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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하늘과 세상의 이치를 미루어 짐작한다는 오십 줄도 어느새 넘어섰다, 남들은 우리를 베이비부머라 부른다. 죽어라 앞만 보고 달린 세월인데 노후 난민 쓰나미가 겨울 그믐날 땅거미 지듯 일시에 몰려오고 있다. 7백만 명이나 되는 엄청난 쓰나미. 회사를 부모처럼 여기고, 온 몸을 던져 정열을 바쳤건만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일자리를 잃고 회사를 떠나고 있다. 정년퇴직은 바라지도 않았다. 애들 대학등록금만이라도 해결하자고 3, 4년만 더 버티기를 간절히 바랬는데. 우리는 날마다 사표를 쓰고 있다. 끝까지 버텨서는 대기발령을 내고, 책상을 없애고 직위를 박탈하고.
결국 사직서를 냈고 물론 명예퇴직금도 받지 못했다. 버림받았다는 배신감에 뒷목이 땅기고 머리가 멍하다. 소화제를 끼고 악몽을 꾼다. 스트레스가 겹쳐 고혈압 판정까지 받아 약도 먹는다. 하지만 주저앉을 여유가 없다. 막무가내 막노동판 심정으로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지만 한 달에 150만 원을 벌기도 벅찬 생이다. 넥타이 메고 다닐 때의 4분의 1도 되지 않지만 아이들 학자금을 내려면 어쩔 수 없다. 동네 뒷골목 치킨 집은 나날이 하나씩 늘고 또 나날이 두 집이 문을 닫는 끔찍한 현실.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 : 오랑캐 땅에 꽃과 풀이 없으니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네!, 매서운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거리를 걷고 또 걷는 시대의 풍운아. 흡사 꽃도 풀도 없는 오랑캐 땅을 밟는 듯 기막힌 현실이다. 박복함을 평생 달고 다니는 가련한 생, 苦難이란 상시 역병이라더니 이제는 떠돌이 잡신이라도 달라붙은 것인가. 가난에 고생을 밥 먹듯 하며 자랐고 위험을 무릅쓰고 산업화의 주역으로 누구보다 치열하게 경제개발 연대를 살았건만 나이 들어서도 늙은 부모와 앞가림 못하는 자식들 부양으로 뱃가죽이 달라붙고 허리는 갈수록 휘어진다. 그렇다고 부모 세대처럼 자식 덕 보기를 기대할 수도 없는 처지, 그야말로 베이비부머의 생은 가렴주구[苛斂誅求] 그 자체다.
들썽한 처지의 낀 세대. 자식 농사 잘 하면 노후보장이 되던 시대는 지났다.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노인 빈곤율 1위(49%)를 몇 년째 지키고 있다. 더욱 걱정되는 것은 준비 안 된 베이비부머들이 속속 은퇴하고 노인 대열에 껴들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갈수록 태산인 우리의 앞날. 하지만 우리가 누구인가. 우리에게는 동지의식으로 묶는 몇 개의 키워드가 있다. '가난'. 가난이 든든한 백이 될 줄 누가 알았던가. 낡은 교과서를 보따리에 싸맨 채 밑창 달아난 고무신을 신고 십 리 길을 걸어 등교했던 유년의 체험이나, 원조용 옥수수 빵과 우유가루로 허기를 달랬던 기억이 있으며 가난말고도 함께 겪은 고난의 사회·문화적 체험은 또 어떤가. 이승복을 매개로 한 무조건적인 반공교육, 달달 외우지 못하면 교실로 들어갈 수도 없었던 국민교육헌장, 기능 올림픽, 중동 건설등등 ...지겹고 버겁고 구질구질한 지리멸렬의 되풀이 속에서도 우리는 견디고 이겨냈다. 시대의 풍운아이면서 가난퇴치의 주역으로서 또 한 시대의 낭만자가 아니던가.
