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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4. 새 언약의 사역자들의 생활_2) 예수의 죽음을 몸 안에 짊어짐
2015년 11월 29일 이현래 목사님 주일 말씀
(고후4:7~!2)
“0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0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09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지난주에 우리나라에서 큰 장례식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소위 국장이라고 알려진 전직 대통령의 죽음이었고 하나는 우리나라의 대통령인 김상구형제의 죽음이었다. 어차피 나라 장례식이니까 국장이다. 여러분이 tv 중계를 보셔서 알겠지만 김영삼 대통령의 장례식은 25세에 국회의원이 되어서 대통령이 될 때까지 정치인생을 마감하는 그런 장례식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아직까지 25세에 국회의원이 된 사람이 없다고 한다. 그러니까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리고 정치역정도 여러 가지 많은 일도 있었다. 당연히 화려하기도 하고 조객도 많은 것이 당연한 일인데, 보니까 겉은 화려한데 속은 공허했다. 거기에 오는 사람들은 다 정치적인 이유로 왔다. 그러니까 그 안에 진짜 알맹이는 없는 것이다.
거기서 만감이 교차하는 특별한 인상의 사람을 봤는데 김종필씨가 휠체어를 타고 조문을 왔다. 꽃 한 송이를 들고 영정 앞에서 무던히 보고 있었다.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정적으로 때로는 3당 통합으로 여러 가지를 했는데 그는 거기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을 했지 싶은데 나는 그 중에 하나가 “당신은 나를 배신했어! 당신은 배신자야!”하는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왜냐하면 3당 통합을 할 때 조건이 내각책임제였다. 그런데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 무시해버렸다. 그래서 이 사람이 화가 나서 다음번 대통령 선거 때 김대중 대통령하고는 사실 적인데 김대중 대통령을 지지했다. 충청남북도를 자기 혼자 돌아서 충청남북도 표를 전부 김대중씨에게 몰아주었다. 1등 공신이 된 셈이다. 얼마나 화가 났으면 그렇게 했겠나. 아마 휠체어에 앉아서 있는데 그 자리에서 그 생각을 했지 싶다. 물론 내 생각이다.
정치라는 것이 그렇다. 친구가 되었다가 원수가 되었다가 또 다시 친구가 되었다가 원수가 되었다가 하는 것이다. 그런 속에서 우리도 같이 살던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의 선동에 따라다니던 사람들이었다. 어차피 군중은 휩쓸려 다니기 마련이고 그런 영웅들이 나오면 세상은 시끄럽게 된다. 조용하던 우물에 미꾸라지 한 마리만 나와도 확 뒤집어지는데 마찬가지로 세상에는 영웅이 나오면 시끄러워진다. 영웅이 세상을 좋게 할 것이라고 사람들은 기대하지만 사실은 시끄럽게 한다. 왜냐하면 영웅이 하나만 나오면 되는데 그렇지 않고 여럿이 나오면 서로 패권을 잡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 안에 고래싸움에 새우등이 터지는 것이다. 백성들만 시달리게 된다. 남극에 고래 떼가 나타나면 새우는 정신이 없다. 세상이라는 것이 꼭 그와 같다.
이런 현실을 사람들이 축하하기 위해서 모였다. 어떤 의미로 축하하는가는 다 의미가 다르겠지만 우리나라 장례식은 그것이 아니고 진짜 하나도 빼놓을 것이 없는 모두 일심동체가 되어서 한 몸으로 함께 예수와 함께 상구와 함께 그 모습을 보면서 너무 대조가 되었다. 승리는 우리 것이다. 우리가 승리하는 것이다. 겉모양은 화려하지만 알맹이는 하나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겉모양은 초라한 것같이 보이지만 어디에든지 뿌려놓으면 싹이 날 것 같은 씨다. 생명력이 충만한 그런 장례식이었다.
죽음을 이긴 것, 이것은 대단한 일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다른 것은 다 이길 수 있는데 이길 수 없는 것이 죽음이다. 그래서 히브리서에 보면 “죽음에 매여 일생을 종노릇하는 자들을 놓아주려고 예수께서 친히 먼저 죽음을 맛보셨다.”는 이런 말씀이 있다. 죽음에 매여서 종노릇하는 자들을 놓아주려고 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탄이 사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 “네가 별거냐 아무리 해봐라 뭘 해도 너는 인간이기 때문에 죽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놓고 마귀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봐라 나보다 네가 나으면 한 번 뛰어내려봐라”이렇게 조롱했다. 아담을 이렇게 조롱했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그래 죽으면 다 헛일이지”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죽으면 헛일이니까 오늘 먹고 잘 살자 이렇게 인생을 망치게 만들어버린다. 하나님의 거룩한 위임을 받은 인생을 “뭐 죽으면 뭐해! 위임을 시행하면 뭐해! 오늘 배부르고 등 따시면 되지 않은가!”이렇게 인생을 멸망시켜버린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죽음에서 해방시키려고 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죽음을 이기면 승리하는 것이다.
“한 번 죽는 것은 인생의 정한 이치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이렇게 되어있다. 그러니까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한 번 낫다가 죽는 것이 정한 이치인데 그 정한 이치를 어기고 “너는 하나님같이 될 것이다.” 이렇게 속인 것이다. 그런데 죽지만 않는다면 사람이 뭘 못하겠나. 여기에 사람이 속아 넘어간다. 어차피 죽을 것인데 그런데 우리는 죽는 날까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인생으로서의 본분을 다하면 된다. 그렇게 안 하면 쓸모가 없는 것이니까 멸망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지어졌는데 그렇게 못하면 멸망이다. 마이크가 소리를 확산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마이크의 멸망이다. 아무리 좋게 만들었어도 안 쓰고 가만히 놔둬도 오래 둬서 썩어버리면 헛일이다. 이것이 소리를 얼마만큼 낼 수 있는가 얼마만큼 많이 쓰고 버렸나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이게 금으로 만들었나 은으로 만들었나 또는 얼마나 오래 되었나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얼마만큼 사용되었나 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도 얼마만큼 사용했나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얼마만큼 길게 살았나 얼마만큼 넓게 살았나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이번 장례식을 통해서 확실히 드러났다. 한 사람은 화려하고 넓게 살았는데 알맹이는 없는데 한 사람은 작고 좁았는데도 아주 알짜만 남았다. 장례식장에 모여있었던 사람들은 입추의 여지없이 모였는데 쭉정이는 하나도 없고 알맹이만 있었다. 그래서 우리가 승리했다. 교회가 이겼다. 그래서 나는 집에서 그것을 보면서 여러분과 같이 박수치고 환영하고 그랬다.
오늘 말씀이 우연치 않게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는 제목이다. 우리는 다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살기 때문에 상구의 죽음도 우리가 짊어지고 사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부터 상구의 죽음을 짊어지고 사는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의 영결식에 온 사람들은 아무도 죽음을 짊어진 사람이 없다. 짊어져 줄 사람도 없고 짊어질 사람도 없고 아무도 없다. 다 남의 죽음이다.
