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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윤회양립할 수 있나
호진 스님 “상호 모순… 양립 될 수 없다”주장
이중표 등 “서로 다른 차원… 모순 아니다”반박
모든 존재는 다섯 요소들의 집합에 불과하며 거기에는 고정 불변의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불교 근본 가르침 중에 하나인 무아설. 그럼에도 불교는 ‘모든 존재는 업에 대한 과보를 받고 이에 따라 윤회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고정 불변의 실체가 없음에도 윤회하는 그 주체는 무엇일까?
무아와 윤회를 동일선상에서 놓고 보면 이처럼 상호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른바 무아-윤회 모순은 오랜동안 불교계의 풀리지 않는 숙제였다. 이는 부처님의 무아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주체가 부정되고, 윤회설을 수용할 경우 주체가 필연적으로 전제되는 사실에서 오는 두 이론체계 사이의 모순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2500여년전 불교가 인도에서 성립될 당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무아-윤회논쟁은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이 같은 무아-윤회논쟁은 한국불교학계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프랑스 소르본느 대학에서 ‘무아-윤회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동국대 교수 호진 스님은 1992년 『무아·윤회 문제의 연구』(민족사)에서 “무아이론과 윤회 이론은 서로 모순됨을 가지고 있어 서로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스님은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는 것은 실체적인 자아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아-윤회설은 서로 양립할 수 없지만 불교는 이 두 이론 중 어느 하나 버릴 수 없었다”며 “이런 이유로 부처님 이후 불교사상가들은 두 이론들을 화해시킬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을 모색했다”고 밝혔다. 호진 스님에 따르면 무아 이론은 불교의 핵심 교리로서 고유한 것이지만 윤회이론은 바깥에서 도입된 것으로 두 이론은 불교를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이지만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 이후 불교사상가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이념을 모색했고 무아설의 근간을 흔들지 않으면서도 윤회설을 정당화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형태의 이념 구축을 시도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스님의 주장은 다른 불교학자들에 의해 즉각적인 공격을 받게 된다.
전남대 이중표 교수는 호진 스님의 쓴 『무아·윤회 문제의 연구』에 대한 서평(선우도량 5)에서 “무아와 윤회를 모순관계로 이해하는 것은 이 둘을 동일 차원의 개념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라며 “그러나 불교 교리상 무아와 윤회는 전혀 다른 차원의 개념이기 때문에 전혀 모순관계가 성립될 수 없다”고 반박했다. 이 교수는 “어떤 개념이 모순 관계가 되는 것은 동일한 차원 또는 동일한 시공이라는 조건 아래서만 성립한다”며 “그러나 윤회는 생사의 세계, 즉 세간(世間)의 차원에 있고, 무아는 열반의 세계, 즉 출세간(出世間)의 차원에 있기 때문에 이 둘은 모순관계가 성립할 수 없는 조건”이라고 강조했다.
또 동국대 정승석 교수도 “무아와 윤회설을 서로 모순된다고 주장할 수 없으며 이 두 이론은 서로 양립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호진 스님의 주장을 일축했다.
정 교수는 「무아와 윤회의 양립문제」(인도철학 4호, 1994)에서 “불교에서 윤회는 연기적인 세계의 생성, 변화과정을 통해 윤회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我)’라는 주체를 설정되지 않더라도 윤회가 가능하다”며 “따라서 무아-윤회설이 모순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즉 범부들의 착각과 집착으로 만들어낸 ‘나’라는 주체의 설정으로 인해 윤회의 주체를 상정하게 되고 이로 인해 두 이론이 모순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 불교에서는 ‘나’는 부정되고 윤회는 극복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결국 불교에서 무아-윤회설은 그 취의가 동일하며, 이런 의미에서 두 이론은 양립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1990년대 학계에서 진행됐던 무아-윤회 논쟁은 서로 모순될 수 없다는 견해로 통일되는 듯 했다. 그러나 2000년대 들면서 서양철학을 전공한 울산대 김진 교수가 “불교의 무아-윤회이론은 서로 양립될 수 없는 모순”이라는 주장을 펼치며 새로운 논쟁의 불씨를 지폈다.
김진, “상호 모순…칸트 요청이론 도입해야” 주장
한자경, “기독교 중심 자아관서 출발한 발상” 반박
90년대 불교학자들간에 진행됐던 무아-윤회 논쟁은 2000년대 들어 칸트 등 서양철학을 전공한 울산대 김진 교수의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면서 철학전공자들간의 주장과 반박으로 이어졌다.