군대란 특수 환경이 남자들의 의리를 스스로 일구듯 지난하고 서글픈 추억일망정 동일한 기억과 체험을 공유한다는 건 삶의 끈기에 밴 결속을 말한다. 베이비부머는 바로 의리이고 끈끈한 정이며 공감어린 아날로그 총천연색 다큐다. 까까머리에 새까만 교복을 입고 청춘의 빛나는 한 때를 살던 우리, 우리는 속박과 부자유 속에서 시대의 반항아로서 민주화를 이뤘다. 교복 후트를 풀고 모자 챙을 삐뚤게 쓰고 청바지를 걸쳐 입고 기타를 치며 히피처럼 머리칼을 길게 기르며 고고를 춘다고 판탈롱 다리를 청승맞게 떨던 우리, 우리는 팝송에 빠져들었고 권위주의를 과감히 섬멸하고 문화부흥을 했다. 고래사냥, 기쁜 우리 젊은 날,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유신 말기, 18년 독재가 부하의 총탄에 의해 무너지는 걸 봤고, 80년 광주 오월항쟁을 거쳐, 5공의 전횡까지 겪으며 20대 초반을 길거리에서 최루탄과 보냈다. 나이 서른 살 , 1987년 '6월 항쟁' 때 넥타이 부대라는 별칭을 받았던 사람들이 그 누구였던가. 때로는 시대의 아웃사이더로 때로는 분노와 울혈의 청년으로 척박한 시대를 스스로 꽃인 줄 모르고 악착같이 견딘 우리이다.
하지만 올바른 삶의 맹렬 투쟁 이전 진정한 본심은 정이다. 소싯적 프로레슬러 김일의 호쾌한 박치기, 헝그리 복서 홍수환의 눈물겨운 4전5기, 배꼽이 빠질 정도로 우스웠던 배삼룡의 슬립스틱 코미디를 추억의 꽃으로, 즐거움으로 간직한 감성체로서 토속정서를 후세에 고스란히 전수한 맑은 심성의 소유는 다름 아닌 우리다. 누추하지만 정감어린 따스한 아날로그 추억이 우리에겐 건강 바이러스처럼 존재한다. 그러기에 자조적으로 말할 업적과 용기를 지닌 우리는 자신은 자신이 가장 잘 안다고 말하는 시대의 개척자가 아니겠는가.
‘그때 그 시절을 기억하십니까, ’나는 이 글 집의 주제처럼 우리에게 되묻고 싶다. 공유하고 싶고 눈물 한 번 찔끔 나누고 또 다시 오뚝이처럼 일어서고 싶다. 우리의 여정은 삶 자체가 한 편의 기록영화다. 산동네 물지게를 지며 근근이 살다 어느 날 자수하여 광명 찾자'는 삐라를 줍고 까까머리로 반공을 외치다 '독재타도'라는 외침과 낙서로 추적을 당하고 구속도 당하며 먹고살자고 안 간 곳이 없으며 안 해 본 게 없는 전천후 오뚝이로 비록 지금은 지친 몰골로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아마도 숨 가쁘고 어둑한 시절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예서 쉬이 좌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궁핍과 정치적 박해를 겪고 처연한 문화체험을 공유하며 단련하듯 하루하루를 끈덕지게 살았다는 자긍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지천명을 넘어선 나이 , 하늘의 뜻을 잘 아는 이제야 말로 제대로 살아보아야 한다. 아직도 우리들의 잔치는 끝나지 않았다. 쓸쓸해질 여유가 없다. 우리는 권위주의를 물리치고 보통사람이 보통으로 사는 데 일등으로 기여한 사람들이다. 어르신은 너는 좋은 날 태어났으니 잘 살 거라고 출세할 거라고 했다.
말이 씨가 되어선지 그동안 출세하여 잘 살았다. 이 세상 황금을 다 준다 해도 맞바꿀 수 없는 청춘 시대 노동자가 되어 땀 흘리며 살았다. 갑근세 주민세 한 푼 깎거나 날짜 하루 어긴 날 없고 공짜 술 얻어먹거나 돈 떼어먹은 일 한번 없고 어느 누구한테서도 노동의 대가 훔친 적 없고 바가지 씌워 배부르게 살지 않았으니 이보다 떳떳한 출세가 따로 있겠는가. 우리는 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대한민국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명백한 진실을 수호한 그야말로 특혜 없는 삶을 온존이 지킨 시대의 노동자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러기에 못난 과거를 거울삼아 앞으로도 똘똘 뭉쳐 기죽지 말고 늘그막 찾아온 된서리를 견디며 보통을 의리로서 지키며 잘 살자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즐겨 입던 청바지. 그 앞 자들을 따서 만든 말, 청춘은 바로 지금부터다. 건배 하자.청바지!
1. 어릴 적 학교에서
1-1 콩나물 시루교실
요즘은 콩나물시루란 표현을 안 쓴다. 꽉 들어차 숨 막히는 현상임에 도심에선 용도가 제법일 텐데 시대 뒤떨어진 표현으로 여기는지 쓰임은 아예 거덜이 났다. 승객이 꽉 들어찬 버스는 그냥 만원버스라 하고 지하철의 경우는 ‘지옥철’이란 표현을 쓴다. 웬만하지 않고서는 사람들 시선을 사로잡지 못하는 강렬한 세상이다.
