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 成於樂 음악에서 덕성을 완성하느니라. 樂有五聲十二律 更唱迭和 以爲歌舞八音之節 可以養人之性情 而蕩滌其邪穢 消融其査滓 故學者之終 所以至於義精仁熟而自和順於道德者 必於此而得之 是學之成也 樂에는 5성과 12율이 있는데 번갈아 노래 부르고 조화를 이루어 가무 8음의 절도로 삼으니, 사람의 성정을 길러서 그 사악하고 더러운 것을 씻어내고 그 찌꺼기를 녹여 없애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배우는 것의 끝에서, 義가 정밀하고 仁이 무르익는 경지에 이르러서 스스로 도덕에 화순한 것을 반드시 여기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배움의 완성이다. 前漢志 聲宮商角徵羽也 晉志 土音宮 其數八十一 爲聲之始 屬土者以其最濁 君之象也 火音徵 三分宮去一以生其數五十四 屬火者以其微淸 事之象也 金音商 三分徵益一以生其數七十二 屬金者以其濁次宮 臣之象也 水音羽 三分商去一以生其雖 四十八 屬水者以其最淸 物之象也 木音角 三分羽益一以生其數 六十四 屬木者以其淸濁中 民之象也 凡聲尊卑取象 五行 數多者濁 數少者淸 大不過宮 細不過羽 前漢志에 소리는 宮商角徵羽라고 하였다. 晉志에 土의 음은 宮이고, 그 수는 81이며, 소리의 처음이 되고, 土에 속한 것은 그것이 제일 탁하기 때문에 임금의 象이라고 하였다. 火의 음은 徵이고, 宮을 3등분하여 그 하나를 제거하여 그 수를 만드는데 54가 되며, 火에 속한 것은 그것이 약간 맑기 때문에 일의 象이다. 金의 음은 商인데, 徵을 3등분하여 그 하나를 보태어 그 수를 만드니 72가 되고, 金에 속한 것은 그 탁하기가 궁에 다음이기 때문에 신하의 象이다. 水의 음은 羽인데, 商을 3등분하여 그 하나를 제거하여 그 수를 만드니 48이고, 水에 속한 것은 그것이 제일 맑기 때문에 物의 象이다. 木의 음은 角이니, 羽를 삼등분하여 그 하나를 더하여 그 수를 만드는데 64이고, 木에 속한 것은 그것이 맑고 탁하기가 중간이기 때문에 백성의 象이다. 무릇 소리의 尊卑는 象과 五行에서 취하니, 수가 많은 것은 탁하고, 수가 적은 것은 맑지만, 큰 것도 宮을 넘어서지 않고, 작은 것도 羽를 넘어가지 않는다. 漢志 律有十二 陽律爲律 陰律爲吕 律以統氣類物 曰 黃鍾大蔟姑洗蕤賓夷則無射 吕以旅陽宣氣 曰 林鍾南呂應鍾大呂夾鍾中呂 皆曰 律陽統陰也 漢志에, 律에는 12가지가 있으니, 陽律은 律이 되고 陰律은 呂가 된다고 하였다. 律로써 氣를 거느리고 사물을 분류하는데, 황종, 대주, 고선, 유빈, 이칙, 무역이라 말한다. 呂로써 陽을 돕고 氣를 펴니, 임종, 남려, 응종, 대려, 협종, 중려라고 말한다. 모두 말하길, 律로 陽을 삼아 陰을 거느린다고 한다. 白虎通曰 土曰塤 竹曰管 革曰鼓 匏曰笙 絲曰絃 石曰磬 木曰柷敔 金曰鍾鏞 此八音也 백호통에서 이르길, 흙은 질나발이라 말하고, 대나무는 관이라 말하며, 가죽은 북이라 말하고, 박은 생이라 말하며, 실은 현이라 말하고, 돌은 경이라 말하며, 나무는 축어라고 말하고, 쇠는 종용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8음이다. 朱子曰 書云 聲依永律和聲 蓋人聲自有高下 聖人制五聲以括之 宮聲洪濁 其次爲商 羽聲輕淸 其次爲徵 淸濁洪纖之中爲角 又制十二律以節五聲 五聲又各有高下 每聲分十二等 謂如黃鍾爲宮 則大蔟爲商 高洗爲角 林鍾爲徵 南呂爲羽 還至無射爲宮 便是黃鐘爲商 大蔟爲角 中呂爲徵 林鍾爲羽 然以無射之律只長四寸六七分 而黃鍾長九寸 大蔟長八寸 林鍾長六寸 則宮聲槪下 而商角羽三聲 不過 故有所謂四淸聲 夾鍾大呂黃鍾大蔟 是也 蓋用其半數 謂如黃鍾九寸 只用四寸半 餘三律亦然 如此則宮聲可以槪之 其聲和矣 看來十二律 皆有淸聲 只說四者意其取數之多者言之 주자가 말하길, “서경 舜典에 이르길, 聲은 길게 읊는 것에 의지하고, 律은 聲을 조화롭게 하는 것이라 하였다. 