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암에 홀로앉아 일 없는 이 적막 오가는 구름안개 초가집 문을 찾네 푸른 숲에 우는 새 신선인 듯하지만 외로이 그림자는 역시 서글퍼 궁벽한 땅 사람 없이 세상과 끊겨 향피워 성수무강 축원 사립문 기대섰다 오묘한 뜻 참다운 길 부처말씀 읽고나니 싸움터 남은 한이 창자속 그득하다
허백당대사가 정묘호란을 치르고 나서 장안사에 들러서 읊은 두 수의 시이다. 지난 번에 보았듯이 대사는 의승대장의 책무를 갑자기 받고 훈련도 되지 않은 승병을 이끌고 이 싸움을 끝내 이기겠다는 혈맹으로 전진을 수습하였다. 그런 결과로 이기고 지는 결과를 떠나 싸움이 끝났다는 안도의 몸으로 찾은 옛날의 도량이다. 전쟁과 평온, 그야말로 하늘 땅의 차이이지만 이 두 지점의 계기로 보면 또한 찰라의 순간이다. 생사의 위기 그 자체가 터럭끝만한 시공적 차이이다. 이 찰라의 순간을 지나 찾은 옛 집이다. 그 번화했던 옛날과 달리, 혼자 앉아 있게 된 암자이다. 정적의 고요함이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그야말로 무사하다. 어제의 소란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구름만이 찾아드는 사립문이다. 하지만 외로운 그림자로 남아 있어야 하는 자신의 모습은 서글프다. 어제의 어수선함과는 너무도 현격한 오늘의 고요함, 그야말로 인간세계를 끊은 경지이다. 이것이 바로 전쟁과 평온의 경계이리라. 싸움에서의 분주함도 이 나라 이 임금을 위해서였으니 평온을 찾은 이 암자에서도 또다시 임금님의 만수를 빌어야 함이 승려로서의 본분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이 나라 백성의 한 사람으로서의 책무이기도 하다.
다시 정신을 가다듬어 오묘한 진리의 경전에 잠시(潛示)해 본다. 현실세계의 싸움이 아직도 애끊는 아픔으로 남기도 하지만 진리의 말씀 앞에는 언제나 참회로 되풀이 되어야 할 번뇌의 싸움이 남아 있어 더더욱 안타깝다 이종찬 <동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