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기차 그림은, 아이들에겐 꿈이고 희망이었다. 칙칙폭폭 흰 연기를 뿜으며 산모퉁이를 돌아 들판으로 힘차게, 힘차게 달려 나가는 검은 동경(憧憬)…. “아아 저걸 타면 꿈에 그리던 서울로, 도회로 훨훨 나갈 수 있을 터인데…” 초등학교 4학년이 돼 받은 국어책에 실린 기차 그림은 그렇게 시골 아이들 마음을 사로잡았다. 서울은 커녕 가깝다는 전주, 광주조차 아직 못 가본 아이들이었다. 아니, 실제 달리는 기차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애들이기도 했다.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이곳 전북 고창에서 멀지 않은 옥구 출신이었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고창 용교 초등학교에 부임한지 몇 해가 지났지만 아이들처럼 “기차를 타고 서울로, 도시로 달려가고 싶은 꿈을 아직 잃지 않은” 스물네 살 젊은이였다. 4학년 담임 한상신 선생님. 그는 학생들에게 힘차게 달리는 기차를 꼭 한 번 보여주고 싶었다. 물론 “소풍을 어디로 가는 게 좋을까?” 넌지시 물었을 때 “기차를 타러 가요!” 일제히 외치던 아이들의 대답에 가슴이 뭉클했던 기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기도 했다.
아이들과의 약속, 마지막 소풍
1964년 10월 17일. 전북 고창군 성내면 용교초등학교 4학년 40여명은 “아이들에게 달리는 기차를 꼭 보여 주어야겠다”는 한 선생님의 뜻에 따라 방장산으로 가을소풍을 갔다. 전북 고창과 정읍, 전남 장성의 경계에 있는 방장산은 해발 734m로 그 중턱에만 가도 정읍 평야를 달리는 기차를 굽어볼 수 있었다. 지금은 자연휴양림으로 지정돼 등산로가 정비됐지만, 그러나 64년 당시 방장산은 아이들이 오르기에 그리 쉬운 코스가 아니었다. 처음엔 재잘거리고 깔깔대며 산을 오르던 아이들은 어느새 “발을 질질 끌거나 헐떡거리면서 겨우 한발씩을 내딛는” 형국이 되었다.
바로 그때였다. 누구 발에 채었는지 산 위쪽에서 커다란 바위덩이가 구르더니 가속을 받아 쏟아지는 게 아닌가. 아이들은 어! 소리도 못 지른 채 나뭇가지를 치고 떨어지는 바위덩이를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또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한 교사가 “모두 피해라!” 외마디 소리를 지르더니 학생 서너 명 코앞으로 달려드는 바위 앞에 버티고 서 몸으로 부딪치는 게 아닌가. 큰 바위, 잔돌이 무수히 구르며 선생님을 치고 때렸다. 하지만 그는 자기 뒤에 선 아이들이 행여 다칠세라 이를 악물며 양어깨로 바위를 밀어냈다. 그리고 아이들이 모두 무사한 걸 확인하고는 끝내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한 선생님은 정읍 초성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이튿날인 10월 18일 새벽 꽃다운 스물넷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갔다. 존경받고 사랑하는 사제 간의 ‘마지막 소풍’은 그렇게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한 선생님은 특히 소풍을 떠나기 직전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았으나 “아이들에게 기차를 보여주겠다고 한 약속을 꼭 지켜야 한다. 아이들의 꿈을 깨서는 안 된다”며 방장산 행을 강행한 것으로 전해져 사람들을 숙연케 했다. 10월20일 학교장으로 장례식이 치러질 때 4학년 일동은 모두 통곡을 하며 살아생전 제자 사랑을 몸으로 실현한 선생님과의 이별을 아쉬워했다.
교육에 평생을 바친 무명교육자들을 위한 추모탑
1968. 10.07 [동아일보] 3면
한상신 선생은 그토록 사랑하던 제자들 곁 학교 뒷동산에 묻혔다. 그가 아이들을 구하고 숨진 지 4년째인 68년 전북청소년적십자 단원들은 5월 스승의 날에 즈음해 “제자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다 순직한 교육자를 위한” 모금운동을 벌여 성금 47만8360원을 모았다. 그 돈으로 금암동 종합경기장 안에 ‘한상신 교사 등 무명 순직교육자 추모탑’을 세워 그해 10월8일 제막했다. 신석정 시인은 추모탑에 “스승님 감으신 눈망울에, 눈망울이 남기신 광막 속에 트이어온 역사여 길이 빛나라”는 추모시를 지어 바쳤다. 전북도는 매년 10월 ‘한상신 추모 예술제’를 열어 그의 제자 사랑 높은 뜻을 기리고 있다.