울산대 김진 교수는 서양철학자 칸트의 사상과 불교 사상을 비교한 『칸트와 불교』(2000년, 철학과 현실사)라는 책을 통해 “무아-윤회설은 모두 불교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교리로서 두 가지 모두를 내세울 경우 서로 상충될 수밖에 없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불교의 십이인연설은 윤회설에 기초한 것이며, 윤회적 주체의 탄생과 성장, 죽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며 “그러나 이와 같이 분명하게 태어나는 이가 있고 그가 살아서 죽다가 다시 어떤 특정한 누군가로 태어난다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설과는 상호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석가가 자신의 전생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낸 사실에서 알 수 있듯 불교에서의 연기적 주체는 의식의 통일성을 전제하고 있으며, 특정한 인격체의 행위사실에 대한 책임이 인과론적으로 규정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며 “이는 불교 스스로 무아설을 철저하게 부정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결국 무아-윤회설이 양립하기 위해서는 칸트가 도덕적 실천을 강조하기 위해 신의 존재를 요청했던 것처럼 ‘참된 자아’를 상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이화여대 한자경 교수는 김진 교수의 『칸트와 불교』의 서평(「오늘의 동양사상」제4호)에서 “김 교수가 칸트의 요청이론을 통해 불교의 무아-윤회설의 모순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은 기독교와 불교에서 인식하는 인간에 대한 차이를 간과한 것”이라며 “기독교적 사유에서 인간은 그 인식에 있어 유한하게 한계 지워진 존재이기 때문에 범부가 생각할 수 없는 그 한계 밖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신이 도입돼야 하지만 불교는 인간의 인식이 무한하기 때문에 또 다른 존재인 신을 요청할 필요는 없다”고 반박했다. 그는 또 “불교의 무아론적 윤회론의 핵심은 현상적 자아의 연속성과 행위의 책임성, 나아가 윤회주체의 연속성조차도 실체적 자아의 자기 동일성을 전제할 필요 없이, 연기적 인과 연속성만에 의해서도 성립될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 교수의 비판에 다시 반론에 나선 김진 교수는 2001년 『철학비평』(6호)를 통해 “자기동일성을 가진 주체 없이 윤회가 가능하다는 것은 희론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김 교수는 “무아설을 절대적으로 해석할 경우 ‘업의 상속’이나 ‘업력의 상속’이라는 말 자체가 무의미하게 됨에도 찰나적 존재에 의한 업의 상속으로 윤회가 가능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며 “어떻게 찰나적인 것들이 그 이전의 찰나적인 것들로부터 업을 이을 수 있으며, 그 이후의 찰나적인 것들에게 다시 업을 넘겨줄 수 있는가”라며 반박했다.
이에 대해 한자경 교수는 「오늘의 동양사상」(5호)에서 “불교에서 말하는 찰나적 존재는 한 찰나에 생하고, 그 다음 찰나에 멸하는 것으로 멸한다는 것은 곧 작용력(업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며, 이는 곧 자기 과(보)를 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며 “하나의 것이 멸하면서 동시에 그 힘에 의해 그 다음 것이 생하므로 찰나적 존재이면서 업보 또는 인과의 관계가 성립하는 것으로 결국 윤회도 업과 보의 관계로 연속된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두 학자의 주장과 반박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이 두 학자는 2002년 10월 본지의 지면을 빌려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며 끝없는 논쟁을 계속했다.
두 철학자가 무아-윤회설을 두고 논쟁을 계속하자 2003년 철학지 「오늘의 동양사상」은 ‘무아와 윤회에 대한 논쟁’을 특집으로 다루며 철학계 전반으로 논쟁의 불씨를 확대시켜 나갔다.
조성택 등, “모순 지적은 불교 왜곡” 비판
김진, “지나친 교조주의적 입장” 반박
김진 교수와 한자경 교수의 주장과 반박이 팽팽하게 진행되던 무아-윤회 논쟁은 2003년 철학잡지 「오늘의 동양사상」이 무아-윤회 논쟁을 특집으로 다루면서 철학계 전반으로 확산됐다.
고려대 조성택 교수를 비롯해 동국대 최인숙 교수, 서울대 김종욱 박사 등이 새로운 논객으로 참가한 「오늘의 동양사상」에서 학자들은 “무아-윤회가 모순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불교를 왜곡하는 것”이라며 일제히 김진 교수의 주장을 비판했다.
고려대 조성택 교수는「불교에 있어 이론과 실천수행」이라는 논문에서 “김진 교수의 문제 제기는 근본적으로 불교에 있어 ‘이론과 실천 수행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서양 철학의 이성 중심주의에서 불교를 바라봤기 때문”이라며 “불교의 교리들은 단지 이성적 사유의 산물이 아니라 선정과 삼매라는 수행을 통해 만들어진 초월적 경험의 산물이라는 점을 김 교수는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나’라고 하는 것이 관념에 불과한 ‘무아’임을 확인하는 것은 오로지 ‘깨달음의 경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며 “깨달음의 경험으로서만 궁극적으로 논증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을 두고 ‘모순이다’, ‘아니다’라고 논쟁하는 것은 의미 없는 것”이라고 일축했다.