새 언약의 사역자들의 삶은 질그릇에 담긴 보화를 자랑하는 것이며 자신의 몸 안에 짊어진 예수의 죽음을 살아내는 것이다. 예수는 죽음에서 살아나셨다. 그러므로 그 죽음을 몸속에 짊어진 우리는 그 죽음을 살아내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 새 언약의 사역자들은 누구인가?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새 언약의 사역자들이다. 옛 언약의 사역자들은 그것을 배워오면 되고 전수받아 오면 되니까 심지어 하나님께 받더라도 은사로 받으면 되는 것이니까 나 자신과는 관계가 없다. 내 자신이 그것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새 언약의 사역자들은 그것이 아니고 내 몸에 짊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등에 짊어지고 있는 것 아니고 내 안에 짊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in body”해서 내 몸 안에 내 몸 속에 짊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새 언약의 사역자들은 질그릇에 담긴 보화를 자랑하고 자신의 몸 안에 짊어진 예수를 살아내는 것이다. 이것이 새 언약의 사역자들이다.
질그릇에 보배를 담았으니까 자랑할 수밖에 없다. 금 그릇에 보화를 넣었으면 별로 자랑할 것도 없겠지만 자랑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자랑을 하려고 해도 억지로 하겠지만 질그릇에 보화가 담겼으니까 자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디를 가든지 안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질그릇에 보배를 가졌으니까 자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길례자매가 질그릇에 보배가 있어서 자랑을 하는 것같다. 자기가 유명한 사람이었으면 그냥 편리한대로 예수를 믿고 어떤 데 가서는 예수 믿는다고 하고 어떤 데 가서는 안 믿는다고 하면 된다. 적당히 처신하면 되는 것이니까 그렇다. 그런데 자랑할 것이 없으니까 감자탕 장사를 하면서 뭘 자랑하겠나. 감자탕은 배고플 때 먹던 음식이다. 돼지뼈를 고아서 거기에 감자를 넣어서 끓여놓은 것이니까 한 뚝배기씩 먹고 나면 배가 부른다. 싸게 배부르게 하는 음식이다. 그러니까 돼지뼉따귀를 끓여서 감자탕을 파는 사람이 뭘 자랑하겠나. 돼지뼉따귀를 자랑하겠나 아니면 감자를 자랑하겠나. 자기는 예수를 자랑하는 것이 최고의 영광이다. 교회를 자랑하는 것이 자기에게는 최고의 기쁨이다. 그래서 담대하게 자랑하는 것 같다.
그래서 질그릇에 담긴 보화를 자랑하는 사람, 이 사람이 새 언약의 사역자이고 좀 더 깊게 그분의 죽음을 몸속에 짊어진 사람, 이 사람은 죽음을 살아낼 수밖에 없다. 자기 속에 있는 것을 살아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예수는 죽었다.”고 하고 다니면 아무 재미가 없다. ‘예수는 죽으면서 살아나셨다.’ 이렇게 간증하고 돌아다녀야 한다. 그래야 죽은 예수가 살아난다. 죽은 예수가 우리 안에서 살아난다. 그러니까 죽음을 몸속에 짊어진 우리는 그의 죽음을 살아낼 수밖에 없다.
내 인생 속에 보배가 있다면 그것을 자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내 속에 그분의 죽음이 있다면 그 죽음을 자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죽음이 있는 것을 슬퍼하고 돌아다닐 수 없단 말이다. 그 죽음은 영광스런 죽음이다. 그래서 사도들은 이 사람을 따라다녔는데 이 사람이 죽어 버렸다. 뭘 전하겠는가? ‘나는 3년 동안 예수라는 따라다녔는데 그 사람이 뭔가 좀 할 줄 알았는데 죽어버려서 내 인생 종쳤다.’ 이러고 돌아다닐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이 사람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이다. 죽은 자도 살린 사람이다.’ 이렇게 선전하고 다녔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에 붙잡혀 온 것이다.
그러니까 새 언약의 사역자는 질그릇에 보배를 담은 사람이고 자기 속에 예수의 죽음을 가진 사람이다.
이것이 새 생명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부활의 삶이다. 새 언약의 사역은 이 생명을 만민에게 공급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께 포로 된 자들의 향기와 편지로서 전해지고, 보화를 담은 질그릇의 자랑과, 예수의 죽음을 몸속에 짊어진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이것이 새 생명이고 예수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부활의 삶이다. 내가 죽은 예수를 자랑하는 삶, 이것이 새 생명이다. 이것이 아이러니 한 일이다. 죽은 사람을 살려 주는 것, 이것이 새 생명이다.
상구를 살려 내 주니까 얼마나 좋은가! 그러니까 이것은 다른 생명이다. 상구는 지금 없는 데 상구를 지금 자랑한다. 이것이 새 생명이다. 다른 게 아니다. 그냥 입으로만 자랑하는가? 나도 그렇게 살아낸다. 이것이 새 생명이다. 부활이 다른 게 아니다. 이것이 부활의 생명이다. 물론 마지막 때의 부활 그것 말고 ‘오늘 너희에게서 부활’ 이것은 우리가 그 죽음을 살아내는 것이다. 그러면 부활의 생명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거꾸로 죽음을 살아내는 데 생명이 나온다. 그래서 ‘죽음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였느니라.’ 나는 죽음을 살아낸다고 살아 냈는데 사람들은 살아났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역자들의 일이다. 참 이상한 일이다.
새 언약의 사역은 이 생명을 만민에게 공급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생명이 아닌 생명이다. 우리가 모르던 생명, 이것을 만민에게 공급하는 일이다. 그리스도께 포로 된 자들의 향기와 편지로서 전해주고 보화를 담은 질그릇의 영광과 예수의 죽음을 속으로 짊어진 자들에 의해서 전파된 것이었다. 다 이것이 아이러니 한 일이다. 다 역설적인 일이다. 우리는 역설을 정상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죽은 자들을 살아내고 살고 있는 일이다. 죽은 자를 자랑하면서 우리가 영광스러워지는 것이다. 예수는 이상한 사람이다. 그 사람을 자랑하면 자랑할수록 내가 영광스러워진다.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나님을 떠난 아담은 죽음의 선고를 무시하고 살아보려고 발버둥 쳤다. 아벨을 죽이고 네피림이 되어 바벨을 건설하려고 시날에 모였다. 흩어짐을 면하자, 하늘에 이르자, 우리 이름을 빛내자........하면서 진흙을 구워 벽돌을 만들고 성을 쌓아올렸으나 그 성은 허물어지고 서로가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 역사에 대한 총괄적 계시다.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나님을 떠난 아담을 죽음의 선고를 받았다. ‘네가 이것을 먹으면 정녕 죽을 것이다.’ 그런데 살아보려고 발버둥 친 것이다. 하나님은 죽었다고 하는 데 ‘나는 안 죽었다. 왜 죽었는가? 나는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다. 나는 하늘에 오를 수 있다.’ 이래서 사람의 위치를 산 체 하려고 발버둥치는 것이다. 돈이 없는 사람이 있는 체 하는 것처럼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아는 체 하는 것처럼 죽은 자가 산 체 하고 있단 말이다. 그래서 아들을 죽였다. ‘봐라. 내가 힘이 있지 않느냐? 네피림이 되지 않았는가? 그래서 장부요 용사가 되었다. 봐라. 내가 장부요 용사가 아니냐? 내가 왜 죽어?’ 그래서 바벨을 건설하려고 시날에 모였던 것이다. 거기서 뭘 하고 있었는가? ‘흩어짐을 면하자. 하늘에 이르자. 우리 이름을 빛내자.’ 이러면서 성을 쌓기 시작했다. 우리는 살았다는 것이다. 왜 죽었는가? 우리는 이렇게 할 수 있다.