물에 빠진 제자를 구하다
사실 64년은 청소년적십자 중앙학생협의회가 5월26일을 ‘은사의 날’로 처음 정한 63년의 바로 이듬해요, 세종대왕 탄신일인 5월15일을 ‘스승의 날’로 바꿔 정한 65년의 직전 해다. 그래서일까, 그해엔 제자를 구하고 숨진 스승의 안타까운 얘기가 3개월 터울로 연이어 보도됐다. 한상신 교사의 사고가 전해지기 꼭 3개월 전인 7월 중순, 부산에서 초등학교 초임교사가 저수지에 빠진 제자들을 구하고 숨진 사건이 그것이다. 역시 스물넷 꽃다운 나이에 제자 사랑을 몸으로 실천해 살신성인의 큰 뜻을 전하고 눈을 감은 것이었다.
부산 구포초등학교 3학년4반 담임 이춘길 교사. 부산교대를 졸업하고 64년 3월1일 구포초교에 발령받은 이 선생님은 무더위가 한창이던 7월11일 낮 “4반 아이들이 저수지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는 황급한 보고를 받았다. 한걸음에 저수지에 달려간 그는 멱 감던 학생 3명이 깊은 데 빠져 허우적대는 걸 보고 지체 없이 물로 뛰어들었다. 그리곤 바로 2명을 구출해 저수지 밖으로 내보냈다. 이제 남은 것은 한 명. 최태성 군(10)을 구하려고 팔을 뻗다 그는 갑자기 헤엄을 멈추었다. 심장마비가 온 것. 선생님이 다가오는 걸 보고 팔을 뻗어 잡으려던 최 군과 함께 이 교사는 물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사제의 정’ 이어 ‘부자의 정’으로
1964. 07.13 [경향신문] 7면
7월13일 구포초교 교정에서 열린 두 사제의 장례식은 온통 눈물바다였다. 그 자리에서 이 선생님이 2대 독자라는 것, 봄에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첫 임지로 구포초교에 왔으며 다른 교사들에게 “아이들에게 존경받는 선생님이 되겠다.”고 입버릇처럼 다짐했던 일들이 소개됐다. 이문영 교장은 “사회 초년병으로 우리 학교에 부임해 오로지 제자 사랑 일념으로 헌신하던 선생님이 마지막까지 제자를 구출하려다 간 그 숭고한 뜻을 우리 구포 어린이들은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라며 울먹였다.
이 사제 장례식에서 숨진 최 군의 아버지(35)는 2대 독자를 잃은 이 교사의 아버지(57)앞에 철벅 무릎을 꿇었다. “제 자식을 구하려다 영영 불귀의 객이 되신 이춘길 담임선생님의 몫을 제가 하겠습니다. 귀하디귀한 2대독자 이 선생님이 이승에 놓고 간 아들 노릇을 제가 대신하고 영령이 된 ‘사제의 정’을 이어받아 ‘부자의 정’으로 제가 아버님을 모시겠습니다.” 이 교사의 아버지나 그의 손을 움켜잡고 아들의 예를 다하겠다고 다짐하는 최 군 아버지의 눈에서는 연신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보는 이들을 애처롭게 했다. 학교는 교정에 이 교사 추모비를 세우고 그의 높은 뜻을 학생들의 귀감으로 삼도록 했다.