김종욱 박사도 「이원성과 비이원성의 구조에서 본 자아의 문제」라는 논문을 통해 김진 교수의 주장을 비판했다. 그는 논문에서 “김진 교수가 칸트가 그랬던 것처럼 불교에서도 ‘참된 자아’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현상과 본체에 대해 이원성이라고 인식하는 칸트 철학의 특징과 비이원성이라고 인식하는 불교간의 근본적 차이를 무시한 채, 칸트식의 방법론을 가지고 불교를 해석하려는 논리적 비약”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윤회를 위해서는 자아동일성이 요청돼야 한다는 김 교수의 주장은 찰나적이면서도 업과 보의 관계가 연속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흐르는 강물이 한순간도 동일하지 않으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되듯 불교의 윤회도 자기 동일체 없이 계속될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여기에 동국대 최인숙 교수도 이 두 학자의 주장에 동조하며 김진 교수의 주장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최 교수는 「무아-윤회 양립설에 대한 해석」이라는 논문에서 “김진 교수가 불교의 자아론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윤회하기 위해서는 실제적 자아가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기독교적 사고의 발상”이라고 지적한 뒤 “불교의 자아는 ‘색수상행식’이라는 것이 인연에 따라 모이고 흩어지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에 ‘무아’이며 윤회는 업의 상속으로 이뤄지는 것으로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불교철학을 전공한 학자들의 대대적인 공세를 받은 김진 교수는 2004년 10월 한남대에서 열린 한국철학자대회에서 「서구적 불교해석의 유사성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통해 자신의 반론을 이어갔다. 특히 그는 자신의 논문에 대해 비판을 가했던 학자들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교조적”이라며 “이런 태도는 오히려 개방성과 포용성을 특징으로 하는 불교의 해석적 지평을 한정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불교의 무아설은 모든 가능한 주체의 설정을 부정하는 반면 윤회설은 수행 주체의 계속성, 연속성, 자기수행성, 자기 동일성을 요구하고 있어 이 둘은 모순이 될 수밖에 없다”며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무아와 윤회가 동시에 성립되기 위해서는 자기 동일성을 가진 주체의 요청이 필요하다는 것”이라며 자신의 주장을 재차 강조했다.
불교의 핵심교리인 무아와 윤회. 불교적 시각에서 보면 이 둘은 서로 모순될 것이 없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서양철학을 전공한 학자, 그리고 불교에서 한 발 물러나 있는 일반 대중들에게 무아와 윤회는 서로 상충될 수밖에 없는 이론일 수 있다. 논쟁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라도 무아와 윤회를 모든 대중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불교학자들의 연구 결과가 서둘러 나오기를 기대하는 대목이다.
법보신문 권오영 기자
807호 [2005년 06월 16일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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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게' 쓰자는 마음에서 일필휘지로 단숨에 작성한 논문
윤호진 스님은 1941년 경북 울산에서 태어나 1962년 입산, 동국대 불교학과(1969)와 동대학원(1971)을 졸업한 뒤 프랑스 파리로 유학, 1981년 소로본느대학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한국정신문화연구원과 동국대 교수로 있다가 2002년 정년 퇴임했다. 신국판, 300쪽, 1992년, 민족사 간.
경주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를 역임하고, 기림사 동암에 계신 호진 스님의 논문입니다.
서강대 종교.신학연구소가 제목을 보내오면서 요청하여 쓴 논문인데,
고심하다가, '솔직하게' 쓰자는 마음에서 일필휘지로 단숨에 작성한 논문이라고 합니다.
1992년 6월 13일에 서강대 종교.신학연구소에서 발표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호진 스님 약력은 아래와 같습니다.
* 동국대 불교학과 졸업
* 프랑스 Sorbonne대학 종교학과 철학박사
* 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역임
* 중앙승가대 교수 역임
* 동국대(경주) 불교학과 교수 역임
* 2008년 70세의 노구로 몇 개월에 걸쳐 인도불적을 걸어서 순례 - 통도사 반야암 지안 스님께 보낸 서신이
<불교신문>에 공개됨.
* 그 동안의 학문과 2008년의 불적순례체험을 바탕으로 <부처님 일대기>를 저술하기 위해 현재 기림사 동암에 칩거하고 계심.
저서:
* 무아윤회 문제의 연구(민족사),
* 인도불적답사기(불교시대사) 외
대표적인 역서:
* 에띠엔느 라모뜨 저, 인도불교사1,2(시공사) 외
첫댓글 “불교의 무아설은 모든 가능한 주체의 설정을 부정하는 반면 윤회설은 수행 주체의 계속성, 연속성, 자기수행성, 자기 동일성을 요구하고 있어 이 둘은 모순이 될 수밖에 없다”며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무아와 윤회가 동시에 성립되기 위해서는 자기 동일성을 가진 주체의 요청이 필요하다는 것”이라며 자신의 주장을 재차 강조했다.--//..동일성이 없는 무아윤회하면 짓는 것도 너야, 받는 것도 너야~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호진 스님의 논문,무아윤회 문제의 연구(민족사), 서강대 종교.신학연구소가 제목을 보내오면서 요청하여 쓴 논문인데, 고심하다가, '솔직하게' 쓰자는 마음에서 일필휘지로 단숨에 작성한 논문이라고 합니다....이렇게 양심고백하는 스님들은 없고...윤회를 주장하는 측만 난무하니 어찌된 영문일까?
초기불교의 대가라고 스스로 떠드시는 각묵스님께서는 윤회는 심리상태다.. 라고 하다가 윤회는 진짜 있는 세상이다.. 이러고 두가지 말을 합니다.. 자기자신도 모르니까 필요와 상황에 따라 두가지다 써먹는 것이지요.. 어리숙한 불자들 앞에서는 천상.지옥은 모두 진짜 있는 것이다..라고 뻥을 치시고 똑똑한 불자들 앞에서는 윤회는 심리상태를 말하는 거다.. 요러고 살짝 피하지요... 양심수치심이 실종된 결과일 뿐입니다..