그래서 흙을 구워서 벽돌을 만들고 성을 쌓아 올렸다. 그런데 그 성은 허물어지고 서로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사방으로 흩어졌다고 한다. 이것이 옛날이야기가 아니고 현실이다. 이런 사람들이 모이면 많이 모인 것 같다. 힘도 굉장하고, 굉장한 사람들이 다 모였다. 우리나라에서 내 놓으라는 사람들이 다 모였다. 그런데 다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말하는 것을 서로가 다 못 알아듣는다. 그러니까 다 흩어진다. 말을 못 알아듣는데 어떻게 모이겠는가? 사방에서 다 각자 자기 방에서 산다. 자기 독방에 들어가서 사는 것이다. 누구도 함께 할 사람이 없다. 어떤 사람도 함께 할 사람이 없다. 보화를 담고 다니는 사람도 없고 생명 안에 감추어진 사람도 없다. 아무도 없고 자기 혼자다. 살았다고 하지만 사실은 산 게 아니다.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고 한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지만 한 말로 알아듣는다. 그냥 눈만 봐도 알아듣는다. 왜 웃는지 안단 말이다. 왜 우는 지 안다. 그렇지만 바벨을 쌓는 사람들은 서로가 모른다. 높이 올라갈수록 서로 모르는 것이다. 초등학교 친구 때는 알고 모르고 상관없으니까 그냥 재미있게 놀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점점 올라갈수록 높아질수록 서로 못 알아보게 된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사람들이 두 사람 있다. 아주 친하던 사람들인데 지금은 완전히 갈라져서 서로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것이 인간이다. 이것이 인간의 역사에 대한 총괄적인 계시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역사는 굉장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이 보실 때는 흩어져 있다. 서로 높아지려고 하다가 서로 말을 못 알아듣게 되어 있다. 모든 조건을 다 빼버리고 볼 때는 그것만 보인다.
인간들은 살아 움직이고 심지어 성을 건설하고 있다. 그러나 움직인다고 살아있는 것은 아니며 성을 건설한다고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게 되었음으로 위임이 있는 생명은 이미 죽은 것이다.
인간들은 살아 움직이고 성을 건설하고 그러고 있다. 그러니까 굉장한 것 같다. 능력도 굉장하고 달나라를 가고 그 다음에는 별나라도 가고 대단한 것 같다. 그러나 움직인다고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성을 건설한다고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를 위해서 무엇이 유익하냐는 것이다.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없다. 선약과를 먹음으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게 되었다. 위임이 없는 생명은 이미 죽은 것이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 그로 하여금 이러 이러하게 하자.’ 그 생명이 죽어버렸다는 말이다. 위임이 끝나면 죽은 것이다.
요즘 대기업에서 그런다고 한다. 내 보내야겠는데 ‘나가라.’고 하면 위법이니까 책상을 치워버린다고 한다. 어느 날 출근을 했는데 자기 책상이 없다. 그런 사람들은 옥상에 담배 피러 간다. 그러다가 생색을 내고 집으로 돌아간다. 출근한 것처럼. 그런데 그것이 하루 이틀이지 못한다고 한다. 그것을 견뎌낸 사람이 드물다고 한다. 그러니까 저절로 그만 두는 것이다. 이미 그 회사의 생명은 끊어진 것이다. 일이 끊어졌으니까, 일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직장에 가서 일이 없다고 편하다고 하면 안 된다. ‘참 좋네, 일도 없고,,,’ 그러면 나가라는 것이다. 일이 많아야 그 사람이 필요하지 일 없는 사람을 무엇 하러 놓아두겠는가? 그러니까 일이 없으면 찾아서라도 해야 한다. 열심히 해야 거기에 남아 있지 일이 없다고 뒷짐 지고 앉아 있으면 곧 나가라는 소리다.
탯줄은 끊어졌고 생명공급은 단절 되었다. 전선이 끊어지면 전등은 이미 죽은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 생명의 공급이 끊어지면 창조목적 안에서 신성한 위임이 있는 인생은 이미 죽은 것이며 생물적 생명만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탯줄은 끊어졌고 생명 공급은 단절되었다. 뱃속에 있는 아기가 탯줄이 없으면 그냥 죽는다. 전선이 끊어지면 전등은 그냥 죽은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 생명의 공급이 끊어지면 창조의 목적 안에서 신성한 위임이 있는 인생, ‘이것이 인생, 이것이 인생이다. 이래서 하나님 아들이 된다.’ 하는 그것이 끊어져 버리면 죽었단 말이다. 죽었다는 말은 그것이 희망이 없다는 말이다.
생물학적 생명은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위임이 있는 생명은 끊어졌다.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이것은 생물학적 생명이 죽는다는 말이 아니고 위임이 끝난다는 그 말이다. ‘네 할 일이 끝난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할 일이 끝나면 뭐가 남는가? 그것은 동물만 남는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집을 짓는다. 도로를 닦는다. 자동차를 타고 다닌다. 그렇다고 인간인가? 그렇다고 인간이 아니지 않은가? 우리가 불편하니까 그런 것을 하고 있는 것이지 만약에 우리가 갈매기나 독수리처럼 그렇게 생겼다면 무엇 때문에 자동차를 만들겠는가? 무엇 때문에 비행기를 만들겠는가? 무엇 때문에 콘크리트를 타설 해서 집을 짓겠는가? 지금 사람들이 열심히 하고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소용이 없다. 시험을 보려고 고등학교 3년 내내 잠도 못자고 공부를 왜 하는가? 대학교 가서 취직을 하려고 왜 공부를 하는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지 않은가? 다 우리가 그렇게 안 살면 안 되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 그렇게 안 살 것 같으면 무엇 때문에 하겠는가?
