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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광수경제연구소포럼 원문보기 글쓴이: 貧道 덕승
지난 편에서 "경제발전을 지속시키는 요인은 폭넓은 권력분배가 동반된 포용적 정치제도였습니다."
라고 마무리를 지었는데요
이번 편에서 바로 정치이야기를 다루려다가 그럼 “폭 넓은 권력분배가 동반된 포용적 정치제도에 의해 혁신이 발생하여 경제가 발전한 사례”를 찾아서 먼저 말씀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이번 편은 여기에 관한 사례를 들어보도록 하고 다음 편에서 정치에 관해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구분을 하자면
검은 일반 굴림체는 제가 작성한 글입니다.
밑줄은 다큐에서 등장한 인물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옮겨적은 것입니다.
약간 푸른색 글씨는 다큐에서 내레이터가 말하는 글입니다.
해서 오래 전에 2007년 정도 인가요 중국 CCTV에서 제작한
대국굴기 1편 작은나라 네덜란드 세계를 움직이다 편(링크)을 한 거의 10년 만에 다시 보았습니다.
여기서 발췌를 먼저 합니다.
스페인 포르투갈과 무역해서 유럽내륙에 다시 되팔아서 이익을 창출하는 네덜란드
유럽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초기 네덜란드의 주인은 귀족이었다.
도시는 항상 귀족이 소유한 영토 위에 만들어 졌기 때문이다.
귀족들은 소규모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명목상으로는 도시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무력을 동원해서 세금을 징수하기 위한 것이었다.
<요리스 포르후페르 네덜란드 국무의원>
상업과 도시의 발전은 자유경제에 대한 갈망을 부추겼습니다.
부유해진 시민들의 마지막 선택은 놀라웠다. 그들은 귀족들의 손에서 쇼핑을 하듯 도시의
자치권을 사들였다.
그 후 시민들은 자체적으로 법을 제정해 귀족들의 세금징수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들의 시민 자치제는 네덜란드 강력한 성장 에너지를 불어 넣었고 나중엔 거의 절반에 가까운
네덜란드 인구가 도시로 몰려왔다.
올해 6월에 방영되었던 EBS 다큐프라임 앙트레프레너(Entrepreneur) 2편(링크)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레오 루카센 네덜란드 레이덴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17세기 초기 암스테르담의 인구 10명 중 4명이 외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이었죠.
당시 암스테르담을 다스렸던 책임자들은 암스테르담을 개방할 수 있는 한 개방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장 경쟁력 있는 상인들과 상인네트워크를 도시로 끌어들이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얀 포프는 독일 이민자로 청어 일꾼으로 시작해 암스테르담 최고의 거상이 된 신화적인 인물입니다.
그의 아들은 후에 암스테르담 시장이 되었습니다.
네덜란드는 막일꾼이 거상이 되고 그의 아들이 시장이 될 수 있는 그런 나라였습니다.
여기서 상업발전이 먼저 되었기에 정치적인 자유를 귀족으로부터 쟁취할 수 있었느냐?
아님 먼저 정치적인 자유를 먼저 쟁취했기에 상업발전을 이루었냐? 에서는 아무래도 전자로 보여집니다.
하지만 귀족으로부터 정치적 자유, 즉 자치권이 있었기에 상업발전에 큰 힘이 되고 가속화가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 이제 여기 정치적 자치권을 얻고 상업이 발전하던 네덜란드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후 위기가 닥치는데
그런데 오히려 여기서 혁신이 발생합니다.
국토, 자원, 인구로만 본다면 네덜란드는 한 국가로서 생존할 조건을 갖추지 못한 듯 했다.
건국초기 조직력이 약한 이 작은 국가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할 수 밖에 없었다.
독립이전 스페인과의 무역은 네덜란드의 가장 중요한 자금 원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독립 후 스페인국왕은 자국의 모든 항구를 봉쇄했고 네덜란드 선박의 스페인 정박을
금지했다. 경제의 생명선이 끊긴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신흥 공화국의 돌파구는 무엇이었을까?
네덜란드인들은 상거래의 예리한 직감력을 통해서 자신들만의 장점을 재빨리 찾아냈다.