<각묵스님의 불교교리 해설 중에서-초기불전연구원펌>-초기경에서 육도는 분명히 중생이 사는 세상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중생이 사는 세상은 모두 심리상태의 반영이라고 불교는 설명합니다. ..이처럼 고통스럽거나 행복하거나, 저열하거나 고상한 다양한 세상은 모두 다양한 심리상태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의도적 행위들의 반영입니다.. 이러한 의도적 행위를 불교에서는 업이라고 합니다.-
-나아가 아비담마에서는 이러한 육도를 세상과 마음 모두에 적용시켜서 설명합니다.. 즉 욕계세상에 사는 인간이 색계세상의 마음을 일으키고 있으면 그때 그가 일으키는 마음은 욕계의 마음이 아니고 색계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육도는 마음상태 그 자체를 뜻하기도 합니다.. 즉 지옥의 마음을 내면 그 순간은 그것이 지옥이요, 천상의 마음을 내면 그 순간은 그것이 천상이라는 뜻도 된다는 말비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는 매순간 고귀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내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일으키고 있는 심리상태들이 결국은 내가 사는 이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며, 앞으로 태어난 세상을 결정짓기 때문-
-입니다. 짐승들에게 의도적 행위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 않을까요? 본생경 등에 짐승들의 선행이야기가 나타나고 주석서들에서도 많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짐승들이 의도적 행위를 하지 못한다는 단정은 곤란합니다..-
조금이라도 논리적 사고를 할 수 있다면 각묵스님의 말속에서 거듭되는 모순을 짚어낼 수 있습니다.. 맹신적 사고로 저렇게 공부많이 하신 스님이신데 그분이 하시는 말이 틀리겠어? 하고 읽으니까 못 찾아낼 뿐이지요.. 육도는 심리상태라고 하다가 그 심리상태가 나중에는 진짜 있는 세상이 된다고 합니다.. 심리상태이기도 하고 진짜 있는 세상이기도 하고..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지금의 지옥같은 심리상태가 지옥을 비유한 것이라면서 그 비유된 지옥같은 심리상태가 죽어서 나중에 다시 태어날 지옥-진짜 있다는-을 준비하고 있다니 이런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벌벌 떠는 불자들이 정말 어리석은 거지요. 진짜 있는 세상이라면 지금 태어나서 경험하고 있는 지옥같은 심리상태가 전생에 지옥같은 심리상태로 준비해서 떨어진 지옥 아닙니까? 뭔 지옥-불태우고 칼로 찌르고 혀자르고-이런지옥이 또 따로 준비된다는 것인지..각묵스님 말대로라면 지금 생은 전생에 준비되어 온것이니까 말입니다..
말을 하면서도 자기가 하는 말의 모순조차 모르고 떠드는 것은 부처법-십이연기, 사성제에 바탕한 사념처의 살핌-을 수행하지 않고 있다는 가장 뚜렷한 증거입니다.
저위에서 궤변을 늘어놓고 있는 이중표라는 사람이 쓴 '근본불교'라는 책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근본불교, 이중표 지음, 민족사 중에서>--외도들은 육신이 죽으면 우리의 삶은 끝이라는 단견을 갖게 되었지만 세존은 '죽고 사는 실체는 없지만 업에 따라 변화하는 삶은 단절이 없다'는 의미에서 단견을 배척했다. 이러한 세존의 견해는 '육신은 죽어도 영혼은 죽지 않고 다음 세상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외도의 상견과도 다르다.. 상견에서는 영원히 존재하는 자아를 인정했지만 세존은 그러한 자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본불교 105쪽>
자기가 세존이라도 된듯이 세존의 견해를 늘어놓고 있네요.. 세존은 아트만이라는 절대불변의 자아를 부정했다.. 브라흐만과 의 합일을 논파했다는 것이지요..그런데 힌두의 상견을 논파한 세존께서 나는 육신통으로 보니 힌두의 아트만이라는 건 없더라.. 대신에 넘어가는게 있는데 그게 업력이라는 재생연결식이더라.. 그러니 아트만은 없고 무아로 재생연결식이 넘어간다.. 이렇게 가르치셨답니다..
힌두에서는 아트만이 넘어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존께서는 그런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건 없는데 넘어가긴 넘어간다.. 좀 다르게 생긴거다.. 무아업력재생연결식이란 거다.. 요렇게 가르치셨다고 썰을 풀고 있습니다.. 이중표라는 사람 만나보신분 있으시면 혹시 다시 만나면 아트만은 어떻게 생긴거고 무아업력재생연결식은 어떻게 생긴건데 세존이 그렇게 말했는지 좀 물어봐 주세요..뭔데 힌두교하는 사람들은 죽어도 있다고 붙들고 있고, 이중표 이하 남방불교, 북방불교 티벳불교 모두에서는 나는 아닌데 넘어가서 또 나를 만드는 요상한게 있다고 주장하는 건지 말입니다..