옛날에 농사만 지을 때는 고등학교에 갔거나 대학에 갔거나 같았다. 오히려 대학을 나온 사람들은 놈팽이었다. 이건 괭이를 잡고 일을 할 수도 없고 그래서 고등 놈팽이라고 했다. 우리나라 산업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는 일자리가 없었다. 고등학교 나온 사람이나 대학교 나온 사람이나 매 일반이었다. 차라리 집에서 농사 좀 배워서 일하는 사람은 그래도 일할 곳이 있었지만 이 사람들은 배워 놓았기 때문에 일도 못하겠고 공부도 못하겠고 직장도 없고 그랬다. 그때는 쓸데없는 공부였다. 지금은 공부를 안 하면 못 살게 되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공부를 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왜 공부를 해야 되느냐고 묻는다. 그 질문에 대답하기가 참 어렵다. ‘야! 너 공부 안 하면 직장에 못 간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듣는다. ‘너 공부 못하면 장가를 못 간다.’ 이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다. 뭐라고 설명해야겠는가? ‘공부를 왜 해야 되느냐?’고 묻는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 줘야 되겠는가? 대답할 말이 없다. 부모가 있어서 밥 주고 옷 주고 다 해 주지 뭐가 부족하냐는 것이다. 이대로 살면 되는 데 왜 달달 볶느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일들은 굉장한 일이고 엄청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아도 사실상 하나님이 보실 때는 아무 것도 아닌 일이다. 갈매기가 날아가면서 볼 때는 인생이 우습다. ‘저것들이 왜 저러고 사는고?’
생물적인 인생 안에서 만들어진 것들은 다 죽는 것이나, 사는 것이나. 선행이나, 악행이나 다 하나님께는 죽은 것이다. 값을 칠 수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이 되어 이것들로 세상을 만들고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이다. “살았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들”(계3:1참)이라는 것이다.
생물적인 인생 안에서 만들어진 것들도 문제가 된다. 그런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 다 살아 있는 것 같지만 다 죽은 것이 아닌가? 다 죽은 자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니까. 새가 만들어 놓은 것은 우리에게 쓸모가 없다. 아무런 쓸모가 없다. 자기들은 좋다고 정성들여 만들어 놓았는데 우리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다.
우리 집에 조그만 새가 있다. 이 놈이 해마다 알을 까기 때문에 어디 알을 깔 자리를 찾아서 둥지를 만든다. 우리 집에 우체통이 있는데 어떻게 그 좁은 구멍을 발견해서 들어가 만들어 놓았다. 그 풀을 얼마를 갖다가 쌓아 놓았는지 마를 풀로 이만큼 두껍다. 그렇게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그 속에다 알을 까려니까 자기는 정말 정성을 다해서 수천 번을 왔다 갔다 해서 한 쌍이 그렇게 하는 데 사람이 보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놈이 우체통만 버려 놓았다. 우리가 막 뭐라고 하지만 하나님이 볼 때는 무슨 정상적이겠는가? 또 새가 보면 뭐가 중요하겠는가? ‘조그만 것만 있으면 알도 까고 다 할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저렇게 큰 집을 짓는다고 애를 쓰는고? 참 어리석도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하는 게 별게 아니다. 굉장히 위대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위대하긴 뭐가 위대한가? 사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선을 행하는 것이나 악을 행하는 것이나 다 하나님께 죽은 것이다. 다 하나님께는 쓸모가 없는 것이다. 이래도 쓸모가 없고 저래도 쓸모가 없다.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선을 행하는 것이 악을 행하는 것보다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그게 필요하다. 그런데 하나님께는 다 죽은 것이다. 값도 칠 수가 없다. 얼마짜리를 얼마라고 할 수도 없다.
오죽하면 1000원, 1000원 하는 데가 있다. ‘모든 물건은 다 천원에 드립니다.’ 하고 써 붙여 놓은 데가 있다. 그냥 없어질 것인데 그냥 1000원씩 받고 파는가 보다. 아마 공장에서 나올 때는 500원이나 300원이 될 것이다.
값을 칠 수가 없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이 되어서 이것들로 세상을 만들고 하나님을 대항하고 있는 것이다. ‘와 우리는 살았다. 죽는다고 하더니만 안 죽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래서 계시록 3장 1절에 보면 ‘너는 살았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다.’ 이렇게 말을 한다.
아담은 죽은 사람이다. 그러나 살았다고 주장한다. 자기를 내 세우면서 하나님을 위한다 하고, 인간의 소원인 이상향을 사모하면서 천국을 사모한다고 하며, 바벨을 건설하면서 천국을 기다린다고 한다. 이미 죽은 아담의 상황이다.
아담은 죽은 사람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죽은 사람이다. 그런데 살았다고 주장을 한다. ‘아니 내가 살았지 않느냐 내가 왜 죽었느냐?’그러면서 하나님을 위한다고 한다. 교회에 가보면 하나님을 위한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인간의 소원인 이상향을 사모하면서 천국을 사모한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지금 예수 믿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왜 예수를 믿소? 천국에 가려고 믿습니다. 이렇게 말을 한다. 그런데 그 천국이 뭔지 아냐? 자기의 이상향이다.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 세계를 말한다. 인도 사람에게 물어보면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주고 우유가 풍성하게 있고 먹을 것이 많은 그것이 천국이고 우리 한국 사람들도 옛날에는 그랬다. 무엇이 천국이냐고 물으면 먹을 것이 많고 기화요초가 만발하고 또 상선벌악의 사상이 있어서 악한 자는 지옥에 들어가고 선한 자는 좋은데 앉고 감투도 개털감투가 있고 오소리감투가 있고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해왔다. 그것이 천국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바벨을 건설하면서 천국을 기다린다고 했다. 하나님 백성이라는 사람들이 바벨론을 건설하고 있으면서 우리는 천국을 기다리고 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죽은 아담의 상황이다. 죽은 자의 소망이니까 이것이 다 빗나가서 딴 것이 나와 버렸다.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자기를 내세운다. 인간의 이상향을 찾으면서 천국을 사모한다고 말한다. 바벨을 건설하면서 천국을 기다린다. 이것이 죽은 자의 상황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따라 자신의 모양대로 지어 거룩한 위임을 주신 그 사람을 회복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셋을 주셨으며, 네피림의 시대에서 노아를 구원하시고, 바벨에서 아브람을 부르셨으며, 애급에서 이스라엘을 건저내시고, 가나안 땅에 나라를 세우게 하셨으나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을 숭배하다가 망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따라 자신의 모양대로 지어서 거룩한 위임을 주신 그 사람을 회복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래서 세상에서 말하는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쓸 수 있는 그 사람을 다시 회복하기를 원하고 있다.
나도 옛날에 이것을 몰랐다. 그러니까 젊을 때 처음 목회하러 나오니까 사람이 많이 모이고 북새통 치는 것이 너무너무 부럽더라. 그것을 어떻게 하면 할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저렇게 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저렇게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가? 이것만 생각했다.
