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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혼합재료, 설치, 400×100×100cm, 2010
정한아
아버지한테서 전화가 왔을 때, 나는 은주와 같이 영화를 보고 있었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게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일본 영화였다. 팝콘을 잔뜩 먹고 꾸벅꾸벅 졸던 나는 휴대폰 진동 소리에 깜짝 놀라 깼다.
아버지는 다짜고짜 주말에 시간이 있냐고 물었다. 마치 우리가 주말이면 야구장에 다니는 부자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망설이면서 말끝을 흐렸다.
“내일이 할머니 추도식이다. 한국 들어온 지가 언젠데, 너도 인사를 드려야지.” 아버지는 나를 책망하듯 말했다. “새벽에 차를 가지고 약국으로 와라.”
“트럭을 몰고 가도 괜찮아요?”
“트럭?”
“작품 때문에 트럭을 가지고 다녀요.”
아버지는 짧게 한숨을 쉬더니, 알아서 하라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잠시 후 극장에서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나는 멀리서 걸어오는 은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누구 전화야?”
“아버지. 주말에 어딜 좀 가자고 하셔.”
할아버지, 할머니의 존재를 알게 된 건 불과 3년 전의 일이다. 아버지는 결혼 생활 내내 그들의 존재를 숨기고 살아왔다. 어느 날, 밖에서 밤을 새우고 돌아온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자신은 고아가 아니며, 그동안 부모와 몰래 왕래해왔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잘 들어.” 아버지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어. 지금 장례식장에 가야 한다구.”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젊은 시절 한센병을 앓았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그 병으로 한쪽 다리를 잃었다. 그는 전북 익산의 한센인 정착촌에 살고 있었다.
아버지가 그 모든 사실을 밝혔을 때, 나는 미국의 미술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낮에는 일식집에서 접시를 닦고, 밤에는 학교 과제를 하느라 하루에 두 시간도 자지 못할 때였다. 주방 구석에서 졸다가 기름 끓는 통으로 넘어질 뻔했던 적도 있었다.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내게는 다른 행성의 일처럼 느껴졌다.
은주와의 오랜 연애도 그 무렵 끝이 났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 기약도 없이 나를 기다릴 수 없다고 했다. 앞으로의 계획이 뭐냐는 은주의 물음에 나는 미술을 시작한 이후 계획 같은 것을 가져본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대답했다. 나는 내가 스타가 될 수 없다는 걸 일찌감치 알아차렸다. 그렇다고 미술을 그만둘 수도 없었다. 은주는 얼마 뒤 소개로 만난 남자와 결혼했다. 벌써 3년 전의 일이다.
우리는 극장가에서 빠져나와 저녁을 먹으러 갔다. 은주는 음식을 주문한 뒤, 남편에게 전화를 걸러 갔다. 그녀의 남편은 운송회사의 하선 스케줄을 관리하는 담당자였다. 나는 한쪽 귀를 막고 통화하는 은주를 바라보며 그가 관리하는 거대한 배를 상상했다. 강철로 만들어진 선체, 수백 톤의 밀가루를 실은 화물칸, 뜨거운 엔진실의 열기……
전화를 끊고 자리로 돌아온 은주는 마른 입술에 립글로스를 발랐다. 나는 그녀의 무릎 위에 손을 올렸다. 선창에 닿는 거대한 배의 이미지가 계속해서 머릿속을 부유했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가까워오는 배. 은주는 나를 보고 싱긋 웃었다.
“한센병이 뭔지 알아?”
나는 은주에게 물었다.
“네가 만약 그 병에 걸렸다고 생각해봐. 어느 날 아침 눈을 떴는데, 한센병에 걸린 거야. 손발에서 진물이 나고, 털이 빠지기 시작해. 근육이 오그라들고, 뼈가 뒤틀리고, 피부가 썩어 들어가면서 조금씩 떨어져 나가는 거야. 정말 끔찍하지. 어때? 그러니까, 만약 네 손가락이 잘려져 나가는 걸 본다면, 기분이 어떻겠어?”
“왜 그런 얘길 하는 거야?”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술을 따랐다.
“그냥. 시한부 게이보다 끔찍한 인생이 뭘까 생각해봤어.”
최근 은주와 나는 한 달에 두세 번꼴로 만나고 있었다. 만나서는 밤새 술을 퍼마시고, 두서없는 말을 내뱉다가, 고함을 지르며 싸우고, 섹스를 하고, 화해했다. 서로 상대의 근황에 대해서는 일절 묻지 않았다. 오직 과거와, 터무니없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우리는 저녁 내내 위스키를 마셨다. 은주는 음식에 손도 대지 않았다. 요새 그녀는 눈에 띄게 살이 붙어서, 검정색 원피스만 입고 다녔다.
