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사 명장면] 43. 백제 사비시대의 불교
열반경 법화경 삼론…대승불교 집중 연구
왕실을 중심으로 수용된 백제의 불교는 웅진.사비시대에 들어서 귀족세력까지 그 신앙의 범위를 넓혀 가면서 신앙 대상층을 점점 확대해 나갔다. 이러한 흐름은 사비시대 후기에 들어서면서 왕실과 귀족세력 이외의 계층까지 불교가 확산되어가는 현상을 보여준다.
<일본서기>에 위덕왕대 도승(度僧)의 대상으로 국민(國民)이란 표현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나, 673년 백제유민들의 작품으로 보이는 연기지역 불비상의 명문에 향도 250인의 존재가 보이고 있는 것은 이러한 가능성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대승불교의 전개도 불교신앙의 확산에 부응된다. 사비시대에는 백제불교의 특징인 대승불교가 집중적으로 연구되고 있는 것이다. 즉, 백제에서 <열반경>과 <법화경>은 물론 삼론이 중요한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대승불교의 사상과 신앙의 발전은 불교의 향유계층을 왕실과 귀족세력을 넘어서, 점차 다른 계층으로의 확산을 부추겼을 것으로 본다.
무왕대 창건된 미륵사는 미륵불국토를 구현하고자 하는 백제인들의 이상세계관이 투영되어 있다. 사진은 해체 전의 미륵사지 석탑. 사진제공=문화재청
남조 梁나라서 ‘열반경’수입…불성론 대중확산
1. 성왕대의 불교와 열반경
성왕은 사비천도 직후 <열반경>에 관심을 갖게 된다. 성왕은 사비천도 3년만인 재위 19년(541)에 양으로부터 열반 등의 경의를 수입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 <열반경>의 수입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정치적인 관점에서의 <열반경>의 수입은 중국 남조 양무제의 <열반경>에 대한 이해를 통해 살펴진다. 양무제는 열반경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계율과 불성론 모두와 관련이 있다.
백제에 수용된 <열반경>은 성왕대 계율의 강조와 석가불신앙으로 표출된다. 성왕이 강조하는 <열반경>의 계율은 정법의 호지와 관련이 있다. 여기서 정법은 곧 부처의 말씀이며, 석가와 관련이 있다. 이는 성왕대 석가불신앙이 보이는 것과 연결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왕대 석가불신앙은 왕권을 고양하는 신앙으로서 작용하고 있으며, 귀족세력과는 조화 속에서 전개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계는 위덕왕대에도 지속되고 있는데, 능산리 사원의 창왕명사리감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열반경>은 6~7세기 삼국에 있어 중요한 경전으로 이해되는데, 그것은 <열반경>이 가지는 불성과 관련이 있다. 이는 <열반경>이 가지는 사회적 의미라 할 수 있다. 일체중생에게 불성이 있음은 평등사상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불교신앙의 확산이 있게 된다. 그래서 원효는 아미타신앙의 사상적 기반을 토대로 일반민에게 성불가능성을 개방한 불성론을 체계화시키고 있다. 이를 통해 불교가 확산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고 있는 것이다.
백제도 일찍부터 불성론을 접하고 있는 만큼, 이를 통한 신앙의 확산은 기대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백제 성왕대의 <열반경>은 백제불교에 있어 신앙확산의 중요한 매개체가 되었을 것으로 본다. 고구려의 승려 보덕은 <열반경>의 평등사상을 가지고 백제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는 백제 또한 이러한 <열반경>의 평등사상이 널리 퍼져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이러한 가능성은 백제의 아미타신앙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백제의 아미타신앙은 직접적인 근거를 찾기가 어렵다. 다만 6세기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얘기되는 예산의 사면석불에 아미타불이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많은 만큼, 사비시대 초기 백제사회도 아미타신앙을 인식하고 있었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러한 아미타신앙은 위덕왕대에 이르러 점차 확산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을까 한다. 위덕왕대에는 <삼론>이 보이고 있으며, <열반경>과 더불어 <법화경>이 크게 설해지고 있다. <열반경>과 <법화경>, 그리고 <삼론>은 불성사상과 관련이 있으며, 이러한 불성사상은 아미타신앙이 전개될 수 있는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백제사회에서 아미타신앙이 전개되는 모습은 연기지역에서 발견된 불비상과도 관련이 있다. 이 불비상은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조성된 것으로 백제 멸망 이후의 것이다. 그런데 이 불비상의 조각수법이나 내용에서 백제유민들에 의해 조성된 것이 확실시 된다. 그리고 조성수법 또한 백제의 불상조성 수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렇다면 불비상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통해 백제 아미타신앙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이 향도 250인의 존재이다. 250인에는 적어도 노동력 공덕을 보시한 일반인도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백제 말기에 있어 아미타신앙은 일반인들에게까지 확산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더욱이 <열반경>에서 설하는 불성론이 전개되고 있었던 만큼, 그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하겠다.