대개 사람의 소리에는 저절로 높고 낮음이 있는 것이니, 성인께서 五聲을 만드시어 그것을 묶으셨다. 宮聲은 크고 탁하며, 그 다음은 商이다. 羽聲은 가볍고 맑으며, 그 다음은 치고, 맑고 탁하기와 크고 작기가 가운데인 것은 角이다. 또 12율을 만들어서 五聲을 절제하였다. 五聲은 또한 각자 높고 낮음이 있으니, 각 聲마다 12등급으로 나뉜다. 예컨대 황종이 宮이 된다면, 대주가 商이 되고, 고선은 角이 되며, 임종은 徵가 되고, 남려는 羽가 됨을 말한 것이다. 다시 무역에 이르면 宮이 되니, 곧바로 황종은 商이 되고, 대주가 角이 되고, 중려가 徵가 되며, 임종이 羽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역의 律은 단지 길이가 4촌 6-7푼에 불과하고, 황종은 길이가 9촌이며, 대주는 길이가 8촌이며, 임종은 길이가 6촌이다. 그러한즉 宮聲은 대개가 낮지만, 商, 角, 羽 이 3聲은 넘어서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른바 네 가지 맑은 聲이 있는 것이다. 협종, 대려, 황종, 대주가 바로 이것이다. 대체로 그 반수만을 사용하니, 예컨대 황종은 9촌이지만 겨우 4촌 반만 사용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나머지 3개의 律(협종, 대려, 대주)도 역시 그러하다. 이와 같다면 宮성은 그것을 개괄할 수 있으니, 그 聲이 조화롭게 되는 것이다. 보기에 12律은 모두 맑은 聲을 갖고 있지만, 그저 네 가지만 말한 것은 그 중에 숫자가 많은 것을 취해서 말한 것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邪穢謂私欲之汚惡 皆蕩滌而無餘 査滓謂道理勉强未純熟者 皆消融而無迹也 신안진씨가 말하길, “邪穢란 사욕의 더럽고 악한 것을 말하는데, 모조리 깨끗하게 세척하여 남음이 없고, 査滓란 아무리 힘써도 道理가 순수하게 무르익지 않은 것을 말하니, 모두 녹아 사라져서 아무런 자취도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易曰 精義入神 孟子曰 仁在乎熟之而已 주역에 이르길, 義를 정밀하게 하여 신의 경지에 들어감이라고 했다. 맹자가 말하길, 仁은 그것을 무르익게 하는 것에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易曰 和順於道德而理於義 주역에 이르길, 도덕에 화순하여 義에 다스려진다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此字指樂而言 三節當看始中終三字及三箇得之字 皆學之得力處也 신안진씨가 말하길, “此자는 樂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다. 3절에서 마땅히 始中終 세 글자와 세 개의 得之라는 글자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이것들 모두 배움이 힘을 얻는 부분이다.”라고 하였다. 問五聲十二律 作者非一人 不知如何能和順道德 朱子曰 如金石絲竹匏土革木 雖是有許多 却打成一片 淸濁高下長短大小 更唱迭和 皆相應渾成一片 有自然底和氣 不是各自爲節奏 歌者歌此而已 舞者舞此而已 所以聽之 可以和順道德 學者須是先有興詩立體工夫 然後用樂以成之 누군가 묻기를, “五聲과 十二律을 만든 사람이 한 사람이 아닌데도, 어떻게 능히 도덕에 화순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주자가 말하길, “예컨대 쇠, 돌, 실, 대나무, 박, 흙, 가죽, 나무 등 비록 대단히 많은 종류가 있지만, 도리어 두드려 한 덩어리를 이루게 되고, 맑고 탁함, 높고 낮음, 길고 짧음, 크고 작음, 그리고 서로 번갈아 노래를 불러 조화를 이룸은 모두 서로서로 응하여 순수하게 한 덩어리를 이루니, 저절로 그러한 조화로운 기운이 있는 것이지, 각자 스스로 節奏를 행하는 것은 아니다. 