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 5 30 종자골에 텃밭을 가꾸면서 나무와 꽃을 기르면서 특히 잔디밭을 가꾸면서 남편과 나는 얼마나 고대해왔던가. 자식들이 결혼할 생각을 안하니 우스개 소리로 이렇게 말하기도 하였다. 허리 구부러지고 머리카락이 허연 두 늙은이가 돼서야 저 단풍나무 아래 앉아 손주 뛰어노는 모습에 기운 없이 허허허 웃음만 날리는거 아닌지 몰라.
조카의 아이들이 놀러와서 잔디밭을 넘어질 듯 뛰어다니며 깔깔거리던 날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손주 생기면 얼마나 좋으시겠어요 이곳에 놀러와서 실컷 뛰어놀고 자연공부도 하고 맑은 공기도 마시고요. 뽕나무에 마침 오디가 검붉게 익어있었고 그걸 함께 따서 먹으면서 오디 라는 열매를 아이들에게 가르쳐주며 조카댁이 말했다. 수박밭에 들어가 수박을 만져보기도 하고 옥수수밭에 들어가 옥수수를 관찰하기도 했다. 벌과 나비등 날아다니는 곤충을 함께 관찰하였다.
심심해 하는 아이들을 위해 바깥 잔디밭 가운데 그가 스프링클러를 설치해주었다. 사방으로 홱홱 돌아가며 물을 뿌려대는 그 사이를 여섯 살과 네 살 된 두 사내 아이가 물에 흠뻑 젖어가면서 신이나 뛰어다녔는데, 그 얼굴을 가까이서 보면 환하고 환해서 햇님처럼 광채를 뿜어냈다. 천국의 얼굴이었다. 적막하고 어둑하였던 종자골 골짜기가 그늘을 감추고 들썩거렸다.
우리는 오랜만에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뛰어노는 모습에 덩달아 뱃가죽이 아플만큼 실컷 웃었다. 내 손주들이 놀러와서 저렇게 뛰어다니면 얼마나 좋을까를 상상하였다. 고대하게 되었다. 다음 해에도 조카의 아이들은 이곳으로 또 놀러오고 싶어했다고 한다.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조카가족이 편하게 올 수 있도록 양평보다는 가까운 서울집으로 오라고 하였다. 아이들은 실망하여 투덜거렸단다.
윗집에 손주들이 놀러와서 아이들의 높고 맑은 목소리가 울려퍼질 때나 아랫집에 주말이면 자식들과 손주들이 대거 몰려와 왁자하게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면 흘금흘금 내려다 볼때마다 은근히 질투가 나고 속이 상했다. 우리는 언제나 저런 시간을 가질수 있을까.
늦은감은 있지만 다행하게도 행운은 우리를 손짓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딸아이의 결혼식이 2022년에 있었고 결혼 7개월만에 종자골 농장으로 사돈댁을 초대하였다. 딸과 사위는 우리에게 복권 한 장씩을 나눠주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회사에서 선물로 받은거에요 긁어보세요. 열심히 긁었더니, 할머니 당첨 할아버지 당첨이 나왔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으나 곧 알아챘다. 만세. 손주가 생겼어요. 단풍나무 그늘에서 우레와 같은 환호성을 질렀다.
양쪽 할머니 할아버지 모두 나이가 많은 편이니 그 기쁨과 놀라움은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행복을 추구할 뿐 자식을 방해꾼이라 생각하는 시대이니만큼 기쁨은 배가되었다. 양평 콘도에서 하룻밤을 자고 용문산과 세미원과 정약용의 생가를 방문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자식들과 사돈간의 정을 돈독히 하였다. 딸아이 뱃속의 아이는 양쪽집에 정겨운 징검다리를 놓아준 것이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될거라는 기쁨을 야금야금 베어물며 건너가는 징검다리는 어릴적 시냇가에 징검다리처럼 재미있었다.