자정이 지나 술집에서 나왔을 때, 우리는 제대로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취해 있었다. 택시를 타자마자, 은주는 뒷좌석에 널브러져버렸다. 나는 기사에게 역 근처로 가자고 말했다.
“어디로 가는 거야?”
잠든 줄 알았던 은주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도 모르겠어.”
늙은 기사가 백미러로 나를 흘금 바라보았다. 택시가 속도를 높이자, 몸의 무게가 붕 뜨는 기분이었다. 어디서부터 모든 게 엉켜버린 걸까. 최근 나는 설치 작업에서 손을 떼고 있었다. 온종일 작업실 벽에 작은 고무공을 튀기다, 잠이 들면 사방이 막힌 방에 갇히는 꿈을 꿨다. 희박한 공기 속에서 어쩔 줄 모르고 숨을 헐떡이다가 깨어나는 꿈이었다.
택시는 텅 빈 도로를 빠르게 달려갔다. 창밖으로 반짝거리는 한강 다리가 보였다. 시시각각 변하는 불빛에 따라 다리가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듯했다. 나는 손을 내려 은주의 얼굴을 더듬었다. 손바닥이 축축했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새벽녘 작업실에 돌아온 나는 서둘러 트럭을 몰고 나왔다. 약국에 거의 다다랐을 때, 휴대폰을 작업실에 두고 온 것을 깨달았다. 길 건너편 하얗게 불을 밝힌 아버지의 약국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미 별거 중이었다. 아버지는 집을 나와 약국에 딸린 작은 방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내쫓지도 않았지만, 다시 들어오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할아버지 댁에 가져갈 약을 가방에 챙기고 있었다. 작은 침대와 탁자 하나뿐인 방 한구석에 컵라면 용기가 쌓인 게 보였다.
“네 어머니는 잘 지내시니?”
아버지는 무심한 듯 제일 먼저 어머니 소식을 물었다.
“잘 지내세요.”
나는 아버지를 도와 약국 문을 닫았다. 아버지는 트럭 화물칸을 흘긋 바라보고, 보조석에 올랐다. 화물칸에는 녹슨 구리 파이프가 잔뜩 쌓여 있었다. 몇 개월 전 작품에 쓸 재료로 사들였다가 지금껏 방치해둔 것이었다.
아버지는 녹슨 파이프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보조석에 올랐다.
아버지는 설치 작업을 이해할 수 없는 외국어처럼 여겼다. 질문도 없었고, 불만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옆에 앉은 아버지에게서 오래된 약 냄새가 났다.
주말인데도 고속도로는 한산했다. 아버지와 나는 말없이 라디오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종종 옆 차선의 차들이 바람 소리를 내며 우리를 앞서갔다. 아버지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불쑥 말을 꺼냈다.
“네 유학 자금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대주신 거다.”
아버지는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이번에 뵈면, 감사하다고 말씀드려라.”
“……네.”
멀리 완만한 구릉이 병풍처럼 둘러싼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익산의 한센인 정착촌에 도착한 것은 이른 오후 무렵이었다. 한적하고 조용한 마을이었다. 아버지의 손짓을 따라 마을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자, 푸른색 양철 지붕 집이 나타났다. 집 안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밖을 좀 살펴보고 올 테니까, 너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라.”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찾으러 간 사이,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담한 건물에 비해 뜰이 무척 넓은 집이었다. 휑한 뜰 한구석에 플라타너스 나무 한 그루와 작은 평상이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퍼즐처럼 흩어진 하늘이 보였다.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아버지와 작은 체구의 노인이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노인의 그을린 얼굴에서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네가 성재구나!”
그는 목발을 짚고 성큼성큼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다리가 불편하다는 것을 그제야 알아챘다. 노인의 한쪽 바짓가랑이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다. 그는 나를 한참 동안 찬찬히 뜯어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어서 들어가자.”
노인은 처마 기둥을 두 손으로 잡고 한쪽 다리에 무게를 실으면서 기우뚱, 마루로 올라섰다. 집 안은 서늘하고 어두웠다. 오래된 집에서만 느낄 수 있는 공기였다. 나는 거실의 테이블 위에서 어린 내 사진이 담긴 액자를 발견했다. 어린이 미술 대회에서 상을 받은 날의 사진이었다. 일곱 살이었던 나는 트로피를 들고, 꽃다발에 파묻혀 눈이 보이지 않을 만큼 환하게 웃고 있었다.