노래를 부르는 자는 이 노래를 부를 뿐이고, 춤을 추는 자는 이 춤을 출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들어보면, 이로써 도덕에 화순할 수 있는 것이다. 배우는 자는 반드시 먼저 詩에서 흥기하여 禮에서 서는 공부를 가져야 하니, 그러한 후에 樂을 이용하여 그것을 완성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興於詩 此三句上一字謂成功而言也 非如志於道四句上一字以用功而言也 시에서 흥기하다는 이 세 구절 위의 한 글자는 이미 공을 이룸을 일컬어 말한 것이니, 도에 뜻을 둔다는 네 구절 상의 한 글자가 열심히 힘쓰는 것으로 말한 것과는 같지가 않은 것이다. 只是這一心更無他說 興於詩 興此心也 立於禮 立此心也 成於樂 成此心也 古之學者 必先學詩 學詩則誦讀其善惡是非勸戒 有以起發其意 故曰 興人無禮以爲規矩 則身無所處 故曰 立此禮之文也 中心斯須不和不樂 則鄙詐之心入之 不和樂 則無所自得 故曰 成此樂之本也 古者玉不去身 無故不徹琴瑟 自成童入學 四十而出仕 所以養之者 備矣 理義以養其心 禮樂(一作舞蹈)以養其血氣 故其才高爲聖賢 下者亦爲吉士 由養之至也 그저 이 하나의 마음일 뿐 더 이상 다른 말이 필요 없다. 詩에서 흥기한다는 것은 이 마음을 흥기시킨다는 것이고, 禮에서 선다는 것은 마음을 세우는 것이며, 樂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이 마음을 이룬다는 것이다. 옛날에 배우는 자는 반드시 먼저 詩를 배웠는데, 詩를 배우면 곧 그 선악과 시비, 권장과 경계를 송독하게 되어 그 뜻을 일으켜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에, 고로 興이라고 말한 것이다. 사람이 禮를 가지고 법도로 삼음이 없다면, 처신할 곳이 없기 때문에, 고로 立이라고 말한 것이니, 이것이 바로 禮의 文이다. 마음 가운데가 잠시라도 화락하지 못하다면 비루하고 거짓된 마음이 들어오는데, 화락하지 못하면 스스로 만족하는 바가 없을 것이니, 고로 成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樂의 근본인 것이다. 옛날에는 옥을 몸에서 떼어놓지 않았고, 변고가 없으면 琴瑟을 거두지 않았으니, 成童(15세가 된 아이)이 되어 배움에 들어가 나이 40이 되어 출사하였다면, 수양한 것이 갖추어져 있을 것이다. 理義로써 그 마음을 기르고, 예악으로써 그 혈기를 길렀기 때문에, 그중에 재주가 높은 사람은 성현이 되었고, 낮은 자도 역시 吉士가 되었으니, 말미암아 수양한 것이 지극했기 때문이다. 學之興起 莫先於詩 詩有美刺 歌誦之以 知善惡治亂廢興 禮者 所以立也 不學禮無以立 樂者所以成德 樂則生矣 生則惡可已也 惡可已則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也 배움을 흥기시키는 것에는 詩보다 앞선 것이 하나도 없다. 시에는 찬미도 있고 풍자도 있으니, 그것을 노래 불러 외우면 이로써 선악과 치란과 흥폐를 알 수 있다. 禮라는 것은 이로써 서는 것이니, 禮를 배우지 않고서는 설 수가 없는 것이다. 樂(악)이라는 것은 덕을 이루는 것이니, 즐거우면 덕이 생기고, 생기면 곧 미워함을 그만 둘 수 있는 것이다. 미워함을 그만둘 수 있다면, 손이 춤추고 발이 구르는지조차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詩較感發人 故在先 禮則難執守 須是常常執守得 樂則如太史公所謂動盪血脈流通精神者 所以涵養前所得也 詩는 비교적 사람을 잘 感發하는 것이기 때문에 앞에 있는 것이다. 