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쇄수녀원의 하루는 기도로 시작해 기도로 끝난다. 11월 20일 철창 너머 경당에서 수녀들이 시간전례를 바치고 있다. 김유리 기자
▲ 노동은 수녀원의 일상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한 수녀가 개인 작업실에서 옷을 만들고 있다. 가르멜수녀원 제공
▲ 수녀원에서도 춤을 출 때가 있다. 수련자들이 수녀원 마당에서 춤으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다. 가르멜수녀원 제공
서울 수유동에는 시간이 멈춘 곳이 있다. 세상과 떨어져 452년 전의 모습으로 사는 가르멜 수녀원이다. 봉헌생활의 해를 시작하며 기도를 통해 매 순간을 주님께 봉헌하는 봉쇄 수녀원을 찾았다. 11월 19일~20일 1박 2일 동안 머물면서 지켜본 수녀들의 하루와 그들의 영성을 소개한다. 수녀원의 하루 24시간
수녀원의 아침
오전 5시 50분. 아침 기도를 알리는 종이 울린다. 작은 경당으로 수녀들이 하나 둘 들어온다. 꼭 필요한 움직임 말고는 절제된 모습. 발걸음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경당에는 거룩한 침묵만이 맴돈다.
제대를 향해서 양 편에 늘어선 수녀들은 삼종기도를 바치며 하루를 시작한다. 한 목소리로 음을 맞추어 내는 수녀들의 아름다운 기도 소리가 경당에 울려 퍼진다. 시편 끝마다 영광송을 바치러 일어서서 고개를 숙여 절하는 수녀들의 모습은 신비로움을 느끼게 한다.
기도 후 아침 미사를 봉헌한 수녀들은 7시 10분부터 1시간 동안 묵상 기도에 들어간다. 수녀원 게시판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기도 지향을 참고해 각자의 방에 들어가 하느님과 대화를 나눈다.
기도 지향은 주교회의나 교구에서 들어오는 기도 요청, 원장 수녀를 통해 듣는 세상의 소식, 교황의 기도 지향 등을 참고해 적어놓는다.
하루를 채우는 기도와 노동
수녀원의 하루는 기도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 7번의 시간전례와 묵상 시간 등을 합하면 최소 5시간이다. 하지만 수녀들은 하루 24시간을 모두 기도로 보낸다고 할 수 있다.
휴식을 취할 때까지도 자신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을 깊게 느끼는 ‘현존 수업’을 하면서 매 순간을 기도로 하느님께 봉헌하기 때문이다.
아침 묵상을 마친 수녀들은 간단한 식사를 한 뒤 자신의 일터에 가서 소임을 다한다. 노동은 크게 제병을 만드는 일과 가사 노동, 손일로 나눈다.
일상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는 수녀들은 생계 수단으로 제병을 만들고, 밭에서 직접 가꾼 채소로 음식을 해 먹는다. 옷이나 생활에 필요한 소품도 직접 만든다.
수녀들은 공동체 생활 중에서도 철저히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다. 기도와 고독, 침묵은 사랑이신 하느님과의 일치라는 가르멜 수도 생활의 본질로 나아가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노동하는 장소도 혼자 작업할 수 있도록 칸이 나누어져 있고, ‘수방’이라고 부르는 수도자의 방은 모두 독실이다.
웃음이 꽃피는 시간
점심과 저녁 식사 후에는 1시간씩 ‘공동 휴식’ 시간이 있다. 16세기 가르멜회를 개혁한 예수의 성녀 데레사가 자신의 체험을 통해 당시에는 파격적인 휴식 시간을 만든 이후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전통이다.
유일하게 침묵을 해제하는 공동 휴식 시간에는 수녀들이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마음껏 웃으며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평생 똑같은 일정으로 살아야 하는 수녀들에게 휴식 시간은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바짝 조였던 긴장의 끈을 잠깐 놓을 수 있는 시간이 된다.
