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해사는 신라 헌강왕(875-886)때에 동해 용왕을 위해 세운 절이라고삼국유사에 기록되어있슴
(신라 제 49대 헌강대왕 때는 서울(경주)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이 연이어져 있었고 초가는 하나도 없었으며
풍악과 노래소리는 길거리에 가득하였고 바람과 비는 철마다 순조로와 나라는 퍽 태평하였다
대왕은 오늘날의 울산 세죽으로 나들이를 나왔다가 낮에 물가에서 쉬는데 문득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져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동해용왕의 소행이라 하는 일관의 조언에 따라 왕은 그의 측근들에게 명령하여 용을 위해 근처에 절을 세우게 하니
그 명령과 함께 구름과 안개가 걷히어 졌으므로 이 땅의 이름을 개운포라 하였다
왕은 서울에 돌아오자 이 영축산 경승지를 선정하여 용을 위해 절을 세우고 그 이름을 망해사라고 하였다 한다
그런데 그 때에 절을 세우라는 왕명이 있자 그것을 기뻐한 동해 용왕은 그의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왕앞에 나타나
왕의 성덕을 찬양하여 춤을 추며 음악을 연주했고 그 중 한 아들은 왕을 따라 서울에 들어와서 정사를 도왔는데
그 이름을 처용이라하여 처용이 나온 바위를 처용암이라 하였다 지금도 개운포 해중에는 이 바위가 남아있다
*** 용연 처용암 ***)
옛날에는 거의 이부근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는 얘긴데...??
이제 망해사지나 산행시작이다...문수산위에 흰구름이~~~
정상에서 본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통도사뒤 영축산 신불산에도...
언양 가지산
문수산 정상석 599.8m
(문수산은 신라와 고려때는 주로 영축산이라 불려오던 산이다 천축국왕사성 부근에있는 영축산의 이름이 불교를 따라
우리나라로 이동하여 온 것으로서 천축의 영축산은 부처님이 설법하시던 곳이며 신선들이 살았고 독수리가 많이 있으므로
영축산 또는 축두, 축봉, 축대라고도 하였다는 것이다 또 축령들이 산에 있으므로 이름하였고
혹은 산모양이 수리머리와 비슷하다는데서 온 이름이라고도 한다
조선조에 와서 는 문수산이라 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그렇게 나타난다
또 이 산을 일명 청량산이 라고 하였는데 산 아래에 있는 청량면은 청량산에서 비롯된 이름인 것이다)
망해사지앞쪽 율리못 물이 왜저렇지???
무거동 문수경기장
문수사
신라 제27대 선덕여왕15년(646)에 자장율사가 이 곳에 절을 세워 문수사라했다고함
(무거설화를 보면 경순왕은 백척간두에 선나라의 장래를 영취산의 문수대성의 계시를받아 결정키로 결심하고
태자와 둘째 왕자를 거느리고 하곡현의 영취산을 찾아길을 나섰다 먼저 태화에 이르러 참배하고 또 길을 나섰는데
중도에서 길가에 한 동자승이 나타나더니 대왕께서 오실 줄 알고 산으로 인도하여 모시고자 왔다고 하였다
왕은 다행이라 생각하고 크게 만족하여 길을 따랐다 그러나 삼호앞에서 태화강을 건너자 얼마가지 아니하여
동자승은 그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왕은 직감에 이 동자승이 문수보살임을 느끼고 하늘이 이미 나를 저버리는구나하여
크게 탄식하며 이제는 할수 없다고 몇번이나 되풀 이하고는 실의에 빠지고 말았다
이래서 왕은 발길을 돌려 월성(지금의 경주)에 환궁하여 사방의 땅이 다 타인의 소유로 돌아가고 나라의 힘은 다 쇠퇴하여
다시 일으키 지 못함을 통탄한 나머지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기를 꾀하였다 이 탄식한 자리를 '헐 수정'이라 하였으며
동자승이 자취를 감춘속을 무거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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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심규훈 (simgh88) | 날씨가 아주 좋네!!! 카메라 줌도 잘되고... | (2008-09-05 15:0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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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정한채 (jhc2928) | 우와!!! 솜씨가 보통이 아니네~~구경 잘하고 간다~~~ | (2008-09-25 18:1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