禮는 붙잡아 지키기 어려운 것이니, 반드시 항상 붙잡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樂은 마치 태사공이 말한 소위 ‘혈맥을 움직이고 정신을 유통시키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전에 터득한 것을 함양하는 방법이다. 興於詩是小底成於樂 成於樂是大底興於詩 初間只是因他感發興起 到成處却是自然恁地與理爲一 凡有毫髮不善 都蕩滌得盡了 這是甚氣象 ‘詩에서 흥기한다는 것’은 하나의 작은 ‘樂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樂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의 큰 ‘詩에서 흥기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그것으로 인해 감발하여 흥기한다는 것이지만, 이루어지는 부분에 이르면 도리어 자연히 이렇게 이치와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무릇 조그만 不善이라도 있으면, 모두 깨끗하게 씻어서 다 없애버리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기상이란 말인가? 慶源輔氏曰 樂雖始於詩歌 而聖人依之以五聲 和之以十二律 更唱迭和而以爲歌舞八音之節 所以合天人之和以養人之耳目 說人之情性 蕩滌其邪穢而使之不存 消融其査滓而使之盡化 學者於此 涵泳而優游焉 則能至義精仁熟之地 而於道德各極其和順 而無一毫勉强拂戾之意也 興則起 立則不反 成則渾全 此三節 其間甚闊 學者於此眞積而力久焉 則自知之 경원보씨가 말하길, “樂은 비록 詩歌에서 비롯되었지만, 성인께서 五聲으로 그것에 의거할 바를 부여하셨고, 12律로 그것을 조화시키셨으며, 번갈아 노래부르고 조화를 이루게 하여 이로써 歌舞와 八音의 리듬으로 삼으셨으니, 이 때문에 하늘과 사람의 조화에 부합시켜서, 사람의 귀와 눈을 기르고, 사람의 성정을 기쁘게하며, 간사하고 더러운 것을 깨끗이 씻어내어 그것이 존재하지 않도록 하고, 그 찌꺼기를 녹여 없애서 그것을 모조리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배우는 자가 여기에서 優游涵泳한다면, 능히 義가 정밀하고 仁이 무르익는 경지에 이를 수 있고, 道德에 각자 그 和順을 지극히 하여 조금이라도 억지로 하거나 거스른다는 뜻이 없게 될 것이다. 흥하면 일어나고, 일어서면 되돌아가지 않으며, 이루면 순수하고 온전해진다. 이 세 가지 절차는 그 사이가 대단히 넓다. 배우는 자가 여기에서 참된 것이 쌓이고 힘쓰기가 오래되면, 저절로 그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吳氏曰 古詩樂相表裏 言之不足而歌生焉 歌之不足而舞生焉 歌舞生而樂作矣 聖人以爲未也 又爲之金石絲竹匏土革木以相其歌 羽旄干戚以飾其舞而樂於是乎大備 君子於樂 或親爲其事 或觀聽其聲容 或講習以知其意 內而一心 外而衆體 蓋莫不有養焉 오씨가 말하길, “옛날에 詩와 樂은 서로 표리를 이루었다. 말이 부족하기 때문에 노래가 생겨났고, 노래가 부족하니 춤이 생겨난 것이며, 노래와 춤이 생겨나서 樂이 만들어진 것이다. 성인께서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고 여기시고, 다시 그것을 위하여 쇠, 돌, 실, 대나무, 박, 흙, 가죽, 나무로써 그 노래를 돕도록 하였고, 깃털과 깃발과 방패와 도끼로 그 춤을 장식하도록 하여, 이에 樂이 크게 갖추어지게 된 것이다. 