국보 제287호로 지정된 백제금동대향로. 위덕왕대에 창건한 부여 능산리 사지에서 출토됐다.
토착신앙 불교화 과정서 미륵신앙 중요한 역할
2. 위덕왕대 수원사와 미륵신앙
위덕왕대에는 불교가 많이 발전하고 있다. 특히 능사의 창건이나 최근에 발견된 왕흥사지의 목탑지와 사리함은 이 당시 불교의 내용을 가늠하게 한다. 그런데 위덕왕대 불교는 미륵신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듯하다. 일본에 미륵석상을 보내고 있는 모습이 그러하다.
위덕왕대 미륵신앙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으로 수원사가 있다. <삼국유사>에 보이는 수원사는 웅진지역, 지금의 공주에 위치하고 있다. 웅진지역의 불교는 무령왕대부터 그 흔적이 보이고 있다. 무령왕릉에서 발견되는 불교적인 요소는 토착신앙과 함께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이 당시 불교가 토착신앙과 공존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토착신앙으로 산신신앙과 동굴신앙이 있다. 동굴신앙은 웅진지역에서 많이 관찰되는 혈사와 연결시켜 생각해 볼 수 있다. 서혈사와 남혈사 등 공주지역의 혈사는 발굴조사 결과 백제시대 이후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가람이 형성되기 이전부터 이 동굴에서 스님들이 수행했을 것이다. 즉, 토착신앙적인 요소를 가진 동굴에서 스님들이 수행함으로써 가람구조를 가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고 본다.
백제 위덕왕대에 이처럼 산신신앙과 동굴신앙 등 토착신앙이 불교화되는 과정이 살펴지는데, 그것이 바로 수원사와 관련해서다. 수원사와 관련한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산신령이 노인으로 변하여 진자에게 이미 미륵선화를 친견하였음을 밝히는 기록이 보인다. 이 기록은 토착신앙의 불교화 과정을 설명해준다고 하겠다.
한편 이러한 불교화 과정에서 업설이 중요시되는데, 이는 미륵신앙에서 밝히는 내세관과의 공통점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미륵신앙에서 하생을 통하여 왕과 제후 등으로 태어나길 바라는 모습에서 뒷받침된다. 따라서 토착신앙의 불교화 과정에서 미륵신앙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게 전개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미륵신앙은 <법화경>의 천불신앙과 연결된다. <법화경> 보현보살권발품에 등장하는 내용이 수원사와 관련한 기록과 의미가 상통하는 면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천산에 있는 산신령이 진자에게 미륵선화를 소개하는 모습은 천불이 중생을 도솔천으로 안내해 미륵을 친견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모습과 유사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능성은 중국에 유학한 법화승려 현광이 웅진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것에서 살펴진다.
신라서 工人 파견…군사대치속 문화교류 엿보여
3. 무왕의 미륵사 창건
무왕대 창건된 미륵사는 미륵하생신앙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미륵사는 미륵불국토를 구현하고자 하는 백제인들의 이상세계관이 투영되어 있다. 더불어 9층탑의 건립은 이러한 이상세계의 구현이 불법을 통한 주변국의 복속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미륵사의 창건에는 당시 귀족세력들의 동참으로 가능하였을 것이다. 그 규모면에서 볼 때, 여기에 투입된 재정은 왕실만의 것으로 해결하기에는 어렵지 않을까 해서다. 따라서 익산은 물론 사비지역의 귀족세력도 익산에 창건되는 미륵사의 불사에 동참하여, 불교적 이상국가를 구현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미륵사의 창건에 신라인들도 동참하고 있는 모습이 살펴진다. 신라의 진평왕이 미륵사의 창건과정에서 여러 공인(工人)들을 보내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미륵사의 가람배치가 3금당식이라는 점에서 그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다. 당시까지 백제의 가람은 1탑1금당식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미륵사를 통해 3금당식이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신라는 이미 황룡사를 창건하는 과정에서 3금당식의 가람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정황은 무왕대에 비록 정치와 군사적인 면에서 대치관계에 있었지만, 문화적으로는 서로 교류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미륵사의 창건은 백제가 익산을 비롯한 호남평야 지역에 대한 관심을 표현해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미륵신앙은 용신앙과 연결되는데, 이는 농경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백제는 일찍부터 김제에 벽골제를 축조하여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을 높여왔다. 미륵사의 창건은 이러한 백제의 관심이 표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길 기 태/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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