10개월이 지나가고 드디어 1월 초에 손주가 탄생했다. 나는 다음과 같은 글을 한순간에 써내려갔다. 그래그래 네가 왔구나 드디어 우리 곁으로 왔구나 입을 크게 벌리고 우는 네 울음소리가 어찌나 우렁차던지 사나이 대장부 노래소리로구나 네 울음소리가 나자마자 탯줄을 자르러 긴 복도를 따라 달려가던 네 아비 발걸음소리에서 기쁨과 떨림과 사랑이 느껴지는구나 눈 코 입 귀가 큼직큼직하구나 네 아비와 판박이로구나 반갑구나 반갑구나
네 어미가 부드럽고 어여쁜 음성으로 애타게 부르더구나 도율아 엄마야 엄마야 엄마야 엄마야 어미의 음성을 듣기라도 한 듯 꼭 감은 네 오른쪽 눈을 살짝 뜨는가 싶더니 싶더니 안타까워라 그냥 꼭 감는구나 너를 안고 네 아비는 옴짝달짝 못한다는구나 너무도 너무도 작은 네가 너무도 너무도 어여쁜 네가 혹 놀랄까 울어버릴까 걱정이 되어서란다 네 어미와 아비는 이미 너의 포로가 되었구나 얼마나 이쁘다구 귀엽다구 제일 이쁜거 같아 실물이 사진보다 훨 이쁘단 말이야 네 어미가 자랑스레 말했구나 영상으로만 볼 수 있다니 안타깝구나 오래도록 널 바라보게 되는구나 가슴이 벅차오르고 웃음이 절로 나오고 살 맛 나는 세상이로구나
손자가 태어난지 5개월째다. 아직 걷지는 못하지만 앉아있고 방긋방긋 웃고 손가락으로 이것저것 잡아다녀 무조건 입에 넣고 돌고래소리를 내기도 하고 다리를 번쩍 들어올리면서 뒤집을 자세를 무한 반복중이다. 눈 코 입 귀 머리칼은 물론 손 발 엉덩이 넓적다리 종아리 어디 귀엽지 않은 곳 있으랴. 손자를 보고 있으면 어디에 산더미만한 웃음을 숨겨놓기라도 한 듯 무한으로 웃음이 쏟아져나온다. 할머니가 되는 일 할아버지가 되는 일, 행운이요 행복이다.
나이가 나이이니만큼 여고동창들과 이번이 마지막이다 생각하며 백두산여행을 5월말에 계획해 놓았었다. 하필이면 그 무렵 손자 봐주랴 종자골 다녀오랴 아르헨티나 언니네가 오셔서 가족 여행하랴 자신을 돌보지 않았더니 독한 감기 몸살에 걸려 나는 갈 수가 없었다. 무리해서 갈 수는 있었지만 나의 끙끙 앓는소리와 기침소리로 친구들의 즐거운 여행을 망쳐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여행을 못가는 것도 그렇고 돌려받지 못하는 여행비가 아까워서이기도 하고 의기소침해진건 사실이지만 태연하게 물 흐르듯 살아야지 나는 그렇게 말했다. 내가 내 관리 소홀했으니 내가 책임져야지 라고 큰소리는 쳤다.
감기에 걸렸어도 꽃밭을 매만지고 쉴 욕심으로 종자골 텃밭으로 가고 있는데 딸아이가 카톡을 했다. 사위가 시간이 나서 종자골에 오겠다는 것이다. 손자 도율을 데리고 말이다. 어린 손자를 데리고 종자골에? 너무 어리지 않아? 여행을 가지 못한 제 어미를 위로하기 위한 서프라이즈란다. 제 어미를 제 어린 딸인양 노심초사 배려하고 걱정하는 딸이다. 제발 백두산에 가지 말라고 매일매일 카톡을 보내는 것은 물론 결국 백두산에 안 가기로 결정했을 때에도 엄마가 안가니까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 몰라 라고 마치 어미처럼 말하기도 했다.
종자골은 금계국과 끈끈이대나무풀꽃과 데이지꽃이 막 피어나 한껏 싱그럽고 맑고 귀한 풍경을 뽐내고 있었다. 그 청초함을 손주에게 보여줄 수 있다니. 그곳으로 여리고 맑고 귀한 손주가 온다니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손님이 어디 있으랴 싶다. 꽃 앞에서 단풍나무 아래에서 양자산을 배경으로 손주와 딸과 사위와 사진을 찍었다. 꽃들이 방긋방긋 손주가 방긋방긋 우리가 방긋방긋. 세상이 방긋거렸다. 어때 엄마 백두산 간 거보다 좋지 딸아이가 말했다.
나는 한 욕심 더 얹었다. 걸어다닐 때 쯤 오면 더 좋겠네. 잔디밭을 아장아장 걸어다니면 얼마나 좋아 나는 이미 내년 봄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날도 오늘처럼 꽃들이 막 피어올라 귀하디 귀한 풍경이어서 귀한 손자를 귀하게 맞아들이기를 고대한다. 정성들여 말끔하게 깎은 잔디밭을 귀한 손님이 뒤뚱뒤뚱 걸어가고 귀한 손님이 넘어질세라 두 팔을 벌리고 허리를 구부리고 잘한다 잘한다 응원을 하며 바짝 귀한 손님 뒤를 따라다닐 그날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