군자는 樂에 대하여 혹은 직접 그 일을 하기도 하고, 혹은 그 聲容을 살펴보거나 듣기도 하며, 혹은 연구하고 익힘으로써 그 뜻을 알기도 하였는데, 안으로 하나의 마음이지만, 밖으로는 많은 체계를 갖추고 있더라도, 대체로 길러줌이 있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라고 하였다. 齊氏曰 十三學樂誦詩 則已通於樂章 學舞 則已通於舞節 至成於樂 則淪肌浹髓而莫能名 手舞足蹈而不可已 제씨가 말하길, “나이 13에 樂을 배우고 詩를 외우면, 이미 樂章에 통하고, 춤을 배우면 이미 無節에 통하며, 樂에서 이루어지는 경지에 이르면, 살과 골수에까지 푹 젖어 들어서 뭐라고 命名할 수가 없게 되고, 손이 춤추고 발이 춤추는 것을 그만 둘 수가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雲峯胡氏曰 興於詩 知之事 成於樂 則知之精 故曰義精 立於禮 行之事 成於樂 則行之熟 故曰仁熟 운봉호씨가 말하길, “시에서 흥기함은 앎의 일이니, 樂에서 완성되면 앎이 정밀해진 것이다. 그러므로 義가 정밀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禮에서 우뚝 서는 것은 실행의 일이니, 樂에서 완성되면, 실행이 무르익은 것이다. 그래서 仁이 무르익었다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夫子屢以詩禮敎人 至此則參及於樂 成於樂 所以成就其始焉中焉之興於詩立於禮者也 신안진씨가 말하길, “공자께서 누차 詩와 禮로써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여기에 이르러서는 세 번째로 樂에 미친 것이다. 樂에서 완성된다는 것은 그 처음과 가운데의 ‘興於詩’와 ‘立於禮’를 성취시킨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4 | ○ 按內則 十歲 學幼儀 十三 學樂誦詩 二十而後 學禮 則此三者 非小學傳授之次 乃大學終身所得之難易先後淺深也 내칙에 따르면, 10세에 幼儀를 배우고, 13세에 樂을 배우고 詩를 외우며, 20세가 된 후에 禮를 배운다고 하였으니, 이 세 가지는 소학에서 전수하는 차례가 아니라, 오히려 대학에서 종신토록 터득하는 바의 難易, 先後, 深淺인 것이다. 朱子曰 古人自少時習樂誦詩學舞 不是到後來方始學詩學禮學樂興詩立禮成樂 不是說用功次第 乃是得效次第 주자가 말하길, “옛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樂을 익히고 시를 외우며 춤을 배웠지, 나중에 비로소 詩를 배우고 禮를 배우며 樂을 배운 것은 아니었다. 시에서 흥기하고 예에서 바로 서고 악에서 완성되는 것은 힘을 쓰는 순서를 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功效를 얻는 순서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詩者樂之章也 故必學樂而後誦詩 所謂樂者 蓋琴瑟塤箎 樂之一物 以漸習之而節夫詩之音律者也 然詩本於人之性情 有美刺風喩之旨 其言近而易曉 而從容詠歎之間 所以漸漬感動於人者 又爲易入 故學之所得 必先於此而有以發起其仁義之良心也 至於禮 則有節文度數之詳 其經至於三百 其儀至於三千 其初若甚難强者 故其未學詩 也先已學幼儀矣 蓋禮之小者 自爲童子而不可闕焉者也 至於成人 然後及其大者 又必服習之久 而有得焉 然後 內有以固其肌膚之會筋骸之束 而德性之守得以見定而不移 外有以行於鄕黨州閭之間 達於宗廟朝廷之上 而其酬酢之際 得以正固而不亂也 至於樂 則聲音之高下舞蹈之疾徐 尤不可以旦暮而能 其所以養其耳目和其心志 使人淪肌浹髓而安於仁義禮智之實 又有非思勉之所及者 必其甚安且久 然後有以成其德焉 所以學之最早而其見效 反在詩禮之後焉 詩라는 것은 樂의 꾸밈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樂을 배운 이후에 시를 외워야 한다. 