그러니까 거룩한 위임이 뭔지를 모르고 그런 일을 하는 것이 거룩한 위임으로 생각을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를 다른데서 찾고 있었다. 자신의 거룩한 위임을 받은 그 회복, 그 사람을 회복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은 완전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을 찾고 있다는 것을 나는 생각을 못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가인의 죽인 아벨대신에 셋을 주었다. 다시 생각해보라는 것이고 다시 한 번 해보자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 대신에 셋을 줬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디로 갔는가? 네피림 시대로 도로 가버린다. 팔백 살씩 구백 살씩 살도록 놔뒀더니 이제 모두 네피림이 되어서 강포해져서 거기서 노아를 구원해서 여덟 식구를 구원해 놓았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어디로 가버렸냐 하면 바벨로 가버렸다.
그래서 거기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이다. 그리고 애굽에 이스라엘 백성을 줬더니 애굽에 내려가서 종이 돼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거기서 건져내서 다시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나라를 세우게 했다. 그런데 또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을 숭배하다가 망하고 말았다.
이미 죽은 아담은 어떻게 해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은혜를 베풀어도 안 되고, 율법으로 가르쳐도 안 되며, 나라를 줘도 지키지 못한다. 핍박 중에도 안 되었으며 국교가 되었어도 더욱 안 되었다. 죽은 자는 오로지 죽음의 모양과 냄새만을 품어낼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이런 과정들이 필요했다고 할 수 있다.
‘아 이미 죽은 아담은 어떻게 해도 안 되는구나.’ 이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너는 죽었다 했던 그 아담은 이렇게 해도 안 되고 또 저렇게 해도 안 되더라. 셋을 다시 줘도 안 되고 노아를 구원해놓아도 안되고 아브라함을 불러내도 안 되고 다 안 되더라는 것이다. 은혜를 베풀어도 안 되고 율법으로 가르쳐도 안 되고 나라를 줘도 지키지 못하고 핍박을 받아도 받기 때문에 안 되고 국교가 되면 국교가 됐기 때문에 또 잘못되고 죽은 자는 오로지 죽음의 모양과 냄새만을 풍길 뿐이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는 사람도 있다. 그와 같다. 돼지라는 놈은 아무리 깨끗하게 해도 그래도 안 된다. 자기가 깨끗하지 않기 때문에 습관이 그렇게 돼 있기 때문에 자기는 똥이 없는데 가서 누워 자지만 깨끗한 것을 가리지는 못한다. 똥은 아무데나 싸놓고 자기는 깨끗한 곳을 찾아다닌다. 깨끗한 것은 좋아하면서 빨래하기는 싫어. 이런 식이다.
죽은 자는 오로지 죽음의 모양과 냄새만을 풍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이런 과정들이 필요했다고도 할 수 있다. 더 잘한다는 것은 죽은 자의 행동을 더 잘한다는 뜻이다. 문명이 지금 발전하고 있다. 옛날에 비하면 놀랍게 발전했다. 그리고 우리가 참 편리하게 살고 있다. 한국 같은 경우 특별히 아주 편리하게 살고 있다. 50년대부터 시작해서 지금 2015년인데 이 기간 동안 세계 역사상 가장 발전한 나라가 한국이다. 이 기간 동안 평균 70% 정도 성장했다고 하면 한국은 280% 성장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세계 역사상 가장 급속하게 발전한 나라가 한국이다. 그러니까 부작용도 많이 있다. 그렇게 빨리 크는데 부작용이 없겠는가.
그러니까 더 잘한다는 것은 참 잘하는 것인데 더 잘하면 더 잘할수록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은 더한다. 옛날에는 아들이 아버지를 거역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살살 빌어야 한다. 다 좋아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죽은 자의 행동이 더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은 완전하게 처리 되어야 할 존재다. 새 창조를 위해서 물러나야 할 존재다. 이 사람을 완전하게 처리하기 위하여 주 예수께서는 십자가 까지 가야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은 사람도 인생, 즉 피조물이라는 것, 하나님으로부터의 공급이 끊어지면 한줌의 흙이라는 것을 역역하게 보여주기 위하여 그 자리까지 가야했다.
아담은 완전하게 처리되어야 할 존재다. 새 창조를 위해서 물러나야 할 존재다. 이 사람을 완전하게 처리하기 위하여 예수께서는 십자가로 가야 했다. 제자들만이라도 안 그랬으면 십자가까지 안 갈수도 있었다. 그런데 십자가가 근처까지 갔는데도 제자들이 뭐라고 했냐하면 ‘누가 더 크냐?’ 이러고 있었다. 한 어머니는 뭐라고 했느냐 하면 ‘주의 나라가 임할 때 한 아들은 좌편에 한 아들은 우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그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십자가 근처까지 왔는데도 그러고 있으니까 만약에 거기서 그러지 않았으면 십자가를 안 져도 될 것이 아니겠는가. 거기까지 왔는데도 그러니까 할 수 없이 십자가를 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십자가까지 가야했구나. 마지막 그것을 처리하려면 그 자리에서는 안 되니까, 말로 해도 안 되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은 사람도 인생 즉 피조물이라는 것, 하나님으로부터의 공급이 끊어지면 한줌의 흙이라는 것, 이것을 역력하게 보여주는 죽음이 예수의 죽음이다.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 왜 하나님은 이렇게까지 하도록 놔 두었을까? 그것은 우리를 완전하게 처리하기 위해서 그렇다. 거기까지 안가면 처리가 안 되니까 우리 모두를 한꺼번에 처리하려면 거기까지 가야만 한꺼번에 처리가 되기 때문에 그래서 그렇다. 우리가 진즉 조금도 먼저 단계에서 돌아섰더라면 원점으로 돌아왔더라면 예수님이 십자가까지 안 가도 되는 것이다. 원래부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아니다. 할 수 없으니 지는 것이다.
말 안 들으면 그렇다. 아이들에게 말을 들으라고 회초리로 때리다가 안 되면 더 반항한다. 계속 반항한다. 그러면 어쩌겠는가. 아버지가 포기해야 한다. 죽으라고 죽을 때까지 싸울 수는 없다. 아버지는 사랑하기 때문에 책망하기 위해서 했던 것인데 이놈이 들을 줄 알았더니 안 듣고 계속 일어나면 아버지가 져야지 아버지가 계속 아들을 가르치려다 죽어버리면 어쩌겠는가. 안될 것이 아니겠는가. 여러분도 혹시 하다가 말을 들을 때까지 때리면 죽는다.
그것이 사실인지 모르겠는데 강원도 산간에는 곰을 키웠다고 하는데 아기를 재울 때 가슴을 다독이며 재우는데 아기를 재워놓고 밖에 나갔는데 아기가 깨서 우니까 곰이라는 놈이 지도 와서 해본다고 때렸다. 때릴수록 우니까 더 세게 때렸다. 때릴수록 우니까 더 세게 때렸다. 결국 울음소리가 딱 그치니까 지는 좋다고 생각을 했다. 와보니 애가 맞아 죽어버렸다. 그래서 곰이라고 한다. 그래서 결국 부모가 져야 한다.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 할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도 어쩔 수 없어서 자기가 짊어져야 한다.