“네 할머니가 그 사진을 무척 좋아했다.”
노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매일같이 그 사진을 들여다봐서, 나중엔 자기가 그곳에서 직접 널 봤던 것처럼 느껴진다고 했어.”
낯선 노파가 매일 내 얼굴을 봤다고 하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할머니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그에 대한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다. 떠올릴 수 있는 건 고작 뚱뚱하고 늙은 여자의 이미지뿐이었다.
“아버지, 눈은 좀 어떠세요?”
아버지는 노인의 눈 속을 들여다보고, 가방에서 한 꾸러미의 약을 꺼냈다. 노인은 얼마 전에 백내장 수술을 했다고 했다. 아버지는 노인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저녁에는 배달 음식을 시키려고 한다.”
노인은 나를 향해 말했다.
“그전에 출출하니까 부꾸미를 좀 만들어 먹자.”
노인은 아버지와 같이 전기 팬, 찹쌀 반죽, 팥, 설탕이 담긴 그릇을 가져왔다. 부꾸미는 생전에 할머니가 좋아하던 음식이라고 했다. 찹쌀 반죽을 넓적하게 지진 뒤 그 안에 팥소를 넣어 먹는, 일종의 구운 떡이었다.
“한국에 온 지 얼마나 됐지?”
팬을 달구면서, 노인이 내게 물었다.
“일 년쯤 됐어요.”
“조각을 한다고 했던가?”
“설치미술이요.”
“그게 뭐지?”
노인은 찹쌀 반죽을 구우면서, 잠자코 내 설명을 기다렸다.
“설치는…… 작품을 공간에 배열시키는 작업이에요. 작품이 우리가 사는 공간에 나타나서, 실질적인 연관을 맺는 거죠.”
“어디서?”
“글쎄요. 미술관이라든지, 공원이라든지……”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고소한 냄새가 났다. 노인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반달 모양의 부꾸미를 접시에 담아 내게 내밀었다. 막 구워낸 떡은 따뜻하고 달콤했다. 그는 내가 떡을 먹는 모습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이것저것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건강은 어떤지, 공부를 계속할 계획인지, 여자 친구가 있는지, 어떤 운동을 좋아하는지, 돈벌이는 괜찮은지. 마지막 물음에 나는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렸다.
“저 애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어요.”
멀리 창가에 서 있던 아버지가 말했다.
“잘됐구나.”
나는 손을 씻고 오겠다고 도망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에 가는 길, 문이 반쯤 열린 방이 눈에 들어왔다. 거실과 달리 빛이 많이 들어오는 방이었다. 화장대 위에 내려앉은 햇살, 그 속에 부유하는 먼지가 보였다. 나는 조용히 그 안으로 들어가보았다. 거울이 없는 앉은뱅이 화장대 위에 로션과 스킨, 콤팩트 따위가 정리되어 있었다. 나는 립스틱을 집어 들고, 조심스럽게 그 뚜껑을 열어보았다. 바짝 마른 담홍색 염료 위에 작은 물방울이 맺힌 게 보였다.
“뭐 하니?”
아버지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나는 립스틱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문이 열려 있어서요.”
방에 들어온 아버지는 말없이 화장대를 내려다보았다. 밖에서 우리를 부르는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전엔 이 쓴 걸 도무지 무슨 맛으로 먹는지 알 수가 없었지. 너희 엄마야 원래부터 커피를 좋아했지만 말이다.”
노인은 곱게 간 커피 원두에 물을 내리고 있었다. 부엌 안이 커피 향기로 그윽했다.
“그 사람, 달리 취향이라곤 없는데 커피만은 특별히 좋아했지. 네가 가져다주는 커피 원두를 얼마나 귀하게 다루는지, 샘이 날 정도였어. 매일 원두 눈곱만큼씩만 갈아서 자기 혼자만 마셨으니까.”
노인은 읍내 복지회관에서 주차권을 끊어주는 일을 하는데, 아침마다 사무실에서 주는 원두커피를 마시다 보니 뒤늦게 그 맛을 알게 됐다고 했다. 아버지는 팔짱을 끼고 구부정하게 앉아서 노인이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아버지는 늘 자신의 큰 키가 불편한 듯 몸의 한 부분을 웅크리고 있었다. 온종일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는 직업이었지만, 말수도 적고, 친화력도 없었다. 어머니는 모든 문제를 아버지가 부모 없이 홀로 살아온 탓으로 돌렸다. 가족들을 멀리하고, 청결에만 집착하고, 쉽게 분노하고, 혼자 여행을 다니는 것도 무조건 덮어주려고만 했다.