이른바 樂이라는 것은 대체로 거문고와 비파, 질나발과 피리가 樂의 一物인데, 이를 점차 익힘으로써 저 시의 음률을 조절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는 사람의 성정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찬미와 풍자와 비유의 뜻이 있고, 그 말이 친근하고 이해하기 쉬우므로, 조용히 영탄하는 사이에 점차 젖어들어 남에게 감동을 하는 것이다. 또한 쉽게 들어가기 때문에, 배워서 얻는 바가 반드시 여기에 먼저 있어야만, 그 仁義의 양심을 피워낼 수 있는 것이다. 禮에 이르면, 곧 품절과 제도와 법도와 數目의 상세함이 있어서, 그 큰 것은 3백에 이르고, 그 작은 것은 3천에 이르니, 그 처음부터 억지로 하게 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가 아직 시를 배우지 않았더라도, 어린이의 예절는 먼저 이미 배웠을 것이다. 대체로 禮 중에 작은 것은 당연히 어린아이를 위한 것이어서 빠뜨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성인에 이른 연후에 그 큰 것에 미쳐서는 다시 반드시 익숙하기를 오래 해야 하는데, 거기에서 터득함이 생긴 연후에는, 안으로 그 살과 피부의 모임과 힘줄과 뼈의 묶음을 굳세게 할 수 있어서 덕성의 지킴을 굳게 하여 움직이지 않게 할 수 있고, 밖으로는 鄕黨과 州閭의 사이에서 행할 수 있어서 宗廟와 조정 위로까지 통할 수 있고, 그 주고받는 즈음에 고루함을 바르게 하여 어지럽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이다. 樂에 이르면, 聲音의 높고 낮음과 舞蹈의 빠르고 느림은 더더욱 하루 아침이나 저녁에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눈과 귀를 기르고 그 心志를 조화롭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살과 정수에 젖어 들게 하여 仁義禮智의 실질을 편안하게 여기도록 만드는 것이다. 또한 생각하고 노력해서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므로, 반드시 대단히 편안하게 여기면서 또한 오래 해야 한다. 그러한 후에야, 그 덕을 여기(樂)에서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배우는 것은 제일 먼저이지만, 그 효과를 보는 것은 거꾸로 詩와 禮의 다음에 있는 것이다. 潛室陳氏曰 此章先禮而後樂 內則先樂而後禮 此章非謂學之序 乃論其終身所得之先後也 學之序當如內則 至其將來得力處 其先善心興起是於詩上得力 其次操守植立是於禮上得力 至末稍德性純熟是於樂上得力 잠실진씨가 말하길, “이 장에서는 禮를 앞으로 하고 樂을 뒤로 하였는데, 내칙에서는 樂을 앞으로 하고 禮를 뒤로 하였다. 이 장에서는 배움의 순서를 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종신토록 터득한 바의 선후를 논한 것이다. 배움의 순서는 마땅히 내칙과 같이 해야 하지만, 그가 장래에 힘을 받을 곳에 이른다면, 그 우선은 선한 마음이 흥기하는 것인데, 이것은 詩 위에서 힘을 받는다. 그 다음은 붙잡아 지키고 올바르게 서는 것인데, 이것은 禮 위에서 힘을 받고, 그 마지막에 이르면, 덕성이 순수하고 무르익는 것인데, 이는 樂 위에서 힘을 받는다.”라고 하였다. 慶源輔氏曰 詩易於禮 禮易於樂 興者淺 立者深 成則又其深者也 故其先後之序如此 경원보씨가 말하길, “詩는 禮보다 쉽고, 禮는 樂보다 쉽다. 흥기하는 것은 얕고, 서는 것은 깊은데,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또한 더 깊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 선후의 순서가 이와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