네덜란드인은 스스로 영리한 중간 상인에서 이제 원양항해를 하는 투사로 역활을 바꾸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자신들만의 힘만으로 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 항로를 개척한다.
그렇다면 먼바다를 항해할 막대한 자금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여기 중간상인에서 직접 원양항해를 해서 타 대륙과 직접 거래하겠다는 아이디어는 그 당시 상황으로 볼 때
엄청난 혁신입니다. 그런데 이 혁신에서 또 다른 혁신이 꼬리를 물고 연쇄적으로 일어납니다.
<빌렘 판트모렌 레이덴 대학 사학과 교수>
그렇습니다. 그것은 최초의 주식회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금 융통을 위해 그들은 주식을 발행했습니다. 투자자는 자신의 출자금액을 장부에 정확히 기재하고
회사는 출자에 대한 이윤배당을 약속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동인도 회사의 자금 모집 방식이었죠.
동인도 회사는 사회구성원을 통한 자금모집방식으로 분산되었던 국민들의 돈을 세력확장을 위한 자금으로 모으는데 성공한다. 심지어 암스테르담 시장의 하녀의 쌈짓돈도 동인도 회사에 투자되었다 그리고 정부도 이 회사에 투자했다.
<로트베크 바날 암스테르담 역사박물관 관장>
초반 10년 동안 동인도회사는 수익을 전혀 남기지 못했습니다.
10년 동안 주주에게 수익금을 주지 못하는 이러한 회사가 대체 어떻게 투자자들에게 인정
을 받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네덜란드인들이 개발한 새로운 자금유통 체제 때문이었다
1609년 세계 최초 암스테르담 주식거래소 탄생 주주는 자신이 원하면 언제든지 자신의 주식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서 현금으로 바꿀 수 있었다. 이 말은 동인도 회사 자본금의 감소 없이 주주는 주식을 전매하면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대량의 화폐가 전래 없던 속도로 유통되기 시작하자
과부하 걸린 네덜란드 경제 혈관이 막히기 시작함 그래서 원활한 자금흐름을 돕기 위해서
현대 경제의 핵심인 은행설립되었다.
사학자들에 의하면 그들은 현대경제의 창시자로 은행, 증권거래소, 주식회사를 상호연계
가능한 하나의 금융체제로 통일시켰고 그것이 폭발적인 자금증가를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어떻습니까 일반 시민계층이 정치적인 자유를 누리며 스스로 열심히 노력하면 잘 살 수 있고 거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의 네덜란드인, 조국을 세계 최고의 경제대국으로 변모시킵니다.
EBS 다큐프라임 앙트레프레너 2편(링크)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가를 다비즈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17세기 네덜란드는 다른 유럽국가들 보다 기회가 훨씬 많았습니다.
부자가 되어 집을 짓고, 자녀를 좋은 학교에 보낼 수 있는 기회와 가능성이 훨씬 더 많았다는 거죠.
네덜란드 사람들은 부자가 되는 방법을 고민했고 동인도 회사라는 주식회사를 만들었습니다.
거래와 투자를 통해 이윤을 추구하는 상업자본주의의 역사가 네덜란드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당신들 나라 역사 속 1600년대를 상상해 보십쇼?
지구상 어떤 나라가 서민들에게, 하녀에게 자본가가 될 기회를 주었는지?
이런 의문이 듭니다. 당시 대항해 시대를 먼저 풀어 젖힌 것은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가는 아시아 항로를 개척한 포르투갈과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하고 그 항로를 개척한 스페인이 먼저였고 그리고 당시 영국과 프랑스도 조선기술도 있었는데 왜 나라도 작고 인구도 작은 네덜란드가 해상상업무역으로 발전하여 경제강국 1위가 되었을까요?
세계를 통치하는 상업무역 공화국 네덜란드는 17세기 무역을 통해 거대한 재력을 쌓았지만 그 재물은 왕과 귀족의 호화로운 궁궐을 꾸미는데 낭비되지 않았고 중산층 상인들의 안락한 주택을 짓는데 쓰였다.(대국굴기)
<헹크 덴 하이어 네덜란드 라이덴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네덜란드는 일반인, 민간인들이 거래할 수 있었고 그들이 나라를 운영했습니다.