새 언약의 사역자들은 이 사람의 죽음, 즉 완전하게 죽은 자를 자신의 몸 안에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몸은 이 죽음을 위한 피할 수 없는 담보물이다. 우리가 몸이 없다면 예수의 죽음도 피해서 갈 것이다. 확인하지 못함으로 또 다시 살았다고 변명할 것이다.
그러니까 새 언약의 사역자들은 이 사람의 죽음, 그 어쩔 수 없어서 죽은 이 죽음, 완전하게 우리를 처리하기 위해 죽은 이 죽음, 이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 아이들이 그것을 안다면 부모를 거역하지 않는다. 부모는 나 때문에 포기하는구나 하는 것을 안다면 그러나 또 엉뚱한 놈은 자기가 이기고 나니까 이제는 내 맘대로 해야지 이제 아버지도 문제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면 이것은 완전히 끝장이다. 이 죽음, 완전한 죽음. 아주 끝을 낼 수 있는 죽음, 이것을 몸 안에 짊어지고 산다는 그 말이다.
어느 도가에 가든지 종교에 가든지 마지막은 자기를 비우라는 것이다. 자기를 비우고 다 내려놓아라. 다 헛것이다. 마지막은 다 이것을 가르친다. 그런데 그 옷을 내가 입었으면 내가 입은 옷이니까 내가 벗을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입은 옷이 아니고 누가 입혀놓은 옷이라면 내가 벗기 어렵다. 그런데 누가 입혀놓았는지도 모르는데 입고 있다면 그러면 내가 벗지를 못한다. 날 때부터 입고 있는 옷을 어떻게 벗겠는가. 그것을 옷이라고 생각을 하겠는가. 날 때부터 있었던 것이니까 내 피부처럼, 내 피부도 하나의 자루다. 우리 피부가 밀가루 부대처럼 부대이다. 그러니까 이것을 벗으라고 하면 벗겠는가. 못 벗는다.
마찬가지로 인생도 타고 나기를 타고 났는데 어디를 벗겠는가. 다 벗고 나면 양파처럼 껍데기 벗기고 나니 아무것도 없다. 인생도 벗기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까 벗어라 벗어라 버려라 버려라 내려놔라 내려 놔라 아무리 해도 안 된다. 죽음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모르겠다. 나는 가능한 사람도 있다고 하니까 아니라고 해서 싸울 필요는 없고 그러면 그렇게 해라. 잘 벗었으면 잘 벗은 데라 살아라. 나는 그렇게 못하겠다. 내가 입은 옷도 벗으려면 귀찮을 것인데 남이 입혀놓은 옷도 벗으려면 귀찮은데 아예 태어날 때부터 입은 옷을 어떻게 벗겠는가. 그것을 벗으려니까 애를 써야 한다. 밥을 굶기도 하고 고행을 하면서 남 안하는 짓 하면서 그렇게 살아야 된다. 남같이 살아서는 안된다. 그렇게 일생을 살아서 뭘 할 거냐? 또 다 벗으면 뭘 할 거냐?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나는 이 일을 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하기 전에는 내가 벗을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뭐 있습니까! 나쁜 짓 안하고 살면 그만이지! 사람들이 나보다 칭찬하고 모범 청년이라고 하는데 내가 뭘 버릴 것이 있겠습니까! 어려서부터 나쁜 말 안 들어 보고 살았다. 내가 나를 버리고 말고 할 것이 없었다. 성질이 고약하면 내가 이것을 버려야지 할 것인데, 내가 성질 고약한 사람도 아니고 뭐 버릴래야 버릴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내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른 것이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나는 내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내가 모르는 것이다. 알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나는 벗는 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혼자 앉아서 생각해서 벗는다. 생각해서 번뇌를 다 깬다. 이것도 버리고 저것도 버린다. 어떤 상황에 와서 그것이 붉어질지 누가 압니까! 모른다. 견물생심이라고 한다. 전혀 그것을 살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길가에 가다가 물건을 보니까 사고 싶은 생각이 난다. 그것을 내가 미리 알아서 다 없앱니까! 사람에게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 다 모르는데 그것을 하나하나 찾아서 다 없게 하려고 하면 어떻게 다 없앨 수 있겠는가!
그런데 예수의 죽음을 보니까! 간단하다. 아 저게 인생이구나! 저것이 진실이구나! 저것이 참 피조물이구나! 나는 저 피조물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구나! 아주 간단하다. 여러분 10년 쭈그리고 앉아 보세요! 불가능하다. 천재 같으면 모르지만 불가능하다.
새 언약의 사역자들은 이 사람의 죽음, 즉 완전하게 죽은 자를 자신의 몸 안에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몸은 이 죽음을 위한 피할 수 없는 담보물이다. 우리가 몸이 없다면 예수의 죽음도 피해서 갈 것이다. 확인하지 못함으로 또 다시 살았다고 변명할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의 죽음! 이 죽음은 만유를 포함한 죽음이다. 더 이상 죽을 수 없는 죽음이다. 그러면 끝이다. 이것을 짊어지고 다닌다는 것이다. 더 이상 죽을 수 없는 그 사람을 짊어지고 다닌다. 내가 도를 닦아서 옷을 벗는 것이 아니고 그 죽은 사람을 내가 짊어지고 산다는 것이다. 그 죽은 사람을 나로 알고 산다.
우리 몸은 이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단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만일 몸이 없었더라면 네가 정령 죽으리라 했을 때 그것을 사람이 그것을 알아 듣고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사탄도 너는 죽었다. 너는 쓸모없다. 아무리 해도 안 된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모르는 것이다. 사탄은 죽음이 있는지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 죽음이 무엇인지 안다. 내 몸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몸은 단보물이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단보물이다. 우리가 몸이 없다면 예수의 죽음도 피해 갈 것이다. 죽을 사람 죽고 살 사람은 살지 뭐! 피해 갈 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확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 살아다고 변명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죽음이 있다. 육체가 있기 때문에 죽음을 안다. 숨이 끊어지면 죽는다는 것을 안다. 이것도 축복이다. 나는 이것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변명하고 피해 갈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피해 갈 수 없다. 나는 몸이 약해서 여러분 보다 조금 더 빨리 알았는지 모른다. 몸이 약하니까! 내가 지금도 몸이 팔팔해서 80kg 들고 달리고 하면 죽음이 뭐야 죽음 같은 소리하네! 안 하겠습니까! 그런데 숨쉬기도 바쁘니까! 완전히 단보물이다. 내 인생 자체가 단보물이다. 우리가 몸이 없었다면 좋았을 것 같은데 몸이 없다면 영원히 구제 받을 곳이 없다. 사탄은 구제 받을 길이 없다.