그리고 이중표씨 만나면 요것도 좀 물어봐 주세요.. 이중표씨 말대로라면 세존은 아트만하고 다르게 생겼지만 넘어가는게 무아업력재생연결식이라는 게 있긴 있다.. 아트만처럼 똑같이 넘어간다.. 요렇게 가르쳤는데 왜 그시대 외도들에게 단멸론자, 모태에 들지 않는자 라는 비판을 받았는지 말입니다.. 이중표씨 말대로 세존이 가르쳤다면 아트만은 아니지만 어쨌든 넘어가서 모태에 든다고 가르쳤을텐데 왜 모태에 들지 않는다 비판받았는지 이중표씨 좀 설명좀 해달라 해주세요
그렇게 물으면 이중표씨는 분명히 이렇게 답할 것입니다.. 세존을 단멸론자라 비난한 것은 세존이 불선법의 단멸과 탐진치의 단멸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거 말됩니까? 아무리 돌대가리인 외도라도 불선법의 단멸과 탐진치의 단멸을 가르치는 것이 나쁜거라고 생각할 외도 있습니까? 누가 들어도 당연하게 옳은 것을 가르치는걸 가지고 트집을 잡아 비난을 했다구요? 이중표씨가 만일 그렇게 대답한다면 이중표씨 아이큐가 얼만지 물어봐 주시기 바랍니다. 당시 외도들이 '부처 너는 왜 그렇게 훌륭한 것을 가르치고 난리냐? 너 단멸론자 맞지?' 이렇게 비난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외도들은 불선법짓고, 탐진치하자 이랬나?
그다음 세존을 모태에 들지 않는 자라 한것에 대하여 아마도 이중표씨는 이렇게 답변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세존을 모태에 들지 않는 자라 비난한 것은 세존이 아라한의 도과를 성취하여 영원히 윤회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다시는 모태에 들지 않는 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비난한 것이다.. 이렇게 답변한다면 이중표씨 아이큐가 얼마인지 꼭 물어봐 주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비난을 하면서 비난받는 대상이 아라한이라는 높은 경지를 성취했다는 걸 인정하기 때문에 비난한다는 것도 있습니까? '니가 아라한 된것은 인정하는데 우리한테 손해니까 나는 너를 비판한다'..ㅋㅋㅋ 외도가 영구도 아니고 말입니다.
저는 이중표라는 사람을 한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그가 써놓은 책을 보니 그가 할 답변이 훤히 보여서 이렇게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또 이중표라는 사람이 쓴 책을 무슨 부처님법인양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명행족이라는 사람이 웨란자경을 끌어다 이렇게 써먹으면서 하도 궤변을 늘어놓는 것을 보았기에 이중표한테 영향을 받아서 저렇게 된 것임을 알았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외도들이 단멸론자, 모태에 들지 않는자 라고 외도들이 비난하는 장면은 앙굿다라니까야 웨란자경에 그대로 나옵니다..
웨란자경의 결론부분에는 육신통의 비유가 나옵니다.. 저위의 이중표라는 사람과 그를 부처님처럼 숭앙해 마지 않는 명행족이라는 사람은 육신통이라면 껌뻑 죽습니다.. 부처님이 육신통으로 보니까 아트만은 없는데 무아업력재생연결식이 있더라,,,이렇게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처가 내법은 현실에서 확인되는 법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을 말짱 구라로 만드는 잡소리만 정신없이 늘어놓는 것입니다.
저 윗글에도 고대로 나오네요..<윗글>- 불교 교리상 무아와 윤회는 전혀 다른 차원의 개념이기 때문에 전혀 모순관계가 성립될 수 없다”고 반박했다. 이 교수는 “어떤 개념이 모순 관계가 되는 것은 동일한 차원 또는 동일한 시공이라는 조건 아래서만 성립한다”며 “그러나 윤회는 생사의 세계, 즉 세간(世間)의 차원에 있고, 무아는 열반의 세계, 즉 출세간(出世間)의 차원에 있기 때문에 이 둘은 모순관계가 성립할 수 없는 조건”이라고 강조했다..이중표 교수...
요게 바로 육신통 이야깁니다.. 육신통은 범부는 얻을 수 없는 출세간의 법이라는 것이지요..그러니 부처가 육신통으로 보아서 윤회있다고 경전에 써있는데 너네(호진스님_ )같이 어리석은 범부들이 뭘 그것이 모순이라고 떠드는 거냐 이러고 썰을 푸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중표교수는 부처법을 전체로 못 꿰어서 저런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어리석은 범부는 한명도 얻을 수 없는 육신통의 법을 설했다면 '누구라도 와서 이 법을 보라' '내 법은 현실에서 확인되는 법이다.'' '연기를 보는 자 법을 보는 자이며 법을 보는 자 나를 보는 자이다.'' 이런 소리를 했겠습니까? 그런데 이중표 교수가 떠벌리는 연기법이라는 걸로 부처법을 꿰어보면 '내법은 육신통을 얻은 자만 볼 수 있는 법이다..' '누구라도 육신통을 얻고 나서 이 법을 보라' '내법은 나말고는 아무도 얻을 수 없는 출세간의 법이다.' '연기법을 보는 자 법(육신통)을 보는 자이며 육신통을 얻은 자 나를 보는 자이다.''
이렇게 됩니다.. 이중표 교수가 아무리 아이큐가 나쁘더래도 이걸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누구 이중표 교수 만나실 분 있으시면 꼭 전해주세요.. 이거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요..