“네 안사람은 잘 지내니?”
노인이 물었다. 순간 아버지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먼저 눈길을 돌린 사람은 아버지였다.
“짧은 전화 통화만 해봤지만, 품성이 따뜻한 사람이라는 걸 알겠더구나. 나는 목소리로 그 사람 됨됨이를 알 수 있다고 믿는다. 사람 속에 있는 건 뭐든 전부 겉으로 드러나는 법이야.”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아이들을 많이 가지고 싶었다고 말했다. 아들, 딸을 줄줄이 낳아서 긴 빨랫줄에 온 식구들 옷을 펄럭펄럭 말리는 게 어머니의 꿈이었다. 하지만 나를 낳은 후, 아무리 애를 써도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어머니는 내가 유학을 떠난 후 아이를 입양하자고 아버지를 설득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한 치의 재고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머니는 근처 입양원에서 봉사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버려진 아이들이 1년간 머무르며 입양 가정을 기다리는 기관이었다. 어머니는 그 애들을 목욕 시키고, 우유를 먹이고, 잠이 들 때까지 안아주었다. 아이들의 끈적끈적한 손가락, 작은 고무 같은 발, 우유 냄새가 어머니의 가슴을 헤집어댔다. 어머니는 아침마다 입양원을 향해 달려갔다. 아이들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안고 있으려고 끼니를 거르기도 일쑤였다. 일주일에 두세 명씩, 길을 잃은 아이들이 끊임없이 차에 실려 왔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식사량이 줄어든 것과, 이상하게 말이 없어진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할머니의 장례식이 끝난 후, 아버지는 자신이 오래전 정관 수술을 받은 사실을 고백했다.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며칠간 집에서 빨래만 했다. 입양원에도 나가지 않고, 집으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지도 않았다. 커튼을 뜯어낸 후, 침대 시트를 벗겨내고, 장롱 속의 케케묵은 옷가지와 김치 국물이 묻은 식탁보, 앞치마까지 벗어내 물속에 담그고 비누칠을 했다. 마침내 집 안에 더 이상 남은 천 조각이 없었을 때, 어머니는 땅이 홱홱 도는 어지럼증에 그만 주저앉아버렸다. 코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의사는 어머니의 달팽이관에 문제가 생겼다고 했다. 평형감각이 상실되어, 작은 자극에도 발작을 일으키는 질환이었다. 아버지가 집을 나온 후 두 사람은 연락을 끊고 지냈다.
추도식 내내 아버지는 상념에 젖어 있었다. 노인은 아버지와 나 사이에 앉아 돋보기안경을 끼고 성경책을 읽었다. 나는 입술을 들썩거리는 노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기도하는 노인의 얼굴은 고통스럽게 일그러져 있었다. 축 처진 눈두덩에, 입술은 침에 번들거렸으며, 두 뺨은 제멋대로 실룩거렸다. 나는 한참 동안 그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그에게 눈썹이 거의 없는 것을 알아챘다. 한센병의 상흔이었다. 그래서 그토록 자주 웃어도, 어딘지 서늘한 인상이었던 것이다.
추도식이 끝났을 때 어느새 창밖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마침 노인이 주문했던 샤브샤브 재료가 배달되어 왔다. 우리는 저녁 먹을 준비를 하기 위해 식탁에 빙 둘러앉았다. 노인은 몸을 기울여 내게 국물을 퍼주려다가, 그만 자신의 사발을 넘어뜨리고 말았다. 뜨거운 국물이 담겨져 있던 사발이 노인의 다리로 떨어졌다. 아버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노인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괜찮다고 손을 내저었다. 그릇이 떨어진 방향이 빈 바짓가랑이 쪽이었던 것이다.
노인이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들어간 사이, 집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아버지는 찬장에서 매실주를 꺼내왔다. 아버지는 술병을 들고, 하나뿐인 잔을 채웠다.
“일이 이렇게 되기 전에…… 네 엄마한테 사실을 밝히려고 했다.”
