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중 임원 5도적(盜賊)
1. 퇴직후 종재(宗財)를 삼지돈으로 쓰는 임원
2. 왜곡된 종사(宗史)를 강요한 임원
3. 종원 배려(配慮)를 본인 권리로 착각하는 임원
4. 종중 물건을 본인 사물로 사용하는 임원
5. 종원 실적을 본인 공적으로 가로채는 임원
조조는 원소의 1/10 이 안되는 전력으로 “관도대전”을 승리하고 원소진영을 접수하고보니 조조신하들이 전쟁중에 원소에게 간첩행위를 한 수많은 편지를 발견하고 조조가 폐배할 것 같은 전쟁에서 신하들이 한 행동의 증거를 없애기 위해 적과 내통한 편지를 소각하고 용서하니 그들이 더 충성심을 보였다는 이야기가 “위씨춘추”에 기록되어 있고 삼국지 본기에 황제로 기록된 왕은 조조 뿐이라니 종중 5적을 용서해야하느냐? 고민중이다
삼국지 본기에는 없고 삼국지 열전에 나오는 유비 손권 관우 제갈량 등처럼 종중 정사(正史,王史)에 없는 종중열전(列傳,野史)에 주인공인 되느냐?가 문제로다.
(※참고문헌자료 : TV N 벌거벗은 세계사 28회 : 9월 21일 밤8시50분)
종중돈을 착복하거니 동조하면서 안건은 무조건 반대하는 도적을 과연 용서해야 하느냐?
문제는 조조처럼 용서해주어도 한동안은 뉘우치치 않는 ×(者)을 설득하고 오랜시간동안 기다릴 인격과 능력이 부족하면서 조조 흉내를 내는 것이 종중을 위하는 길인지 알 수 없다.
요즘 선거철이라 네거티브가 활개를 치는데 당한 사람이 억울하여 성질내면 대부분 사람들이 성질 낸 사람에게 잘 못했다고 하니 종중임원이 개(犬)보다 못한 행동을 하고 틀렸다고 지적하면 대부분 종원들이 “어른에게 버릇없다”하는데 버릇 없다는 말을 듣고라도 문제를 제기해야하느냐? 순종하면서 5적에 동조하느냐?가 문제로다.
※참고문헌자료 : TV N 벌거벗은 세계사 27회 : 9월 14일 밤8시50분 후기
소설 삼국지에 제갈량이 하늘을 읽고 화공작전으로 “적벽대전”을 승리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왕건이 912년 3차 나주해전에서 제갈량처럼 동남풍을 이용하여 막강한 견훤군을 물리치고 승리를 하는데 겨울에는 북동풍 부는 때이기에 백만대군의 조조는 북쪽에 있고 魏의 군과 남쪽에서 올라온 5만의 손권, 유비 연합군이 양자강 적벽에서 싸우게 되었고 유비의 책사 제갈량은 겨울철인데 여름 바람인 남동풍이 필요했고 제사를 지내고 법석을 떨며 남동풍을 이용하여 승리한다.
제갈량은 오랜 경험으로 겨울철에 남동풍 부는 날을 알고 있었지 제사 덕분이 아니다.
왕건의 군사였던 태평(泰評,고려개국공신3등, 무자보총목 113쪽에는 진평秦評으로 등재됨)이 겨울철에 남동풍부는 날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겨울철 서해상 바람은 북서풍이다. 하지만 통계적으로 보면 1년에 한번정도 남동풍이 분다. 중국 화남지방에서 기압골이 북동진하면서 서해상에서 발달한 경우다.
1년에 많아야 1~2회 정도 남동풍이 발생하는데 지난 2001년 1월 7일 이런 기압배치가 형성됐다. 이때 해전이 벌어졌던 압해도(押海島·전남 신안) 기상관측자료에 의하면 화공에 이용할 수 있는 5~8m/s 이상의 남동풍이 새벽 4시부터 오후 4시까지 12시간정도 불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가능했다는 생각이 든다.
왕건과 견훤이 충돌한 곳은 우리나라 서남해 지방이다. 과거 서남해 지방은 9세기 장보고 청해진 체제의 중심지로 일찍부터 해양세력이 크게 성장했던 곳이다.
장보고 암살당한 이후에도 서남해 지방 일대는 해양세력이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900년대 서남해 지방의 해양세력은 섬지역을 무대로 한 “도서 해양세력”과 해안 육지를 무대로 한 “연안 해양세력(무자보 총목113쪽 4해황제)”으로 나뉘었다.
왕건과 견훤이 싸웠던 912년에 견훤은 직접 왕건의 군대와 맞섰다. 견훤은 전함을 목포에서 덕진포(전남 영암군 덕진면)에 이르는 영산강 하구에 배치시켜 왕건이 나주세력과 협공하는 것을 차단했다.