그런데 참말로 요상한 것은 그 훌륭하신 부처님원음을 한다는 남방불교에서 근세에 아라한이라는 이가 딱 한명 나왔는데 뭐 순룬명상이래나 그런걸 창안했답니다.. 다리가 아파도 절대로 쪼그린 다리를 펴면 안되고 세상에 호흡을 단 한번이라도 놓치면 안된다..뭐 이런 수행을 해서 예류자되고 한달만에 일래자. 또 한달만에 아라한 이렇게 초고속 승진해서 아라한 되었다는데요..그 훌륭하신 분께서도 육신통은 구족 못하셨다네요..그리고 돌아가실때 뭐라나.. 나 죽은 뒤에 시체에 손도 대지 말아라 이런 유언을 남겼다네요... 그리고 시체가 아직도 안썩고 있고 거기서 좋은 향이 나온다고 그걸로 유명하답니다..
이중표 교수의 말처럼 부처님 법은 너무 차원이 다른 법이라 그 훌륭하신 아라한 도 육신통은 구족이 안되었다는군요..그러니 부처가 '내법은 현실에서 확인되는 법'이라고 말한것은 말짱 구라이다... 이중표 교수는 그런 말을 저렇게 떠들고 있는 것입니다.. 완전 부처법부정이지요.. 법훼손도 이만저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1.무아윤회를 [나는 아닌데 넘어가서 또 나를 만드는 요상한게 있다고 주장하는 건지 말입니다.. ]라든지[무아재생연결식]이라고 하는데 이중표가 이렇게 말했습니까? 그의 책 어디에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지 부탁드립니다.
2.[이중표씨 말대로라면 세존은 아트만하고 다르게 생겼지만 넘어가는게 무아업력재생연결식이라는 게 있긴 있다.. ] -->이중표가 세존은 아트만 하고 다르게 생겼지만 넘어가는게 있다라고 정확히 어느 곳에 써 있는지 말씀해주세요.
3.[이중표씨 말대로 세존이 가르쳤다면 아트만은 아니지만 어쨌든 넘어가서 모태에 든다고 가르쳤을텐데 왜 모태에 들지 않는다..] 라고도 어느 곳에 써 있는지 가르쳐 주시고요.
4.[그다음 세존을 모태에 들지 않는 자라 한것에 대하여 아마도 이중표씨는 이렇게 답변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세존을 모태에 들지 않는 자라 비난한 것은 세존이 아라한의 도과를 성취하여 영원히 윤회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다시는 모태에 들지 않는 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비난한 것이다..]--> 라고 이중표가 할거라는데 여기서 모태란 어머니 자궁입니까?
5.[..<윗글>- 불교 교리상 무아와 윤회는 전혀 다른 차원의 개념이기 때문에 전혀 모순관계가 성립될 수 없다”고 반박했다. 이 교수는 “어떤 개념이 모순 관계가 되는 것은 동일한 차원 또는 동일한 시공이라는 조건 아래서만 성립한다”며 “그러나 윤회는 생사의 세계, 즉 세간(世間)의 차원에 있고, 무아는 열반의 세계, 즉 출세간(出世間)의 차원에 있기 때문에 이 둘은 모순관계가 성립할 수 없는 조건”이라고 강조했다..이중표 교수... ]를 육신통에 비유하여 연기법은 와서보라 라는 현실적의미로 연결시켰는데 '와서보라' 하였다고 보입니까? 깨달아야 연기법이 보이는 것 아닙니까? 깨닫는다는 것 출세간 차원 아닙니까?
'와서보라' 라는 것과 연결시키는 것은 좋은 비교가 아니군요.
이중표씨의 근본불교 쪽수까지 표시해놓았으니까 세세하게 읽고 사고해보시기 바랍니다.. 부처님법의 출세간이라는 것도 현실에서 확인되는 법--자기안에서 문사수하여 스스로 납득하였기에 믿어지는 법--입니다.. 감수님께서는 출세간이라는 의미를 저 하늘 어디쯤인가의 따로 있는 하늘세상 극락세상이라는 의미로 두십니까? 그러면 부처님께서 누구든지 와서 이법을 보라 고 말씀하신 의미는 완전히 무의미한 언어가 되는 것입니다.
와서보라 라는 말씀이 어디 잘 모셔두었다가 죽어서 확인하라는 가르침이라고 이해하십니까? 부처님법인데 그 가르침의 진의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불자로서 바른 것 아닌지요? 감수님께서는 무아윤회로 재생연결하여 언제.어느세월에 '와서보라'는 가르침을 확인하신다고 보시는지요?
이미 근본불교 105쪽은 참고하여 질문 드린 것이지요.[-외도들은 육신이 죽으면 우리의 삶은 끝이라는 단견을 갖게 되었지만 세존은 '죽고 사는 실체는 없지만 업에 따라 변화하는 삶은 단절이 없다'는 의미에서 단견을 배척했다. 이러한 세존의 견해는 '육신은 죽어도 영혼은 죽지 않고 다음 세상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외도의 상견과도 다르다.. 상견에서는 영원히 존재하는 자아를 인정했지만 세존은 그러한 자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본불교 105쪽>]
->님이 올리신 근본불교에서 [나는 아닌데 넘어가서 또 나를 만드는 요상한게 있다고 주장하는 건지 말입니다.. ][ .[이중표씨 말대로 세존이 가르쳤다면 아트만은 아니지만 어쨌든 넘어가서 모태에 든다고 가르쳤을텐데 왜 모태에 들지 않는다..]는 발견되지 않습니다.또 명색 이야기도 이렇게 님과 같이 이야기 한적이 없습니다.
