화책《귀신골 송사리》《십원짜리 똥탑》》
∙동시집《콧구멍만 바쁘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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