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1일 – 성 스타니슬라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성 스타니슬라오 주교 순교자는 폴란드분으로 11세기에 사셨던 분입니다. 폴란드 남부에 있는 크라쿠프에서 교구장으로 사셨던 분으로 그분에 대한 기록은 성인들에 대한 공식 기록인 로마 순교록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오늘은 성 스타니슬라오의 기념일이다. 그는 주교이며 순교자이고, 그의 시대의 불의 사이에서도 도시와 그리스도교 가치의 수호자였다. 가난한 이를 돕고 매년 자신의 성직자들을 방문하였던 크라쿠르 교회의 착한 목자였다. 거룩한 신비를 거행하고 있던 중에 그가 심하게 나무랐던 폴란드 국왕 볼레슬라오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분의 시신은 크라쿠프 주교좌 성당에 모셔져 있고, 그 도시는 우리 시대의 성인 성 요한 바오로 2세께서 교구장으로 계셨던 곳입니다. 그분께서는 교회의 영역만이 아니라 세상의 영역에서 가난한 이들과 인권을 위해 일하셨고, 공권력을 동원해 국민에서 폭력을 행하던 정권에 항거하시다가 순교하신 분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빛입니다.
니코데모와의 대화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그 후속의 대화를 제자들과 나누십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 말씀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제 느낌으로는 유대인인 니코데모가 어쩌면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는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신 것 같습니다. 좀 더 나가서 제자라면 당연히 알아듣고 실천해야 할 제자도를 말씀하신 것 같기도 합니다. 특히 앞으로 복음을 전 세계 모든 인류에게 전해야 하는 사도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연상이 되었기에 한 가지를 설명하고 글을 잇겠습니다. 제자와 사도는 다릅니다. 제자는 영어로 “disciple”라고 씁니다. 어떤 스승을 따르는 사람들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반면 사도는 “Apostle”이라고 씁니다. 첫 문자인 A는 반드시 대문자로 써야 합니다. 이는 열 두 사도만을 지칭하는 고유한 말입니다. 그래서 영어를 비롯한 서유럽 언어로 정관사를 붙이고 열둘이라는 숫자를 쓰면 그냥 열두 사도로 알아듣습니다. 예를 들어 영어로 “the Twelve”가 그렇습니다. 여기서도 T를 대문자로 써야 합니다. 이처럼 문화가 차이가 좀 있습니다. 좌우간 이처럼 교회적으로 고귀한 품격을 지닌 분들이 열두 사도입니다. 그분들에게 교회가 걸려있습니다. 지금도 그분들의 후계자들인 주교님들에게도 그렇습니다.
이분들에게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하시지 않은 말씀,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에게 하신 말씀, 그래서 우리 교회가 지금도 기억하고 실천해야 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더 말씀하셨을까요? 저는 이 말씀에 주목합니다.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요한 3,33) 자신들이 믿는 신은 참되다고 모든 종교에 속한 신앙인들이 믿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종교는 각기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것도 특히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계시된 하느님을 믿습니다. 유대인들이 믿는 하느님도, 모하메드가 알려준 알라도, 석가모니도 아닙니다. 오로지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그분을 믿습니다. 우리가 그만한 확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만이 진리이시라는 배타적인 확신이 있다는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옳다는 것을 믿는다는 뜻도 됩니다. 유대인이던 니코데모는 이런 믿음이나 확신까지는 갖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는 랍비로 남았습니다. 그에 비해 바오로 사도는 완전히 바뀐 사람으로 그리스도를 믿었던 분입니다.
저는 우리 신자분들께서 오늘 복음 말씀을 들으시면서 “나는 왜 예수님의 하느님을 믿는가?”를 스스로 질문하시고 대답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통해서 그리고 교회 생활을 통해서 만난 예수님, 더 나아가서 나의 일상생활에서 나와 함께 살아계시면서 늘 나를 “진리와 생명의 길”로 이끄시는 예수님에 대한 체험을 잠시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분께서는 스승이시고 동반자로서 우리를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께로 이끄시는 사랑이 넘치는 분이니, 그분과 천천히 그리고 깊이 대화를 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대화에 늘 당신의 성령을 부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요한 3,34)
(비전동성당 주임신부 정연혁 베드로니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