아버지는 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매일 약국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오늘은 말하겠다고 결심하곤 했어.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서, 네 엄마한테 웃옷을 건네주면서, 밥을 먹으면서, 텔레비전 뉴스를 보면서, 이불을 덮고 누워서, 말해야지, 말해야지…… 그러다 잠든 네 엄마를 내려다보면 또 하루를 미루게 되는 거야. 내게는 사실을 밝힐 용기가 없었다.”
“지금 어머니를 탓하시는 거예요?”
아버지는 힘없이 웃었다.
“거짓말에 대한 얘기다.”
노인은 한참이 지나서야 밖으로 나왔다.
“잠자리를 펴놓았으니까, 언제든지 피곤하면 들어가서 쉬어라.”
나는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늦어도 오늘 밤 안에는 서울로 올라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조용히 술만 마시고 있었다.
“저는 오늘 밤에 서울로 올라가봐야 해요.”
“그래……?”
노인은 잠시 눈을 껌뻑거렸다.
“……알았다.”
노인은 실망한 기색을 애써 감추고, 밝은 어조로 음식을 권했다.
“자, 어서 먹자.”
나는 괜스레 허겁지겁 음식을 먹었다. 식지 않은 뜨거운 국물에 입천장을 데일 정도였다. 아버지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술을 마셨다. 노인은 혼자 대화를 이어나가다시피 했다. 주로 동네 사람들 이야기였다. 한마을에 오랫동안 모여 살다 보니, 그들 이웃끼리는 서로의 사정을 모르는 게 없다고 했다.
“요즘은 모이면 특별법 이야기지. 누군 받고, 누군 못 받고, 온통 그 이야기뿐이야.”
“아직도 그 보상금 얘기예요?”
아버지가 불콰해진 얼굴로 노인의 말을 가로막았다. 노인은 아버지를 잠시 바라보았다.
“보상금 얘기가 아니다.”
노인은 다시 한 번 되풀이해서 말했다.
“돈 얘기가 아니야.”
한센인 특별법이란 과거 한센인들이 당했던 부당한 처우에 대한 보상 제도였다. 그런데 그 조건이라는 게 너무나 까다로워서 마을 안에 아직 제대로 된 보상금을 손에 쥔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했다. 노인의 말에 따르면, 기대를 품었던 마을 사람들이 도리어 더 상처를 입었다는 것이었다.
“이 마을에는 언제부터 사셨어요?”
“40년 가까이 되었지.”
노인은 식탁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 아버지 열 살 때 격리가 풀리고 섬에서 나왔는데, 세 식구가 갈 곳이 없었다. 사람들은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귀신처럼 알아냈어. 돌을 던지고, 뜨거운 물을 뿌리고, 욕설을 퍼부어댔지. 정착촌 말고는 우리를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살기 위해서는 다른 수가 없었어.”
노인은 잠시 말을 멈추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세 식구가 밥을 지어 먹고, 네 아버지를 고아원으로 보냈다. 네 아버지까지 나환자 꼬리표를 달고 살게 할 수는 없었어. 또다시 그때로 돌아간대도 마찬가지일 거다. 네 아버지가 너에게도, 네가 네 아이에게도, 마찬가지일 거야.”
“저는 잠깐 눈을 좀 붙여야겠습니다. 이 애한테 떠날 때 절 깨우라고 하세요.”
아버지는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 노인에게 말을 전하고, 휘청휘청 방으로 들어갔다. 노인과 나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수정과를 좀 가져다줄까?”
노인이 물었다.
“아니오. 그보다……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말해봐라.”
“무슨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니까, 질문을 듣고 화를 내지 마세요. 그저, 정말로 궁금해서 그래요. 대답하기 싫으시면 대답하지 않으셔도 되고요.”
노인은 고단한 미소를 지었다.
“글쎄, 말해보라니까.”
“할머니의 얼굴은 얼마나 일그러졌나요?”
노인은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잠시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지갑을 꺼냈다. 그 안에 작은 증명사진이 들어 있었다. 나는 어머니와 놀랍도록 닮은 노파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사진 속 노파는 동그란 얼굴에, 은발의 단발머리가 곱슬거렸고, 웃음 속에는 장난기가 있었다.
“네 할머니는 겉으로 보기에 아무 이상이 없었다. 보통 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어. 그런데도…… 병명을 듣기만 하면 모두가 벌레처럼 바라보았지. 네 할머니는 평생 외출하는 걸 제일 두려워했다.
나는 사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노인은 마주 잡은 두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채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더 물어보고 싶은 건 없니?”
저녁 내내 나를 붙잡고 있던 질문이 튀어나왔다.
