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학계에서 말하는 거란 성종의 고려 공격로(붉은색)는 개경을 한반도로 미리 정한후 전쟁상황을 그리는 군사학 기초가 없는 엉터리 주장.
○女眞復報契丹兵至,始知事急,分遣諸道軍馬齊正使。
여름 5월에 서북계(西北界)의 여진이 보고하기를, “거란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침노할 것을 모의한다." 하였는데, 조정의 의논은 '여진이 우리를 속인다.' 하여 방어를 하지 않았다. 여진이 다시 보고하기를, “거란의 군사가 이르렀다." 하니, 비로소 일이 급함을 알고 여러 도의 군마제정사(軍馬齊正使)를 나누어 보내었다.
○冬十月,以侍中朴良柔,爲上軍使,內史侍郞徐煕,爲中軍使,門下侍郞崔亮,爲下軍使,軍于北界,以禦契丹,閏月,幸西京,進次安北府,聞契丹蕭遜寧,將兵攻蓬山郡,獲我先鋒軍使,給事中尹庶顏等,王,不得進,乃還,徐煕引兵,欲救蓬山,遜寧,聲言,大朝,旣已奄有高句麗舊地,今爾國,侵奪疆界,是用征討,又移書云,大朝,統一四方,其未歸附,期於掃蕩,速致降款,毋涉淹留,煕,見書還奏,有可和之狀,王,遣監察司憲,借禮賓少卿李蒙戩,如契丹營請和,遜寧,又移書云,八十萬兵,至矣,若不出江而降,當須殄滅,宜君臣,速降軍前,蒙戩,至營,問所以來侵之意,遜寧曰,汝國,不恤民事,是用恭行天罰,若欲求和,宜速來降,蒙戩還,王,會群臣議之,或言車駕,還京闕,令重臣,率軍士乞降,或言割西京以北之地,與之,自黃州至岊嶺,畫爲封疆,可也,王將從割地之議,開西京倉米,任百姓所取,餘者尙多,王恐爲敵所資,令投之大同江,煕奏曰,食足則城可守,戰可勝也,兵之勝負,不在强弱,但能觀釁而動耳,何可遽令棄之乎,況食者,民之命也,寧爲敵所資,虛棄江中,又恐不合天意,王,然而止之,煕又奏曰,自契丹東京,至我安北府,數百里之地,皆爲生女眞所據,光宗,取之,築嘉州,松城等城,今丹兵之來,其志不過取此二城,其聲言取高句麗舊地者,實恐我也,今見其兵勢大盛,遽割西京以北與之,非計也,且三角山以北,亦高句麗舊地,彼以谿壑之欲,責之無厭,可盡與乎,況今割地,則誠萬世之恥也,願駕還都城,使臣等,一與之戰,然後議之,未晩也,前民官御事李知白,奏曰,聖祖,創業垂統,洎于今日,無一忠臣,遽欲以土地,輕與敵國,可不痛哉,古人有詩云,千里山河輕孺子,兩朝冠劍恨譙周,蓋謂譙周爲蜀大臣,勸後主納土於魏,爲千古所笑也,與其輕割土地,棄之敵國,曷若復行先王,燃燈,八關,仙郞等事,不爲他方異法,以保國家,致太平乎,若以爲然,則當先告神明,然後戰之與和,惟上裁之。時,王,樂慕華風,國民不喜,故知白,及之,遜寧以蒙戩回還,久無回報,遂攻安戎鎭,中郞將大道秀,郞將庾方,與戰克之,遜寧,不敢復進,遣人,促使來降,王,遣和通使,閤門舍人張瑩,往丹營,遜寧曰,宜更以大臣,送軍前面對,瑩還,王會群臣,問曰,誰能往丹營,以口舌却兵,立萬世之功乎,群臣,無有應者,煕獨奏曰,臣,雖不敏,敢不唯命,王,出餞江頭,執手慰藉而送之,煕,奉國書,如丹營,與遜寧抗禮,不小屈,遜寧心異之,語煕曰,汝國,興新羅地,高句麗之地,我所有也,而汝侵蝕之,又與我連壤,而越海事宋,大國,是以來討,今割地以獻,而修朝聘,可無事矣。煕曰,非也,我國,卽高勾麗之舊也,故號高麗,都平壤,若論地界,上國之東京,皆在我境,何得謂之侵蝕乎,且鴨綠江內外,亦我境內,今女眞,盜據其間,頑黠變詐,道途梗澁,甚於涉海,朝聘之不通,女眞之故也,若令逐女眞,還我舊地,築城堡,通道路,則敢不修聘,將軍如以臣言,達之天聰,豈不哀納,辭氣慷慨,遜寧,知不可强,遂具以聞,丹帝曰,高麗,旣請和,宜罷兵,煕,留丹營,七日而還,王,大喜,出迎江頭,卽遣侍中朴良柔,爲禮幣使,入覲,煕,復奏曰,臣,與遜寧約,盪平女眞,收復舊地,然後朝覲可通,今纔收江內,請俟得江外,修聘未晩,王曰,久不修聘,恐有後患,遂遣之。
○ 겨울 10월에 시중(侍中) 박양유(朴良柔)를 상군사(上軍使)로, 내사시랑(內史侍郞) 서희(徐熙)를 중군사(中軍使)로, 문하시랑(門下侍郞) 최양(崔亮)을 하군사(下軍使)로 삼아, 북계(北界)에 주둔하여 거란을 막게 하였다.윤달에 왕이 서경에 행차하여 안북부(安北府)로 나아가 머무르다가, 거란의 소손녕(蕭遜寧)이 군사를 거느리고 봉산군(蓬山郡)을 쳐서 우리 선봉군사(先鋒軍使)인 급사중(給事中) 윤서안(尹庶顔) 등을 잡았다는 말을 듣고는, 왕이 더 나아가지 못하고 바로 돌아왔다.