그러나 죽을 몸이 있음으로 어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모든 인류는 죽었다. 팔백년을 살던 구백년을 살던 일반이다. 변명의 여지기 없다. 하나님의 위임이 끊어지고 그의 생명 공급이 끊어지면 죽은 것이다.
그러나 죽을 몸이 있음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인생! 우리가 몸이 있어서 죽은 것을 알기 때문에 어찌 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이 인생! 이것이 어찌 보면 복된 인생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모든 인류를 안고 죽은 것이다. 죽음으로 우리를 가르쳐 준 것이다. 죽음을 보여 준 것이다. 이것이 죽음이다. 8백년을 살든 9백년을 살든 다 일반이다. 변명의 여지가 없고 하나님의 위임이 끊어지고 생명 공급이 끊어지면 죽은 것이다. 살았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사역자들은 이 죽음, 즉 예수의 죽음, 만유를 포함한 이 죽음을 몸 안에 짊어지고 그 진실을 살아낸다. 주님은 죽으시고 새 생명을 가져왔다. 이와 같이 “우리가 그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 것은 그 의 사심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역자들은 이 죽음, 예수의 죽음, 만유를 포함한 죽음, 이것을 몸에 짊어지고 그 진실, 그 사실을 살아내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라고 나타내고 다니는 것이다 이것이 진실한 인간이며 여기서 더하던지 덜하든지 그것은 다 가짜라는 말이다. 주님은 죽으시고 새 생명을 가지고 오셨다. 그렇게 죽었는데 새 생명이 온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그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 것은 그의 사심도 우리 몸에 나타내게 하려한 것이다. 성경에 보면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함이라 했다. 죽음이 내 안에 있다면 생명도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죽음이 내 안에 있다면 생명도 내 안에 있다.
그의 죽음을 몸 안에 짊어진 사람은 그 진실을 살아낼 때 주님의 새 생명, 주님의 부활생명이 몸 안에서 나타날 것이다. “우리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함이라”(11) 하였다.
그의 죽음을 몸 안에 짊어진 사람은 그 진실을 살아낼 때 주님의 생명, 새 생명, 주님의 부활생명이 몸 안에서 나타날 것이다. 부활 할 때 어떤 모양으로 부활 할 것인가? 바울에게 물었다. 이 어리석은 사람들아 우리가 씨를 뿌릴 때에 그 형체를 뿌린 것이 아니고 씨, 알갱이를 뿌린 것이 아닌가? 그런데 하나님이 각기 그 알갱이에 맞추어서 모양을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모양이 어떻게 생긴 것인가 부터 물어본다는 것이다. 심은 대로 거둔다. 우리가 콩으로 심어졌으면 콩으로 나올 것이고 팥이 심어졌으면 팥이 나올 것이라는 말이다.
예수 죽음을 우리 몸에 짊어짐이 씨라는 것이다. 얼마만큼 짊어졌느냐, 어떤 모양으로 짊어 졌느냐에 따라서 나타나는 것은 달라진다. 교회 안에서 다 죽음을 짊어지고 있지만 어디서 예수와 같은 모양이 나오느냐 하는 것은 다 다르다. 죽음을 짊어진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그 잎이 다르게 나온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에게서 더 영광스러운 것이 나오고 또 어떤 사람에게서는 영광스러운 것이 나오기는 나오는데 조금 밖에 안 나오는지 이런 차이는 씨에 달렸다는 것이다. 오늘 내가 예수의 죽음을 짊어진 정도에 달렸다는 말이다. 주님의 부활생명이 몸 안에서 나타날 것인데 어떤 모양으로 나타날 것인지는 우리가 모른다.
우리가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내게 하려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음을 짊어진 사람이기에 누구에게 예수를 위해서 내 죽음을 내놓게 되면 그것을 보고 다른 사람이 살아난다. 그것은 신기한 일이다. 나는 죽음을 내놓았는데 그것은 본 사람은 살아난다. 예수님은 죽음을 내놓았는데 우리는 살아났다. 마찬가지로 나는 죽음을 내놓았는데 다른 사람은 살아난다. 나 자신 안에서도 나는 죽음을 내놓았는데 나는 살아난다. 나는 자꾸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내 죽음을 내놓으면 나는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새사람이 되려고 애를 쓸 필요가 없다. 애를 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애를 써서 된 사람은 새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리모델링한 사람이다. 애써서 된 사람은 리모델링한 사람이고 새사람은 죽음을 내놓는 사람이다. 죽음을 내놓으면 새사람이 나온다.
예수의 생명, 즉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난 생명이 나타나면 죽은 자들이 살아난다. 죽음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면 생명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역사한다(12참). 그러면 예수를 다시 살리신이가 우리도 다시 살리사 그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실 것이라 하였다.
예수의 생명 즉 죽은 자들 가운데 살아난 생명이 나타나면 죽은 자들이 살아난다. 이상한 일이다. 죽음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면 생명은 다른 사람에게서 역사한다. 그러면 예수를 다시 살리신이가 우리도 다시 살리시어 그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실 것이다. 내가 죽음을 내놓아 살아난 사람이 나의 수확물이며 이 수확물과 함께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인데 이 수확물을 보면 내가 무엇을 주었는지를 알게 된다. 내가 뿌린 씨가 거두어지는 것이다. 내속에 짊어진 예수의 죽음을 뿌린 것이다. 그냥 2000년 전에 십자가에 죽은 예수의 이야기를 뿌린 것이 아니고 내속에 짊어져 있는 예수의 죽음을 뿌린 것이다. 그랬더니 이런 열매가 나왔다. 뿌린 대로 열매가 나온다. 그 열매와 함께 나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런 뜻이다. 그러니까 심는 대로 거둔다는 말이다. 먹는 대로 살고 심는 대로 거둔다는 말이다.
서양 사람들이 왜 키가 큰가? 잘 먹어서 큰 것이다. 우리는 왜 키가 작은가? 잘 못 먹어서 작은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 아이들이 옛날 보다 엄청나게 크다. 지금 아이들을 보면 1m 80cm이 보통이다. 옛날 한국아이들은 잘잘했다. 꽁보리밥 먹고 사는데 얼마나 크겠는가.
해방 후 얼마 있다가 일본아이들과 우리나라 아이들이 서울 장충공원에서 축구시합을 했다. 그 때 일본 아이들이 우리아이들 보다 켰다. 왜냐하면 해방 직후로 그 아이들은 잘 먹여야 큰다. 해서 잘 먹었다. 우리는 그때 까지도 그것을 몰랐다. 10년 동안 가난했으니까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 미국사람들은 밀가루를 먹으니까 크더라! 국수 먹으니까 크더라! 이렇게 해서 분식장려가 되게 됐다. 빵 먹고 그래야 큰다고 소를 수입하고 돼지를 수입하고 그렇게 했다. 그래서 그 영향으로 우리아이들이 1m80cm가 다 넘는다. 지금은 우리가 일본사람들 보다 더 크다. 종자가 우리가 더 크다. 못 먹어서 작았던 것이다.