5 | 程子曰 天下之英才 不爲少矣 特以道學不明 故不得有所成就 夫古人之詩 如今之歌曲 雖閭里童稚 皆習聞之而知其說 故能興起 今雖老師宿儒 尙不能曉其義 況學者乎 是不得興於詩也 古人 自灑掃應對 以至冠昏喪祭 莫不有禮 今皆廢壞 是以人倫不明 治家無法 是不得立於禮也 古人之樂 聲音 所以養其耳 采色 所以養其目 歌詠 所以養其性情 舞蹈 所以養其血脈 今皆無之 是不得成於樂也 是以 古之成材也易 今之成材也難 정자가 말하길, “천하의 영재가 적은 것은 아니지만, 단지 도학에 밝지 못하기 때문에, 성취하는 바가 있지 못한 것이다. 무릇 옛사람의 시는 지금의 가곡과 같아서, 비록 길거리의 어린아이라고 할지라도 모두 그것을 듣고 익혀서 그 말씀을 알았기에 능히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을 흥기시킬 수 있었다. 지금은 비록 늙은 스승이나 오래 공부한 유생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그 뜻을 깨우치지 못하였으니, 하물며 배우는 사람이랴! 이것은 바로 시에서 이런 마음을 흥기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옛사람은 灑掃應對부터 冠婚喪祭에 이르기까지 禮가 있지 않은 것이 없었지만, 지금은 모두 폐지되고 무너졌다. 이 때문에 인륜이 밝지 않고 집안을 다스림에 법이 없으니, 이것은 바로 禮에서 설 수 없기 때문이다. 옛사람의 악에서 성음은 그 귀를 기르는 것이고, 채색은 그 눈을 기르는 것이며, 노래 부르기는 그 성정을 기르는 것이며, 춤추는 것은 그 혈맥을 기르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모두 없으니, 이것은 바로 악에서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옛날에 인재를 완성하는 것은 쉬웠지만, 지금은 인재를 이루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成於樂是古人眞箇學其六律八音 習其鍾鼓管絃 方底於成 今人但借其義意以求和順之理 如孟子樂之實樂斯二者 亦可以底於成否 朱子曰 古樂旣亡 不可復學 但講學踐履間 可見其遺意耳 故曰 今之成材也難 누군가 묻기를, “樂에서 이루어진다고 하였는데, 이는 옛사람이 진짜로 그 六律과 八音을 배우고 그 종과 북, 피리와 현악기를 익혀서 비로소 완성에 이르는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단지 그 의의만 빌려서 화순의 이치만 구하고 있을 뿐입니다. 樂의 실질은 이 두 가지를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맹자의 말처럼 해야만, 역시 완성에 이를 수 있는 것 아닐까요?”라고 하였다. 주자가 말하길, “옛날의 樂은 이미 사라졌으니, 다시 배울 수가 없다. 다만 강학하고 실천하는 사이에 그 남겨진 뜻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지금 인재를 이루기가 어렵다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此章與志道據德章不同 彼就德性上說 此就工夫上說 只是游藝一脚意思耳 이 장은 도에 뜻을 두고 덕에 근거한다는 장과 더불어 같지 않다. 저것은 德性 위로 나아가 말한 것이고, 이것은 공부 위로 나아가 말한 것이니, 그저 六藝에 노닌다는 것에 대한 脚註의 의미일 따름이다. 