서희가 군사를 이끌고 봉산군을 구원하려고 하니, 소손녕이 성명(聲明)하기를, “거란이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했는데, 이제 너희 나라가 강토의 경계를 침탈하니 이 때문에 정토한다." 하였다. 또 글을 보내 말하기를, “거란이 사방을 통일하는데 귀부하지 않은 자는 기필코 소탕할 것이니, 속히 와서 항복하고 지체하지 말라." 하였다.
서희가 글을 보고는 돌아와서 상황이 화친할 수 있겠다고 아뢰니, 왕이 감찰사헌(監察司憲) 이몽진(李蒙戩) 예빈소경(禮賓少卿)으로 차함(借銜)하여 거란의 진영으로 보내어 화친하기를 청하였다. 소손녕이 또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80만의 군사가 다다르리라. 만약 강에 나와 항복하지 않으면 마땅히 모두 멸할 것이니, 군신(君臣)이 빨리 진영 앞에 와서 항복하라." 하였다.
이몽진이 거란의 진영에 이르러 침노한 이유를 물으니, 소손녕이 말하기를, “너희 나라가 백성의 일을 돌보지 않으므로 이 때문에 우리가 공손히 하늘을 대신하여 천벌을 시행한다. 만약 화친하려고 한다면, 마땅히 빨리 와서 항복하라." 하였다. 이몽진이 돌아오자, 왕이 신하들을 모아 의논하였는데, 어떤 이는, “임금께서 개경의 대궐에 돌아가서 중신(重臣)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항복을 청해야 합니다." 하고, 어떤 이는,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서 거란에게 주고 황주(黃州)부터 절령(岊嶺)까지를 국경으로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왕이 땅을 떼어 주자는 의논을 따르려고 하여 서경의 창고를 열어 백성들의 마음대로 쌀을 가져가게 하였는데 아직도 남은 것이 많자, 왕은 적군에게 이용될까 염려하여 대동강에 던져 버리게 하였다. 서희가 아뢰기를, “먹을 것이 넉넉하면 성도 지킬 수 있을 것이며, 싸움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전쟁의 승부는 군사의 강약에 달린 것이 아니요, 다만 능히 틈을 보아 움직이는 데 있을 뿐인데 어찌 대번에 쌀을 버리도록 하십니까. 하물며 먹을 것은 백성의 생명이니, 차라리 적군에게 이용되었으면 되었지 헛되이 강물 속에 버리는 것은 또한 하늘의 뜻에 맞지 않을 듯합니다." 하니, 왕이 옳게 여겨 이를 중지시켰다.