먹는 대로 큰다. 잉어라는 놈은 먹는 대로 큰다고 한다. 그래서 치어를 키우는데 가만히 놔두면 다 잡아먹고 한 마리만 남는다고 한다. 큰놈이 계속 잡아먹어버린다 그래서 다 죽어버리고 한 마리만 커지면 안 돼까 그래서 키우는 사람이 계속 보고 관찰해서 조금만 크면 갈라내고 조금만 크면 갈라내고 하는 것이다. 그냥 놔두면 다 잡아먹어 버린다. 이놈은 먹는 대로 크기 때문에 그렇다. 사람도 어느 정도 까지는 먹는 대로 큰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생명을 먹는 대로 크고 예수의 죽음을 먹는 대로 큰다. 그래서 그 때 그것이 나타나면 우리 안에서 예수의 죽음이 나타나면 우리 안에 품어진 예수의 죽음이 나타나면 다른 사람은 살아나고 다른 사람 살아난 사람들과 함께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는 말이니까 살아난 사람들을 보면 내가 무엇을 먹었는지 알게 된다는 것이다.
사역자들은 자신들의 증거로 인하여 살아난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다(14참). 이것이 예수의 죽음을 몸 안에 짊어지고 그 죽음을 살아낸 사역자들에게 주신 상급이요 영광이다.
사역자들은 자신들의 증거로 인하여 살아난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다(14참). 이것이 예수의 죽음을 몸 안에 짊어지고 그 죽음을 살아낸 사역자들에게 주어진 상급이고 영광이고 그렇다. 거기서 살림 받은 사람들이 예수와 같은 형상으로 닮아 간다면 그 사역자는 그것이 바로 상급이요 영광인 것이다. 선생은 제자들을 볼 때 공부를 잘하는 것이 자기의 자랑이다. 우리 반 아이들은 우리학교에서 제1급이요 이러면 그것이 선생님의 자랑이다.
마찬가지로 사역자들도 자기가 먹여준 것으로 뭐가 됐냐? 자기가 먹여준 양식을 먹고 뭐가 됐냐 이것이 중요하다. 죽은 자를 살리고 죽은 자를 살리고 계속 이렇게 죽은 자를 살려야 된다. 대를 이어서 대대로 바로 그것이 증거가 된다.
아담은 어떻게 하든 예수의 십자가를 무시하고 자기 지식으로 모든 방법을 연구하고 동원한다. 그러나 새 언약의 사역자들은 십자가의 도만을 따른다. 죽지 않고 다시 사는 법은 없으며 새 창조 없이 새 생명은 올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담은 어떻게 하든 예수의 십자가를 무시하고 자기 지식으로 모든 방법을 연구하고 동원했다. 이것이 모두 종교적인 방법이다. 기도하는 방법 뭐하는 방법 기타 등등.... 기도도 이렇게 해야 하고 이렇게 해야 하고 기도도 하려면 서론 분론 결론 이렇게 정리해서 해야 하고, 잘못하면 중언부언한다고 하고 그래서 장로들이 대표기도 하려고 나오려면 준비를 많이 해야 한다. 기도를 써서 외우고 그렇게 한다. 안그려면 중언부언하게 될까봐 그렇다. 이것은 모두 예수의 죽음을 무시하는 것이다. 어찌하던지 그것을 피해서 다른 길로 가보려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새 언약의 사역자들은 십자가의 도만 따른다. 다른 것은 없다. 예수의 죽음만 짊어지면 저절로 새 생명은 나오는 것이다. 죽지 않고 다시 사는 법이 없지만 새 창조 없이는 새 생명은 올 수가 없다. 죽지 않고 다시 사는 법은 없다. 내가 뭐 스스로 벗고 다시 사는 것이 아니다. 리모델링이다. 신장개업하는 것이다. 여자들 신장개업 하는 것이다. 하하하 뭐 좀 알아듣는 모양이다. 싸악 화장하고 나오면 신장개업하는 것이다. 종교도 그렇게 하고 있는 경우가 참 많다. 죽지 않고 다시 사는 것을 찾고 있다. 죽지 않고 다시 사는 법은 없다. 예수의 죽음을 우리 속에 우리 몸속에, 몸속에 짊어진다는 말은 생리적으로라는 말이다. 몸속에 짊어진다는 말은 in body로 마음속에가 아니고 몸속에라는 말로 이 말은 마음속에 보다 훨씬 더 강조하는 말이다.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것은 잊어먹을 수 있고 자기 편리한데로 잊어 먹을 수 있다. 그런데 몸속에 짊어진 것은 어찌할 수 없다. 내 속에 있는 들어있는 DNA를 바꿀 수 없는 것처럼 어찌할 수 가 없다. 내 마음대로 못한다. 그렇게 내가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면 내 죽음으로 알면 내 죽음으로 여기면 나를 통해서 새 생명이 나오게 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하였고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니라“(고전1:22~25)하였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라고 했다. 그래서 그렇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멸망하는 자들이 말이 원자폭탄을 맞는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끊어 진 사람을 말한다. 하나님의 위임에서 끊어진 사람, 위임은 받지 못할 사람을 말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다. 구원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래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대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니라. 여기서 헬라인은 인도유로피안이다. 그것 참 이상하다. 피가 그렇게 흐르는지 인도는 사실 유럽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동양처럼 느껴지는데 동양이 아니고 서양이다. 이 사람들은 지혜를 찾는다. 희랍사람만 지혜를 찾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도사람도 지혜를 찾고 있다.
그러니까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이 사람들은 항상 역사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에 표적을 구하고 있다. 그런데 헬라인은 역사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혜를 찾고 있다. 지혜를 통해서 옷을 벗자는 것이다. 지혜를 통해서 모든 것을 벗고 무색무취 그런 인간이 되자는 것이다. 거기서 창조가 나온다. 그런데 지혜로 할 수 있으면 하나님께서 네가 이것을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했겠냐는 것이다. 또 그렇게 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쓰실 수가 있냐는 것이다. 하나님이 쓰실 수 가 없다. 설사 이렇게 해서 내가 무색무취의 인간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쓸 수 있는 인간은 아니다. 하나님은 쓸 수가 없다. 내가 그렇게 했으니까 어디까지나 나인 것이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오직 부르심은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니라! 아멘!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이리저리 빠져서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고 무효화시키려고 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붙잡으셔서 예수의 십자가 안으로 인도하시고 그의 죽으심을 우리 몸 안에 짊어지도록 축복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 뼈 속까지, 우리의 피 속까지 주님의 죽으심으로 적셔지게 해 주시고 주님의 죽으심으로 점령되도록 주님께서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