“기도를 할 때 …… 무슨 생각을 하세요?”
노인은 말뜻을 못 알아들은 듯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이마를 찡그리며 웃었다. “정말 그런 게 궁금하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입을 열었다.
“네 할머니가 네 아버지를 낳았을 때 내 나이가 열아홉 살이었다. 낮에는 빵 공장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해양 학교에 들어갈 공부를 하고 있었어. 언젠가 항해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지. 네 할머니는 공부에 방해가 될까 봐 밤마다 네 아빠를 업고 부뚜막에서 쪽잠을 잤다. 입학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때였어. 갑자기 손발이 저릿저릿하더니 며칠 사이에 감각이 둔해지더구나. 두꺼운 껍질이 몸을 감싸는 느낌이었다. 피가 나올 정도로 손발을 긁어대면서도, 나는 의원을 찾아가지 않았어. 불길한 예감 같은 게 있었던 거지.”
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한 가지 알려주마. 불행의 꼬리를 봤을 때 재빨리 잡아채지 않으면, 거꾸로 꼬리를 붙잡히게 된단다. 얼마 후, 네 할머니의 목덜미를 보니까, 꽃이 핀 것처럼 낭종이 퍼져 있었다. 한밤중에 옆 마을에 가서 한센병 확진을 받았지. 늙은 의원은 아무도 모르게 작은 봉투를 품에 넣어주었다. 비상(砒霜)이었어. 그날, 우리는 한밤중에 집을 빠져나왔다. 짐이라곤 보퉁이 하나, 네 아버지를 싸맨 포대기, 새털처럼 가벼운 비상 가루뿐이었어. 소록도로 끌려가느니, 도망을 치다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지. 가만히 있어도 몸이 떨리는 한겨울이었는데, 설상가상으로 눈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네 할머니는 당시 몸이 너무 약해져 있었고, 나는 나대로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산을 넘기가 쉽지 않았다. 산길이 너무 가팔라서 한 발 나아갔다 싶으면 뒤로 두 발 미끄러지는 격이었어. 도무지 가망이 없다는 생각이 드니까, 더 자주 넘어지게 되더구나. 눈이 점차, 더 많이 쏟아져 내렸다. 내가 넘어지면, 나를 붙잡고 있던 네 할머니, 네 할머니 품속에 있는 네 아버지가 우르르 무너졌어. 그날 칼날 같은 눈발 속을 걸어가면서, 생에 처음으로 기도 비슷한 걸 했다. 뭐라고 빌었냐고? 글쎄, 그건 말이라기보다 신음이었어. 진짜 고통스러운 건, 삶이 내게서 완전히 등을 돌렸는데도, 나는 삶을 조롱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땀에 흠뻑 젖어서 오르막을 기어가고 있는데, 어느 순간 주위가 부옇게 변했어. 해가 뜨고 있었어. 산 중턱이었는데도, 멀리 바다가 보였다. 푸른 안개 같은 바다였어. 순간 기운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온 세상이 눈밭에 반사되어서 반짝반짝 빛이 났어. 네 할머니와 네 아버지는 훌쩍거리며 콧물을 들이마셨지. 온몸을 덜덜 떨면서 나를 바라보는 그 두 사람을 보니까 …… 모든 게 내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내가 실패했던 거야.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어. 병에 걸린 게 내 선택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깨달음은 논리적인 게 아니야. 그냥 아픈 거지. 그때 나를 괴롭히던 의문들이 사라져버렸다.”
“병이 나았나요?”
“아니.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섬으로 끌려갔지.”
“그런데, 뭐가 사라졌다는 거예요?”
노인은 설핏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기도에 대해 묻지 않았니?”
벽에서 시계가 열 시를 알렸다. 샤브샤브 국물은 전부 다 졸아붙어 냄비가 바짝 말라 있었다. 나는 이야기가 계속되기를 기대했지만, 노인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이제 가야지.”
그는 나를 일깨우듯 말했다.
“자고 갈게 아니라면, 더 늦기 전에 일어나는 게 좋겠다.”
노인은 목발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말이 너무 많았구나.”
노인이 아버지를 깨우러 간 사이, 나는 바깥뜰로 나갔다. 주머니에 손을 넣자, 립스틱이 잡혔다. 내 손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 울던 은주가 떠올랐다. 문득 손가락 사이에서 끈적끈적한 습기가 느껴졌다. 어둠에 잠긴 넓은 뜰, 그곳은 검은 바다처럼 보였다.