서희가 또 아뢰기를, “거란의 동경부터 우리나라의 안북부(安北府)에 이르는 수백 리의 땅은 모두 생여진(生女眞)에게 점거되었었는데 광종이 이를 빼앗아 가주(嘉州)ㆍ송성(松城) 등의 성을 쌓았으니, 지금 거란 군사가 쳐들어 온 것은 그 의도가 이 두 성을 빼앗으려는 데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 고구려의 옛 땅을 빼앗는다고 소리치는 것은 실상은 우리를 공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군사의 세력이 강성함을 보고 대번에 서경 이북의 땅을 그들에게 떼어 주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더구나 삼각산 이북의 땅 또한 고구려의 옛 땅이니, 욕심 많은 저들이 한없이 요구한다면 그대로 다 주겠습니까. 하물며 지금 땅을 떼어 준다면, 진실로 영원토록 수치가 될 것입니다. 원컨대 임금께서는 도성으로 돌아가시고, 신들이 한 번 싸움을 한 연후에 의논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전 민관어사(民官御事) 이지백(李知白)이 아뢰기를, “태조께서 나라를 세우고 자손에게 물려 주어 오늘날까지 이르렀는데, 한 사람의 충신도 없어 대번에 가벼이 토지를 적국에게 주려고 하니 어찌 원통하지 않습니까. 옛사람의 시(詩)에, '천리 산하를 어린아이보다 가볍게 여기니, 두 조정의 관검이 초주를 원망하네.[千里山河輕孺子兩朝冠劍恨譙周]' 하였으니, 대개 초주가 촉한(蜀漢)의 대신이 되어 위(魏)에 토지를 바치도록 후주(後主)에게 권하여 영원히 웃음거리가 된 것을 이른 것입니다. 가벼이 토지를 떼어 적국에 버리는 것보다는, 선왕(先王)께서 행하시던 연등(燃燈)ㆍ팔관(八關)ㆍ선랑(仙郞) 등의 일을 다시 행하고 외국의 다른 법을 쓰지 않아 국가를 보전하고 태평을 이루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만약 옳게 여기신다면 마땅히 먼저 신명께 고한 뒤에 전쟁을 하든지 화친을 하든지 주상께서 이를 결정하소서." 하였다. 이때 왕이 중국의 풍속을 즐겨 본받았는데, 백성들이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이지백이 이렇게 말한 것이다.
소손녕은 이몽진이 돌아온 후에 오래도록 회보(回報)가 없자 드디어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하였는데, 중랑장(中郞將) 대도수(大道秀)와 낭장 유방(庾方)이 소손녕과 싸워 이겼다. 소손녕이 감히 다시 전진하지 못하고 사람을 보내와 항복하기를 재촉하자, 왕이 화통사(和通使)로 합문사인(閤門舍人) 장영(張瑩)을 거란의 진영에 보내었는데, 소손녕이 말하기를, “마땅히 다시 대신을 군문 앞에 보내어 면대하게 하라." 하였다. 장영이 돌아오자, 왕이 신하들을 모아 묻기를, “누가 능히 거란의 진영에 가서 말로써 군사를 물리치고 길이 남을 공을 세우겠느냐?" 하니 신하들 중에 누구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서희가 홀로 아뢰기를, “신이 비록 불민하나 감히 명령대로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왕이 강가에 나가 전송하면서 손을 잡고 위로해 보내었다. 서희가 국서를 받들고 거란의 진영에 가서 소손녕과 대등한 예를 차리고 조금도 굴하지 않으니, 소손녕이 마음속으로 기특하게 여겼다. 서희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의 소유인데 너희 나라가 이를 침식(侵蝕)하고 있다. 또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음에도 바다를 건너 송을 섬기니, 대국(大國 거란)이 이 때문에 와서 토죄하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땅을 떼어 바치고 조빙(朝聘)을 한다면 아무 일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서희가 말하기를,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바로 옛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다. 그런 까닭으로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을 정한 것이다. 만약 땅의 경계를 논한다면 상국(上國 거란)의 동경도 모두 우리의 지경(地境)에 있는데, 어찌 우리가 침식했다고 이르느냐. 더구나 압록강 안팎 또한 우리나라의 경내인데, 지금 여진이 그 사이에 점거하여 교활하고 변덕스럽게 길을 막아 통하지 못하게 하여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렵게 되었으니, 조빙이 통하지 못하는 것은 여진 때문이다. 만약 여진을 쫓아 버리고 우리의 옛 땅을 돌려 주어 성보(城堡)를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한다면, 감히 조빙을 하지 않겠는가. 장군이 신(臣)의 말을 귀국의 황제에게 알린다면 어찌 딱하게 여겨 받아들이지 않겠느냐." 하는데 말씨가 강개하니, 소손녕이 강요할 수 없음을 알고 드디어 사실대로 거란 황제에게 아뢰기를, “고려에서 이미 화친을 청하였으니 마땅히 전쟁을 중지합시다." 하였다.
서희가 거란의 진영에 7일 동안 머무르다가 돌아오니, 왕이 크게 기뻐서 강가에 나가 맞이하고, 곧 시중(侍中) 박양유(朴良柔)를 예폐사(禮弊使)로 보내 들어가서 거란의 임금을 보게 하였다. 서희가 다시 아뢰기를, “신이 소손녕과 약속하기를, '여진을 소탕하여 평정하고 옛 땅을 수복한 후에 조빙을 통하겠다.' 하였는데 이제 겨우 압록강 안쪽만 수복하였으니, 청컨대 강 바깥쪽까지 수복하기를 기다렸다가 조빙을 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왕이 말하기를, “오래도록 조빙을 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다." 하고 마침내 박양유를 보내었다.
윗글은 고려사절요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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