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세, 흑룡띠
작년에 나는 흑룡띠였다. 한 바퀴 돌아 제자리를 찾았던 0세. 61년 전 6.25전쟁의 끝자락에 세상행 생명줄을 붙잡았던 어떤 수정체가, 용케도 이 번다한 세상에 발을 붙이는데 성공하여 한 바퀴 돌아 여기까지 왔다. 나를 아는 이보다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이 훨씬 많은 세상에서, 나 있노라 내세울 그 무엇도 지니지 못한 분수에, 그 무엇이라도 된 양 종말을 보고 말겠다는 기세로 아등바등하며, 예순 한 해를 사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 나이를 일컬어 이순이라고 한다던가. 나는 무엇을 얻었기에 그 값에 당했는가. 누군가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렵다’고 말하여 현자로 칭할 명분을 삼았다지만, 태어남이 곧 신비라는 고등 생명체의 하나로서 그 메커니즘이라도 깨달았던 것일까.
아버지가 일생을 걸쳐 만든 빅뱅의 산물인 수 조 개의 정충 중에서 선택받은 어떤 하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던 형제 후보들을 죽음에 빠트리고 현신에 성공하여 얻은 생명이라는 이름의 현상을, ‘태어나기 어렵다’ 단 한 줄 문장으로 해석하셨던 이는 대단한 무엇을 잡으셨기에 정의를 내리실 수 있었을까.
이 나이를 당하여 백발삼천장을 노래하며, ‘알지 못하겠도다, 거울 속 어디에서 가을 서리를 얻었던고’하고 읊으셨다는 세칭 시선(詩仙)이었던 어떤 이는, 피할 길 없는 수순을 따라 늙고 있는 인생에 대해 탄식이라도 하셨던 것일까.
사는 일에 유능하지 못하셨던 아버지, 60여 년 전에 있었던 동족상쟁의 피해자로서 사람 구실을 할 수 없도록 억매여 살아온 85년의 생애 끝에 얻은 중증 치매환자라는 이름의 훈장……. 그 혼돈의 시대에 열정을 둘 그 무엇도 지니지 못한 채로, 오로지 삶을 절대로 여기고 동가식서가숙을 일삼으셨던 생애의 끝에, 무슨 다행을 얻었기에 저리도 공선(空仙)으로 사시는가. 대를 이어 생을 얻은 자식 또한 얻는 것보다 버리는 것이 다행인 세상에서 엉덩이에 불이라도 붙은 양 냅다 달리다가 실족하여 딸각대는 다리로 남은 생을 살아야 할 처지이니, 이 참담함의 유전은 누구를 원망하여 버릴 것인가.
즐겁지 않은 기억 따위 남겨서 쓸 일이 없으니 버리고 떠나자 하시는가. 아버지는 한 세상의 기억을 버림으로 평안을 얻은 각자일 터이지만, 이제쯤 당신의 뒤를 따라 한 갑자를 돌아 제자리를 찾은 아들은 버리고자 하는 몸부림에 미치지 못하여 짐짓 너털웃음을 흉내 내고 있는데…….
살아오면서 얻은 훈장인 결함투성이 육체는 시시때때로 병원비를 필요로 하고, 사고를 당해 쇠붙이로 보철을 댔던 오른쪽 다리는 경련을 자주 일으켜 내 삶이 치열했던 증거가 된다. 남들처럼 펜대를 굴려 먹고 사는 재주를 터득하지 못하고 몸뚱이 하나를 밑천으로 살아 온 젊은 날은 지하철을 공짜로 탈 수 있는 복지카드 한 장으로 나라님이 인정하신 퇴직 증명서를 얻었는데…….
60년쯤 살면 얻는 게 있는 법이라는데, 나는 생계의 방편으로 가진 7만여 권의 책을 핑계로 30평 지하공간에서 비빌 언덕을 찾은 황소마냥 고장이 잦은 몸뚱이를 뒹굴뒹굴 굴리며 살아가기 위한 양분을 구걸하고 있다.
죽은 자가 남긴 메시지의 집약이 헌책방인데, 죽음 후에도 남기는 것이 있어야한다고 바득바득 살아있음을 기록했던 헌책들 속에서, 유통기간을 넘긴 막걸리 냄새 같은 문자향에 취해 나는 잘도 취중에 있다. 생계의 수단인 중고책방 안의 7만여 권 책 속에 역할을 하고자 기다리는 140억여 개의 글자들은 스스로 뜻을 지니지 못하지만, 종이 위에 모여 격식을 따라 춤을 추다보면 7만여 권의 책으로 엮이기도 하는데, 원래 7만여 권의 책이고자 태어났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세상 속 70억 인구 중에 숨 쉬고 있는 나는 무엇을 목표로 하여 춤추고 있는 것일까?
