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리더십과 창안
리더의 리더십은 창안(創案)이 전제되어야 한다. 늘 새로운 것을 생각해 새로운 방안을 만들어 새롭게 도전하는 진취력 없이는 리더의 리더십은 벽에 부딪히고 만다.
채명신이 창안한 중대전술기지 개념은 어느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전술 개념이었다. 중대전술기지 개념은 미군 전술 교리에 있어서 사주 방어 또는 전면 방어의 형식이지만 구체적으로 구성 내용을 살피면 전혀 그 역할과 운영이 다른 특징이 있다.
미군 교리에서의 전면 방어나 사주 방어는 고립 상태에서 방어 목적을 위해 적용하는 것이 상례지만 중대전술기지 개념은 방어진지이면서 공세적인 발진기지 역활을 하는 면이 특출한 점이라 할 수 있다.
처음 맹호사단이 월남에 상륙하여 진지 편성을 시작할 때 채명신 맹호사단장에 의한 중대전술기지 설치 명령은 예하 연대장, 대대장으로부터 많은 저항을 받았다.
채명신 사단장도 6.25전쟁 전투경험이 있고 많은 공훈을 성취 했지만 연대장, 대대장 또한 전원이 6.25전쟁 전투경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무공훈장에 빛니는 전쟁 영웅들이었다. 더구나 전원이 미국 군사학교에서 최신 미군 군사교리를 이수한 군사전문가들이었다.
"우리가 월남에 온 것은 싸우러 왔습니다. 방어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온통 중대를 작전지역에 산개시켜 놓고 방어진지를 구축하라니 저는 이해 할 수 없습니다"
제1연대장 김정운 대령의 이의 제기였다.
첫 맹호사단 작전회의시 주요 지휘관들은 정식으로 채명신 사단장에게 항의 했다.
"무조건 내 명령에 따르시오, 공사가 완료되면 그 이유를 알려 주겠소"
채명신 맹호사단장의그 말로 작전회의는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지금 베트콩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곳곳에서 공격을 위한 준비가 한창입니다. 중대전술기지 공사보다 베트콩 소탕작전을 먼저 승인해 주십시요. 선제공격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기갑연대장 신현수 대령의 건의였다.
그러나 두 연대장의 건의는 묵살되었다. 채명신의 리더십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자기가 자신있다고 생각한 창안은 어느 누구의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실천하는 실천력에 있었다. 그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채명신의 깊고깊은 고려사항이 있었다.
명분이 약한 월남전쟁에서 부하를 미군이나 월남군처럼 떼죽음 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명분을 살리면서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이 창안한 중대전술기지 개념 밖에 없다고 확신 했다. 미군과 월남군은 주로 연대 단위로 주둔하면서 그 주둔지에서 헬기로 적진을 향해 출격하는 형식이었다. 그러므로 연대 단위 주둔지는 베트콩의 기습 목표로 좋은 표적이 된다. 늘 불안을 안고 지내면서 희생이 줄을 잇는다.
더구나 연대 주둔지 안에 있는 포병화력은 무용지물이다. 곡사포병 화력이 코앞의 적에게 사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대량 희생은 수십 수백대의 헬기 기동중에 일어난다. 기동중인 헬기는 적의 기관총만으로도 격추 당한다. 그런 미군의 취약점을 확인한 이상 채명신은 자기만의 전략전술을 창안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채명신의 창안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맹호사단의 전술책임지역에서 작전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지역학보가 우선되어야 하며 그 방법은 중대전술기지를 구축해 적의 공격에서 보호받은 후 공세작전으로 지향 해야 한다고 확신 했다.
정규전과 게릴라전을 경험한 채명신은 전규전과 게릴라전 경험에서 얻은 중대전술기지 개념만이 부하의 희생을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반면, 연대장과 대대장 가운데 어느 누구도 게릴라전 경험자는 없었다. 게릴라전 경험이 없는 이들 지휘관들이 더 이상 게릴라전 전문가인 사단장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다.
"두 연대장의 건의는 일면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 어느 지휘관이건 앞으로 공격하고 싶다면 얼마던지 공격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그러나 사단장인 나에게도 생각이 있다. 공격은 중대전술기지 구축 이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내 지시에 따르라. 중대전술기지는 가장 적은 희생으로 가장 많은 전과를 올릴 수 있는 기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채명신은 그 말을 남겨놓고 그대로 회의장 밖으로 나갔다. 이때 부사단장 이남주 준장이 작전회의를 주재했다. 당시 채명신 맹호사단장은 주월한국군사령관을 겸직하고 있었으므로 사이공에 있는 주월한국군사령부에 상주하고 있었고 실제 맹호사단의 작전은 사단장 채명신의 지침 아래 이남주 장군에 의해 지도되고 있었다.
"여기 모인 연대장과 대대장 모두는 지금부터 귀대하면 중대전술기지 구축에 박차를 가하시오. 기지 구축에 소요되는 군수물자는 즉시 지원하겠소"
부사단장 이남주 장군에 의한 최종 명령이 확인되었다.
군대는 일단 명령이 내려지면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연대장 대대장들은 불만이 있었지만 모두 입을 다물고 귀대해 중대전술기지 구축에 박차를 가했다.
당시 한국군에 대한 모든 군수지원은 주월미군 군수사령부에서 담당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군수물자가 월남전에서는 요구하는 족족 헬기로 운반해 주었다.
사단이 부여받은 넓고넓은 전술책임지역은 일제히 진지 공사판으로 변했다. 베트콩은 물론 월맹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디 그뿐인가 미군은 더욱 놀라면서 한국군의 동태에 대해 주시하기 시작했다.
평야지대를 장악하고 있던 베트콩은 평야지대 일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한국군의 진지공사로 인해 졸지에 평야지대에서의 주도권이 한국군에게로 넘어가자 막대한 식량 보급 근거지를 잃게 되었다.
베트콩은 이 평야지대에 산재해 있는 중대전술기지를 차레차레 공격을 시도하며 주도권 장악에 나섰지만 그때마다 맹호사단 포병의 불벼락을 맞아 베트콩의 희생은 늘어만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