그만큼 세상은 강하고 억세져 버렸다. 나는 그 표현이 뒷방 차지임에도 친근감이 있어 그냥 좋다. 콩나물시루는 이제는 한 시대의 유물이다. 슈퍼 냉장실에 진열된 콩나물을 보고 누구도 콩나물시루를 연상하지는 않는다. 안 쓰고 소원해지면 다다미 소리 같은 여문 느낌도 자연 멀어진다. 지금 내 추억도 어느 참 뒷방신세로 전락하고 만 것은 아닐까. 사실 콩나물시루는 원래부터 뒷방 차지였다.
방앗간에서 쌀을 빻아오면 팥을 으깬 고명을 만들어서 반죽 위에 흩뿌려 훈김을 내어 직접 시루떡을 해 먹고 콩나물도 직접 키워서 상에 올렸었다. 콩나물 키우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벌레가 먹은 것이나 썩은 콩은 골라내고 물에 하루정도 불려서는 콩나물시루에 불린 콩을 겹쳐지지 않게 펴놓는다. 널빤지를 두 개 준비해서는 물 받을 그릇위에 올려놓고 시루를 받친다. 평상시는 검은 천에 가려놓아 햇볕이 스며들지 않도록 하고서는 세끼 밥 먹을 때 때맞춰 물을 준다. 그러면 콩나물은 이틀도 채 안돼서 서로를 위로 밀치며 비집고 솟는다.
어느 참 콩나물대가리들이 빽빽한 좁은 공간이 형성되는 것이다. 아이들이 앞으로 나란히 하듯 자연 머리는 위로 뿌리는 아래로 향하고는 쑥쑥 자라나 불과 일주일 만에 시루를 꽉 채운다. 이를 걸맞게 쓴 비유가 그 시절의 학교교실이 아니었던가. 작은 놈 큰 놈 못생긴 놈 하다못해 반쯤 썩은 놈 까지 온갖 애송이 종자들을 학교운동장에 줄 세우듯 불려서 시루에 담았더니 쑥쑥 자라나 시루가 비좁은 공간이 되어 버린 현상과 그 시절의 빽빽한 교실의 풍경은 너무도 닮았다.
그 시절의 한 학급의 학생 수는 무려 70명이 넘었다. 그야말로 고만고만한 친구들의 콩나물시루 교실이다. 옆줄은 꽉 차고 뒤에도 공간 여분이 없어서 선생님은 뒤에까지 살펴 볼 처지가 못 되었으며 화장실 갈 때도 책상을 넘어서 갔다. 자연히 저학년들은 2부제 수업을 했으며 학급 수는 10반이 훨씬 넘었다. 그것으로도 교실 충당이 안돼서 해마다 교실들을 달아냈는데 당시 서울에 숭덕 초등학교는 전교생이 만 명이 넘었다고 하니 그 수효를 가히 짐작 할만하다. 그 시절 반 등수 20등이면 중상 정도이지만 요즘은 거의 꼴찌수준이다. 격세지감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나는 평생 통 털어 결석을 딱 한 번 했다. 사실 결석을 한 것도 아닌데 억울하게 결석한 것으로 되어 버렸다. 아무리 아파도 조퇴 한 번 안했는데 어이없게도 오전반을 오후반으로 착각하여 오후에 등교하는 바람에 결국 6년 개근상을 못 탔다. 한 반에 스무 명도 채 안 되는 아이들을 돌보는 지금은 참으로 좋은 환경조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단순히 미어터지도록 수가 많다고 해서 교실을 콩나물시루에 비유한 것만은 아닌 듯싶다.
알다시피 콩나물을 키우는 데는 특별한 방법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물만 때 맞춰서 부어주면 그만이다. 그때 우리들 또한 밥만 제 때 챙겨 먹으면 그것이 바로 행복이었다. 그런데 참 묘한 게 콩나물이다. 물을 주면 그냥 주르르 흘러내리는 것 같아도 그 다음 날 검은 천을 들춰보면 어느 참 물을 머금었는지 노란 빛깔은 진하여져 있으며 하얀 뿌리는 쑥쑥 올라 매초롬하다. 우리 어린 시절도 그와 흡사했다.