ㅎㅎㅎ 경전을 읽고 사고한다는 것은 조건지어짐까지 사고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안되면 문구에 갇혀 버리게 됩니다. 이중표씨가 주장하고 있는 것이 무아윤회라는 것을 알고 계신다면 님이 묻고 있는 것은 말꼬투리 잡는 것에 불과함을 스스로도 알고 계실텐데요..
그럼 이중표씨가 도대체 뭘 주장한걸로 이해하시는지 님께서 이해하신걸 말씀해 보시던가요..님은 명색을 뭐라고 이해하고 계십니까? 님이 인용한 구절 상견과 단견의 구절을 이해해보면 그대로 무아윤회 아닙니까? 무아라서 넘어가는 것은 없지만 업력이 넘어가니까 단견은 아니다..이런 말 아닙니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자는 이야기 아닌지요? 님은 아트만과 업력이 어떻게 다른지 실증할 수 있습니까? 부처님법은 현실에서 확인되는 법입니다. 말꼬리잡는 것은 현실법과는 상관없는 것입니다. 인터넷을 보다보면 불교가 말장난인줄 착각하는 분들이 계시더군요..
..글쓰는 도중 끊겼네요.문자에 묶이는 것이 아니라 제가 문제를 삼으려면 님이 표현한 정확한 그 부분을 가져와야 오해가 없을 것 같아서 입니다.그리고 이교수가 사용하지 않은 문구를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왜냐하면 내 생각으로 비판하기 때문이지요.그러한 예가 다음과 같은데 ['..업에 따라 변화하는 삶은] 은 [또 나를 만드는 요상한게 있다고 주장하는 ..]과는 천지 차이지요. 전자는 삶에 실체가 없음을 전제하고 하는말이고 후자는 실체가 있음을 전제하고 비판하는 말이지요.
이와같이 이교수가 하지 않은 말을 그렇다고 생각하여 비판하므로 잘못된 비판을 하는 것인데 이유는 그의 책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로 보입다.또 제가 명색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떠나서 이 교수는 명색을 '모태에 드는..'등으로 님과 같이 비유한적도 없답니다.하지 않은 말을 사용한 것 처럼 비판해서는 안되구요.
그리고 [무아윤회 아닙니까? 무아라서 넘어가는 것은 없지만 업력이 넘어가니까 단견은 아니다..이런 말 아닙니까?] 라고 해석하는 것도 통찰님 개인적 견해라 보이네요. 아트만과 업력을 실증하라니 저는 깨달은 사람이 아닙니다. 공부하길 아트만과 업의 용어적 해석으로 이해할 뿐 입니다. 혹시 '업'을 아트만으로 알고 계시진 않겠지요.업은 실체가 없습니다.
그리고 제 이야기가 잘못 전해진 것 같은데 '여기와서 보라'는 그야말로 수행해서 알수 있다라는 현실적 이야기 랍니다.님 주장대로 하늘나라에 있는 것 아니지요.출세간이 하늘나라인가요. 아니지요.수행에서 현실에서 진리를 아는 법이지요.이 교수가 출세간이라는 문구를 사용 하였다고 육신통,하늘나라에 비유하는 것은 그의 이야기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죠.님의 공부에 판단할 생각은 없구요 말꼬리 잡을 생각은 더욱 없습니다.이교수글을 잘못 이해하는 부분이 있어 지적한 것입니다.
그러시다면 님께서도 무아-윤회는 양립할 수 없다는 데 견해를 같이 하는 것입니까? 육신통도 비유로 이해하시는 것이구요? 그렇다면 아무 문제될것이 없습니다. 이중표 씨의 글은 초기불교를 시작부터 잘못 이해하도록 이끄는 면이 하도 많아서 짚어본것입니다..
초기불교의 가르침은 수행을 통하여 자신안에서 직접 연기의 통찰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말장난 되기 십상인 법입니다. 연기법을 도표로 달달 외워서 아는걸 연기법을 믿는 걸로 착각한다는 말입니다. 연기의 통찰은 자기 안에서 자기 어리석음의 뿌리 확인하는 법입니다. 단견과 상견은 어리석음의 뿌리 확인해야 이해되는 법이지요..이중표교수의 글이 말장난이라고 하는 이유는 스스로 확인함도 없이 머리굴려 써놓은 글이라는 뜻입니다. 무아-윤회는 그런 말장난의 대표적인 케이스이지요.부처님법을 이한몸뚱이 안에서 일어나는 법으로 이해하면 업이니, 아트만이니, 하는 요상한 용어가지고 머리 썩일 이유가 없습니다.
