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아자르 - 본명 로맹 가리
많은 시인과 작가들의 은밀한 사랑을 받는 작가.
시인 박정대는 그의 소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인용하여 <새들은 목포에 가서 죽다>를 썼고, <로맹 가리>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 그만큼 그는 많은 사랑을 받는 작가다.
이번에 우리가 읽은 <솔로몬 왕의 고뇌>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다.
회원들의 반응은 예상 외로 별 재미를 못느끼는 듯 했다.
그러나 이미 그의 세계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책을 선정한 나로서는 어쨌든 애정을 갖고 읽어냈다. 죽음을 향하여 노쇠해가는 노인의 심정을 가장 화려한 쪽에서 부각시키고 있는 것은 로맹 가리가 평소에 늙어가는 것을 극도로 거부한 것을 대변하는 것 같다. 인생의 바닥을 쳤다고 볼 수 있는 택시 운전사인 장의 눈을 통해 작가는 노인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삶에 관여하고 심지어는 신처럼 선심을 베풀기도 한다.
테네시 윌리엄스가 희곡을 써서 영화화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블랑쉬를 연상시키는 코라,
25살 청년 장은 솔로몬 노인의 심부름으로 그녀의 아파트에 과일바구니를 배달하면서 그녀와 가까워진다.
장은 65살이 넘은 그녀의 나이를 65살로 꺾어준다. 퇴역가수로서 추억을 먹고 사는 코라와 청년 장의 심리 이행 과정,
장의 박애주의에 입각한 섹스, 그리고 솔로몬 노인의 고백과 그들의 해피엔딩....
85세이면서도 외모 가꾸기에서나 사상에서 청년이기를 지향하는 솔로몬은 장을 통해 35년 기다린 늙은 연인의 젊음을 환생시키고, 인생의 마지막 장미를 담대하게 선택한다. 그리고 우아하게 손을 흔들고 배웅을 받으며 꿈의 항만도시 니스로 여생을 보내러 떠난다. 인생의 정점에 선 나이의 청년 장과 고귀하게 늙어 가는 노인 솔로몬은 사실 작가 로맹 가리의 오버랩인 것이다.
단순한 줄거리 같지만 행간마다 예술과 노년과 죽음에 대한 조명이 있다.
예술하는 사람으로서의 세월에 대한 회한, 잊혀진다는 것의 고뇌를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퇴역 가수 코라에 대한 묘사는 당시 누벨바그 영화를 풍미했던 자신의 두번째 아내 진 세버그에 대한 묘사인 것 같다.
작가는 안일과 권태를 철저히 거부한다. 그리고 지금 인생의 장미를 꺾어라! 하고 권한다.
로맹 가리 자신이라 할 수 있는 장은 전공한 사람인 아닌데도 언어에 집착한다.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그는 사전을 뒤진다. 자기의 화두를 들고 사전의 해석에서 의미를 찾아나선다.
언어에 대한 그의 신봉은 우리 시인들을 무색하게 한다.
언어의 실재, 그 존재를 탐구하는 태도로 인해 관념적인 언어를 뒤지고 있는 우리 시인들을 부끄럽게 한다.
사랑(Amour)이라는 혼돈에 빠졌을 때 그는 이 낱말을 이렇게 찾아냈다.
사랑(amour) (회화) 풀이 잘 묻을 수 있도록 새 캔버스에 일으켜 놓은 보풀.
사랑(Amour) (석고 작업) 석고를 만지고 난 다음 손가락에 남는 미끈거림 같은 것.
새장 속 사랑(Amour en cage) 식물학 용어 및 매사냥 용어. 사냥개를 격려하기 위해 새를 자유롭게 날려 보내는 것.....
사랑(Amour) 자신보다 상대방의 안녕을 원하고, 그에게 헌신하고자 하는 경향.
사랑(Amour) 어떤 가치에 대한 사심 없고 깊은 집착.
이러한 장의 언어에 대한 기이한 천착은 언어가 갖는 의미 너머의 실존을 찾는 로맹 가리의 운명같은 사랑을 나타낸다고 확연히 느꼈고, 감히 비교해도 된다면, 나도 로맹 가리처럼 언어에 의탁해 인생을 조종하는 그 공동운명체로 부름받은 것에 설레이는 기쁨을 느꼈다. 그는 변화무쌍한 삶을 살았지만 궁극적인 자기 구원을 항상 pen에 두었다. 그로해서 콩쿠르상을 두번이나 받아내었다. 아버지를 모르는 불우한 러시아 태생의 청년이 프랑스에 정착하여 외교관과 문필가와 공군 장교와 영화감독으로서 부침의 세월을 살다가 목구멍에 권총을 넣고 자살하기까지 그는 새로운 정점을 향해 쉬임없이 나아갔다.
이 책을 읽고 나는 또 한번 행복하다. 동화처럼 키치적으로 유머러스하게 써냈지만 에밀 아자르, 즉 로맹 가리의 굴곡 많은 인생과 언어예술에 대한 사랑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이 작품을 쓰고 일년 뒤, 먼저 자살한 배우였던 아내의 뒤를 따라 권총자살을 한다. 소설보다 더 극적인 그의 삶을 그는 65세에 잘라냈다.
우리는 그렇게 목숨을 버릴 수는 없지만 언제라도 구태의연을 버리는 창작과 삶의 태도로 그의 예술정신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영원한 청년이고자 했던 로맹 가리, 그를 이 책을 읽음으로 다시 기념한다.
"추석과 크고 작은 질병과 사건 사고 속에서도 자리에 참석해 준 회원 여러분께 깊은 사랑과 감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