뭣 모르고 들어와 어느 새 하늘을 향하는 반듯해진 콩나물과 이것 아는 사람 하였더니 저마다 저요! 저요 ! 하는 코흘리개 올챙이들의 변모 또한 콩나물의 생태와 꼭 닮았다. 요즘은 화초 가꾸듯 너무들 집착하고 꾸민다. 중국에 갔을 때 아이들을 대하는 어른들을 보고 꽤 놀랐다. 체육관에 모여든 아이들의 집단 발표회가 끝날 무렵 그 주변은 아이들을 싣고 갈 차들로 북새통을 이루어 거의 교통이 마비상태였다. 아이는 하나인데 가족은 할아버지까지 해서 다섯 명도 넘었다.
산아제한이 엄격하다고는 하지만 애지중지가 지나쳐 저러다가 오히려 아이들을 망치지 않을까 내심 염려되었다. 콩나물은 지나치게 물을 많이 주면 썩어 버린다. 갑갑할 것이라고 콩나물 씌운 천을 벗겨버리면 빛이 스며들어 이내 초록색 새싹으로 변하여 채소가 된다. 그리 되면 콩나물로서는 쓸모가 없다. 아이들도 과욕과 무관심의 사이 그 정도가 제일 적당하지 싶다. 사실 나는 그 시기를 산 우리 또래가 그렇게 많은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요즘 말로 나는 베이비부머( 한국전쟁 직후인 1955년부터 가족계획정책이 시행된 1963년까지 태어난 세대) 다. 우린 스스로 꽃인 줄 모르고 자라났다. 그렇게 한 청춘 다 바쳐 그냥 앞만 내다보고 열심히 산 사람들이다. 백과사전을 들춰보면 '1970년대 말~1980년대 초에 사회생활을 시작하였고 베이비부머들은 경제성장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한국 경제발전의 주역들이다" 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런 우리는 요즘 '벼랑 끝 칠백만 은퇴 쓰나미가 밀려오고 있다. ' 라고 하는 서글픈 영화제목 같은 현실 속의 주인공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준비 없는 퇴직과 창업, 그리고 실패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 자식과 부모를 챙기느라 정작 자신의 노후준비를 못한 베이비붐 세대는 뻔히 개미지옥인 줄 알면서도 자영업에 뛰어들고 있으며 때 아닌 농사를 짓겠다고 산골로 밀려가고 있다. 그 한 때 '어머니 왜 나를 나셨나요.' 를 부른 맹인가수 이용복의 노래가 갑갑한 현실 속에서도 삶의 위로가 되기도 하였는데 정말 기구하게 사는 한 세월만 같다.
그래도 우리는 고난의 젋은 시절을 아무 탈 없이 보냈기에 어쩌든 참을 만은 하다. 정작 도저히 못 참겠는 것은 축 처진 어깨의 우리들 자식들 때문이다. 우리 인구 비중만큼이나 많은 수를 차지하는 아이들. 무슨 업보라도 되는지 우리 아이들은 고난을 되물림 받고 극심한 취업난에 발을 동동 구른다. 비록 휴대폰 하나 끼고 차 키를 들고 다니는 세상이기는 하지만 생각해보면 콩나물시루처럼 좁은 터에서 바글바글 아등바등 살 때가 더 좋았다. 다 같이 힘들고 다 같이 가난했으니 별 불평이 없었다. 숨 쉴 틈 없이 모여들어서는 뻥이요 뻥! 소리와 동시에 일시에 우르르 쏟아진 강냉이처럼 저마다 저요! 저요 !하며 창피를 모르고 살던 그 시절, 나는 강냉이 빵을 점심으로 때우던 그 시절의 가난이 그렇게 그리울 수 없다.
첫댓글 나 어릴 적이란 글을 개편...살펴보는 중 책으로 낼 글들은 많은데 마누라가 돈을 안줘서 못내고. 사실 할 말이 없다. 지금까지 낸 책이 10권도 넘으니...그래서 생각한게 국가글 응모인데 ..최부 표해록... 이번 응모에서 떨어졌다. 최부 표해록도 못내고 영대정잉묵도 못내고..사학자들 텃새도 왠만한듯... 물론 실력도 못미쳐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내년 다시 도전해보고 안되면 탐진최씨집안에 부탁을 해 책을 내달라고 해야 하려나...무척 아쉽네.....베이비부머를 위한 세레나데... 이것 책으로 내서 안양사람들이 사주면 더 바랄 게 없는데... 다들 공짜만 좋아해서..내지도 못하고 참.. 한숨 쉬며 글을 보려니
나 어릴적 2가 언제 나오나 기다렸는데.........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