아버지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며칠째 잠을 못 잔 사람처럼, 목까지 이불을 끌어올리고, 푸우푸우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노인은 그 옆에 앉아 잠든 아버지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방바닥에 앉은 노인의 바지 한쪽이 푹 꺼져 있었다. 마치 그의 다리부터 시작해서 막 땅으로 녹아드는 것처럼 보였다. 내 기척을 느꼈는지, 노인이 고개를 돌렸다. 노인과 나는 잠든 아버지를 사이에 두고 눈빛을 교환했다. 우리는 아버지를 깨울 수 없었다.
“부탁이 있는데, 저기 바깥의 나무 근처까지만 나를 데려다 줄래?”
노인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노인의 손을 잡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노인의 손은 생각보다 컸다. 내가 그를 붙잡은 게 아니라, 그가 나를 감싸 쥔 느낌이었다.
나는 노인이 살아온 50년을 생각해보았다. 그것은 나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그는 그 시간 동안 다리를 잘라내고, 아들과 헤어지고, 또 아내를 잃었다. 매일 다리가 있던 자리가 텅 빈 것을 보면, 어떤 기분이 들까.
밖으로 나온 노인과 나는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 평상에 앉았다. 불빛이 새어 나오는 노인의 집은 섬에 정박한 낡은 배처럼 보였다. 노인은 배의 수명을 가늠하는 선장처럼 그 집을 바라보았다. 밤의 정적 속에 풀벌레 소리가 맑게 울렸다.
“아버지는 매달 혼자서 낚시를 하러 다녔어요.”
나는 노인에게 말했다.
“다른 아이들은 아버지와 같이 낚시를 가서 카드 게임을 배우고, 생선 대가리를 넣어 라면을 끓여 먹는다고 했죠. 하지만 아버지는 나를 한 번도 낚시에 데려가주지 않았어요. 아무리 졸라도 소용없었죠. 한번은 아버지 차에 몰래 숨어들었는데, 휴게소에 들렀을 때 들통이 났어요. 아버지는 처음으로 나한테 손을 들어 올렸어요. 한 번만 더 이런 짓을 저지르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소리를 질렀죠. 아버지는 나를 땅에 내팽개치고, 차를 출발시켰어요.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데, 어딘가가 망가진 것처럼 눈물이 멈추지 않았어요. 죽을 때까지 이 일을 잊지 않을 거라고, 절대로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결심했죠.”
누구에게도 그 이야기를 했던 적은 없었다. 어머니에게도, 은주에게도. 나를 후려칠 때 아버지의 얼굴은 물웅덩이에 빠진 아이처럼 절망적인 것이었다. 나는 그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노인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네가 태어났다는 전보를 받았을 때, 이 나무를 심었다.”
노인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매일 이 나무를 보면서 네 아버지와 네 생각을 한단다. 잘 봐라. 커다란 녹색 나뭇잎이 정말 보기 좋지 않으냐?”
나는 노인이 가리키는 대로 하늘 높이 솟은 그 나무를 바라보았다. 바닷속에서 흔들리는 수풀처럼 나뭇잎이 이리저리 바람에 흔들렸다. 음악처럼 리드미컬한 움직임이었다. 내 옆에 앉아 있는 그 노인이 한편으로는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느껴졌고, 한편으로는 평생 함께 살아온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는 내게 소록도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곳에서 겪었던 강제 노역과 처벌, 다리를 잘라냈을 때의 고통, 관리인들의 폭행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영원히 그곳에 갇혀 지낼 거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의 절망에 대해서. 어떤 대목에서는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고, 말을 하다 말고 우뚝 멈춰 서기도 했다.
“그 섬은 죽음과 삶의 경계에 있었다. 그래서 누구도 살려고 기를 쓰지도, 죽으려고 악을 쓰지도 않았어. 누구도 그런 권한을 가질 수 없었지.”
섬에서는 감염의 이유를 들어, 부모와 자식을 서로 접촉하지 못하게 했다. 한 달에 한 번 면회가 있었지만, 멀찌감치서 얼굴만 확인할 수 있었다. 개울가를 사이에 두고 한쪽에는 부모들, 한쪽에는 자식들이 모여들었다. 부모들은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아이들을 보고 싶어서 고개를 쭉 빼고, 깨금발을 했다. 날씨가 좋을 때는 아이의 모습을 더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매서운 눈으로 감시하는 관리인들 속에서, 그들은 비명을 지르듯 말하고, 웃고, 손짓하고, 실없는 농담까지 했다. 쇠꼬챙이처럼 마른 아버지는 수십 명의 아이들 사이에 파묻혀 눈에 잘 띄지 않았다. 하지만 할머니는 언제나 단번에 아버지를 찾아냈다.