반면 프랑스, 스페인 등 다른 유럽국가들은 왕과 상류층이 아주 중요했죠
그래서 민간인은 어떤 것에도 투자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권리와 이윤이 왕이나 상류층에게 다 돌아갔으니까요.
그렇지만 네덜란드에선 민간인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투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회적인 체제가 전제적이지 않고 일반 시민들이 정치적인 자유와 함께 경제적 이윤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도 역시 자유로웠기 때문입니다. 즉 활기차고 역동적인 사회체제였죠.
해서 초기에는 상업발전이 먼저 시작 되었기에 정치적인 자유를 귀족으로부터 쟁취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상업이 같이 발전한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볼 때 일반 시민 개개인이 왕이나 귀족들의 간섭 없이 자유로운 정치환경 속에서 이윤을 추구하다 보니, 전부 민이 주도한 아시아 항로 개척, 유한책임의 주식회사의 설립, 은행, 증권거래소를 만드는 혁신 들이 다른 나라보다 자연스럽게 먼저 일어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혁신은 왕이나 귀족 등의 기득권층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 한가지 더 사례를 들겠습니다. 네덜란드가 17세기의 최대강자였다면
18~19 두 세기 동안 세계를 호령한 나라는 영국이었습니다.
잠시 이해를 돕기 위해 영국역사를 간략히 말씀드리면
귀족들과 전제정권 존왕의 힘 겨루기가 결국 귀족의 승리로
1215년 존왕이 마그나카르타(대헌장)를 귀족들의 강압에 의해 승인합니다.
대헌장은 국민의 자유를 옹호하는 근대 헌법의 토대가 되었고
특히 제12조는 의회의 승인 없이 왕이 과세할 수 없다는 주장의 근거가 됩니다.
이후 청교도혁명(영국혁명)이 1640~1660년에 일어납니다. 이 혁명은 영국의 시민혁명으로
의회를 거치지 않고 상인에게 세금부과한 전제군주 찰스1세에 대항한 혁명입니다.
결국엔 의회군 크롬웰장군이 승리하고 찰스 1세는 1649년 단두대에서 처형당합니다.
이후 전제왕조가 몰락했으나 크롬웰이 군사독재를 합니다. 크롬웰 사망 후 다시 왕정복고가 이루어져 1685년 처형된 찰스 1세 아들, 제임스 2세 즉위합니다.
하지만 제임스 2세는 카톨릭을 옹호하고 그의 아버지처럼 전제정치를 합니다.
이에 의회는 1688년 제임스 2세를 폐위하고 딸인 메리와 그녀의 남편인 윌리엄 3세를 공동 왕으로 추대합니다. 제임스 2세가 망명하자 메리와 윌리엄 3세는 1689년 의회가 제정한 권리장전을 승인하고 왕위에 올랐는데 유혈사태 없이 정권 교체를 이룬 이 사건을 명예혁명이라 합니다.
이 명예혁명은 국왕이 의회에 의해 결정되는 전무후무한 사건으로 왕권은 신의 수여에서 백성의 수여로 바뀜.
1000년 이상 지속된 왕권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변화된 사건이다.
즉 입헌군주제 수립해 나갔다.
<첸청단 베이징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명예혁명은 영국을 전제 통치에서 탈피하게 해주었으며 이는 전 세계에서 최초의 일입니다.
또한 유혈사태가 없는 방식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때부터 영국은 의회제도의 조직안에서 평화적이고 점진적으로 제도 걔혁을 진행히켰죠.
명예혁명 후 영국에는 상대에게 여유있고 자유롭게 대하는 사회 환경이 조성됐습니다.
1588 스페인 해전의 승리부터 1688 명예혁명까지 1세기 동안 영국은 내부조정을 해나가며 대외 확장을 계속해 나갔다. 백년의 시간을 저축한 후 인구가 대량으로 증가하기 시작했고 상업과 수공업이 신속히 발전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대외무역은 국가의 중요한 민생이 되었다.
이 당시 세계 환경은 프랑스는 전제군주의 전성시기, 러시아 표트르 전제군주 막 수립, 독일 이탈리아 사분오열 분열되어 백성들이 강력한 왕의 출현 기대함, 일본은 봉건 막부의 속박에, 중국은 이제 청나라 44년 지남,
이러한 시기에 프랑스 사상가 볼테르는 당시의 영국에 대해 이렇게 평가합니다.
