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아픔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다.
이 작품의 플롯은 매우 단순하다. 장면과 장면으로 이어져서 극의 내용이 저절로 줄거리를 이끌어가는 작품이 아니라 극 안에 등장하는 세 인물의 이야기가 극 전체를 이끌고 나가야하는 배우 중심의 작품이다.
연출가의 연출력이 중심이 되는 현대연극의 현실 속에서 이런 작품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철저하게 사실주의적 무대 위에 느릿한 템포로 움직이는 노부부가 결혼 40주년을 기념하며 조촐한 파티를 준비하고 있다.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이고 무척이나 행복해 보이는 그들의 모습에는 폭풍전야를 연상시키듯 묘한 긴장감이 존재한다.
그러던 중 6.25 전쟁 중에 국군으로 참전하였다가 북한에 국군포로로 억류되었던 권씨가 50년 만에 탈북을 해서 남한으로 돌아오게 되고, 그의 이전 아내였던 양씨와 그녀의 현재 남편인 박씨를 만나는 일이 사건의 시작이고 스토리의 전부이다.
하지만 그 극적인 만남으로 인해 인물들의 내적인 갈등이 겉으로 표출되어 극적 갈등을 만들어가며 극을 이끌어 간다.
이 작품 안에는 세가지 이야기가 들어 있다.
등장하는 세 인물 하나하나가 그 이야기를 가지고 무대에 등장하여 각 각 하나의 작품을 공연하듯 풀어내고 있다.
50년 전 결혼한지 일주일만에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어 생이별을 하게 되고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산 후 안정을 찾았지만 50년 전의 사랑을 찾아 목숨을 걸고 탈북하여 결국은 만나게 된 남자. 언뜻 상상해 보아도 고통이 생생히 느껴지는 듯 하다.
하지만 배우들은 관객이 그냥 언뜻 상상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고통과 그리움의 삶을 무대위에서 이야기 하는 것만으로 관객의 마음을 찌를 듯이 파고 들었다.
배우가 보여준 완벽에 가까운 감정선의 정리와 호흡의 조절 덕분이었다.
50년 전에 헤어진 남편을 잊지 못하지만 새로운 삶을 살아내야하기 때문에 잊을 수 없는 사람을 잊은 체 하며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온 여인의 이야기는 그만한 삶을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가슴깊이 와닿지 않을 이야기이다.
하지만 양 여사 역을 맡은 서권순 배우님의 연기가 그 이야기에 생명을 실어주었으며 관객이 겪어 보지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공감하게 만들었다.
결혼하고 한 여자와 40년을 살았지만 항상 보이지 않는 적과 싸워야 했던 남자. 한 여자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사랑이 너무나 필요했던 남자의 이야기가 세월을 초월하여 가장 큰 공감을 이끌어 냈다. 보이지 않는 사람에 대한 질투가 그 세월에 고스란히 묻어나는 듯 했으며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 한 호흡 호흡이 무대를 벗어나 객석으로 퍼져 나와 관객의 마음속에 전달됐다.
사실주의 무대에서 아무런 연출적인 도움을 받지 않고 순수하게 배우들 개개인들의 연기력과 앙상블만으로 이루어진 공연이었다.
90분이라는 시간을 단 한 번의 암전으로 극을 이끌어가려면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단순히 장시간 말하고 움직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 안에서 과거를 떠올려야하고 사랑해야하고 미워해야하고 화내야하고... 90분이라는 시간동안 인간의 희로애락을 모두 보여줘야 하는데.. 아니 인생을 살아야하기 때문이다.
감정을 다루는 기술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은 최고의 기술을 가진 이들이라고 말해두고 싶다.
급작스러운 변화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처리해 내는 모습이 마치 베테랑 피아노 연주자의 현란한 손짓 같았다.
그들은 그 시간동안 무대 위에서 인생을 살았다. 적어도 난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그들이 무대에서 보여준 것은 인생이었으며 진실이었다.
원래 인생은 항상 신나거나 다아나믹하지 않다. 불같이 격동적이고 시끌벅적하며 바쁘기도 하지만 잔잔하고 고요하며 심심하기도 하다. 그러한 인생을 어떻게 살아내는가... 상처주고 상처받으며 용서하고 용서받아가며 살아가는 인생을 90분동안 살아낸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