아트만윤회, 무아윤회, 이런 말장난 가지고 머리 쓸 시간에 지금 현재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육입처의 발생과 소멸에 머리를 쓰고 사고하는 것이 훨씬 자타에 유익한 일입니다. 아트만과 업이 어떻게 다른것인지 그거 소상하게 알아서 님은 지금 현재 님자신에게 일어나는 것들 똑바로 보는데 어떤 도움이 됩니까? 업은 태어난 때부터 기억으로 확인되어지는 지금 현재까지의 삶에서 보면 헷갈릴 것 하나도 없는 개념입니다.. 철저하게 자업자득의 논리를 현실에서 확인할 수 있지요.이런걸 뭘하러 태어나기 전, 죽은 후로 들고가서 머리를 썩히는 시간낭비를 해야 합니까?
제 뜻이 잘 전달된 것 같지 않군요. 저는 무아윤회를수용합니다.그러나 이곳에서 무아윤회에 대하여 님과 토론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교수의 여러부분 글이 왜곡되어 있어 지적한 것입니다. 이 교수가 말하는 것은 '모순이란 동일차원에서 대립되는 것이므로 세간과 출세간의 윤회,무아란 동일차원이 아니므로 대립될수 없는 것이라고 언어구조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육신통의 비유를 들어 '여기와서보라' 라는 예로 드는 것은 동등비유가 되질 못하겠지요.하여 그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아집니다. 학자란 경을 근거로 바른 교리를 전달하는 것입니다.깨달았다면 책쓰는 일로 끝나지 않겠지요.
님 역시 깨달은 분이라면 카페에서 글쓰기보다 세상에 더 널리 알려졌겠구요.더욱이 깨달았다면 이 교수글을 이렇게 왜곡되게 지적두 않했겠구요. 왜람된 말씀이지만 이교수를 비판 할려면 머리굴려 써 놓았다고 자신의 견해로 짐짓 말씀하지 마시고 그의 책 어느 부분이 경과 합일이 되지 않는다 해야지 위에서 제가 지적한데로 그가 하지 않은 말을 만들어 비판하는 것은 '육처' 보는 일보다 더 현실적인 글쓰기 순서가 아닐까요?
제가 한말은 그 모두를 바탕으로 하여 말씀드린 것임을 이해하지 못하시는군요..조건지어짐이란 말을 드렸는데요..부처님의 가르침을 세간과 출세간으로 양분해놓고 들어가면 상견과 단견이란 말도 말장난으로 나누어지지요.. 깨달아서 세상에 알려지고 안알려지고가 뭐그리 중요한 일입니까? 제가 말장난을 말하는 것은 그런것을 논해서 님이 직접 님안에서 확인해내는 고의 소멸이 무엇이 있느냐 이거 말씀드리는 겁니다. 무아윤회를 수용한다... 그런 문제가 님이 수용하고 안하고에서 결정되어지는 문제입니까? 내가 수용하니까 무아윤회가 맞고 내가 수용하지 않으니까 무아윤회가 아니고 이런 문제입니까?
부처님법을 내가 수용하고 안하고로 이해하신다면 님이 세워서 주장하고 있는 그 '나'라는 것의 실체없음은 무엇이 해결합니까? 그거 똑바로 보자고 설해진 법 아니던가요? 님의 그 나라는 것이 수용하니까 무아윤회는 절대로 있어야 한다..이렇게 웃자라나가는 인간의 자아의 속성에 대해서는 도외시하시는군요..
부처님법은 처음, 중간, 끝이 하나로 통하는 법입니다. 처음시작부터 세간과 출세간을 따로 실재하는 세계로 양분해 놓고 들어간다는 것은 이미 끝도 틀린 소리라는 것을 인정하고 시작하는 것이지요..그러니 현실법인 부처님법을 육신통구족을 요구하는 법으로 바꿔먹는것 아닙니까? 사성제의 바탕하에서 틀린것은 틀린것이고 바른것은 바른것이다..이거 외에 무슨 말장난이 필요합니까? 동일차원이니 아니니 이게 바로 궤변아니고 무엇입니까? 지금여기서 확인하라는 법에 무슨 동일차원이고 아니고 가 끼어들어옵니까? 부처님이 그렇게 설하셨나요?
누구 이중표 교수 만나실 분 있으면 '부처법훼손행위좀 고만하고 입좀 닫고 살아라' 이렇게 좀 전해주세요.. 불교학자면 학자답게 불교사연구 이런거나 신경써서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학자적 양심을 담은 글이나 써서 내놓아라 라고 말입니다.. 부처의 연기법 같은 것은 불교학자인 이중표 같은 사람이 손댈 부분 아니니 손대지 말라고 전해주세요.. 손대고 싶으면 부처법 똑바로 공부하고 수행해서 자신안에서 직접 확인되어진 법을 글로 써라.. 이렇게 좀 전해주십시오.. 꼭 부탁드립니다..
자칭 타칭 깨달았다고 세상에 널리 알려진 자들을 무조건 맹신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음 아닙니까? 사성제의 통찰을 바탕으로 하여 그가 하는 말이 바른가 그른가 법과 율에 비춰보는것이 불자로서 바른 자세입니다..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안알려지고 가지고 깨달음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음의 안경으로 깨달은 자를 재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깨달음이라는게 세상에 널리 알려지는 것일까요? 탐진치의 소멸이라는 것..그게 깨달음인데 세상에 널리 알려짐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