“영국을 강대하게 변화시킨 것은 이것이다. 엘리자베스 시대부터 느껴왔던 상업의 중요성, 그리고 국왕을 단두대에 보냈던 그 국회가 해외무역에 분배하는 그 일에 바빠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시치미를 뗀 것이다. 찰스 1세의 선혈이 아직 낭자한데 국회는 항해법을 통과시켰다”.
영국은 3차례의 전쟁을 통해서 네덜란드에 강제로 항해법을 받아들이도록 한다. 영국 및 영국의 식민지에서 화물 수입할 때 반드시 영국선적 또는 수출국(영국 식민지) 선적을 이용하게 한다(즉 영국이 다해먹겠다는 말입니다). 이때부터 네덜란드 선적은 점차 퇴출되고 영국이 대륙의 규칙과 해상의 규칙을 정할 차례가 됩니다.
여기서 잠깐, 위에 소개했던 네덜란드에서 이제 그 경제의 권력이 영국으로 넘어가는데요
제가 볼 때는 그것은 네덜란드가 잘못했다기 보다는 영국이 네덜란드보다 국토가 크니 당연히 인구가 많고
인구가 많으니 군대를 더 키울 수 있고 또 무엇보다 인구가 더 많으니 수요가 네덜란드보다 많다는 것이,
즉 이 국력의 차이가 18세기에는 영국이 주도권을 쥐게 된 것으로 판단됩니다.
<해리 디킨스 영국 왕실 역사학회 부회장>
1688년 명예혁명 이후로 영국은 민주국가는 아니지만 활짝 개방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개방적인 사상은 많은 이들에게 폭넓게 퍼져 나갔습니다.
누구나 노력하기만 하면 경제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죠.
이야말로 영국이 세계 최초로 이뤄낸 위대한 업적입니다.
사실 제가 보기엔 “누구나 노력하기만 하면 경제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다는 것은
네덜란드가 먼저 한 것 같은데요 여하튼 이 양반, 자국 영국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대국굴기 영국 하편 – 공업화의 서막(링크) 편이 있는데요
여기서는 영국의 산업혁명이 일어난 배경과 과정을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산업혁명이야 말로 혁신 중의 혁신이죠. 중요한 사건은 아래와 같이.
1687 아이작 뉴턴의 프린키피아 발간: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1769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특허
1776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발간
어떻게 영국에서 산업혁명(혁신)이 일어 날 수 있었는가? 에 대해서 많은 주장들이 있다고 하는데요
저는 다큐에서 내레이터의 아래 말을 듣고는,
제일 먼저 방직업에서 수요가 나타났다. 상인이 공업생산자에서 빨리 대량생산 할 수 있도록 방법을 연구하라고 재촉함. 이 부분은 일반사람 생활방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었다.(옷이니까)
더욱 빠른 속도로 생산하기 위해 산업혁명 도화선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장들의 한계는 강의 하류에 세울 수 밖에 없었다. 동력원이 풍차와 수차밖에 없었기 때문에 생산을 제약했다. 즉 동력기계 만드는 나라가 경쟁에서 선점을 할 운명이었다.
동력기계에 대한 요구, 이것이 와트의 혁신적인 증기기관을 낳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럼 왜 동력기계에 대한 요구가 있었을 까요?
즉 수요였습니다 이 수요는 다수의 일반 시민계층의 수요였습니다.
원래 영국은 양털에서 나오는 양모에 경쟁력이 있었는데 인도에서 수입되는 모직은 처음 왕족이나 상류층 귀족들만 입는 옷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일반 시민들의 소득이 증가함에 따라 수요가 늘었고 이에 상인들과 공장생산자들이 먼저 빨리 많은 양을 공급해서 이윤을 보려고 한 것이 와트의 증기기관을 이끌어내는 동기가 되었던 것이죠.