아이들이 위험한 유리창 청소를? 솔선수범한 교사
“하늘같아서 우러러볼수록 높아만 지는” 스승의 은혜는 이 두 사례로 끝나지 않는다. 81년 9월 9일 낮 2시 반. 서울 성수초등학교 5학년4반 담임 신영순 선생님(41)은 방과 후 아이들과 함께 교실 청소를 하다 3층 유리창에서 떨어져 5일 만에 숨졌다. 신 교사는 이날 당번 학생 12명과 함께 청소를 하면서 교실 안쪽과 복도 청소는 아이들을 시키면서 “바깥쪽 유리창 닦기는 아이들이 하기엔 위험하다”며 자신이 직접 청소를 했다. 바깥 유리창을 닦으려면 폭 40cm의 좁은 베란다로 나가서야 하는데 몸집이 작은 아이들은 서기가 용이하지만 어른은 발대기도 힘들어 그만 중심을 잃고 떨어진 것.
신 교사와 마주보며 안쪽 유리창을 닦던 학생이 황급히 교무실에 사고 소식을 알려 직원들이 달려왔지만 신 교사는 이미 의식을 잃은 뒤였다. 군사사범을 졸업하고 전북 지방에서 교편을 잡던 신 교사는 사고나기 바로 전해인 80년 9월 성수초등학교로 전근왔다. 당시 이 학교는 유리창은 물론 모든 내외부 청소를 아이들에게 맡기고 담임선생은 감독만 했는데 신 교사는 부임하자마자부터 바깥 유리창 청소는 위험하다며 항상 자신이 도맡아 청소를 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유리창 청소가 없을 때도 복도나 교실 걸레질을 아이들과 어울려 함께 하는 등 솔선수범하는 교사였다.
신교사의 장례식
1981. 09.16 [매일경제] 11면
“40대 여교사가 3층 유리창을 닦다 추락해 입원치료 중”이라는 소식에 교육계는 물론 온 사회가 들썩였다. “그 위험한 일을 여교사가 직접 하다 다쳤다”는데 우선 놀랐고 “평소엔 어린 학생들이 도맡아 하던 일”이라는데 두 번 놀랐다. 언론은 초등학교의 위험한 청소 문제를 시급히 개선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통령과 문교장관, 교육감 등은 신 교사의 쾌유를 빌며 성금을 보냈고 그러는 중에 어버이처럼 아이들을 돌보던 신 교사의 참 교육자 모습이 하나둘 소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각계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신 교사는 입원 닷새 만에 영원히 눈을 감았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살신성인한 교사들
85년 가을 대전에서는 학생 하교지도를 하던 60대 교사가 신호를 무시하고 달려드는 트럭으로부터 아이들을 구하고 숨진 사건이 일어났다. 9월 3일 낮 12시 40분경 대전 문화초등학교 앞 횡단보도에서 이 학교 2학년10반 담임 임홍술 선생님(61)이 녹색신호등이 켜지자 학생 50여명을 인솔해 길을 건너던 중 군 트럭이 무섭게 달려들었다. 맨 앞줄에서 학생 4, 5명의 손을 잡고 길을 건너던 임 교사는 트럭이 횡단보도 앞에서도 멈추지 않고 돌진하자 “어린이들을 급히 뒤로 밀쳐내고 자신은 마치 차를 몸으로 막기라도 하듯 나아가” 트럭에 치였다. 정부는 그의 의로움을 기려 국민훈장 목련장을 추서했지만 할아버지 선생님은 제자들 곁에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고 김영재 교사 영결식, 울먹이는 제자들
1999. 07.06 [한겨레] 15면
99년 경기도 화성 씨랜드 청소년 수련원 화재 때는 경기 마석초등학교 김영재 교사가 어린 학생 40여명을 구하고 자신은 불길을 헤어나지 못해 숨졌다. 한밤 수련원에서 불이 나 유치원생 등 23명이 참변을 당한 사고 당시 김 교사는 “불길 속을 헤집고 다니며 방안에 잠든 어린이들을 흔들거나 소리쳐 깨워” 밖으로 내보냈다. 그는 불길이 계속 번지는 데도 “안에 아이들이 더 있다”며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으나 끝내 나오지 못했다. 말 그대로 “살신성인을 실현하고 간” 그에게 답지한 성금을 동문교사이던 부인은 또 전액 모교의 장학금으로 내놓아 참 교육자의 전형을 여실히 보여줬다.
아아 “하늘같이 높고, 태산보다 무거우며, 바다보다 더 깊은 스승의 사랑 갚을 길은 오직 하나, 살아생전에 가르치신 그 교훈을 마음에 새기는 것뿐”이련가. 그 선생님들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