오후 1시~2시, 7시~8시 두 번의 공동 휴식은 대침묵과 소침묵으로 일관된 하루 일과에 생기를 불어넣으며 기도의 삶에 균형을 유지한다.
수도생활의 고행
현재의 가르멜 수녀회는 수도회 규칙이 완화되었던 중세 말에 예수의 성녀 데레사가 개혁한 엄격한 수도원의 모습을 따르고 있다. 수녀들은 침묵과 희생 등의 내적 고행과 대재(금식재)와 노동 등 외적 고행을 통해 관상생활의 질서를 잡아간다.
수녀들은 고기를 먹지 않고 1년 중 6개월 동안 밥과 국, 김치만 먹으며 대재를 지킨다. 특히 대림 시기와 사순 시기에는 가족들의 면회도 삼가며 몸과 정신이 오로지 예수님만을 향하도록 노력한다.
“안일함과 기도는 병행할 수 없다”는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말대로 수녀들은 봉쇄 수도원 생활에서 피할 수 없는 불편함과 어려움을 사랑과 극기의 정신으로 참고 견디는 것이다.
기도로 시작한 수녀들의 하루는 기도로 끝난다. 오후 9시 30분 시작하는 독서기도와 성체조배를 마친 수녀들은 수방에 돌아가 개인 기도를 하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수녀원의 하루가 지나간다. ‘봉쇄’의 의미
봉쇄는 수녀들을 세상에서 격리해 외딴곳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관상 생활을 도와주는 장치다. 관상(觀想)은 하느님을 눈앞에 보며 산다는 의미로 외부와 단절해 기도에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세상 속에서 살다 보면 다른 이들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기 쉽지만 수녀들은 예민하게 그것을 느끼며 마음으로 품는다.
세상과 떨어져 있기 때문에 오히려 깊이 다가갈 수 있다. 실제로 수녀들은 사회정의와 약자에 대해 무척 관심이 많다.
활동 수녀회 수녀들이 직접 현장을 뛰며 세상의 고통을 나눈다면 봉쇄 수녀들은 기도로 이에 동참하고 사람들의 아픔을 끌어안는 것이다.
세상을 자기만의 고정된 시각이 아니라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며 공감하는 수녀들은 이 땅에 소외되는 곳 없이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내리도록 돕는다.
수도원 소개
가르멜회는 기원전 950년쯤 엘리야 예언자가 이스라엘 가르멜 산에서 은수 생활을 하던 것에서 기원한다. 기원 후에도 엘리야의 정신을 따르는 후계자들은 자신을 성모님께 봉헌하고 은수 생활을 하며 공동체를 이루기 시작한다.
1204년 정식 수도회로 인준받은 수도회는 1562년 예수의 성녀 데레사가 완화된 수도회를 개혁하면서 현재 ‘맨발 가르멜 수도회’가 됐다.
우리나라에는 프랑스 가르멜 수녀들이 오면서 소개됐다. 봉쇄수녀원에 살면서 기도를 통해 세상의 아픔을 껴안는 사도직을 담당하고 있다.
“나는 교회의 딸”이라고 말한 예수의 성녀 데레사를 따라 보편교회와 지역교회에 깊은 관심과 연대감을 가지며 기도와 희생으로 교회에 봉사할 책임을 갖는 것이다.
2015년은 데레사 성녀 탄생 500주년이자 서울가르멜수녀원 설립 75주년이다.
겹경사를 맞은 수녀회는 12월 6일 수유동 수녀원에서 예수의 성녀 데레사가 생전에 쓰던 지팡이를 모시고 정순택(서울대교구 수도회담당 교구장 대리) 주교 주례로 미사를 봉헌한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고향 스페인에서 10월 15일 출발해 각 대륙을 순례하는 지팡이 순례단은 12월 5일~8일 한국에 머문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서울, 천진암(수원교구), 대전, 충주(청주교구), 대구, 상주(안동교구), 밀양(부산교구), 고성(마산교구)에 가르멜수녀회가 있으며 동두천에 새로운 보금자리가 만들어지고 있다.