제가 볼 때는 영국에서 산업혁명의 혁신이 먼저 일어난 것은 전제적인 왕권이 아니라 권력이 분배된 포용적인
정치제도하에서 일반시민들의 보다 자유로운 이윤추구 그 결과로 네덜란드보다 넓은 일반시민계층의 소득증대로 인한 수요의 증가 때문 이라고 감히 생각합니다.
네덜란드와 영국을 사례로 들고 마무리 하려다, 여기서 제 글 제목이 일본관련이니 대국굴기 일본편도 마저 다시 보았습니다. 여기서 관심이 가는 내용이 있더군요 그것은
일본은 독일의 정부주도 경제발전 방식을 따랐고 재벌이 양성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관료와 지역 토호들과의 결탁이 그때부터 있었던 것 같습니다.
1871년 백여 명의 구미사절단을 파견해 1년 10개월 동안 12개국을 방문했는데 시찰단은 일본을 발전시킬 모델을 독일에서 찾았다. 그것은 정부가 나서서 공업발전을 주도하는 방식이었다
이건 일본의 대단한 혁신입니다. 중국과 조선은 감히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후에 우리나라 조선은 발달된 일본을 보기 위해 고종이 몰래 조사시찰단을 보내죠(1881)
그건 이 일본의 구미사절단을 베낀 겁니다.(10년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 왜 조선은 시찰 이후로 발전을 하지 못하고 나중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는지 안타깝습니다.)
<나리타 세이이치 미쯔비시 경제연구소 상무이사>
일본정부는 이러한 사업을 민간 기업에게 맡겨 성장시켰습니다.
시작은 정부가, 성장은 민간기업이 책임지는 형식이었죠. 일본은 이런 방법을 통해 계속 성장했습니다.
미쯔비시뿐 아니라 미쯔이, 스미토모 같은 기업 역시 일본 정부로부터 국영기업을 사들여 성장한 기업입니다.
그러던 중
1878 유신정부의 개혁개방 강경파 권력자 오쿠보 토시미치가 도쿄 시미즈에서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것은 유신의 강경파 정부의 정책에 반발하는 세력이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내레이터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개혁이 가져온 불공평은 이미 존재하던 사회적 모순을 극대화시켰다
1881년 일본정부는 투자액의 1/30에도 미치지 못하는 싼 가격에 홋카이도의 정부사업을 개인에게 팔아 넘기고 만다. 이 일은 부패한 관리와 기업가의 결탁에 불만이 많았던 일본국민들을 자극하여 폭동직전까지 갔다가 천황이 직접 나서서 부패한 관리 파면함으로 진정되었다”.
물론 후발주자로서 기존의 공업국들을 따라가기에는 독일이 했던 정부주도 발전방식을 모델로 삼는 것은 수긍이 갑니다만 위에서 살펴보았던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느꼈던 민에 의한 뭔가 자율적인 분위기에서 나도 열심히 하면 잘 살 수 있다는 시민들의 욕망, 권력이 개입되지 않은 상업이나 산업활동들의 산뜻한 느낌은 받질 못합니다.
왜냐하면 먼저 같은 정부주도 발전방식을 택했던 독일의 경우에는 이러한 정경유착의 폐해를 거의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물론 제가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개혁이 가져온 불공평은 이미 존재하던 사회적 모순을 극대화시켰다”
이게 무슨 말인가요? 내레이터가 이렇게만 말을 하고 넘어갈 것이 아니라 새로운 불공평과 이미 존재하던 사회적 모순이 무엇인지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설명이 있었으면 좋았을 건데 아쉬웠습니다.
해서 네덜란드, 영국 그리고 주제인 일본을 중국에서 제작한 대국굴기 다큐와 우리나라에서 제작한 앙트레프레너로 혁신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한번 살펴 보았습니다
물론 제가 말씀 드린 혁신의 사례에 동의 못 하실 수도 있으실 겁니다.
오늘 글은 상당히 길어졌네요
다음 글에서 현재 잃어버린 20년의 일본, 그리고 주요산업의 하락을 겪고 있으며,
일본의 전철을 밟고 있는 우리나라 한국. 어떻게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지, 과연 뭘 바꾸어야 되는지
결국 나라를 바꿀 수 있는 수단은 정책이기에 정책은 지도자와 정치집단에서 나옴으로,
다음 편에서는 정치와 관련하여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긴 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