밥은 잘 먹니? 아픈 데는 없고? 없어요. 그런데 엄마, 밤에 잠이 잘 안 와요. 얘, 그럴 때는 노래를 불러라. 마음속으로 네가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 하지만 노래를 부르면, 마음이 아픈걸요. 왜? 그냥, 마음이 아파요. 얘야. 네, 아버지. 내가 했던 말 기억나지? 우리는 이 섬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죽었고, 지금 이 삶은 서로가 서로를 위해 사는 거라고. 네. 기운을 잃으면 안 된다. 네, 아버지.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아니에요.
면회 시간이 끝나면, 먼저 관리인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부모들은 아이들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는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다. 키가 5미터도 넘는 플라타너스 나무가 길가에 깊고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냈다. 노인은 할머니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풀처럼 자란 애를 보고 돌아올 때면 마음이 허전해서, 뭐라도 붙잡을 게 필요했어. 나는 네 할머니한테 어떻게 하면 그 개울을 넘어갈 수 있을까 얘기를 하곤 했지. 한쪽 다리로 쿵쿵 뛰면서 경사진 땅을 내려오고, 개울물을 넘는 연습을 했어. 다리를 잃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라 넘어지기가 일쑤였지. 두 팔을 휘휘 젓다가 벌렁 자빠지는 내 꼴을 보고, 네 할머니는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와 같이 길을 가던 사람들이 퉁퉁 부은 빨간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았지.”
노인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나는 한 번도 그 개울을 넘지 못했다. 한평생 이 쪽에서 저 쪽만 바라보는 게 내 인생이었어. 늘 어딘가로 떠나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고, 여기서는 임시로만 머무는 것 같았지. 꿈은 애타게 희미하고 푸르기만 했어. 어쩌면 삶은 긴 잉태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 후에는 이곳에서 꿈꾸었던 것들로만 채워진 세계와 마주하게 될지도 몰라. 그래, 잊어버리지 않도록, 저쪽에 있는 것들을 계속해서 기억하고, 떠올려야 해.”
노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바짝 마른 목소리로 이제 그만 쉬어야겠다고 했다. 내가 부축해주려고 나서자 손을 휘젓고는 절룩절룩, 집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그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그가 집으로 들어간 뒤에, 나는 홀로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 앉아 있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르는 가운데도 머릿속이 맑았다. 잠시 후 나는 트럭을 세워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제멋대로 쌓인 구리 파이프의 표면이 붉게 빛났다. 나는 녹슨 구리의 촉감을 느껴보았다. 오래전 아이였을 때처럼, 그것들을 붙잡고, 무엇을 만들어볼까 생각했다. 나는 집을 만들 수도 있고, 강을 만들 수도 있고, 커다란 새를 만들 수도 있었다. 당장은 아무 계획도 떠오르지 않았지만, 예전처럼 불안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구리 파이프를 바벨처럼 힘주어 들어올렸다. 유학 시절 단 한 번 과제로 교량을 만든 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얇은 구리 파이프를 이어서, 단단한 판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판을 지탱하는 다릿발과 보를 세웠다. 각 지점이 서로 기대어 무너지지 않을 수 있도록 파이프와 파이프를 연결시켰다. 어둠 속이라,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확신에 차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커다란 손이 내 손을 붙들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순서대로 파이프를 구부리고, 접붙였다. 그렇게 얼마쯤 반복했을까. 어느 순간, 발밑에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다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소리, 웃음소리, 기대 어린 속닥거림…… 긴 치맛자락과 포근한 외투의 끝자락이 손을 스치고 지나갔다. 낯익은 얼굴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모두 한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윽고 햇살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제자리에 맞추어진 퍼즐처럼, 눈앞에 넓은 뜰이 드러났다. 그곳에 무지개처럼 다리가 드리워져 있었다. 구리 파이프에 반사된 햇살이 갖은 색깔로 빛났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아버지가 집에서 나왔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한동안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눈이 부신 듯, 잠에서 덜 깬 듯, 어쩌면 아직도 꿈을 꾸는 듯했다.
작가 : 정한아
1982년 서울 출생. 2005년 대산대학문학상으로 등단. 소설집 『나를 위해 웃다』, 장편소설 『달의 바다』가 있음.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매번 고마워요.
감사합니다. 눈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