西山眞氏曰 自周衰禮樂崩壞 然禮書猶有存者 制度文爲尙可考尋 樂書則盡缺不存 後之爲禮者 旣不合先王之制 而樂尤甚焉 今世所用 大抵鄭衛之音雜以夷狄之聲而已 適足以蕩人心壞風俗 何能有補乎 然禮樂之制雖亡 而禮樂之理則在 故樂記謂致禮以治身 致樂以治心 外貌斯須不莊不敬 而慢易之心入之矣 中心斯須不和不樂而鄙詐之心入之矣 莊敬者 禮之本也 和樂者 樂之本也 學者誠能以莊敬治其身 和樂養其心 則於禮樂之本得之矣 亦足以立身而成德也 三百篇之詩 雖云難曉 今諸老先生發明其義了然 可知如能反復涵泳眞可以感發興起 則所謂興於詩 亦未嘗不存也 서산진씨가 말하길, “주나락 쇠약해지고부터 예악이 붕괴하였다. 그러나 禮書는 그래도 보존된 것이 있어서 제도와 文爲(문물)는 아직도 찾아서 상고할 수 있지만, 樂書는 모조리 모조리 없어져서 보존되지 않았다. 후일의 禮가 된 것이 이미 선왕의 제도에 부합하지 않았지만, 樂은 그보다 더욱 심하였다. 지금 세상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은 대저 정나라와 위나라의 음에 오랑캐의 소리가 섞인 것일 뿐이다. 마침 인심을 흔들고 풍속을 무너뜨리기 충분한 것이니, 어찌 능히 보충해줌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예악의 제도는 비록 사라졌지만, 예악의 이치는 남아있기 때문에, 예기 樂記에서 ‘禮를 바쳐(致)서 몸을 다스리고, 樂을 바쳐서 마음을 다스린다.’고 말했던 것이다. 외모가 잠시라도 장엄하지 않고 공경스럽지 않으면 게으르고 쉽게 여기는 마음이 들어오는 것이다. 마음속이 잠시라도 화락하지 않으면, 비루하고 속이는 마음이 들어오는 것이다. 莊敬이라는 것은 禮의 근본이고, 和樂이라는 것은 樂의 근본이다. 배우는 자가 진실로 능히 莊敬으로 그 몸을 다스리고 和樂으로 그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면, 禮樂의 근본에 대하여 터득하게 될 것이고, 또한 족히 제 몸을 세우고 덕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삼백 편의 시는 비록 깨우치기 어렵다고 말하지만, 지금 여러 늙으신 선생들께서 그 뜻을 일목요연하게 드러내어 밝혀놓으셨다. 만약 능히 반복하고 涵泳하여 진짜로 感發하고 興起할 수 있다면, 이른바 ‘詩에서 흥기한다는 것’은 역시 일찍이 존재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胡氏曰 程子因世變而歎傷 學者當因其尙存者而深考之 不可以自盡也 호씨가 말하길, “정자는 세상의 변화로 인해 탄식하며 가슴 아파하였지만, 배우는 자는 마땅히 그 아직 존재하는 것을 바탕으로 깊이 고찰해야 할 것이지, 스스로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雲峯胡氏曰 無程子之說 後世不知所以成材之難 無眞氏之說 後世遂眞以成材爲難矣 況詩自性情中流出 非吾心外物 天高地下合同而化 天地間 自然之禮樂 禮是敬 樂是和 亦非吾心外物也 운봉호씨가 말하길, “정자의 말씀이 없었더라면, 후세 사람들은 인재를 완성하는 것이 어려운 까닭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고, 진씨의 말씀이 없었더라면, 후세 사람들은 인재를 완성하는 것이 정말로 어렵다고 여겼을 것이다. 더구나 詩는 性情 안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니, 내 마음 밖에 있는 사물이 아니다. 하늘이 높고 땅이 낮아도 서로 합쳐져 변화하니, 천지간에 자연스러운 禮樂인 것이다. 禮는 敬이고, 樂은 和이나, 이 역시 내 마음 밖에 있는 사물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