명예가 되기 힘든 헌책장사를 직업으로 하여 먹이를 구하면서, 남이 버린 잡서를 주워 읽어 돈이 될 수 없는 지식을 쌓으며, 잠시도 멈추지 않는 번잡함 속에서 짐짓 세상을 볼 여유를 잃은 척하고, 현실 이야기를 피한 SF소설을 즐겨 읽어 공상 속의 시각으로 사건을 보는 엇박자의 비겁함을 무기로 기른 후에, 현실계에서 유리된 자신의 정체를 변호하고 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세계는 곧 세상의 끝과 같다고, 죽음은 블랙홀로 진입하는 사건의 지평선(Event Horizon)이라고, 존재는 인식자가 있을 때만이 존재로서의 가치를 지닌다는데, 내가 죽어 세상을 기억하지 못하면 세상이 억 만 개 있은들 무슨 소용이냐고, 내 죽음과 세상의 종말을 결부시키는 허무의 논리를 만들어 인식 세계에 답을 주고, 스스로 세상을 마름하여 살고 있다.
살아오면서 쌓아온 수많은 사랑과 미움의 감정들……. 누구를 좋아한다는 감정을 일컬어 사랑이라고 한다던가. 애욕이라고 이름 해도 좋다. 우리가 경험한 사건의 지평선이 그 만큼의 명분을 지녔다면, 살아있었다는 증거로 보다 더한 다행이 어디에 있겠는가.
돌이켜보면 종말은 자명한 것을……. 몸을 눕힐 한 평 땅을 향해 종종걸음을 치고 있음을 알면서도, 얼굴에 칠할 금분을 찾아 몸부림을 치면서, 살점을 잃은 뼈다귀를 핥고 또 핥는 강아지처럼, 나는 세상에 끈을 두고 제자리 뛰기를 한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맨 정신으로 어떻게 사느냐고, 뻗을 자리를 확인하지 않고 내질러버린 발을 주체하지 못해 허공에 대고 흔들면서, 오로지 잊지 못하는 인연을 향해 귀뿌리를 돋워 소리를 청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라고,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여인들의 본능에 속아 혼을 빼앗겨버린 맹목의 시절을 벗어나지 못한 채로 열역학 제2법칙의 변화에 준한 혼돈 만들기에 열중하며, 나는 내 인생의 필연을 만났음을 믿고 있었다.
인연이 있었음직한 존재의 소리를 향해 귀 끝을 쫑긋 세운다. 그녀라고 믿고 있는 인과의 조합일 뿐인데, 나 혼자만의 세계에서 나 혼자만의 자문자답으로 삶을 흉내 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는데, 내가 있고 없고 그녀가 있고 없고의 매트릭스 세계 안에서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이 되어 관람객을 즐겁게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는데, 종잡을 수 없이 세상을 휘젓고 있는 엔트로피는 이아무개라는 엑스트라에게 상대역을 준 후, 이 혼돈의 세계에서도 이러한 경이를 탄생시켰노라고 대견한 그 무엇이라도 이룬 양 큰 소리를 치고 있다.
전혀 원하지 않은 결과의 산물인 내가, 진화와 돌연변이의 야합이 낳은 지성체로 탄생한 인연에 얽매어, 울고 웃고 그리워하며 살아왔는데, 어떤 메커니즘이 여기까지 길을 놓았을까.
내 현재에 앞서 길을 만드신 이를 신이라고 한다면, 신은 무엇을 기대하셔서 내게 이생의 삶을 주셨고, 숨가빠하도록 달리게 하셨을까. 니체인가 뭔가 하는 매독환자 미치광이는 짜라투스트라의 입을 빌어 초인을 예언하여 우리가 갈 방향이라고 지껄여댔다는데, 원인이 갖추어져 있음의 결과인지 돌연한 방향전환인지 모를 일이다.
자리에 누웠는가 확인하고자 발을 뻗어본다. 그래, 이 밤에 내게 필요한 것은 하룻밤 꿈을 꿀 수 있는 잠자리이고, 나는 무엇을 얻었는가 하고 의문을 가질 수 있는 자유뿐이다. 한 바퀴 돌아 제자리를 찾았지만, 시작 이전의 공허를 깨달았을 뿐인 이제 한 살 흑룡띠 어린것이 바로 나인 것을…….
다행히 옛 인연의 꿈이라도 꾼다면, 모든 혼돈이 제각기 생명을 얻을지도 모르는 깊은 밤의 엔트로피 속에서, 꿈의 꿈속에라도 들어가 호접몽이라도 꾸어 봄직 하련마는…….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