견훤은 이후 많은 함대를 압해도로 이동시켰다. 후백제 견훤의 군사력을 본 왕건의 병사들은 겁에 질려 전의를 상실한 상황에 왕건은 남동풍을 비는 제사를 지냈다. 남동풍으로 화공작전을 하겠다는 것이다.
왕건과 태평이 제사를 지내는 동안 북서풍이 불었다. 왕건이 남동풍이 부는 것을 확신한 것처럼 견훤군대는 왕건군에엑 공격할 화공에 쓰는 많은 기름과 불화살, 화약까지 싣고 있었다.
7일째가 되던 때 갑자기 바람은 남동풍으로 바뀌었다.
싸우지 않고 제사만 지내는 왕건의 계책이 무엇인가 두려워 공세를 취하지 못해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공격하려고 준비하던 견훤군은 바람이 남동풍으로 바뀌자 당황하기 시작했다.
남동풍을 타고 불화살과 화약으로 공격하는 왕건의 전함에 견훤 함대는 불길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속수무책이었다.
견훤의 전함들이 대부분 불에 타면서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이 전투가 “덕진포 대전”이다.
그런데 정말 태평이 남동풍을 비는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남동풍이 불었을까? 그것은 아니다.
배를 이용한 무역을 하던 개성을 근거지로 했던 왕건과 태평은 서해상에 나타나는 겨울철 기후와 특성을 파악하였고 장보고 피살이후 장보고 세력중에 견훤지역에 거주하였던 “도서 해양세력”세력이 왕건을 도와주었고 염주(鹽州: 지금의 황해도 연안) 출신인 태평에게 덕진포에서 남동풍 부는 날을 알려준 것이다.
※ 조조이야기에서 왕건까지 이야기가 두서 없었습니다.
고양공종중 류민성 회장님께서 대승공이야기를 모여서 해 보자고 하셨는데 답변을 하지 못한 이유가 있습니다. 대승공 이야기는 삼국유사에서 흥률사 중수 상량문으로 다시 1300년대 대승공12세 휘 보발 묘지명, 대승공 10세 휘 승 딸(權溥처) 묘지명, 대승공11세 휘 돈 묘지명으로 이어지는데 제가 원한 것은 이야기 보다는 토론을 해야 삼국유사 내용을 정사로 접목시키자는 설득을 할 것인데 토론자들이 인정할지 모르지만 설득할 근거가 있는데 문제는 종중 어른이라고 이론이 딸리면 “너가 무엇을 안다고 나서냐 하지 않을까” 염려되어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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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공 역사에 대하여 공부를 조금만 했다면 무자보 총목114,115쪽에 휘 류차달께서 수레 1천대를 만들고 신군(神軍) 1천명이 도적을 무찌르고 전공을 세워 삼한을 통일한다는 내용을 보면
① 궁예가 양길에게 100 騎兵을 받아 결국 양길을 쳤는데 왕건 휘하에 기마병(騎馬兵)마군(馬軍)대장 홍유 배현경 복지겸 등이 있었으나 대승공이 말 1,000필로 군량을 실어나르는 것이 아니고 가병 천명이 수레를 끌고 도적(견훤군)을 무찔렸다는 것이고
② 작제건이 서해안 해적 노략질을 막았다는데 장보고 청해진 병력이 1만명으로 작재건이 만명 사병이 있었다면 왕건아버지가 궁예에게 귀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런 내용을 모르는 임원이 있어 제가 설득하려하면 순수히 인정할지 의문입니다.
③ 912~914년 3차 나주전투의 덕진포해전에서 승리한 왕건은 일부 군사를 모산에 주둔하고 나머지 군사를 대리고 영암천을 통해 영산강 일로 앞을 지나 남해포를 지나 견훤이 있는 자미성을 포위하려고 가는 도중 시종 남해포에 잠을 자려고 진을 치고 있었는데 견훤이 왕건 작전을 미리 눈치 채고 야간 급습을 위해 반남면 자미성에 군대를 남해포 인근 야산에서 잠복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왕건은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왕건에게 일어나서 빨리 남해포를 벗어나라고 해서 왕건군대가 남해포를 벗어났을 때 견훤군이 공격해 왔지만 빈 진영이었습니다.
고려사에는 백발노인을 수신(水神)이라 하는데 현실적으로는 수신은 없는 이야기이며 영암해양세력으로 왕건책사 최지몽과 연결된 호족이거나 해산된 청해진 세력이라면 영암고향에 와 있는 장보고 친구이며 오른팔인 정연장군으로 흥률사상량문에 사해황제 후손이 견훤의 작전계획을 왕건에게 알려 준 것입니다.
903년 류차달이 흥률사에서 졸았고 꿈에 선몽하여 신군천명과 수레천대를 지원했는데 흥률사꿈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903년과 912년 동시대 왕건의 꿈과 백발노인은 인정하는 일부종원과 토론해야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리 선조 꿈과 천명 신군을 인정하지 않으면서(수레천대는 인정함) 왕건꿈은 말하고 다니는 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